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5월 11일 주일 예배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는 삼손 (사사기14:1-)
지금 바깥은 온통 푸르른 빛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세월호의 아픔이 아직은 채가시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맞이해서 많은 이들이 가정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있습니다.
그 무엇보다 소중한 우리의 아이들과 부모님들에 대한 사랑에 이어서 청소년의 날과 스승의 날도 예정되어 있습니다. 5월은 신록에 대한 예찬과 더불어 가정의 달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의 사사인 삼손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신력을 가졌지만 여자에 눈이 어두워 결국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팽개쳤을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파멸에 이른 비운의 사사인 삼손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삼손의 이야기 중에서도 삼손과 블레셋 여인 들릴라의 이야기가 가장 유명합니다. 그러나 삼손에게 들릴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삼손은 딤나에 있는 블레셋 여인과 한번 결혼했지만 파경을 맞았고, 가사에 있는 블레셋 기생에게 빠지기도 했고, 소렉 골짜기에서 역시 블레셋 여인 들릴라에게 미쳐서 죽음을 맞게 되기까지 여자들과 얽힌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삼손의 기사는 여자로부터 시작해서 여자로 끝이 납니다.
삼손에게는 여자가 죽음에 이르는 질병인 셈입니다. 그것도 전부 이스라엘 여자가 아니라 블레셋 여자입니다. 당시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수수한 그래서 약간은 촌스러운 이스라엘 여자보다 도시적이고 세련된 블레셋 여자에게 여자를 밝히는 삼손의 눈이 돌아간 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비록 블레셋의 통치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혼자서 천명도 죽이는 신력의 소유자인 삼손에게 블레셋의 군대가 무섭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독립과 안전을 책임져야 할 사사가 오히려 적국의 여인들을 좋아 하다니! 결론이 눈에 환히 보입니다. 명약관화!
1.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오늘 본문은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딸 중 한 여자를 보고’ 마음에 들어서 자기 부모에게 그 여자를 아내로 삼게해 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뭐 결혼 적령기의 총각이 처녀를 보고 사랑을 느끼고 결혼을 꿈꾸는 것은 전혀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삼손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삼손이 딤나에 내려간 것은 그냥 여행을 간 것이 아닙니다. 딤나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블레셋인들의 거주지입니다. 그런데 그가 , 이스라엘의 사사인 그가 왜 딤나로 내려갔을까요?
13장 마지막 절에 힌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출생을 예언했었고, 나실인으로 예정된 삼손은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비로소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즉 이제부터 그에게는 성령이 주신 힘이 더하여져서 민족을 위한 큰 일, 즉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한 일을 하도록 하는 사명이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삼손이 비록 하나님이 천사가 예언한 대로 탄생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처음부터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서 민족을 구원할 일을 한 것은 아닙니다. 출생후의 오랜 세월 후에 비로소 여호와의 영이 그를 사로잡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삼손이 한 첫 일은 ‘딤나’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아마 민족을 위한 어떤 큰 일을 하러 내려간 것 같습니다.
2.거기서 한 여자를 보고
그런데 삼손이 한 일은 독립운동이 아니라 기껏 블레셋의 한 여인을 보고 빠지게 된 것입니다. ‘딤나’는 원래 단지파의 땅이었지만 아모리 족에게 빼앗겼고 후에 블레셋의 도시가 되었는데 삼손의 집이 있는 소라와는 약 5km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부모에게 그 여인과 결혼하게 해 달라고 조릅니다.
그런데 본문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삼손의 정황이 더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거기서 블레셋 딸 중 한 여자를 보고’라는 말은 원문을 직역하면 ‘그리고 그는 딤나 안에서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다’입니다.
똑같지요? 그런데 ‘한 여자’란 말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이건 성경이 일부러 뭔가를 암시하기위해 삽입한 것입니다. 여기서 ‘한 여자’는 짐승의 수컷에 대비되는 한 암컷을 의미하고 뭔가 성적인 측면을 강조하기위해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삼손은 단지 블레셋 여자의 외면의 성적 매력만을 보고 그 여자와 결혼하려고 부모를 졸랐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가 처음 딤나로 내려갈 때는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어 민족의 독립을 위한 일을 하러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여자의 외모에 끌려 거룩한 사명을 잊어 버린 것입니다.
3.도로 올라와서 말하여 가로되
삼손은 자기의 눈에 드는 여인을 보자 마자 집으로 돌아옵니다. 딤나에 간 목적이 무엇인지도 생각지 않고 그냥 이 여자를 아내로 삼기위해 허겁지겁 집으로 도로 올라간 것입니다. 소라는 딤나보다 높은 산지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래서 산 아래를 내려가면 있는 곳이 ‘딤나’니까 성경에서는 올라간다, 내려간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삼손이 집으로 가서 그 여자를 취하여 자기의 아내를 삼게 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또 본문에서 나타내는 것이 있습니다. “말하여 가로되”
이 말은 단순히 부모에게 자기가 그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선포하다, 선언하다’의 뜻입니다. ‘내가 그 여자와 결혼 할 테니까 그렇게 아십시오’라는 통고입니다. ‘그 여자가 제 마음에 드는데 그 여자와 결혼하면 안될까요?’같은 의논이 아닙니다. 일방적인 선언을 한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풍속에는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랑의 부모가 아들의 결혼에 동의하고 결혼 지참금을 신부의 가족에게 지불하고서 결혼을 합니다. 그러니까 삼손은 지금 일방적으로 자기의 눈에 든 여자를 위해서 부모에게 빨리 그 집에 가서 지참금을 주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아내를 반드시 삼아야 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삼손은 아직 철이 없고 또 불효자입니다. 여자의 내면을 알아보고 사랑을 느낀 것이 아니라 그냥 외모만을 보고는 정신없이 부모를 몰아세웁니다. 마치 떼쟁이 아이를 보는 것 같습니다.
4.천사가 예고한 아이
그런데 삼손은 부모님에게 이런 식의 태도를 보여서는 안되는 사람입니다. 삼손은 오랜 기간 임신하지 못했던 여인에게 천사, 기묘자가 와서 출생을 예언한 하늘이 낸 아이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에게 서원된 나실인이며 장차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할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 예언된 자입니다.
그래서 그 엄마는 삼손이 자랄 때 포도주를 먹지 못하게 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못하게 하였으며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나실인으로 키웠습니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우며 기대를 한 아들 삼손은 너무 기대를 크게 받은 나머지
너무 애지중지 키워진 나머지 그만 망나니가 되어 버렸습니다. 외적인 나실인의 법규대로 아이를 키우기는 했는데 그 규례의 내용대로 정말 하나님과 민족에 헌신된 아이로는 키우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삼손이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뒤 처음으로 한 일은 독립을 위하여 전쟁을 준비한 것이 아니라 그냥 적국의 딸을 보고 정신을 빼앗긴 일입니다.
그것도 그냥 외모만 보고 성욕이 동해서 정신없이 그 여자를 아내로 맞으려고 부모에게 막무가내로 요청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세상에서 말하는 연인들의 ‘비련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냥 육욕의 발로였을 뿐입니다.
5.부모의 반대
삼손이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삼게 해 달라고 조르자 부모는 이에 반대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아무리 사랑에 국경이 없다고 해도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할 사명을 띠고 태어난 아이가 적국의 여인과 결혼하려고 하는데 흔쾌히 허락할 부모는 없습니다.
더구나 블레셋 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무할례자들 입니다. 한집안에 여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집안을 흥하게도 망하게도 하는게 여자의 역할입니다. 예로부터 베갯머리 송사에는 당할 장사가 없다고 하는데요 그만큼 여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걸 말하는 겁니다.
삼손의 부모는 이스라엘에 여자가 없어서 네가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삼으려 하느냐고 반대하지만 삼손에게는 통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육욕에 미친 삼손에게 부모의 훈계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이유도 없습니다. 단지 내가 보기에 그 여자가 좋아 보이기 때문에 그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겁니다. 원문으로 보면 더 의미가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눈에 그녀가 좋기 때문에”
내 눈에 좋으면 되지 부모님이 무슨 상관이며 세상의 규칙이 무슨 상관이며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낭만적인 사랑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삼손은 미안하지만 이 여인을 사랑한게 아니라 단지 눈에 좋아 보여서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눈에 좋아 보인다는 말은 관용적으로 외모만 좋다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덕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요즘 유행하는 이 말과 같습니다.
“예쁘면 모든게 용서된다”
삼손은 지금 그 여인의 외모가 마음에 들어서 어서 속히 이 여자를 아내로 맞아야겠다는 거지 다른 아무런 생각이 없습니다. 사실 삼손은 일생을 아무런 생각없이 산 사람인데 벌써부터 이런 모습이 보입니다.
6.하나님의 계획
성경은 4절에 이렇게 삼손이 부모를 조른 것은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 이었으나 그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고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아서 삼손이 그 정도로 깊은 생각을 가질 사람이 아닙니다. 기껏 여인의 외모에 맛이 가서 결혼시켜 달라고 조르는 철부지 아이에게 그런 높은 뜻이 있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삼손’이 아니라 ‘하나님이’ 라는 말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즉 우리말 ‘삼손’이 라는 부분이 원문에는 ‘그’라고 되어 있는데 이 ‘그’가 뒷부분의 글과 대조해 보면 아무래도 삼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삼손이 육욕에 정신이 나가서 결혼을 추진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이용하셔서도 이스라엘을 위한 큰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절의 말미에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이라고 적어 놓은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삼손의 잘못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이 일의 주체는 삼손이고, 삼손이 그 여인을 좋아했으며 삼손이 결혼을 추진했기 때문입니다.
뒷부분에 나옵니다만 결론적으로 삼손은 이 여인과 결혼을 하기는 하지만 결혼생활을 오래 지속하지는 못하고 수많은 블레셋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는 비참한 결과만을 초래하고 끝이 납니다.
요즘도 농사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자식 농사라고 합니다. 그만큼 자녀를 제대로 키운다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자녀를 잘키우기를 원하고 모든 부모들이 자녀가 훌륭하게 자라기를 원합니다만 자녀를 잘 키우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랑을 많이 주면 많이 주어서 탈
안주면 안주어서 탈이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이 우리의 자녀를 잘 이끌고 보호해 달라고.
삼손의 아버지인 ‘마노아’나 그 어머니의 기대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아이를 낳지 못해서 노심초사할 때 여호와의 사자, 기묘자가 나타나서 아이의 출생을 예언하며 아이를 어떻게 키울지를 예언하고 그 아이가 장차 어떠한 일을 할 것인지에 관해서도 말했기 때문에 부모는 세상에 둘도 없는 민족의 영웅이 되리라 여기며 애지중지 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실인의 규정을 지키도록 키웠겠지만 아이가 자라서 머리가 굵어지자 이제는 부모의 합당한 목소리도 청종하지 않고 자기의 눈에 좋은 대로 행하려고 합니다.
부모는 그게 그르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결국 아들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속담이 생긴 거지요.
그 뒤로도 자식의 행보를 얼마나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며 마음 졸였을지 눈에 선연히 보이는 듯 합니다.
만일 삼손이 단 한번이라도 자신에 대한 부모의 사랑과 기대, 하나님의 인도와사명을 생각했다면 삼손의 일생은 조금은 달라졌을 것이고 이스라엘, 보다 더 직접적으로는 단지파의 미래도 달라 졌을 것입니다.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삼손이 속했던 단지파는 결국 거대 지파에서 소규모의 집안으로 규모가 축소되어서 근거지를 탈출해서 북쪽으로 갔고 이스라엘 12지파의 명단에서도 빠져버립니다. 군대만 6만명이었던 대부족이 600명의 군대를 꾸려서 북방으로 탈출하는 지경에 까지 이릅니다.
부모님이 나를 키우실 때 얼마나 고생하셨을까를 한번 생각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장성한 자식이 자기가 잘나서 혼자 큰 것 같지만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아이를 키우고 입히고 교육시켜 성장케 하는 일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게다가 자녀들이 장성하는 만큼 부모는 늙어 가는 것입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자녀는 부모의 청춘을 갉아먹고 자라난 존재입니다.
부모 입장에서 자식이 큰 영예를 얻고 출세하고 하는게 물론 좋기는 하겠지만 그냥 언제나 자기의 앞에서 웃으며 서로 사랑하는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만 해도 마냥 좋습니다.
더 이상 물질을 벌 수 없는 부모님이 부유한 자녀에게 뭔가를 주려고 하는 것이 이상하십니까? 냉장고에서 김치도 주고, 밑반찬도 주고 , 뭔가를 주려고 하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가 아무리 장성해도 여전히 아이 같아서 뭔가를 더 해주고 싶고 보호하고 가르치려고 하는게 이상한 일이 전혀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독립시킬 위대한 영웅으로 만들라는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마노아와 그 아내는 진정한 사랑도 아니고 한갓 욕정으로 결혼을 서두르는 다 큰 아이, 힘은 천하장사지만 아직 전혀 철이 들지 않은 아이를 보며 , 그리고 더 이상 자기의 말을 들어 먹지 않는 아이를 보면 절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자, 삼손은 그렇고 우리로 눈을 한번 돌려 봅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삼손 못지않은 재능과 그 재능을 가지고 해야 할 귀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부모들은 우리를 또 귀하게 키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부모의 은혜에 대해서 어떻게 감사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 재능을 가지고 이루어야 할 사명을 지금 제대로 감당하고 있습니까?
이땅의 한쪽에서는 다시 없을 큰 슬픔에 잠긴 부모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명이고 재능이고 뭐고 간에 사랑하는 아이의 모습을 다시 보는게 제일 중요할 것인데 오늘 하나님이 우리를 데려가지 않으시고 이 땅에 그대로 두신 것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코 홀로 자란 것이 아니며 우리가 지금 아무리 나이를 먹었더래도 우리는 처음에는 다 아이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부모님의 사랑 때문이며 우리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때문이며 이 사회의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오늘 이 생존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때문입니다.
그 무엇보다 가족간의 사랑이 중요합니다.
밖에는 여전히 잎이 햇볕을 투과하여 시리도록 연한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네요. 그 햇살아래서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네 이웃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우리 가족부터, 부모와 자식부터 먼저 사랑합시다. 그게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의 시작이거든요.
우리에게 믿음, 소망, 사랑이 있지만 그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5월 11일 주일 예배
――――――――――――――――――――――――――――――――――――――――――――――――――――――――――――――――――――――――――
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
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삼손이야기는 어딘지 납득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것은 왜 하필 저런 사람을 사사로 삼았단 말인가? 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전능하시다는 그 하나님이 말이지요. 조금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리 봐도 하나님 이름에 먹칠하는 것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최근 한 책을 보다가, 뒤집힌 U자 곡선에 대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 이런 모양의 곡선이라 하겠네요. 어떤 재능이 있었을 때, 왼쪽 극단, 즉 재능이 너무 미미하다면 살아가기가 힘이 들고 어렵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이와 반대로 오른쪽 극단, 다시 말해 재능이 아주 뛰어나다면 이 사람 역시 제대로 삶을 살아가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매우 반직관적으로 들리겠지만, 사실 동양만 해도 예로부터 뛰어난 재능을 조심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경고문구가 종종 발견되곤 합니다. 그래서 일찍 꽃피는 재능이 독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도 고전에서 몇 번 보았습니다. 옛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저 사람 정말 뛰어나, 그러면 뭐해, 망나니인데!
왜 이 이야기를 꺼내었는가 하면, 삼손의 비극은 그가 너무나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처음으로 조금은 삼손의 몰상식(?)이 이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많은 축복을 받았기에,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그것이 결국 자기만 생각하는 사고방식으로 귀결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참으로 똑똑한 사람들이라는 평가를 여러번 보았던 것 같습니다. 또한, 한글의 우수성과 편리함은 오늘날 스마트폰 시대에 얼마나 큰 유익인가요. 아무것도 없던 나라에서, 남을 도울 수 있는 나라로, 말그대로 기적을 실제로 이루어 낸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덕분에, 다들 너무 잘났기 때문에, 우리는 "남을 생각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게 아닐까요. 훌륭한 장점과 함께 분명 그 그림자도 따라오고 있다는 게 새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좋아하는 미국영화 스파이더맨에는 큰 힘에는 반드시 큰 책임이 뒤따른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걸 조금만 다르게 접근하면, 큰 힘과 무책임이 만나면, 삼손과 같은 망나니가 될 수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혹여라도 우리에게 재능이 있다면, 그것을 소중히 여길 수 있기를, 그래서 함부로 다루지 않기를. 보다 나은 세상을 이루어가는데 단 1cm라도 기여할 수 있다면,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아름답고 복된 인생이라 생각해 봤습니다. / 2014.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