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4년7월13일/베드로와 다비다(사도행전9:36-43)/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4. 7. 23. 18:43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7월 13일 주일 예배

베드로와 다비다 (사도행전9:36-43)

오늘은 베드로의 행적에 대해서 몇가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난주에는 베드로 후서에서 베드로가 교인들에게 권면하는 내용, 특히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성도가 갖추어야 할 덕목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요 이제 우리는 주님의 승천 후에 베드로가 과연 어떤 일을 했는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물론 베드로가 한 일은 매우 많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일도 많을 겁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오늘 저는 베드로 이적의 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죽은 다비다를 살린 기적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1.체험의 종교
사실 우리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자기가 직접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솔직히 누군가의 설득이나 간접적인 교육으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기는 좀 어렵습니다.
일단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만 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게 됩니다. 왜냐면 내가 하나님을 직접 체험했으니까. 내 몸으로 하나님을 느꼈기 때문에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미혹되지 않습니다.

베드로 역시 변화산 위에서의 경험이 너무나 굉장했기 때문에 수십년이 지난 후에도 잊지 못하고 베드로 후서에서 그때의 일을 회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법칙을 깨고 어떤 놀라운 일을 하게 되면 사람은 그걸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일어날 법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가지고 기적이라고 호들갑을 떠는 사람은 잘 없습니다. 기적은 그렇게나 어렵고도 신기한 것입니다.

2.기적은 누구를 위하여
오늘 본문에는 베드로가 행한 몇가지 기적들이 나와 있습니다. 본문의 바로 앞에는 중풍병자를 고친 기사가 나오고 본문의 바로 다음에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보자기 환상을 본 일이 나옵니다.

오늘날 특히 중풍병자와 암환자들이 많습니다. 이분들의 완전한 치유도 조금 어렵습니다. 그런데 기도로 이 병자들을 낫게 한다면 이건 정말 엄청나게 굉장한 일이 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중풍병자들이 나은 기록이 많이 있지만 제가 알기로는 중풍병자가 현대에 기도로 나은 경우는 잘 보지 못했습니다. 저도 여러 병자들을 위해서 기도했지만 다른 병자들에게는 나름 효과가 있었는데 중풍병자와 암환자에게는 별로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저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저의 믿음이 부족해서겠지요.

그런데 이런 기적은 왜 일어납니까? 베드로가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을 광고하기 위해서?
아니면 베드로를 잘먹고 잘살게 해주려고?
그도 아니면 베드로의 영적인 권위를 높여 주려고?

보통 기적은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법칙을 깨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자연법칙도 사실은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자연법칙이 자주 깨어진다면 이건 더 이상 법칙이라고 불리기가 어렵게 됩니다. 더구나 자기가 만든 법칙을 스스로 깨뜨린다면 이건 좀 이상합니다.
그래서 기적은 정말 드물게 일어납니다. 아니 일어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기적은 일어납니다. 그것이 아무리 드물어도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자기의 교회를 위해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인간 아무개를 영화롭게 할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덕을 위해서 기적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욥바는 예루살렘의 북서쪽 50km정도에 위치한 항구입니다. 이 항구는 그 옛날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 위해 레바논에서 목재를 들여오던 항구로 유명합니다. 요나가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갔습니다.

유명한 로마의 율리우스 케사르(시저)가 이 항구를 유대인들에게 주었고 유대인들이 로마인들과 독립전쟁을 할 때까지 이 항구는 유대인들에게 속합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의 배경이 되는 시점에서 욥바는 이방인의 도시가 아니고 유대인의 도시입니다.

참고로 독립전쟁은 주후66-70년에 벌어지고 베드로는 주후66년도에 죽기 때문에 이 당시에 유대가 로마의 속령이기는 했지만 헤롯의 아들들이 분봉왕으로서 여전히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가나안의 주인은 여전히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독립전쟁에서 패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했고 세계 각처로 흩어지게 되었지요.

3.욥바의 다비다
그러므로 지금 욥바에는 유대인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이 욥바에 다비다라고 하는 여자 제자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제자는 예수님을 직접 따른 사람이 아니라 그냥 예수님을 믿고 그 계명을 지키는 사람 즉 신자를 말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람어식 이름과 그리스식 이름. 다비다는 아람식이고 도르가는 그리스식입니다. 아람어는 곧 히브리어의 모국어입니다. 로마의 식민지이지만 로마인들 중에서 지배층이나 지식인들은 라틴어가 아니라 그리스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로마식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비다나 도르가는 똑 같은 뜻을 가지는데 그 뜻은 ‘영양’입니다. 빨리 달리고 품위가 있는 그래서 은혜로움이나 아름다움의 상징이 되었는데 바로 본문의 다비다가 그런 일을 한 사람입니다. 주위에 어려운 형제를 돕는 선행을 베푸는 헌신된 여인.

그런데 베드로가 롯다에 머물고 있을 그때에 이 다비다가 병들어 죽어서 이제 시체를 씻어서 다락에 두었답니다. 왜 시체를 다락에 두었는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사람을 살릴 때 다락에서 이적을 행했던 것을 기억하고 다비다에게도 똑같은 은혜가 임하기를 기원하고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여하튼 다비다가 죽자 사람들은 다비다의 시체를 씻어서 다락에 두고는 롯다에 거하고 있던 베드로에게 빨리 와 달라고 사람을 보냅니다. 롯다는 욥바와 약 16km 정도 떨어져 있답니다.
더운 지역에서는 시체가 빨리 썩기 때문에 당일 매장이 관습인 이스라엘에서 사람들은 어떤 기적을 바라고 롯다에 있는 베드로를 급히 청한 것입니다. 왜냐면 베드로가 롯다에서 중풍병자였던 애니아를 낫게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모든게 끝인데도 이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고 이웃도시인 롯다로 사람을 보내서 기적의 베드로를 초청한 것입니다.

베드로를 초청하면서 한글 성경에는 번역이 되지 않았지만 ‘우리에게까지’ 같이 와 달라고 요청했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를 비롯해서 믿음의 형제들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욥바의 제자들은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곧 내려와 달라고 강경하게 이야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제발 와 달라고 사정합니다. 뭔가 앞뒤가 안맞는 것 같지만 그만큼 롯다의 제자들은 베드로가 오면 다비다를 살릴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는 것이고 또 다비다에게 하나님의 기적이 임하기를 간절히 소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체를 다락에 두고는 롯다로 두명의 제자를 급히 보낸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났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게 일반적인데 이들은 지금 다비다를 이대로 떠나 보낼 수가 없습니다. 다비다가 그 정도로 이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너무 다비다에게 큰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욥바의 제자들은 이웃도시에 있는 베드로를 청한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베드로가 욥바에 도착하니 과부들이 다비다의 시체가 있는 다락으로 베드로를 따라와서는 서서 웁니다. 그리고는 베드로에게 다비다가 자기들을 위해서 좋은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이야기 합니다. 그냥 이야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입고 있는 다비다가 해준 속옷과 겉옷을 보여줍니다. 혹시라도 오해하실까봐 이야기하는데 여기서 속옷은 오늘날의 속옷개념이 아닙니다. 그냥 겉옷 안에 입는 옷으로 요즘 식으로 하면 긴 남방이나 티. 겉옷은 외투도 되고 이불도 되며 전당포에서도 잡아줄 만큼 고가입니다.

이런 옷을 입은 과부들이 다비다의 선행을 증거하며 베드로에게 제발 다비다를 살려달라고 빕니다. 베드로가 이런 힘이 있다고 믿었을까요?
다비다는 과부들이 볼 때 반드시 이 세상에 있어야 할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온몸으로 실천한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지금 울고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다비다의 은혜를 갚을 수 없어서 더 슬퍼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당시 과부들은 가난한 이의 대명사입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는 성경에서 항상 가난한 사람들을 말할 때 사용되는 단어들입니다. 이 가난한 이들은 너무나 다비다의 은혜가 고마웠기 때문에 다비다가 앞으로도 자기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때마침 주님의 수제자이면서 롯다에서 중풍병자를 고친 베드로의 이야기를 듣고 그에게 매달린 것입니다.

4.다비다야 일어나라
자, 일단 사람이 죽었습니다. 아프기나 하면 기도해서 치료의 광선을 발해 달라고 성령님께 간청하겠지만 이미 죽은 시체를 향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죽은 이를 살리는 것은 글쎄요,

그러나 이때 베드로는 죽은 아이를 살리신 예수님이 생각났습니다. 나사로는 죽은지 사흘이 지나서 이미 무덤에 들어있었지만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방금 죽어서 침상에 그래도 누워있었겠지요.
베드로가 막막할 때 그는 주님이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것이 생각 났습니다. 선생님께 배운 것을 이제 제자가 써먹는 겁니다. 더구나 다락방에 안치된 시체를 보고 베드로는 그 옛날 엘리야와 엘리사를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신이지만 엘리야와 엘리사는 단순히 주의 선지자,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주의 사자인 베드로도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예전에 선생님은 일어서서 명하셨지만 베드로는 그 주님의 권능을 힘입기 위해 조용히 무릎 꿇고 기도한 것입니다.
사실 예전에 주께서는 이미 열두제자들에게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10:8에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이 말이 그냥 단순히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믿을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에게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을 주신 주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주님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여인 다비다를 살려주시옵소서. “주의 권능이 아직도 살아서 역사하심을 저들에게 보여 주소서”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기도를 마친 베드로는 시체를 향하여 말합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시리아 사본과 벌게이트 역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권능을 힘입어 주님의 이름으로 시체에게 명한 것입니다.

이미 인간적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상태에서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그에게 기도하고 이제 시체를 향하여 일어나라고 명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한 말은 아람어로 ‘타비다 쿰’입니다. 그런데 그 옛날 주께서 야이로의 딸에게 하신 말씀은 ‘탈리다 쿰’이지요. 아람어 철자 한개만 다르지 똑같은 말입니다. 주는 이미 승천하셨지만 주께서 파송한 주의 제자들은 이제 주께서 주신 권능을 행하고 있습니다.

5.기적의 효과
다비다가 곧 일어나니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다비다를 잡이 일으킵니다. 그리고 과부들과 온 성도들이 다비다가 다시 살아난 모습을 봅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성도들과 과부들은 놀라고 기뻐했겠지만 온 욥다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믿더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걸로 기적의 효과가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욥바에 사는 가죽가공업자인 시몬은 자기와 이름이 같은 시몬 베드로를 자기의 집에 유하게 하고 베드로는 이제 이방인을 향하여 전도하게 되는 놀라운 일을 하게됩니다.
로마의 백부장으로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던 고넬료의 가정을 주께로 인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이 기적으로 말미암아 튼튼하게 서게 된 것입니다.

6.죽은 자를 살리신 이유
그럼 왜 하나님은 이미 죽은 다비다를 살리신 것일까요? 그 당시 진실된 믿음을 가진 성도들 중에 다비다만 죽은게 아닙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죽었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 다비다만큼 다른 이를 구제하고 선행을 한 신자가 없었을 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의 시대인 초대교회에서 다비다만큼 자기의 재물을 가지고 이웃을 돕고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이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랬는데 왜 하필 다비다 만입니까?
그것은 바로 다비다의 구제와 헌신 그리고 진실된 믿음이 다비다의 도움을 받은 과부들로 하여금 베드로에게 , 아니 베드로가 대표하는 하나님에게 매달리게 한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들은 다비다의 은혜에 갚을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엄청난 은혜를 입고서도 단지 그녀를 위해서 기도만 할 뿐입니다.

그래서 과부들은 더 슬픕니다. 자기들의 은혜를 갚기도 전에 다비다가 죽었기 때문이지요. 다비다의 시체를 앞에 두고도 이대로는 도저히 다비다를 못보낸다고 베드로에게 매달리게 만든 이유입니다.
다비다가 나에게 행한 은혜의 증거가, 그녀가 한 선행의 증거나 이렇게나 내 몸에 있는데 은혜를 갚기도 전에, 좀더 감사하기도 전에 다비다가 죽었기 때문에 더 과부들은 슬퍼하고 베드로를 청하여 다비다의 선행을 말한 것입니다.

다른 수많은 신약의 성도들이 죽어갈 때에 성경의 기록에는 그 누구도 시체를 다락에 두고 제자들에게 찾아와서 살려 달라고 요청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살려달라고 요청하기만 하면 누구나 다 살아 날 수 있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믿는 사람은 아무도 죽지 않을 겁니다. 그러므로 각 교회는 준비한 묘지가 필요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베드로를 급히 청한 욥바의 교인들과 과부들은 다비다가 얼마나 자기들을 도왔는지 그 증거를 보여주며 울기만 했지 베드로에게 제발 다비다를 살려 달라고 요청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그 먼거리를 사람들의 요청을 받아 들여 갔을 때에는 단순히 장례식을 집전하려고 간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욥바의 성도들은 다비다를 다락에다 두었기 때문입니다.
다락은 예로부터 선지자들이 죽은 자를 살리던 장소였습니다.
열왕기상17:19 “엘리야가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열왕기하4:21“아들을 하나님의 사람의 침상위에 두고” 여기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침상 역시 다락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체를 다락에 두고 베드로를 불렀다는 것은 죽은 이를 살려달라는 강한 요청인 것입니다. 하루만에 장례를 치르는 관습을 가지고 있고, 사흘이 지나면 영혼이 완전히 하나님께로 떠난다고 믿었던 욥바의 성도들은 다비다의 영혼이 아직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고 급히 베드로를 불렀던 것입니다.
그럼 왜 주님은 다비다를 다시 살려 주셨을까요? 왜 하나님은 다른 성도들의 죽음에는 눈감고 계시다가 다비다를 다시 살리셨지요?

그것은 다비다가 다시 살만한 일을 했다고 인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직 다비다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다비다의 시신을 다락에 두고 베드로를 부른 것은 욥바 성도들의 공통적인 생각이기 보다는 다비다의 죽음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던 도움받은 과부들의 요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어떤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해야 할 일이 있는 동안에는 주께서 우리의 목숨을 거두어 가시지 않는다’ 정말 그런지 아닌지는 놔두고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할 말입니다.

아직도 이땅에서 주를 위해서 해야 할 사명이 있다면 우리는 결코 저세상으로 갈 수 없습니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이걸 마저 다 해놓고서야 주께로 가서 편히 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생명의 면류관을 쓸 자격이 안되었는데 갈 수는 없습니다. 아직  우리가 거할 처소가 완성되지 않았는데 갈 수가 없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해볼까요
주께서 우리 믿는 성도들을 위해 천국에 거할 처소를 마련하셨는데 이게 아파트 기본형입니다. 85제곱미터. 아무 장식도 가구도 편의시설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가 받은 상급으로 보석장식들이 더해지는 거라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각종 편의시설과 가구들이 상급으로 주어진다고 생각해 보세요.

겨우 구원을 얻는 수준의 부끄러운 구원을 얻어서 천국에 갔다고 생각하면 너무 밋밋해요. 우리가 거할 집이 영 그렇습니다.
한때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개털 모자론이 유행했는데요, 기왕 쓸거면 개털모자보다는 면류관이 낫지 않습니까? 뭐 개털모자가 없을 확률이 높지만.

두 번째는 다비다의 다시 살아남이 부활의 주님을 전도하는데 굉장한 역할을 한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의 눈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똑똑히 보았는데 갑자기 그 주님이 부활하셨다고, 그리고는 우리들의 눈앞에서 산채로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의 주장이 다비다의 부활로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 옛날 엘리야와 엘리사가 죽은 이를 살린 그 놀라운 기적이 다시 일어났다는 것은 그 기적을 행한 이가 구약의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증거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욥바의 많은 이들이 다비다의 부활사건을 듣고 보고 주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튼튼해 진 것입니다. 각종 핍박을 무릅쓰고라도 하나님을 믿을 힘을 공급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초대형 기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사실상 기적은 교회를 세우기위해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하나님의 건덕을 위해서 일어납니다. 결코 기적의 대리자에게 영광을 주기위해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내가 죽는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다비다에게 했던 것처럼 울어 주며 애통해 할까요?
정말 이렇게 가서는 안 될 사람이 갔다고 애석해 할까요?
선행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고 기억되는 사람이 될까요?

요즘 우스개 소리로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부자에게 돈을 주는 것은 투자라 하고 가난한 이에게 돈을 주는 것은 자선이라고 한다.
투자는 돈을 날릴 수도 있지만 잘만 되면 수배의 결실을 가져옵니다. 그런데 자선은 자기의 것을 일방적으로 베풀지 뭔가를 기대하고 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가난한 이에게 뭔가를 베풀기 보다는 부유한 이에게 베풀려고 합니다. 나중에 뭔가라고 덕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그런데 어떻습니까? 다비다는 부자에게가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게 선을 베풀었고 이것은 부자에게 한 것보다 몇배로 아니 비교할 수도 없는 엄청난 이익으로 돌아왔네요.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있겠습니까?
예전에 국내 모 재벌회장이 암이 걸려서 죽음을 앞두고서도 그걸 한번 살아 보겠다고 기공수련을 한일이 있쟎습니까? 그가 죽어가면서도 내가 이걸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죽지 않을 텐데라고 한탄했다는데.

돈도 있겠다. 명예도 권련도 있겠다 얼마나 죽기가 싫겠습니까만 목숨은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비다는 바로 그 목숨을 구함 받은 것입니다. 그것도 죽지 않은 상태에서 희망이 있는 상태에서 그 희망이 연장된 것이 아니라 이미 끝났다고 생각되어진 절망의 상태에서 다시 사는 놀라운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부자에게 돈을 주는 것은 뇌물이고 가난한 이에게 돈을 주는 것은 투자다. 가난한 이들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뭔가 되갚아 주지는 못하지만 그 가난한 이들의 주께서 이를 보시고 우리에게 몇배로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글쎄 성경의 표현으로는 구약적 표현으로 배로 받고 신약적 표현으로 최소 삼십배에서 최대 백배.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만 한다면 우리 주님은 이미 다 끝난 것 같은 곳에서도 놀라운 이적을 행하십니다.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곳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권능을 보이십니다.
세상이 이미 끝난 듯이 보여도 우리가 하나님앞에 바로 서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도저히 인간이 떠올릴 수 없는 놀라운 방법으로 주의 성도들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요?
묵묵히 사랑하며 하나님을 믿으며 그렇게 살아 가면 됩니다.
가젤 영양처럼 순하고 기품있게 그리고 부지런하게 살아 가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가 명하신 것을 힘써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그렇게 주님과 함께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 인간의 눈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이 우리를 위하여 일어날 것입니다.
내 하나님은 나의 사랑의 하나님은 결코 나를 이대로 그냥 두시지 않고 나를 위하여 놀라운 일을 하실 것입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7월 13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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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머릿속에 남아 있는 풍경이 있습니다. 어느 부자가 죽음을 맞이했는데, 자식들이 재산을 갖고 싸우고 있더라 라는 이야기. 그리고, 어느 선생님이 죽음을 맞이했는데 끝없는 사람의 물결이 있더라. 매우 짧은 이야기 였지만, 지금도 생각나는 걸 보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비다라면 당연히 후자처럼, 사람들의 슬퍼함이 가득하더라 가 되겠지요.

요즘은 워낙 개인이 중시되고, 관계 피로를 호소하는 사람들도 늘어가고 있기 때문에, 다비다 같이 선량한 이웃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느낌도 간혹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불평이나 원망하기에 앞서서, 내가 먼저 남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주었던가? 라고 반성해 보는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직 우리가 세상에 남아 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결국 좋은 이웃이 되어 사이 좋게 살아가야 하는 책임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끝으로 다비다처럼, 옷을 만들어서 나눠줄 수 있는 실력. 그리고 인품이 참 멋있어 보입니다. 남을 돌아보고, 지원하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먼저 건강하고 근사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요즘에 많이 듭니다. 한 사람이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될 수 있는가... 다비다를 보면서 반성하게 되는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