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6월 8일 주일 예배
삼갈의 소모는 막대기 (사사기3:31)
오늘도 역시 지난 주에 이어서 사사기의 내용을 살펴보려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한절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하기가 곤란해서 제가 이제까지 한번도 삼갈에 대해서 설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갈의 기사를 보면 도저히 설교를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극적인 요소가 많이 있습니다. 그는 성경에 비록 딱 한 절이 기록되었지만 결코 딱 한절만큼 별볼일 없는 일을 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 한절의 구절로 우리에게 엄청난 많은 것들을 말씀하십니다.
솔직히 삼갈에 대해서 성경은 아무 하는 일 없이 그냥 부자로 잘먹고 잘살다가 아들 손자 많이 낳아서 장가보내고 시집보냈다는 사사들보다 더 적은 딱 한절의 분량만을 할당하고 있습니다.
자 먼저 삼갈이 누구일까요?
삼갈은 아낫의 아들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이 ‘아낫’이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낫의 아들’이란 말을 이방인이며 전쟁의 용병을 이르는 말로 추론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이는 아낫을 지역이름으로 생각합니다. 가령 우리나라에서 ‘양산의 아들’이니 ‘부산의 아들’이니 하는 식으로 ‘벳아낫’ 이란 지역사람이란 겁니다. 그리고 이 지역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가나안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근거는 없답니다.
그래서 그의 집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말 그대로 설에 불과하지 추론하기가 곤란합니다. 근거가 너무 불명확하거든요. 성경은 이렇게 삼갈에 대해서 불친절합니다. 또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인 사실만 나와 있지 혼자서 그렇게 했는지 여러명이 그렇게 했는지 아니면 삼갈이 이끄는 군대가 그렇게 했는지에 대한 기록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는 했지만 사사인지 아니면 장군인지 아니면 목자나 농부인지에 대한 기사도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이 한절을 가지고 우리가 삼갈에 대해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정말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한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래도 몇가지의 내용을 알 수가 있습니다.
1.에훗의 후에
본문의 제일 첫 번째에 나오는 구절인데 삼갈이 등장한 시대가 바로 ‘에훗의 후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삼갈이 등장한 시기가 ‘에훗의 후’라는 것입니다. 그럴수 있지요. 그런데 본절의 다음인 4:1을 보면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라는 말이 나옵니다. 제가 항상 말씀드리는 거지만 성경은 장절로 나뉜다기 보다는 동그라미가 있는 부분으로 나뉩니다. 그렇다면 4:1절부터 새로운 내용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앞의 3장 마지막절부터 새로운 내용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에훗의 후에 삼갈이 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내용이 나왔다면 보통은 기술 순서가 삼갈이 나오기 전에 에훗이 죽고 그리고 삼갈이 나오고 그가 죽고 그리고 비로소 바락과 드보라의 시대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되어야 정상적인 기술이 될 터인데 성경은 여기에서만은 그런 식의 구성을 취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정상적으로 기술된다면 아마 4:1은 삼갈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했다는 구절로 시작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디에도 삼갈의 죽음에 관한 기사는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삼갈의 전대 사사인 에훗에 관해서만 나옵니다.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겠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에훗이 살아 있을 동안에 즉 에훗이 나이 많아서 사사직을 제대로 수행하기가 어려울 때 삼갈이 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인 600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삼갈이 사사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예전 번역본에서는 들어있었던 사사라는 말이 새로운 번역본에는 빠져 있습니다. 그가 사사인지 아닌지는 더 알 수 없는 셈입니다.
오히려 용병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에훗이 나이 많아서 싸움을 주도할 수 없게 되자 용병을 사서 블레셋의 침입을 막았다는 가설은 상당히 그럴듯해 보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3:30절에 에훗의 시대에 이스라엘이 무려 80년간이나 평온하였다는 말이 이해가 됩니다. 한 사람이 아무리 일찍 사사직에 올라도 그렇지 어떻게 80년을 다스리겠습니까? 결코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드문 경우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고구려에도 80년을 다스린 왕이 있습니다. 누구겠습니까? 바로 장수왕입니다. 이름부터가 장수했다고 적혀 있쟎습니까? 이 왕은 너무 오래 집권하는 바람에 그 아들이 아니라 손자가 다음의 왕위를 이었다고 하는데 아들은 왕이 되어 보지도 못하고 태자의 몸으로 있다가 아버지보다 먼저 늙어서 죽었다고 합니다.
아들 이름이 뭐겠습니까? 쪼다, 바로 우리가 사람을 무시해서 하는 말인 ‘조다’가 바로 이 태자의 이름입니다. 고조다. 그래서 이후부터 사람들은 ‘야이 쪼다야!’ 이렇게 바보같은 사람들을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조다의 아버지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대왕이 일찍 죽는 바람에 자동적으로 왕직에 오른것이지 에훗처럼 무명에서 몸을 일으켜 최고통치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자, 그건 그렇고 이렇게 에훗이 80년을 사사의 직에 있었다면 말년에는 그가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 지중해의 다섯 도시를 중심으로 거주하던 블레셋 인들이 슬금 슬금 내륙 쪽으로 진출하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에 활약한 사람이 바로 삼갈입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지금도 앙숙이지만 그 징글징글한 역사가 이미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삼갈은 에훗의 후에 일어난 사람이기는 하지만 에훗이 죽기 전에 말년 즈음에 사사의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옛날 왕들도 자신이 노년에 자신의 아들에게 일정 범위안에서 권력을 물려주어서 대리청정을 하도록 한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러나 삼갈의 경우에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삼갈은 공식적으로 에훗의 후계자가 아니었습니다.
2.삼갈은 사사였을까?
우리말 성경은 삼갈을 에훗 다음시대의 사사로 소개합니다. “에훗의 후에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사사로 있어”
그런데 새롭게 성경이 개정되면서 사사라는 말이 빠져버렸습니다. 왜냐면 원문에는 처음부터 삼갈이 사사라는 말이 없거든요.
그럼 뭡니까? 삼갈이 비록 에훗의 노년에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는 했지만 공식적으로 사사의 직함을 띄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만일 삼갈이 정식 사사였다면 성경에서 삼갈이 이스라엘에 몇 년간의 평화를 주었고 그가 어디에서 죽었다는 기사가 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삼갈이 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인을 죽인 기사는 나오지만 그가 죽었다고 하는 기사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가 정식적인 사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
그래서 새롭게 번역된 성경에서는 전에 들어 있었던 사사라는 말이 빠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를 이방의 용병으로 보기는 무리가 있는 것이 그가 싸운 무기를 보십시오. 그의 무기는 소모는 막대기입니다. 용병, 그것도 유명한 용병이라면 직업군인으로서 최소한 밥벌이 도구인 무기를 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검이나 창이나 쇠도리깨나...여하튼 무기도 없이 소모는 막대기를 무기로 사용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용병들에게는 좀 억지스럽습니다. 당시 가나안인들이 발달된 철기 문명을 가졌다는 것을 본다면 직업 군인이 무기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래도 삼갈이 용병은 아닌 것 같습니다.
3.소모는 막대기로
이렇게 보면 삼갈의 직업이 무언지 상당히 혼란스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삼갈이 블레셋사람들을 죽일 때 사용한 무기가 바로 소모는 막대기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소모는 막대기!
저도 이 막대기를 본 적은 없는데 이 막대기는 목동들이 소를 몰 때 사용하는 막대기이기도 하지만 농부들이 쟁기로 사용하기도 했답니다.
길이가 2.4m에 한쪽 끝은 뾰족하게 못이 달려있고 또 다른 쪽은 끌이 달려 있어서 가축을 몰때도 사용하고 밭을 가는 쟁기의 역할도 했답니다. 그러니까 못으로 말을 안듣는 소들을 살짝 찌르는 거지요. 그러니까 아픔을 겪지 않으려고 소들이 다른 길로 가지 못하고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갈 수 밖에 없는 그런 막대기입니다. 그러므로 삼갈은 목자일 수도 있고 농부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딱 평범한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목축도 하고 약간의 농사도 짓는 그런 사람!
그런데 이 막대기로 그는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친 것입니다. 그것도 무려 600명을.
우리가 이 글로 보면 그냥 삼갈이 엄청난 무술을 가졌거나 천하장사구나 하고 여기겠지만 실제로 생각한다면 이게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왜냐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철기가 없었지만 블레셋 인들에게는 철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블레셋 사람들은 쉽게 말하면 그리스인들의 이주민입니다. 에게해의 크레테 섬에서 전쟁을 피해서 이주해 온 사람들로 싸움이나 철기 문명 자체가 이스라엘같은 후진국하고는 차원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무기도 없이 단지 목자의 도구인지 농부의 도구인지만을 가지고 싸워서 이겼다면 이는 굉장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 간단한 기사에서 삼갈이 결코 훈련된 용사, 즉 전쟁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면 그에게는 한자루의 쇠로된 비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에훗에게는 다리에 차고 있던 비수라도 있었지 이 사람에게는 그런게 아예 없었습니다. 단지 그는 목자이거나 농부였으며 그 일을 위한 농기구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의 생업에 종사하는 이를 들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놀라운 일을 하신 것입니다.
4.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성경에서는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였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는 쇠로된 검을 가지지도 않았고 단지 손에 소모는 막대기만을 가졌기에 목자이거나 농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가 블레셋인들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구원했다고 말합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그리고 그의 뒤에 아낫의 아들 삼갈이 있었다....그도 역시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어떻습니까? 비록 사사는 아니지만 삼갈 그도 에훗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사의 역할을 했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사사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사사기에 기록된 것이고 이전 번역본에서는 삼갈의 이름뒤에 원문에도 없는 ‘사사’라는 말을 적은 것입니다.
에훗의 이야기는 엄청나게 길고 또 재미있습니다. 성경은 매우 자세하게 에훗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뒤이어 나오는 바락과 드보라의 경우에도 정말 극적인 요소가 많이 있습니다. 그에 비해 삼갈의 기사는 겨우 한절만 있습니다. 그럼에도 삼갈 역시 그 유명한 에훗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말입니다. 비록 공식적으로 사사의 직함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사사들이 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을 삼갈이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소모는 막대기로.
5.이제 우리가 할 차례입니다
1)직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늘 이 간단하고 짧은 한 구절에서 한가지의 교훈을 얻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비록 공식적인 직함도 없어도 이 나라를 구원하는 일에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사의 직이나 사령관의 직을 가져야만 나라를 구원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공직에 있어야만 나라를 구원할 자격을 가지지도 않습니다. 나라를 구원하는 것에는 직위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대통령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장관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정치인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사령관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재벌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내 이웃을 돌아볼 여력도 없거니와 이 사회와 나라를 돌아볼 책임은 더더구나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누구나 이 나라의 국민이라면 이 나라를 염려하며 걱정하고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나라의 불안과 환란이 결국은 그 속에 사는 나의 안위를 위협하고 흔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소위 말하는 사회 지도층에 있는 이들, 많은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 남에게 존경받거나 유명한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더 앞장서서 일하고 걱정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기는 합니다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나몰라라 외면하고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성도는 그 모든 육적인 신분을 뛰어 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천에 하나 만에 하나 택하셔서 이 땅에서 자기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로마 교황을 보고 카톨릭에서는 신의 대리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요 우리 신교에서는 우리 모두가 다 신의 대리자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는 이로 선택받은 존귀한 존재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그의 국정 파트너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그 어떤 탄원보다 더 강력하게 내 아버지께 영향을 미칩니다.
2)여건을 탓하지 말라
삼갈이 무엇을 가지고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쳤습니까?
그는 소모는 막대기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 600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삼갈의 무기는 단순한 ‘소모는 막대기’였지만 그의 상대인 블레셋 사람들은 용사들입니다. 제대로된 군사훈련을 받았고 또 제대로된 무장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청동제의 갑옷과 철제의 무기들은 막대기를 가진 삼갈과는 비교할 수 없이 우수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무기에 상관없이 결국 삼갈은 블레셋을 이겼고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얼마 전에 지방선거가 있었습니다. 투표율은 역시나 60%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젊은층의 투표율은 정말 너무 낮아서 민망할 지경입니다. 왜 투표율이 낮으냐 하면 할말은 많습니다.
취직 준비해야 하는데 투표할 시간이 어디있어.
내 먹고 살기도 바쁜데 투표는......
그럴듯한 말이기는 하지만 인터넷에 댓글다는거 보면 그렇지도 않아 보입니다. 흔히들 ‘키보드 워리어’라고 하는 이들은 맹렬하게 키보드로 인터넷에서 분노의 언어들을 쏟아 냅니다. 그런데 정작 이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투표할까요?
이들이 만들어 내는 오늘의 이슈를 가만 보면 정작 중요한 것은 몇 개 없고 거의 대부분은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들의 사소한 일상입니다.
갖가지 핑계가 많지만 정작 그들의 속마음은 귀찮아서입니다. 몇발짝 걸어가서 신분증을 제시하고 기표하는 행위도 귀찮아서 핑계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삼갈은 자기의 여건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손에 쇠로된 검이나 창이 없음을 핑계하지 않고 그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도구를 사용하여 이긴겁니다.
우리가 성경을 잘 보면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통일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사울 때에 전 이스라엘에 철기를 다루는 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전에는 있었는데 그때만 없었다고 하기는 곤란합니다.
그래서 철제 검은 딱 두사람 사울왕과 왕의 태자 요나단만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무엇을 가지고 전쟁을 했을까요?
청동제 칼? 천만에요. 청동제 칼과 철검이 부딪치면 볼거 없이 청동제 칼이 부러집니다. 그리고 청동제 칼도 엄청 비쌉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생업에 종사하다가 전쟁이 나면 바로 삼갈의 소모는 막대기 같은 나무 막대기하고 물맷돌을 가지고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원래 물맷돌은 전쟁하는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소모는 데 사용합니다. 소가 대열을 이탈하면 물맷돌로 소의 진행방향에 던져서 소가 깜짝 놀라서 다시 돌이키도록 하는 데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기 자체가 아예없는 사람들이었네요.
웃깁니까? 황당하지요?
그런데도 그들은 그 두가지의 조잡한 무기로 충분히 승리를 거두어 왔습니다. 사사의 시대가 시작되기전에 그들은 바로 그 막대기와 돌맹이를 가지고 가나안을 정복했던 사람들입니다. 기술자는 연장을 탓하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가지고 나는 내 나름의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나귀의 턱뼈로 블레셋 사람 일천을 쳐죽인 삼손도 있고 물맷돌로 골리앗을 죽인 다윗도 있쟎아요.
3)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도구를 탓하지 맙시다. 여건을 탓하지 맙시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께서 나에게 사명을 주셨다면 그 사명을 이룰 수 있는 도구는 자동적으로 주실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도구가
여건이 너무 부실하게 보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은 추상같다고요? 그렇다면 주어진 그 도구로 그 사명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만 내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의지하고 믿기에 그런 불신과 불평과 원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육적인 눈으로만 보고 불평하며 사명을 위하여 노력조차도 하지 않고 좌절하고 낙망하여 주저 앉아만 있다면 인간을 통하여 일하시기를 원하시는 내 아버지의 일을 감당할 수 없고 그 일은 다른 이에게 뺏겨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누군가는 그의 믿음과 사랑으로 나하고 똑같은 여건과 도구를 가지고 나는 불가능하다고 아예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일을 훌륭하게 수행할 것입니다.
삼갈이 이방인이었는지 이스라엘 인이었는지
삼갈이 사사였는지 용병이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삼갈 역시도 에훗과 마찬가지로 소모는 막대기로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했다는 점입니다. 이건 누가 뭐래도 바뀔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의 앞시대에 에훗이 한자루 비수로 이스라엘을 구원했던것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입니다. 한자루의 지팡이로. 소모는 막대기.
그의 뒷시대에 바락은 오합지졸들을 모아 무적의 철병거 군단을 물리친 것입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대의를 위해서 내 손에든 막대기라도 들고 일어선다면 우리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 전능하신 아버지는 나를 위해 그 막대기로도 충분히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해서 그의 대의를 위해서 일어나는가 하는 점입니다.
오른손에 장애가 있어서 왼손만을 사용한 에훗이 손에 든 한자루 비수
삼갈의 소모는 막대기
삼손이 든 나귀의 턱뼈
다윗의 물맷돌
야엘의 장막 말뚝 박는 망치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도구였습니다.
쇠로 잘 제련된 검이나 창만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요, 내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에 든 것을 가지고 나의 대의를 위하여 일어서라. 내가 너로 이 민족을 구원하는 큰 일을 하게 하리라.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6월 8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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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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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환경 탓을 하지 않고,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며 감사하며 살아간다는 것. 기독교가 가지는 중요한 힘이자, 또한 저 개인적으로는 항상 의문이 들었던 주제였습니다. 보통은 주어진 것이 너무나 작게 느껴지고, 이루어야 할 일은 끝도 없을만큼 광대하기 때문에, 도대체 실현이나 가능할까 답이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막스 베버의 말을 참 좋아해서, 동호회의 서명란에 써놓았는데, 짧은 문구입니다.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지 않으면, 가능한 일도 성취하지 못한다" 내가 지금 봤을 때, 힘들어 보이는 일에 도전해야만, 성장이 있고, 발전이 있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기회 조차도 빼앗기고 만다는 목사님의 말씀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일상 생활에서 쓴 것으로 보이는 소모는 막대기 하나라도, 의미 있는 일을 해나갈 수 있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느낄 수 있는 많은 경험과 도구들이 있지 않을까요. 중요한 힌트는 언제나 발 밑에 있었다는 어느 경영자의 고백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적극적으로 시도해보고, 부딪혀 볼 수 있기를...
그리하여, 정말 놀라운 결과를 만나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것이 "삶의 경이로움"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