정관누리교회

2014년4월20일/브살렐과 오홀리압(출31:1-1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4. 5. 21. 04:06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4월 20일 주일 예배

브살렐과 오홀리압 / 재능을 개발하라 (출31:1-11)

여러분, 혹시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이런 말을 들은 기억이 나십니까?
“하늘은 후박이 없건마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습니까? 심청전에서 심봉사가 하는 이야기지요.
사실 심봉사 입장에서는 결코 하늘이 후박이 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가난한 장애인이 딸까지 뺏겨 버렸습니다. 당연히 그는 하늘의 공평을 믿을 수 없습니다.

요즘도 보면 이런일이 많습니다.
사람들을 잘 보면 날 때부터 차별이 심한 것 같습니다.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기고 머리도 좋고 게다가 성격까지 좋아서 모든 사람들의 칭찬이란 칭찬은 다 받습니다.
사람들의 부러움과 찬탄 그리고 기대를 받으며 사랑 속에 삽니다. 자신감이 넘칩니다. 사람들이 그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점점 더 잘됩니다.

그런가하면 지지리도 가난한 집안에 키도 작고 얼굴도 못생겼고 운동도 못하고 머리도 나쁘고 그래서 세상의 사랑과 관심에서 멀어지고 이 때문에 가슴에 증오가 쌓여서 성격마저 비뚤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싫어하고 할 줄아는 것도 없습니다. 점점 더 안좋아집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세상을 원망하며 많은 젊은이들이 사회의 주변에서 울분과 한숨으로 세상을 원망하며 숨어 지냅니다.

그런데요 과연 하늘은 후박이 있을까요? 아니면 공평하신 하나님은 후박이 없게 사람을 만드셨을까요?
약간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우리는 태어날 때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선물이있습니다. 내가 할 줄 아는게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면 아무리 없어 보이는 자들이라도 뭔가 한가지 정도는 남들보다 뛰어난 점이 있습니다. 또는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걸 잘 개발하면 그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공평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조금 시각적으로 이야기해볼까요? 우리는 다 몸속에 한가지 보석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그 보석은 가공이 덜되어서 갈고 닦지 않으면 찬란한 보석으로 태어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보석을 갈고 닦아서 찬란하게 빛나게 해야 할 책임은 가집니다.

갈고 닦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빛이 찬란한 보석으로 완성되어서 모든이들로부터 찬탄과 경탄을 받게 되고 행복한 삶이 시작된다는 즐거운 상상은 그래요 말그대로 우리의 상상속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면 못하실 일이 무에 있겠습니까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갈고 닦아서 찬란한 빛으로 세상을 빛내고 어둠을 몰아내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보석역시 홀로 빛을 내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이라는 거대한 발광체옆에 있어야 그 빛을 받아서 눈부시게 빛이 나는 것이지요.

저는 오늘 우리가 가진 재능과 이 재능을 주신 하나님과 그리고 그것을 개발함으로써 이 재능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는 일들에 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활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께 제사드릴 성막을 지으려고 했습니다
이 장막을 짓기 위하여 하나님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이란 사람을 지명하셨습니다.

1.일러 가라사되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되’라는 말로 31장이 시작됩니다.
‘일러 가라사되’
참 부드럽고 자상하게 느껴지는 말입니다.
그런데 원문에는 이 말이 부드러운 의미가 아니고 ‘단호하고 엄정하게 명령하여 가라사되’ 정도의 뜻을 가집니다.

즉 이제부터의 말은 네가 반드시 순종해야 되는 명령이라는 말입니다.
그것도 내가 너에게 계명을 준 것을 지키듯이 철저하게 순종해야 되는 아주 중요한 명령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무엇을 그렇게 소중하게 명령하실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한 사람을 세워서 금,은,동 그리고 나무로 뭘 만들게 하라는 것 하고 또 하나는 다른 한사람을 그의 조력자로 세워서 베를 짜고  옷을 만들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멋있게 이야기하면 성막 건축 총책임자하고 부책임자라고 할 수 있지만 엄격히 말하면 석수, 목수, 장인, 베짜고 옷만들고 , 옷에 수를 놓고 기름, 향을 만드는 사람
글쎄요
모세와 같은 지도자도 아니고 아론과 같은 대제사장도 아니고 여호수아같은 전쟁의  지휘관도 아니고...선지자, 족장, 장로도 아닙니다.

심하게 말하면 단지 손재주가 좀 있을 뿐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사람들을 뽑는데 내가 너희에게 계명을 준 것 같이 반드시 철저하게 따라야 하는 명령의 형태로 하셨습니다.

2.지명하여 부르고-브살렐 편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그냥 모집한 것이 아니라  ‘지명하여’ 부르셨습니다.
즉 손재주가 있는 사람은 다 나와라 이렇게 모집한 것이 아니고 어느 지파의 누구의 손자이며 누구의 아들인 누구라고 정확하게 지명하여 부르셨습니다.

먼저 브살렐이 어떤 사람인지 살펴봅시다.
브살렐의 뜻은 ‘하나님의 보호아래서’라는 뜻입니다.
정말 엄청나게 신앙적인 이름이군요

이 사람은 훌의 손자고 ‘우리’의 아들이랍니다.
훌이 누굽니까?
바로 모세의 자형 아닙니까?
누나 미리암의 남편

이스라엘이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싸울때 아론과 더불어 모세의 팔을 붙잡고 있었던 사람이며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계명을 받고 있는 동안에 아론과 더불어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훌’의 아들이라는 것 외에 무엇하는 사람인지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는  전혀 성경에 나와있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이름만 나오면 대게 업적이 없기 때문이거나 재주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기야 이름이 안나오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이름이 나왔다는게 어딥니까
근데 아들 때문에 이름이 나왔습니다. 누구의 아버지로
모세를 대통령으로 보면 ‘우리’는 대통령의 조카입니다. 그것도 초대 겸 종신 대통령의 조카인데 어떠한 공직에도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그의 아들은 요즘말로 하면 이공계 출신이군요
장인이랍니다.
금속으로 뭘 만드는 사람, 대장장입니까?
영어로는 스미스
아니면 금을 다루니까 골드스미스

나무로도 만들고 , 조각도 하고,설계 도면도 그리고 목수? 대목장?
뭐 말로는 여러 가지 하는 것 같은데
결정적으로 그는 뛰어난 공학자도 아니고 대장장이도 아닙니다.
연금술사는 더더욱 아닙니다. 정말 문자 그대로 금은동으로 녹여서 뭐 만드는 사람, 나무 정도 새기고 돌 좀 다듬고

여가로 즐길만한 일이지 권력자의 집에서 직업으로 삼기는 좀 뭣한 일들입니다.
제가 왜 이 사람을 낮추는지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학문도 무술도 성직도 아니라서 제가 무시하는 것 같습니까?

하하 여러분 4절에 한번 보십시오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5절에 “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겨서”
여기서 보석은 원문에는 돌이라고 나와있습니다.
그러면 간단하게 한번 볼까요. 금은동,석목

우리 성경을 자세히 한번 봅시다
뭐 하나 빠진 것 같지 않습니까?
모르시겠습니까?
음, 다시 한번 잘 보십시오. 그리고 여기는 올림픽 시상식장이 아닙니다.

바로 철이 빠졌지 않습니까
왜 빠졌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철기를 다룰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소한 것에서 당시의 시대상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당시 이스라엘은 청동기시대였단 말입니다.
그러나 만일 브살렐이 진짜 똑똑하고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을 한다면 바로 문제의 철기를 다룰 줄 알아서 이스라엘의 문명과 군비를 한단계 상승시켜야 되지 않을까요?

그들이 살았던 ‘애굽’이나 그들이 가려고 하는 목적지인 ‘가나안’ 사람들은 이미 철기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들과 싸워야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생존을 위한 철기가 필요했다 이 말입니다.
보기에 좋은 예술품이나 장난감 같은걸 만드는게 아니라 철제무기를 만들었다면 아마 굉장히 중요하다고 여기고 칭송을 받고 여호와의 지명을 받으며 또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지명이라니!

그렇게 칭찬받고 중요하게 여겨져서 여호와로부터 직접 지명받은 브살렐도 철기를 다루지는 못했습니다.
참 별 볼일 없는 것 같습니다
권력자의 집안에서 이런 일을 한다는 것도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으로 보아 그는 ‘하나님의 보호아래’ 일생을 의탁한 신앙인이었고 그러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밑에서 자라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무술이나 병법이나 아니면 학문을 닦아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일에 종사하지 않고 만들고 새기고 하는 일을 한 사람
만일 성막을 만들지 않았다면 브살렐이란 사람의 이름은 성경책에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브살렐은 단지 성막, 제사지내는 천막을 만들었을 뿐인데 브살렐이라는 이름이 나와있습니다.
그것도 여호와의 지명으로, 계명을 주실때와 같은 당당하고 엄정한 명령의 형태로

어쩌면 그 부모들도 그를 약간 한심하게 생각했을지 모르겠습니다.
훌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자기의 손아래 처남, 모세의 팔을 들어주며 내 자식들은 반드시 성공시켜서 이나라의 일인자가 되게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안내려오고 있을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서 춤추고 마시고 음란하게 우상을 섬기며 취해있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모세가 아론에게 야단치자 아론은 뭐라고 합니까
금붙이들을 불에 던졌더니만 그게 금송아지가 되었답니다

여러분 그게 말이 됩니까
아론이 하나님도 아닌데 목걸이 귀걸이 팔찌를 던져넣었는데 그게 저절로 금송아지가 되어서 나오다니.......... 이건 모세도 부린 적이 없는 재주입니다

이때 아론과 함께 백성들을 다스리던 사람은 누굽니까?
바로 미리암의 남편인 훌입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우리라고 언제까지나 모세의 그늘에서 그의 명령을 받으며 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기회에 모세와 모세가 걸핏하면 내세우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리가 대장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대장으로 인정해주는 허수아비 금송아지 신
그게 그렇게 해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미리암은 모세가 이디오피아 여자와 결혼했을 때 하나님이 모세와만 얘기하셨느냐면서 모세에게 반기를 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훌은 자기의 아들 ‘우리’에게 큰 기대를 걸고 훈련을 시켰겠지만 그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역시 자기의 아들 브살렐을 지도자로 키우려 했지만 브살렐은 허구헌날 만들고 그리고 새기고 이런 것만 하고 있습니다.

요즘 부모들은 자식에게 공부하라 공부하라 고 이야기합니다. 인문계에 가서 대학을 가고 그리고 대학원을 거쳐서 박사가 되고 크고 훌륭한 사람, 권력을 쥐고 돈도 많이 벌고 쉽고 안전한 일을 하기를 원합니다. 적어도 넥타이매고 사무실에 앉아서 펜대를 굴리는 일을 하게 하고 싶어 합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자녀들의 다른 모든 재능들을 하찮게 만들어 버립니다

옛날 고대인들의 부모들은 뭐라고 했을까요
고대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생존에 필요한 무력입니다.
남자가 좀스럽게 집안에만 있지말고 사냥도 하고 말도 타고 칼도 휘두르고 해라
그래서 힘을 길러라

니므롯 역시 칼을 가지고 나라를 세워 인류의 첫 임금이 되었습니다
모세는요
그 역시 키가 2미터가 넘고 이디오피아 원정군의 야전사령관이었으며 일당백의 용사였습니다.
고대인에게 힘은 곧 권력입니다. 그래서 훌과 아론은 연장자임에도 불구하고 형임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수하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두고봐라
내 자식들은 반드시 너희의 후손을 밟고 올라서게 하고 말테다‘
이건 제 생각이지만 별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뿐만 아니라 손자 브살렐 역시 전혀 기대에 어긋난 일을 합니다
그래서 자랄 때 적어도 성막을 만들기 전 까지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눈밖에 난 한심한 자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재주로 말미암아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와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지파의 이름을 함께 거명하며 지명하여 불렀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사람들이 훌과 ‘우리’의 이름을 잊어버리더라도 성막이 있는 한 사람들은 이 성막을 브살렐이란 사람이 세웠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조각과 모양들을 보라
바로 이것이 브살렐의 솜씨라고 이야기 할 겁니다

후세에 브살렐은 더 이상 누구의 손자요 아들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할아버지가 아버지가 누구의 할아버지 누구의 아버지라는 것으로 불려지게 됩니다.

그는 아버지의 근심거리에다 한심한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 재주로, 사람들이 볼 때 하잘 것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재주로 이스라엘 건국의 구심점이자 언약의 장소인 성막을 만드는 일을 책임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성경에서 브살렐의 솜씨와 업적에 관해서 읽고 듣고 있습니다.

3.지명하여 부르고-오홀리압 편
오홀리압은 ‘아버지는 나의 장막’이란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아버지는 ‘아브’입니다.
아버지하고 ‘아브’하고 비슷하지요.
‘하나님 아버지는 나의 기업’이란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나의 밥벌이’란 말입니다.

신실한 이름이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이 사람 역시 자기의 이름과 딱 맞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브살렐의 조력자로, 다시 말해서 성막 제작의 부책임자로 임명받았지만 내면을 살펴보면 브살렐보다 더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하는 일은 베짜는겁니다.
텐트 만들 베, 염소가죽으로 이어서 텐트 만드는 것 하고 옷만들기위해 베짜는 것, 옷에 수놓는 것
즉 한마디로 바느질 잘하는 사람입니다
정말 굉장한 재줍니다

브살렐은 그래도 최소한 대장장이라서 힘이라도 필요하지 그래 이사람은 베짜고 수놓고 바느질하는 걸로 특기를 삼았습니다
그걸로 고대에 밥먹고 살려고 하다니!
하기야 그러니 이름이 ‘하나님 아버지는 나의 밥벌이’ 가 되었겠지요.

사내아이가 바느질이나 하고 수나 놓고 있는 것을 보고 그의 부모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참 기특하기도 하지
벌써부터 어린나이에 엄마의 일을 도와 주는구나. 착한 녀석
하하 그랬겠습니까?
전혀, 전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부모가 그걸 보고 기특하다고, 자기의 일손을 도와준다고 기뻐하겠습니까?
아마 홧병이 나서 어떻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홀리압을 보면 차라리 브살렐은 그래도 남자답기나 하지...
도대체 뭐하자는 건지!
부모에게 한심한 아들일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도 놀림감과 모멸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텐트 만드는 일을 하면 요즘말로 하면 건축업자입니까?
건설회사 사장
옛날 사람들은 천막에서 살았으니까 천막이 집이고, 집짓는 사람이면 건축업자 아닙니까?
돈도 많이 벌겠네요. 건축업자면
이렇게 생각하고 속편하게 넘어갔을 것 같습니까?

이 사람역시 단지파 ‘아히사막’의 아들로 소개가 됩니다.
누구의 아들
‘아히사막’은 성경에 어떤 업적이나 재주로 기록되지 못했습니다. 단지 오홀리압의 아버지로서 기록되었을 뿐입니다

그 역시 아들로 인하여 영화롭게 된 사람입니다.
그 역시 브살렐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들로 말미암아 유명해진 사람입니다.
따지고 보면 브살렐이나 오홀리압이나 재주라고 가지고 있는 것이 참 별볼일 없는 것 같습니다.

만일 당시에 성막을 제작하지 않았다면 이 사람은 아마 그 재주로 밥먹고 살기도 힘들었지 싶습니다.
아무리 바느질 잘해봤자 아무래도 여자들은 어느 정도는 바느질을 하니까 뭐가 떨어졌다고 자기에게 꿰메달라고 하지도 않을 것이고 수도 어느 정도는 놓을줄 아니까 당연히 수를 놓아달라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짐승가죽 말려서 엮는 것 정도는 하겠네요

큰돈 벌기 어렵습니다
출세하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런데 비철금속을 녹여서 뭘 만들고, 베를짜고 수를 놓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잘 할 수 있고 누가 해도 어느 정도는 하는 일을 했을 뿐임에도 그는 성막을 만드는 일을 담당한 사람으로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이름을  당당히 성경에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옛날 사람으로서 자기의 장막을 수리하고 깁고 수놓는 정도의 일은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할 수 있었고 해왔던 일입니다.
당연히 나무나 돌로 뭘 만드는 일 역시 일반 백성들도 당연히 하는 일입니다.
물론 금은동을 녹여 뭘 만든다는 건 약간 전문적이기는 하지만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기술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대부분의 대장장이들은 힘들고 괴로운 삶을 살았으면서도 대우받지 못하고 멸시와 조롱을 받아왔습니다.
대장장이면 차라리 철을 다루는 기술이라도 개발하던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런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당히 이름을 기록했는데 그 묘사하는 글이 대단합니다

4.성령을 충만하게 하여
그런데 이 사람들의 일이 별로 힘들게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일에 대한 수식어는 어마어마 합니다
3절에 보면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하나님의 신은 성령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 이렇게 됩니다

여기서 지혜는 ‘타고난 재간이나 발명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총명은 ‘어려운 이치를 깨닫고 이해하는 능력’을 말하며
지식은 ‘경험적으로 아는 지식’을
재주는 ‘구체적인 기술’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볼때 별 볼일 없는 일, 즉 금은동을 녹여서 기구를 만들고 조그만 보석들을 다듬어서 손바닥만한 대제사장의 흉패에 붙이는 일
이런걸 하는데 총명에 지혜에 지식에 재주까지 그리고 성령의 충만을 받는다니...

성막 제작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하는 일 자체로는 별로 기술적으로 어려움이 없을것 같은데도 하나님은 그런 일을 함에 있어 먼저 성령의 충만을 부어 주시고 총명과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부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은 우리들의 눈과는 다른 모양입니다.
그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 즉 남에게 유익을 준다는 관점에서 모든 일을 보시는 분인가 봅니다

5.지혜로운 자에게 지혜를 주어
오늘 본문 출애굽기31:6에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라고 말한 구절은 실제로는 간단히 말하면 ‘기능공에게 재능을 더하여’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사람들을 단순한 기능공으로 부르시지 않고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눈에 그것은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그것이 다른 이들을 위해 하나님과 인간들의 언약의 약속을 위해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성경에 많은 용사와 학자들이 나오지만 ‘무릇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라는 호칭은 아무나 받지는 못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재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의 재주가 부럽고 그들의 영달에 나 자신이 초라해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이미 친구의 부러운 재능을 넘어가는 재능을 주셨습니다. 단지 아직 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지 못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에 총명과 지혜와 지식이 더해지지 못했을뿐...

우리가 이미 재능이 있다면 우리는 그 재능을 개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역시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에게 지혜를 더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스스로 개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역시 우리를 향하여 잠잠하실 겁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나의 재능입니까? 난 알 수 없습니다”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선 따로 자세히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이지만 가장 단순하게 이야기 한다면 내가 좋아하는 것이 나의 재능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천하를 아우르는 큰 재주를 가졌다해도 갈고 닦지 않으면 빛을 발할 수 없는 법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재능을 소중히 여기고 힘써 개발해서 다른 이들과 사회를 유익하게 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빛내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일들을 할 때 의도하지 않아도 다른 이들, 사회, 하나님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이름도 빛나는 자리에 있게 될 것입니다
“말세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4월 20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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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동트기 직전의 새벽시간이 가장 어둡다는 비유가 있는데요. 지금 새벽 4시 2분. 정말로 하늘이 아주 어둡기만 합니다. 재능이라는 영역도 가끔 동트기 직전의 새벽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정말 많은 노력, 아주 아주 깜깜한 현실 앞에서도 꾸준히 걸어가는 노력이 함께 할 때만, 비로소 환한 결과를 만나게 되는게 아닐까 합니다.

저는 목사님의 설교를 올려놓을 때마다, 반성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는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외면하지 않았는가. 자꾸만 그런 생각이 마음을 파고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잘 알려진 화씨지벽의 비유처럼, 어두운 현실 앞에서도 여전히 희망을 담아내고, 묵묵히 살아가는 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 2014.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