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4년5월25일/의인 열명은 있어야 한다(창세기18:16-33)/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4. 5. 30. 00:15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5월 25일 주일 예배

의인 열명은 있어야 한다 (창세기18:16-33)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여러 가지 의문점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가령 이런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려 하실 때 아브라함이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하면서 아브라함이 “의인 50명을 찾으면 그래도 소돔을 멸하실 것입니까?”라고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데 이건 상당히 좋지 못한 습관입니다. 왜 백명도 아니고 겨우 50명일까하는 점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숫자는 많습니다. 열명도 있고,백명도 있고, 천명도 있고 소돔사람의 십분의 일(십일조니까)도 있을 수 있는데 왜 하필 50명을 불렀을까요?

지금 우리가 쓰는 숫자인 아라비아 숫자는 십진법입니다. 일십백천만 이런식으로 나가는 거지요. 그런데 이 말은 당시 중동 지역사람들의 관념이 십진법이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2나 50이 아니라 10이나 백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50이라?

솔직히 성경적인 관점에서 50명이라는 숫자는 정말 독특합니다. 구약에서 50명은 세 번나오는데 한번은 사무엘하에서 압살롬의 반역 때 또 한번은 열왕기상에서 아도니야의 반란 때 나오는데 둘다 왕이 되려고 기병대와 전배50을 마련했다고 할 때 나옵니다. 그리고 한번은 열왕기하에서 엘리야를 잡으러 파견된 부대가 50인대였고 하나님의 불이 50명을 불사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50명이 부대의 편제이기는 하지만 백부장이 더 일반적인 것 같은데....

여하튼 이렇게 잘 안쓰는 숫자의 사람수가 나왔습니다. 왜 50명일까?
일반적으로 소돔성읍이라고 했지만 실제로 소돔은 한 개의 성이아니고 5개의 성읍으로 이루어진 도시국가 연맹입니다. 그 다섯 개 도시의 이름이 창세기14장에 나옵니다.

북쪽 엘람왕의 연합군이 쳐들어 왔을 때 가나안의 도시국가 5개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것은 5개의 도시국가가 한 개의 연맹왕국을 이루고 있었고 그 대표자가 바로 소돔왕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섯 개의 도시 이름은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소알입니다. 이 성읍들은 자체적으로 다 왕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외적으로는 가나안 도시연합으로 한 개의 국가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관용적으로 ‘소돔과 고모라’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한 개의 국가가 아니라 분명히 두 개의 나라임에도 말이지요.

일단 50명과 다섯 개의 도시국가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뭔가 연관이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이런 의문점을 머리에 두고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1)손님을 배웅하다
아브라함은 손님들을 배웅하러 소돔으로 가는 길을 얼마쯤 따라갑니다. 당시 아브라함이 있었던 헤브론은 산지였으므로 산아래로 멀리 소돔이 잘 보이는 지점까지 손님들을 전송하러 온 것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여기서 손님들과 헤어져서 다시 장막으로 돌아갈 겁니다. 중동 지역의 아름다운 풍속인 ‘손 대접하기’가 끝이 납니다.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변합니다. 세명의 손님들사이에 뭔가 말이 있습니다. 한분은 제2위 하나님이고 두분은 천사인데 하나님이 천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알려주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유는 “내가 그로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랍니다. 하나님은 내가 아브라함을 택했기 때문에 내가 이 지상에서 하려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는 또 뭡니까?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

아브라함을 택한 이유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가 다스리는 공동체에게 명령하기위해서랍니다. 그러니까 개인의 구원은 결국 공동체의 행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가 속한 공동체에게 어떤 일을 하게 하시려고 개인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 공동체가 해야 하는 일은 앞에서도 나온 바처럼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요 결국 개인을 구원하심은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독불장군이 없다고 공동체를 이루지 못한 개인의 힘은 미약합니다. 나라와 사회를 구하기 위해 개인 혼자만 의인이 되어서는 그 의인은 견디지 못하고 제거되거나 소외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구하시기위해서 적어도 열명의 의인 공동체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의인 열명은 문자 그래도 열명이라기 보다는 열명의 가장, 즉 열 개의 가정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성인 남자들만 계수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아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의와 공도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호와의 도를 지켜서 혼자 천국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도를 혼자서 지키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게 의와 공도를 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일차적으로는 불의한 사회구조아레서 의인 역시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고 혼자서 그 구조를 변혁시키려고 할때는 핍박을 받을 것이며 순교로 끝을 맺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개인을 택하셔서 그가 속한 공동체를 의로운 공동체로 바꾸도록 하시는 것이며 그들이 행하는 의와 공도로 말미암아 사회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각 성읍에서 열명의 공동체 한 개씩 총 오십명의 의인을 하나님에게 제시한 것입니다.

그러면 의는 무엇을 말합니까?
의는 원래 ‘옳다, 의롭다’는 말에서 나와서 공의나 정의같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인간이 생활가운데서 마땅히 지켜야 할 윤리적, 도덕적인 기준과의 조화를 말합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우리 기독교에서는 결코 비윤리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일을 진리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단들은 종종 하나님의 명령을 빙자하여 비윤리적이고 반도덕적인 일들을 요구하거나 시행할 때가 있습니다. 주의해야 합니다.
먼저 윤리적 측면에서 의는 인간 상호간의 행위와 관련하여 이기심을 버리고 공동체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노력할 때 실현됩니다. 법률적 측면에서 의는 부유하든 가난하든 지위에 상관없이 법률아래서 모든 자에게 동등하게 적용될 수 있을 때 실현됩니다. 언약적 측면에서의 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킬 때 이루어 집니다.

공도는 심판하다, 다스리다는 뜻에서 유래하여 판단이나 재판을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나아가 모든 판단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공의를 의미하는 말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절대 공의로운 속성에 근거하여 인간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 판단과 다스림이란 뜻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므로 의와 공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반드시 지켜야 할 의미입니다. 이 두가지를 행하게 하려고 사람을 택하신 것입니다.

3)크고 무거우니
이렇게 하나님이 택하신 이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알려 주십니다. 천국의 비밀뿐만 아니라 이 지상에서 행해지는 일들까지도 알려 주십니다.

오늘 아브라함에게도 역시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킬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러한 사람을 일러 하나님의 국정 파트너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이 지금 하나님의 국정 파트너가 된 것입니다. 그가 비록 세상을 다스리는 황제나 왕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자신의 사역계획을 미리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택하신 자이기 때문이며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와 공도를 아브라함 공동체가 행하도록 하시기위함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택하신 이유는 나로 통하여 내가 속한 공동체를 불러서 하나님의 도를 지킴으로 의와 공도를 이 땅에서 행하도록 하시기위함입니다. 그렇게 의로운 공동체가 행하는 의와 공도는 세상을 구원합니다. 이 민족에 속한 공동체가 묵묵히 주어진 위치에서 하나님의 의를 지키고 의와 공도를 행한다면 우리 민족은 적대적인 강대국들 사이에서도 민족을 보전하며 안녕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가 있다고 해서 즉각 즉각 나라와 사회를 징벌하지는 않으십니다. 왜냐면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도 하지만 그가 한번 징계의 채찍을 들면 엄청나게 견디기 어렵고 가공할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채찍을 들어서 징치하기 전에 오래 참으시며 또 몇 번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먼저 하나님이 소돔을 멸하시려 한 이유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여기서 부르짖음은 원성 즉 하늘을 향한 억울한 사람들의 애절한 호소를 말합니다. 하나님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저의 억울함을 풀어 주소서라는 원성을 말합니다. 이런 호소가 크답니다. 이것은 그들의 죄가 극에 다다랐음을 말합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 보세요. 혹시라도 이런 억울함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하늘 아버지께 울려퍼지고 있지는 않을까요? 이들은 자기들의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하늘 아버지께 호소합니다. 이 말은 법률적으로는 자기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재판을 청구하는 것으로 고소라고 하지요.
이제 재판이 개시되면 저들의 호소가 참인지, 저들이 당한 억울함의 정도가 어느정도인지 조사하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그런데 그 죄악이 너무 무거워서 감히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답니다. 여기서 중하다는 말은 무겁다, 둔하다는 뜻으로 죄가 너무 많아 무거워서 움직이기에 둔할 정도가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수많은 죄악 가운데서 특히 이들은 성적으로 매우 문란했는데 이들의 이름인 소돔이란 말은 영어사전에서는 동성애, 남색을 뜻하는 말로 쓰일 정도이니 어느정도인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남자 형상을 한 천사 두사람을 한밤중에 포위하고 성폭행하려 한 이들의 모습이 19장에 나옵니다. 이건 빙산의 일각입니다. 소돔의 죄악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무겁습니다.

4)보고 알려 하노라
이렇게 죄악이 크고 중하다고 해서 또 억울한 사람들이 소돔을 고소한다고 해서 무작정 하나님이 징계의 채찍을 휘두른다면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겠지요.
하나님은 이제 이러한 소돔의 죄악을 확정하기 위해 재판의 사전 조사인 고소자의 말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친히 두 천사를 소돔에 파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천사를 파견하셔서 친히 보고 알려합니까?
하늘위해서 지상의 일을 살피기가 너무 어려워서 일까요?
판결을 위해서 사전조사가 필요하지만 이미 하나님의 판결을 내려진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왜 친히 내려가서 보려 하십니까? 저들의 죄를 알지 못해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파견된 것은 이들의 죄악상에도 불구하고 소돔성을 구원할 기회를 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늦추어 지고 또 천사들이 이러이러한 좋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증명해 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자 공의의 하나님은 저들의 죄가 결코 사망에 이를 정도는 아니고 개전의 정이 있다는 증거가 발견되기를 원하신 것이며 그를 위하여 심판을 미루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때는 반드시 오지만 그 전에 한사람이라도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들은 좋은 일을 증명하기는커녕 오히려 황당한 일을 겪음으로 도저히 소돔이 용서받을 수 없는 멸망의 도시에 합당하다는 사실을 인증하고 말았습니다.

5)아브라함이 50인을 제의하다
아브라함이 이 소식을 듣고 한 말은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마음이 다급합니다. 왜냐면 소돔성에는 자신의 조카 롯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뿐입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 위기에 처한 셈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합니다. 악인은 죽어도 되지만 의인은 살려야 하는게 아버지의 공의가 아닙니까?

아브라함은 25절에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이렇게 하나님의 정의에 호소합니다.

아브라함의 이런 호소는 오늘날 목사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의문이자 곤란함입니다. 우리는 지난 세월호 참사때 한 아이의 기도하는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그 아이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었고 동무들도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공의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부르짖을 수 밖에 없는 광경입니다.

이것은 사실 의인과 의인 공동체의 관계까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만 의롭게 살 것이 아니라 의로운 공동체를 이루어서 사회를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킬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회속에 사는 의인을 위해서입니다. 자기의 책임이 없음에도 불의한 사회시스템 때문에 의인이 피해를 보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바로 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개인구원에 빗대어 사회구원이라고 합니다. 선진국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 기껏해야 돈을 많이 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제대로된 시스템을 만들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보장받고 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개인이 하는것보다는 공동체가 하는 것이 더 쉽고 적어도 한 개의 공동체는 있어야 사회가 개혁될 가능성이 보이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공동체가 한 개도 없다면 그런 사회는 죽은 사회이므로 죽어버린 부분이 더 퍼지기 전에 잘라내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지요. 의인은 죽어서는 안됩니다. 악인과 같이 대접하는 것도 부당합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소수의 의로운이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낼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만일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으면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라고 질문합니다.

다섯 개의 도시국가에서 의인 오십을 찾는 것은 정말 쉬울 것 같습니다. 한 개의 성에 의인 열이 없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게다가 이전에 롯을 따라갔던 그의 부족들, 또 다른 히브리 부족들의 숫자를 염두에 둔 건지도 모릅니다. ‘설마 그들이라면 그래도 하나님을 섬기니까 하나님에게 의인으로 인정받지 않을까?’
이유야 어쨌든 의인 오십을 제시한 아브라함의 질문에 하나님은 너무나 쉽게 승낙하십니다. ‘의인 오십 때문에라도 내가 소돔을 멸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면 응당 아브라함은 기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너무 쉽게 하나님께서 응낙하는 것을 본 아브라함은 뭔가 조금 불안합니다. 아니 찝찝하다는 정도?
그래서 혹시 몰라서 오십에 다섯이 부족한 45명도 괜찮지 않느냐고 조심스럽게 제안합니다. 그러자 역시 하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것도 기꺼이 허락하십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또 불안해 집니다. 다시 40명으로 내려간 제안을 하게 되고 이런 식으로 숫자는 계속 내려가서 최후로 열명의 의인을 발견하면 소돔전체를 용서하는 것으로 하고 끝을 맺습니다.

한 성읍에서 의인 열 명을 찾는 조건에서 소돔 전체에서 의인 열명을 찾는 것으로 조건이 완화되었지만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결코 의인 열명 밑으로 내려가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유대사회에서 열 명의 남자 성인이 한 개가 회당을 건설할 수 있다는 규정에서도 찾아 볼 수 있지만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바로 열명이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은 의인들 개인 개인이 아니라 한 개의 의인 공동체를 찾으려 하셨다는 말이고 한 개의 공동체도 제대로 서 있지 않기에 소돔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결하신 겁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5월 25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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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4월 16일을 잊을 수 없어서, 잊고 싶지 않아서, 저는 바보같이 아직도 노란 리본을 카카오톡 프로필 이미지로 쓰고 있습니다. 한 달이 지났고, 내일이면 6월이라지만, 남의 일 같지가 않고, 생각할 수록 슬픈 마음이 오늘도 듭니다. 저는 신앙에도 깊은 회의감을 느꼈었습니다. 제 머리로는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저녁알바를 하고 십일조를 낼 만큼 착하디 착한 여학생은, 사고 당시 갑판까지 나왔다가 친구들을 구해야 한다고 다시 선내로 돌아갔다가 숨졌고, 알려져 있듯이 세월호에서 마지막 기도 동영상까지 공개되었음에도, 현실은 비극일 뿐이었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 처럼, 비디오게임과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던 한 남학생은 친구에게 구명조끼를 벗어줄 만큼 남을 배려하는 멋쟁이 였지만, 그 학생도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습니다.

유가족 분들이 밤새워 이동하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았고, 유가족 김병권님의 호소도 이제는 낯이 익습니다. 그만큼 세상에 많이 호소했다는 이야기 입니다. 저는 어떻게 세상에 하나님이 있다면 이럴 수가 있는지 무척이나 원망스러웠습니다. 인간들의 탐욕이 만들어 낸 시스템 속에서, 착하고 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다는 참담함이, 가슴 찢어질만큼 서럽고 슬펐습니다.

아마도 이 설교문은, 그런 저 같은 사람들이 가지는 의문에 대한 목사님의 설교였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사회를 만들어가지 못한다면, 그런 사회 속에서는 착한 사람도 버틸 수 없기 때문에... 좋은 사람도 희생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분명하게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서 목소리를 내야 하며, 적극적으로 모이고 힘써야 함을 설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만 은혜받고 잘 살면 된다가 아니라, 나에게만 헤드라이트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의 잘못된 모습들에 대하여 어쩔 수 없다며 절망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를 놓고, 정말 많이 생각했었고, 저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잊지 않겠습니다. 좋은 사회의 꿈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다짐할 뿐이었습니다. 무능한 스스로의 모습에 마음이 더욱 아프기만 했습니다.

 5월 30일날, 유가족 김병권님과 몇몇 분들께서, 처음으로 교회를 찾아와 호소했습니다. "세월호 참사 국정조사를 두고 정치인들이 밥그릇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교회가 나서 국회나 정부에 질타의 말씀을 한 번 더 해주셨으면 좋겠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개신교계에 유가족들이 면담을 요청하며,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힘써달라며 진상규명을 요청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독교는 어떤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걸까요.

저는 오늘도 눈물이 납니다. 의인 공동체가 정말로 단 하나도 없을 만큼, 개인의 이기심과 탐욕으로 물들어 버리고, 남의 일이라며 침묵과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면, 거기에는 정말로 답이 없을 것입니다. 이웃의 눈물과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시인 브레히트의 말처럼 되지 않을까요. "가장 곤궁한 자들의 외침에 귀를 막는다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도 알아듣지 못하게 된다"

약한 사람, 희생당한 사람, 힘없는 사람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정녕 기독교가 가지는 핵심적 의제라면, 오늘날 교회는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사회가 좋은 사회이기는 커녕, 삼류가 판치는 사회, 돈이 최고고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이미 물질적 가치관에 완전히 전복되어 버렸음을 우리는 두 눈으로 목격해왔습니다. 그러나, 어딘가에는 여전히 제대로 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야만, 앞으로 아이들이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초대형 재해가 일어났을 때, 시장 한 사람이 현장에 직접 가서 끝까지 버텨가면서 현장 지휘를 했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 책임감을 가진 사람이 있었기에, 미국이 선진국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좋은 나라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에 달려 있습니다. 한 아이가 고통스러워 할 때, 외면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가 있기를... 소돔과 고모라가 결국 망한 것은 천사들이 찾아왔음에도 그들을 괴롭혔고, 그 장면을 아무도 막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무도 타인의 어려움을 듣고 싶어 하지 않고, 자기가 듣고 싶은 달콤한 말만 들으려 한다면, 그런 사회도 멸망의 길로 걸어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 2014. 05. 30. 자정 무렵.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