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5월 4일 주일 예배
어부들을 부르시다 (마태4:16-25)
이 설교는 제가 예전에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란 제목으로 한번 한 설교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다시 한번 설교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제가 이전의 원고를 전혀 참고하지 않고 새롭게 작성했습니다. 아무래도 시대와 환경이 변했기 때문에 새롭게 작성한 것인데 이 원고가 이전의 원고와 얼마나 다를지는 저도 궁굼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12제자들을 부른 모습이 나옵니다. 여기서는 12제자 중에서 처음으로 제자가 된 4사람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들의 직업은 모두 어부입니다.
그래서 제목이 ‘어부들을 부르시다’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의 특징이 예수님이 제자들을 너무 쉽게 얻는다는 것입니다. 요즘 한사람 전도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별다른 수고없이 그냥 길가다가 만난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니까 아무런 조건도 없이 망설임도 없이 그냥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를 따랐다고 합니다.
여기 본문에 보면 주님은 그냥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들을 보고는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이렇게 얘기하니까 베드로와 형제 안드레가 바로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답니다.
또 가다가 이번에는 고기잡이가 끝난 후 야고보와 요한이 그의 아버지와 함께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두 형제가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아주 쉽게 예수님은 네명의 제자를 얻습니다. 유명한 베드로와 요한이 바로 이때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전도 정말 쉽습니다. 역시 신의 말씀은 굉장한 권능이 있습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권능이네요.
자 그런데 정말 이렇게 단지 한마디 말로써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네명의 제자를 얻었을까요?
만일 이 정도로 사람을 얻는 것이 쉬웠다면 주님의 제자가 12제자니 70명의 제자니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명이니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만명도 넘어야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성경을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유다에서 갈릴리로
먼저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면 12절에 “예수께서 요한의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로 되어 있습니다. 어디에서 물러나셨을까요?
유다에서.
사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제일처음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는 사막으로 들어가서 40일간의 금식기로로 성령의 충만을 힘입고 이로써 마귀의 세가지 시험을 이기고 세상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는 고향 갈릴리의 나사렛으로 간 것이 아니라 유다에서 사역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때의 사역에서 예수님은 별다른 역사를 일으키지 못한 것 같습니다. 왜냐면 성경 마태복음에 뭔가 기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지요.
기록할 뭔가 큰 일이 없기 때문에 기록이 없는 겁니다. 유다에서 주님은 그 유명한 12제자를 만들지도, 기적을 행하지도 않았던 걸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마귀의 시험을 받던 11절에서 갈릴리로 간 12절에 공백기간이 있는 것입니다. 이 공백기간 동안 주님은 유다에서 사역을 했는데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는 갈릴리로 물러가셨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요한에 대한 핍박소식을 듣고 예수님 자신도 잡힐까봐서 두려워서 도망한 것은 아닙니다. 당시 유다와 갈릴리는 행정상으로 다른 구역으로 통치자가 다릅니다.
마치 우리 성경에는 요한이 잡힌 소식을 듣고 겁이 나서 갈릴리로 도망을 한 것처럼 되어 있는데 번역이 애매모호하게 잘못된 것입니다. 단지 요한이 잡힌 이후의 때에 갈릴리로 사역 장소를 옮긴 것 뿐입니다.
그 시간이 요한의 체포 이후라는 것이지 요한의 체포와 예수님의 사역지 이동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마태도 그런 식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때를 알게 하려고 요한의 체포소식을 들은 걸로 기록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그게 아닙니다. 처음 얼마동안의 유다 사역기간 중에 예수님은 어떠한 특별한 성공도 기록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을 당시 하늘로부터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하였으며 소리가 들려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은 예수는 어떠한 목회적 성공도 거두지 못하고 사역지를 옮기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고 하는 말처럼 그래도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이스라엘의 중심지인 유다지역입니다. 그래서 유다에서 먼저 사역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제 갈릴리로 사역의 중심지를 옮깁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갈릴리를 이방인과의 혼혈지역이라고 무시했습니다.
유다라는 이스라엘의 중심지에서 갈릴리라는 변두리의 낙후된 지역으로 옮기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 갈릴리가 예수님의 고향이기는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라고 해서 무작정 쉽게 사람을 전도하는 그런 역사는 일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갈릴리로 옮기고 나서 해변가를 다니다가 고기잡는 일을 하는 형제를 보고 한마디 하니까 즉시 예수를 좇았다?
좀 웃기지 않습니까? 그러고 또 가다가 이번에는 다음 출어를 준비하기 위해 그물을 깁는 사람들, 역시 일하는 사람들을 보고 한마디 했는데 직장과 아버지까지 팽개치고 예수를 좇았다?
너무 과장이 많은 것 같지 않습니까?
일생을 좇을 제자가 이렇게나 쉽게 얻어집니까?
그런데 마태복음 이외의 병행기사는 어떤 식으로 기록했는지 볼까요?
2.첫번째가 두 번째다.
무슨 말인지 궁금하시지요?
마태복음에서는 베드로가 첫 번째 제자인 것처럼 기록되었지만 실제로 베드로는 두번째 제자군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제일 첫 번 제자는 누굴까요?
바로 요한과 안드레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두 번째 제자군으로 기록되었지만 요한이 직접 쓴 책 요한복음1장35절에 보면 세례 요한이 자기의 제자 두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칭하면서 자기의 두 제자를 예수님에게 보냅니다. 바로 이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가 된 요한과 안드레입니다.
그런데 안드레가 바로 베드로의 형제입니다. 그는 처음으로 주님의 제자가 되고 난 다음 자기의 형제인 베드로에게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데리고 예수께로 온”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안드레의 전도로 예수에게 나아 온 것입니다. 첫 번째가 아닙니다. 두 번째도 아닙니다. 그럼 세 번째일까요?
문제는 베드로를 전도할 때 안드레는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메시야로 소개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다른 내용을 참조한다면 이때 베드로가 생각한 메시야는 영적인 메시야가 아니고 정치적인 메시야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베드로가 항상 검을 차고 다녔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사실입니다. 영적인 스승을 따르면서 검을 차고 다녔다는 것은 글쎄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3.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요한복음을 보면 이 네 사람 다음으로 제자가 된 자는 빌립입니다. 여기에도 과장법이 사용되었지요?
요한복음4:43에 보면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여기에 보면 아예 빌립이 예수를 믿었다는 말도 없습니다. 다만 이런 말을 듣고 바로 빌립이 자기의 친구인 나다나엘을 찾아서 전도한 기록이 나옵니다. 그 역시 메시야를 우리가 만났다고 소개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나다나엘이 주를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지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로 베드로에 대한 문제입니다.
누가복음4장에 보면 38절에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 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그런데 이때까지 성경은 ‘사람들’이라고만 하지 ‘제자’라는 말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시몬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주님이 고치신 기사가 나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베드로는 주님의 제자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사람들’을 대접한 사람 역시 베드로가 아니라 베드로의 장모입니다.
베드로의 장모 집이고 병고침을 받은 이가 너무 감사해서 직접 수종한다? 그럴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4장이 끝나고 5장에 베드로가 어떻게 해서 주의 제자가 되었는지가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예수님은 이미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미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게네사렛 호수, 즉 갈릴리 바닷가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설교를 하는데 이때 사람들에게 보다 더 효과적으로 말씀을 전하기 위해 배위에서 설교를 했는데 이때 탄 배가 바로 베드로의 배입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고,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했던 베드로가 이에 순종해서 그물을 내리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가 잡혔고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을 불러서 함께 잡았는데도 두배가 고기의 무게 때문에 잠기게 될 정도가 되지 비로소 주님의 앞에 무릎을 꿇고 죄인임을 고백하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10절과 11절에 마태복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그들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바로 이 사람들이 오늘 본문에 나왔던 네 사람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고기를 너무 많이 잡아서 자기와 함께 고기를 잡자고 요청한 동무의 배가 바로 이 네사람의 배입니다. 한척은 고기를 잡는 중이고 한척은 일과를 마치고 육지에 배를 대고 그물을 깁고 있고.
성경을 기록할 때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된 것이기는 하지만 각 사람들마다 기록하는 방식은 다릅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들을 생긴대로 기질 대로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자기보다 먼저 부름을 받은 네사람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래서 그냥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주님을 따르게 될 때의 장소와 멋진 말만 기록한 것입니다. 마태의 기록은 전혀 틀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너무 생략이 많이 되었을 따름입니다.
그 중에서도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이 말은 마태의 가슴속에 깊이 깊이 인상적으로 남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생략된 와중에도 그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이 네 사람의 제자를 만들게 된 것이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가다가 말 한마디를 했는데 아무런 조건 없이 망설임도 없이 즉각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는다? 글쎄요.
이제 네 어부를 부르신 과정이 그렇게 말 그대로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4.기적이 제자를 만든다?
자, 그럼 베드로를 제자로 만든 것은 형제의 전도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기적 때문입니까?
도대체 무엇이 베드로를 일생을 주를 따르는 제자로 만든 것일까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의하면 베드로는 고기잡다가 주님의 명령을 따라 주님을 좇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의하면 베드로는 제일 처음 주님의 제자가 된 형제 안드레의 전도로 주님을 따르게 된 걸로 보입니다. 과연 무엇이 진실입니까?
다수설에 따라야 합니까? 그러나 요한은 스스로 제일 먼저 주님의 제자가 되었고 베드로가 제자가 된 과정을 자기와 함께 주의 제자가 된 안드레의 전도라고 말하는데요? 어느한쪽의 말이 맞다면 다른 기록은 거짓말이 됩니다. 일점일회도 틀림이 없다고 하는 성경이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다니 곤란하지요.
5.초기 사역이 힘들다
그래서 제가 사건을 재구성해 보았습니다. 먼저 결론적으로 두가지의 기록 모두 전혀 거짓이 없습니다. 다만 중점적으로 강조한 것이 달랐을 뿐입니다. 관점의 차이라고 할까요?
먼저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이 제일 자세하게 상황을 기술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사막으로 들어가서 40일간의 금식기도로 영성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금식기도의 말미에 사탄의 세가지 시험을 이기게 됩니다. 이때부터 예수님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처음 유다에서 사역을 시작했고 세례 요한의 체포 이후에는 갈릴로 이전해서 사역을 시작합니다. 유다에서 사역할 때까지는 예수님의 12제자단이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처음 주님은 자신의 제자단을 만들지 않고 갈릴리의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물론 회당에서는 설교하는 사람, 요즘 말로 목사 정도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냥 안식일 가까운 회당에 들어간 것이고 이때 말씀을 읽을 사람하고 회당장이 지원자를 받을 때 예수님이 나가서 말씀을 읽고 간단한 설명을 덧붙인 것입니다.
회당에는 3인의 회당장이 있고 목사나 다른 성직은 없습니다. 이 회당장은 자기가 말씀을 읽고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회당에 온 일반인들 중에서 말씀을 읽을 사람이 있는지 먼저 물어 봅니다. 이때 주님이 나가서 그냥 말씀을 읽고 이 말씀에 대한 간단한 해석을 한 것입니다. 이게 사람들의 주목을 끈 것입니다.
주님은 이때까지 제자단도없고 독립적인 학파를 세우지도 않았지요. 물론 이 시기에도 혼자서 많은 치유의 역사를 일으킨 것 같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목사인지만 정식으로 신학교를 나오지도 않고, 고정적으로 교회를 담임하지 않았으며 그냥 성령충만하고 사명감에 불타서 기도하고 이 교회 저 교회 다니면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 정도!
이후에는 쉽게 얘기하면 개척교회를 세웠는데 너무 제자가 없자 세례 요한이 자기의 제자 두 사람을 주님의 개척교회에 파송한 겁니다. 물론 이때 주님이 세운 개척교회는 건물도 없었습니다. 비록 실력도 있고 능력도 있기는 하지만 배경도 없고 돈도 없고 정식으로 신학도 안나온 목사가 건물도 없으니 누가 주님을 따를 것입니까? 그래서 사촌형인 세례 요한이 자기의 두 제자를 파송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러 온 자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사적으로는 예수님의 사촌 형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하고는 어마어마하게 신분차이가 나는 인물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엄친아.
세례 요한은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지성소에 들어가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할 때 천사를 만나서 아들을 계시받습니다. 아들이 태어날 때까지 벙어리로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도데체 어떤 아들이 태어날지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아들이 태어난 후에 다시 말문이 트였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이 아이가 보통 아이가 아니라는 하늘의 계시로 받아 들여졌습니다.
명문가의 후예가 하나님의 계시까지 받고 태어났으니까 그의 사역이 순조로울 것은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사역에 입문했을 때 이미 세례 요한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이 비록 세례 요한의 사촌동생이기는 하지만 신분과 처지는 너무 다릅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의 아들이 아니라 목수의 아들이었고 나사렛이란 가난하고 도덕적이지 못한 동네에서 태어났습니다.
빌립의 전도를 받았을때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태어났다는 말을 들은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라고 바로 반응한 것만 보아도 나사렛이 얼마나 형편없는 곳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의 고향집에서 나와서 가버나움에서 살게 됩니다. 집이 없으니 산다고 하기 보다는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활동을 했다고 표현해야 할까요?
6.기적이 역사를 이룬다
처음으로 주님의 제자가 된 두 사람 요한과 안드레가 예수님을 만나보고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이분이 우리가 고대하던 메시야라고 선전해서 그 형제들 야고보와 베드로가 주께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곧 주를 떠나게 됩니다. 베드로는 정치적인 메시야인줄 알고 주를 따르기로 했는데 주님은 정치하고는 상관없이 그냥 하늘나라의 일만 이야기했기 때문에 실망한 것입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고통받는 이스라엘을 회복할 메시야가 아니라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고 살아서도 영적인 나라를 만들겠다는 예수님의 말은 베드로를 실망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떠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가 다시금 세상으로 나간 것을 다시 부르기 위해 시몬 베드로의 장모집에 간 것입니다. 당시 베드로는 장모집에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면 원래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 북동쪽의 벳새다라고 하는 곳에서 살았는데 후에 가버나움으로 이주를 했고 남편을 사별한 장모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베드로의 집으로 가서 열병을 앓고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여기서 보시면 베드로가 주님에게 자기 장모의 병을 고쳐달라고 청하지 않습니다. 왜겠습니까?
베드로가 이미 주님의 제자였다면 당연히 스승에게 자기 장모의 병을 고쳐달라고 떳떳하게 이야기했을 것이고 또 베드로의 집에 간 예수님과 사람들을 베드로가 앞장서서 대접했을 것이지만 이때 베드로는 일시적으로 주님을 떠난 상태였기 때문에 미안해서 주님에게 장모의 질병을 낫게 해 달라고 부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따지고보면 예수님은 잃어버린 제자를 찾기위해 베드로의 집으로 심방을 간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장모의 중한 열병이 나았습니다. 이건 분명히 굉장한 기적입니다. 당시 중한 열병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이를 낫게 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여실히 나타내는 기적입니다. 그러한 기적을 보았지만 여전히 베드로는 주님께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쨋단 말이냐?
그랬기 때문에 이제 주님은 다시 베드로가 고기잡이하는 바라도 가신 것입니다. 봅시다. 만일 주님이 베드로를 전혀 몰랐는데 사람들에게 설교하기위해서 지금 한참 고기잡이하고 있는 영업용 배를 빌려서 자기를 위하여 노를 젓게 한다는게 말이 됩니까? 이 배는 사람을 태우는 유람선이 아닙니다. 고기잡이 배입니다. 그리고 지금 베드로는 다른 사람과 함께 고기잡이를 하고 있습니다.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고기를 잡지 못해서 낙담하고 괴로워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런 배에 그냥 올라타서 나를 위하여 노를 저으라고 한다면 이게 통하겠습니까?
베드로가 주님에게 한 짓(?)이 있기 때문에 주님이 무리하게 베드로의 배에 올라타는데도 막지 못한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고 주님은 베드로에게 뭔가 댓가를 주시기위해 그에게 배를 깊은곳으로 가져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명령합니다.
이때 말씀에 순종한 베드로는 혼자서는 다 못잡을 엄청난 고기를 잡게 되고 마침 근처에서 그물을 깁던 동무의 배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엄청난 고기, 배 두적이 잠길 만큼 많은 고기를 잡은 기적을 맛본 베드로와 어부들은 비로소 주님 앞에 엎드려 저는 죄인입니다.저를 떠나소서라고 고백하게 되고 마침내 사람을 낚는 어부로 주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7.치병보다 돈? 남보다 나?
자 그런데 한가지 의문점이 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이적을 지금 처음 본 것이 아닙니다. 일전에 베드로는 자신의 장모가 열병에 걸려서 사경을 헤맬 때 자기 집에까지 와서 장모의 병을 고치는 놀라운 이적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때 베드로는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주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처가살이를 하는 입장입니다. 장모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입장이지요. 그런데 장모가 죽으면 그 집은 베드로의 집이 될 것이고 더 이상 장모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그런데 장모를 살리다니 지금 뭐하자는 거냐?
물론 이정도로 베드로가 나쁜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도 그렇게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단지 이적을 맛본 베드로가 주님을 따르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베드로가 자기 배에 고기가 어마어마하게 잡히는 기적을 맛보고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치유의 기적보다는 부자되는 기적이 베드로에게 더 가치있는 것이었을까요? 자기의 질병을 고쳐준 것이 아니라 장모의 질병을 고쳐주었기 때문에 내가 아니라 남(?)이었기 때문일까요?
장모를 모시고 장모의 집에서 살았지만 베드로에게는 여전히 강건너 불이었기 때문에 ,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었을때는 가만있다가 고기를 많이 잡아서 부자가 될 것 같으니까 주님을 따르기로 한 겁니까?
보다 더 전에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는 형제의 전도로 주님 앞에 나갔던 베드로는 왜 다시 세상으로 나갔을까요? 그건 베드로가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8.나는 죄인입니다.
물고기 이적을 맛본 베드로는 뜬금없이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합니다.
신학적 의미에서 인간이 아담의 원죄를 받았다는 의미의 죄인입니까? 베드로가 벌써부터 신학을 알았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정말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속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처음 전도를 받고 주님 앞으로 갈 때 들은말은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는 말입니다.
이후의 전도에서도 사람들은 전부 자기들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메시야를 따릅니다.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만나려고 하는 메시야는 정치적인 메시야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독립운동의 영웅입니다. 그럼 베드로가 나라를, 민족을 너무 너무 사랑해서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그럴 수도 있기는 한데, 성경은 그렇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식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는 예수님이 나라를 회복하고 난 다음 자기의 두 아들을 가장 높은 벼슬에 앉혀달라고 부탁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나중에 나라를 회복하고 난 다음, 나라가 독립하고 난 다음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혁명영웅인 예수를 만나러 갔다가 그가 독립운동에 뜻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주를 버리고 세상으로 나간 것입니다.
‘벼슬자리에 앉을 가망도 없는데 내가 왜 저 가난한 선생을 따라야 되지?’이게 베드로의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는 주를 떠난 것입니다. 막상 주를 만나러 가보니까 집도 없이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중입니다. 먹을 것도 풍부하지 않지요? 돈이 없어요. 명성에 비해 실상은 너무 초라합니다. 그래서 떠난겁니다.
비록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었지만 베드로에게 장모는 자기 자신보다 덜 소중했기 때문에 애써 외면한 것입니다. ‘그것 가지고는 나를 움직일 수 없어’
그런데 베드로가 고기를 잡고 주님 앞에 항복한 것은 자기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 속물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주님이 가난하지만 주님은 얼마든지 부자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그렇게 부유해 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주님은 왜 고기 잡아서 자기 집을 사지 않았지?
왜 나처럼 주를 떠나 세상으로 나와 나만을 위해 사는 속물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주는 거지?‘
이렇게 생각하자 그는, 죄인 베드로는 자기 자신이 부끄러워 진 것입니다. 자기 밖에 모르고 , 형제도 자매도 없이 그냥 돈에 눈이 벌게 가지고 벼슬이나 한자리 할려고 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 그래서 자기가 주를 떠나는게 아니라 주께서 자기 같은 죄인을 떠나시라고 간청하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급수가 다르다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마침내 베드로와 친구 어부들은 주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물론 이들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정치적인 메시야를 갈구하고 주님이 한자리를 주실 것으로 믿고 따라 다녔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사람들을 속이는 거짓을 말씀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은데 왜 제자들마다 주님이 나중에 나라를 차지하면 한자리 할걸로 여겼을까요?
그것은 주님이 자꾸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왕국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의 왕국, 하늘 왕국을 지상의 독립국가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무릎을 꿇고 죄인임을 자백한 베드로는 그 후로도 여전히 지상의 왕국을 꿈꾸었고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려고 할 때 그것을 저지하려고 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살지 못한 죄인임을 자백한 베드로는 여전히 높은 벼슬 한자리를 노립니다. 결코 간단하게 말씀 한마디로 주님이 네 어부를 제자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베드로나 그 형제들, 친구들과 같지 않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예수 믿어서 한자리 할려고 주님을 따랐던 그들과는 다르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선거철만 되면 교회 와서 자꾸 헌금하고 인사하는 정치꾼들 있잖아요. 우습지 않습니까? 베드로의 후예들이지요. 갈릴리 해변의 네 어부들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러한 사실을 다 아시고도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자기의 가장 위급한 순간, 십자가의 순간에 자기를 버리고 도망친 그 제자들까지도 주는 결코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걱정하셔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셨지요.
오늘날 베드로를 포함한 네 어부들은 바티칸의 성베드로 대성당의 꼭대기에서 세상을 굽어 보고 있습니다. 비록 살아서는 한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는데 죽어서는 지금 현재 가장 영향력이 있는 종교 지도자인 로마교황은 스스로를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합니다. 어때요? 베드로는 죽어서 한지리 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난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오래전에 우리를 택하신 거대한 구원의 섭리에 포함된 신기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 거대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세상에 교회는 많고 세상에 주님의 교인은 많지만 진정한 주님의 제자는 드뭅니다. 우리가 바로 그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됩시다. 내 모든 장래를 맡기고 주를 한번 진심으로 따라 봅시다. 저는 우리들의 미래가 기대됩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얼마나 굉장한 일을 예비하셨는지 너무 너무 확실히 알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각을 초월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들어 쓰실 것이며 우리로 말미암아 , 우리 교회로 말미암아 영광받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호반의 네 어부는 그 놀라운 기적 앞에 엎드려졌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그런 기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나와 여러분의 만남,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만난 것은 놀라운 기적을 일으킬 거대한 역사의 시작임을 믿고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나갑시다.
그 끝에 도저히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룰 수 없는 거대한 역사의 주인공들로 쓰임 받을 것을 믿고 나갑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5월 4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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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말하자면, 목사님의 마태복음 해설 업그레이드 버전 정도 되겠네요. 베드로의 인간미에, 인간다움에 저는 매우 감격했습니다. 흔히 생각하는 인식과는 조금 다르게 사실 성경책은 구약도 그렇고, 상당히 인간적이고, 저열하고 추잡한 장면이 많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삼손 같이 황당한 사사는 물론이고, 영웅 다윗도 실은 욕정의 죄 앞에서 무기력하게 당하는 모습이 나오니까요. 사실은 그렇기 때문에, 저는 훨씬 현실감이 느껴집니다.
몇 번이나 언급했지만, 회개하라라는 말은, 생각을 돌이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왜 우리는 생각을 돌이켜야만 하는 걸까요. 가만히 놔두면 저절로 탐욕스러움을 향해서 계속 다가가기 때문이 아닐까요. 베드로는 장모가 낫는 기적을 두 눈으로 보고서도, 자신의 마음을 주님을 따르는 방향으로 돌이키기에는 어려웠습니다. 또 다시 물고기가 잡히는 기적을 보고 나서, 그는 자신의 부끄러운 마음을 들킨 것 처럼 괴로워 하고, 떠나라고 고백합니다.
오늘날 여전히 예수님은 우리를 찾고 계실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나부터 찾고, 내 코가 석자인 우리들을 찾고 계실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의 유명한 고백, 예수님은 죄인을 찾고, 병든 이를 고치기 위한 주님이라는 것이 와닿았습니다.
예전 중국에서 처음 선교가 시작될 때, 사람들은 왜 내가 죄인이냐, 말도 안 된다, 대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협박하느냐라고 달려들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저는 원죄라는 신학적 개념 자체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은 그토록 못나고, 그토록 이기적인 모습이 가득하다고 할지라도, 주님은 여전히 그런 사람들을 찾고 계시며,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기꺼이 돌이킴으로서, 놀랍고 경이롭고 멋진 일들을 펼쳐나간다는 그 믿음 뿐입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마음을 돌이켜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인간이 선하게 살아가려는 그 멋진 의지를 분명히 기억하시고 갚아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 2014.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