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네 이름이 무엇이냐?(창세기32:21-32)/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4. 7. 29. 07:07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7월 27일 주일 예배

 

네 이름이 무엇이냐? (창세기32:21-32)

 

가장이란 무엇일까요? 오늘을 살아가는 이 땅의 많은 남자들의 고민입니다. 솔직히 가장은 누구보다 고독하고 힘든 자리입니다. 옛날처럼 가장이라 해서 무슨 큰 벼슬이나 되는 것도 아닙니다. 말이 가장이지 그는 가정에서 가장 힘쓰고 그리고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처자식을 부양하기위해 하루종일 열심히 일합니다. 일하지 않으면 돈이 없어서 먹고 살기 어렵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아이들은 그런 아버지의 노고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밖에서 너무 시달렸기 때문에 가정에서 편히 쉬고 싶은데 정작 가정에서 그는 빵점짜리 아빠고 남편입니다. 아내와 자식과 오붓하게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없었거든요. 자식들은 엄마하고만 이야기하고 아빠에게는 비밀이 많습니다.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집에 있는 아빠를 서먹하게 대하기도 합니다. 그동안 자주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자식들이 일어나기도 전에 일어나서 일하러 갔다가 자식들이 잠이 든 후에 돌아와서 피곤한 몸을 쉬려합니다.

 

어릴 때 그렇게나 아빠를 그리워하던 아이들도 조금만 크면 이제는 더 이상 아빠를 찾지 않습니다. 아빠는 어쩌면 돈주는 현금지급기에 불과할 지도 모릅니다. 현금지급기는 현금을 지급하기 위해 필요한 기계입니다. 그래서 현금이 떨어지면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집니다.

 

이 땅의 남자들은 모두 힘이 듭니다. 젊어서 가장 황금기를 군대에서 보냅니다. 군대는 일반적인 환경의 범위를 넘어서는 특수한 곳입니다. 보통남자들은 다 가기를 싫어합니다. 군대를 다녀오면 이제부터는 무려 십년동안 예비군에 시달립니다. 예비군이 끝나면 40세까지 민방위에 편입됩니다.

 

그리고 민방위가 끝이 나면 남자로서의 화려한 삶도 같이 시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냥 가족에 대한 무한 사랑과 책임감으로 그는 괴롭고도 힘든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한사람의 가장이 있습니다.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비록 이스라엘이란 영광스런 호칭을 얻었지만 그의 삶은 야곱이었습니다. 그가 왜 야곱일 수 밖에 없었느냐면 그는 가장이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고, 재주도 없고, 그렇다고 부모로부터 거대한 유산을 물려받지도 않은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도 가난하게 살기는 싫어서 악착같이 버둥댄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기적인 인간이었습니다. 바깥으로는 자기 가족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가족 내에서는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고 아낀 극도의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는 보통의 가장이기는 하지만 이 땅의 대부분의 가장보다도 오히려 못한 사람입니다.

 

이 땅의 가장들은 적어도 자기보다 가족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그는 야곱입니다. 이제 그가 얍복 강가에서 인생의 대전환기를 맞이합니다.

 

1.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오더라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손에서 목숨을 구하고는 이제 가나안 지경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세일땅 에돔들에 살고 있는 에서에게 사자를 보냅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사죄하고 용서해 달라고 하는 의미였겠지만 직접적으로 그는 자기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요청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내 주께 은혜를 받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만 말합니다. 글쎄요, 이 말 속에 지난날의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비는 의미가 있다고 하는데 저는 조금 다른 생각입니다.
왜냐면 그 앞에 “내게 소와 나귀와 양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라는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지금 여기서도 뭔가 형 에서에게 뇌물을 바칠 터이니 나를 잘 봐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은혜를 베풀면 내가 소와 나귀와 양떼와 노비를 선물로 바치겠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아직도 자신의 성품이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사람의 술수를 더 선호하는 권모술수형 인간입니다. 틈만나면 상대를 속이고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비한 사람입니다.

야곱은 이 재산을 모으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그리고 이 재산을 가지고 오다가 하마터면 외삼촌의 식구들에게 잡혀서 죽을 뻔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소와 나귀와 양떼와 노비를 언급한 것은 나에게도 재물이 있으니 나를 살려주기만 하면 당신에게 뇌물을 바칠 것이라는 것입니다. 재물보다는 목숨이 중요하거든요.

 

이걸 보면 야곱이 완전히 어리석은 인물은 아닌 모양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재물을 너무 사랑하여 심지어 목숨이 경각에 달렸음에도 재물을 욕심내다가 목숨을 잃는 어리석은 일들을 저지르는데 말입니다.
일단 친선의 사자를 보냈는데 그 사자가 돌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사백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여기서의 ‘만나려고’는 적대적인 목적을 가지고 만나려고 오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백명의 군대를 이끌고 오는 것을 보면 에서가 야곱을 아예 진멸하려고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장자에게 주는 축복기도를 빼앗겼지만 에서는 굉장한 사람입니다. 야곱이 그렇게나 아등바등 사람들을 속여가며 때로는 속아가며 재산을 모았지만 에서가 이룬 성취와 비교하면 새발의 핍니다.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이미 에서는 아브라함 때의 세력을 능가했습니다. 그러니까 에서는 호리족속을 격파하고 세일산과 에돔들 일대의 패자가 된 것입니다. 에서의 후손들은 이 지역의 왕이 됩니다.

 

2.야곱의 잔꾀
여하튼 에서는 자기의 군대를 이끌고 야곱을 잡아 죄를 물으려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한가지 꾀를 냅니다.
자기와 동행하는 사람과 자기의 가축들을 두 떼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떼가 공격받으면 다른 한 떼는 도망가도록.
이 사람은 포기도 빠릅니다. 모든 재물을 최대한 가지고 있다가 목숨을 잃는 것보다 절반의 재물을 가지고 목숨을 살리는 쪽을 택합니다. 정말 잔대가리 하나는 끝내주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상당히 합리적인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두 떼’라고 할 때 ‘떼’는 군대 진영을 말합니다. 에서의 공격에 대비해서 그냥 한 떼를 포기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공격에 대비한 방어 진영을 취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는 에서와 싸우려는 준비도 갖춘 것입니다.
쌍둥이 형제들의 20년만의 상봉은 정말 살벌합니다. 에서는 20년 동안 동생에 대한 원한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3.야곱 기도를 시작하다
뿐만 아니라 야곱은 비로소 이 장면에서 기도를 시작합니다. 32장에서 가나안의 지경 안에 들어와서 제일 처음 본 천사의 군대 진을 보고 마하나임이라고 말한 야곱은 이제 하나님이 자기를 살피시고 보호하심을 깨닫고 에서의 위협에서 자기를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비로소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때까지 야곱은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비록 20년 전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지만 그는 이방의 지역에서 하나님을 까맣게 잊었고 오직 자기의 힘과 꾀를 믿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실패하고 때로는 성공도 했지만 하나님께 자기의 모든 것을 맡기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에서의 400명 군대가 자기를 죽이러 오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비로소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는 것입니다.
별 뾰족한 수가 없었기 때문에 비로소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인간적인 방법이 있다면 그걸 믿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보통의 때에 우리는 ‘기도나 하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요 기도는 정말 놀라운 능력을 가집니다. 기도는 모든 것에 우선합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는 먼저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바라야 합니다. 아주 간단하고 쉬운일 같아도 먼저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되자 야곱은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야곱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내 할아버지, 아버지의 하나님이지 나의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런데 야곱의 기도를 잘 보면 좀 웃깁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자기의 하나님으로 전적으로 믿지는 않으면서도 하나님이 20년 전에 하신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약속의 이행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마치 빚쟁이가 빚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여호와여 전에 주께서 나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은혜를 베풀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제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이제는 당신이 저에게 은혜를 베풀 때입니다. 빨리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야곱은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야곱은 지금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여 제가 당신의 조건대로 고향으로 왔으니 이제 당신의 약속을 저에게 이루어 주셔야 할 때입니다’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놓고도 야곱은 안심이 되지 않습니다.
마치 보험을 들 듯이 기도해 놓고는 여전히 인간적인 책략을 실시합니다.

 

4.위기의 야곱
기도가 끝나고 그 다음날 야곱은 이제 자기의 잔꾀를 실천에 옮깁니다. 어차피 에서와는 싸워봐야 승산이 없으므로 피해를 최소화하고 정 안되면 자기라도 살아서 도망갈 궁리를 한 것입니다.

 

먼저 에세 에게 예물을 보냅니다. 인간세상에서 처세의 기본은 뇌물입니다. 날이 밝자 마자 야곱은 손에 잡히는 대로 급히 예물을 마련합니다. 여기의 예물은 조공이란 의미입니다. 단순히 선물이 아니라 당신이 나의 주인입니다라는 의미의 조공인 것입니다.

 

이걸 보면 야곱은 앞서 친선 사자를 보낼 때에는 예물을 준비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냥 뇌물을 바칠 수도 있다는 의미만 전달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로 떼우려고 한 겁니다. 그래서 에서가 자기를 용서하면 그냥 넘어가고 ... 정말 얄팍한 꾀지요.

 

이제 그게 안통하니까 직접적으로 급하게 조공품을 마련합니다. 본문에 나와있다 시피 그 양이 상당합니다. 소와 낙타와 나귀와 염소와 양을 오백팔십마리 추려서 조공품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이 떼를 나누는 방식은 값이 싼 것부터 비싼 순인데 욥기의 베열 순서와 같습니다. 그래서 아마 야곱의 시대와 욥의 시대가 비슷할 거라는 추측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이 가축떼를 세 떼로 나눕니다. 그래서 먼저의 예물을 받으면 계속해서 예물을 바치고 그렇지 않고 첫 번째 떼를 도륙하면 그 다음 떼는 도망을 가도록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떼를 각각 상거가 뜨게 배치한 것입니다. 게다가 종들에게는 에서가 할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준비시킵니다.

 

야곱이 얼마나 지금 머리를 쥐어 짜서 계책을 꾸미는지가 훤히 보입니다. 이 사람은 인생을 정말 피곤하게 삽니다. 일평생이 속고 속이는 사기꾼의 삶이었기 때문에 사람을 그냥 순수하게 대하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뭐가 더 이익인지 저울질하고 의심하고 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물론 그렇게 살아서 부자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정말 힘들게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예물로 에서의 마음을 푼 연후에야 비로소 야곱은 에서를 만날 생각입니다. 에서가 끝까지 자기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자기는 도망갈 생각으로 제일 마지막에 남습니다. 여기는 얍복 나누터입니다. 강을 건너면 에서를 만나야 합니다. 얍복강이 별로 큰 강은 아니지만 그래도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몇떼로 나뉘어진 가축과 사람들은 이제 야곱을 두고 강을 건넜습니다. 얍복강은 물살이 메우 셉니다. 그래서 그냥 강을 건너기는 어렵습니다. 배도 없고 해서 야곱은 나루를 찾은 겁니다. 나루는 아마 물살이 약하고 수심이 얕아서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지역일 것입니다.

 

야곱은 밤중에 일어나서 그 소유와 처자를 강을 건너게 합니다. 그리고 강 이편에는 그만 홀로 남았습니다.
야곱은 정말 비겁한 사람입니다. 자기의 가족들이 다 죽어도 자기는 살려고 혼자 맨 뒤에 남는 것입니다. 보통 이 땅의 가장들 같으면 자기가 먼저 건너고 가족들은 뒤에 남겨서 보호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해서 목숨을 건져라’ 하고 말합니다. 이게 보통의 가장인데 이 사람은 가족보다 자기의 몸이 더 소중합니다. 그래서 맨 뒤에 남았습니다. 너희들 다 죽어도 나는 살아야겠다. 아직 그는 강을 건너지 않습니다.

 

야곱처럼 자기밖에 모르고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것을 빼앗았으며 외삼촌을 속이고 외갓집의 재산을 편취했으며 끝내는 자기의 목숨을 살리기위해 가족 마저도 포기하려는 사람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유명한 족장이 되었는데 우리는 최소한 야곱보다는 더 나은 자들이므로 우리 아버지께서 야곱보다 더 큰 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물론 얍복강을 건너기는 건너서 에서의 앞에 나가야 하지만 아직 야곱은 겁이 납니다.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없습니다. 이제 날이 새면 강을 건너서 에서를 만날텐데 그는 여전히 두렵습니다. 그의 시름은 깊어 갑니다.
절대적인 위기의 순간, 정체절명의 순간에 그는 심히 고독합니다. 누구에게도 자기의 고민을 내어 놓을 수 없습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을 혼자서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5.씨름하는 야곱
그런데 24절에서 갑자기 야곱은 어떤 사람하고 날이 새도록 씨름을 합니다.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씨름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전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냥 룰이 정해지고 삽바를 잡아서 하는 젊잖은 씨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씨름은 ‘먼지에 쌓이다, 붙잡다’란 말입니다. 땅에서 먼지가 일어날 정도로 서로 붙잡고 격렬하게 싸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날이 새도록 씨름했지만 그 사람이 야곱을 이길 수 없음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쳤답니다.
정말요? 야곱이 그렇게 싸움을 잘했을까요? 사람이 하나님의 천사와 싸워서 이기는 것이 가능합니까?
여기서 ‘이길 수 없음을 보고’란 말은 야곱이 천사보다 더 힘이 쎄고 기술이 뛰어나서 못이긴다는 말이 아니라 야곱이 자기를 붙잡고 놓아 주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즉 야곱이 이 싸움을 포기하도록 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야곱은 무엇 때문인지 이 씨름을 필사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휘둘리고 맞아도 절대로 천사를 놓지 않습니다.
날이 새고 그래서 천사가 이제는 야곱을 두고 하늘로 돌아가려고 하는데도 야곱이 놓아주지 않으니까 비로소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의 환도뼈를 쳐 버린 것입니다.
정확하게는 엉덩이 아래쪽의 좌골을 말한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의 환도뼈를 ‘친’ 것이 아닙니다. 원문으로는 야곱의 환도뼈를 ‘만졌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냥 슬쩍 그 부분의 뼈를 만진 것에 불과한데도 야곱은 그 후 일생을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날이 새도록  씨름한 것은 천사에게는 가소로운 행동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힘도 없고 재주도 없는 것이 자기 딴에는 죽기 살기로 잡고 매달리니 어이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최선을 다한다고 난리를 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정말로 하품이 나올 정도인 것이지요. 아마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의 정성과 노력이 가상해서 이때까지 야곱과 놀아 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6.야곱의 뼈가 부러지다
여하튼 사자가 환도뼈를 만지자 야곱의 환도뼈가 위골이 되었지만 야곱은 계속해서 천사를 붙잡고 놓아 주지 않습니다. 독종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의 환도뼈를 부러뜨리셨을까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육신을 의지하는 야곱에게 인간의 육신이 얼마나 무능한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허리를 치심으로 더 이상 육신의 힘을 의지해서 하나님과 싸울려고 하는 야곱을 겸손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과 의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너의 잔머리와 노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환도뼈가 부러진 야곱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말합니다.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원문의 의미는 강한 명령형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결코 야곱에게 하나님이 사자가 부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놓아라, 이제 너하고 더 이상 놀아줄 시간이 없다.’
아마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려고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하면서 결코 천사를 놓아 주지 않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매달리는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요, 기도는 이렇게 결사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진실되고 절박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이 일이 해결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저에게 축복해 주십시오. 하나님만이 저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야곱이가 야비하고 잔꾀가 많고 사기꾼이기는 하지만 이 사람은 정말 집요한 구석이 있습니다. 이제 그 집요함이 하나님에 대한 기도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지긋지긋하게 달라 붙는 야곱을 떼어내기 위해서라도 야곱에게 축복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들어 주시면 좋겠고요 안들어 주셔도 뭐 어쩔 수 없지요”
그래놓고 ‘그러면 그렇지 기도한다고 변하는게 있겠냐’ 이렇게 불평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저에게 축복하시기 전에는 결코 이 손을 놓지 않겠습니다’하면서 매달리십시오.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7.네 이름이 무엇이냐
자, 이렇게 까지 되었으니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을 축복합니다. 그런데 그가 제일 먼저 한 말은 ‘그래 알았다. 내가 너에게 축복하마’가 아닙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오늘 말씀의 제목이지요.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제가 지금까지 야곱의 조잡한 인품에 관해서 설명한 이유도 바로 이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한 말은 바로 “네 이름이 무엇이냐”입니다.
야곱은 자기의 이름을 말합니다. “야곱이니이다”
야곱이라는 이름을 듣고 하나님의 사자는 “다시는 야곱이라고 부르지 말고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우리는 누구의 이름을 듣고 이름 참 좋네, 아니면 이름이 멋지다. 아니면 이름이 마치 여자같다는 등의 여러 가지 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을 듣고는 그 이름을 다시는 부르지 말고 다른 이름으로 부르라고 하면서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이라는 이름을 듣고는 두말도 하지 않고 야곱이라는 이름을 다시는 부르지 말라고 합니다.

 

야곱이란 이름의 뜻이 무엇일까요?
야곱은 ‘발뒤꿈치를 잡은 자’란 뜻입니다. 야곱이 태어날 때에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야곱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라는 이름에는 ‘속이는 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야곱의 아버지 이삭은 야곱이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났기 때문에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난 자, 야곱이라고 불렀지만 실제로 야곱은 일생을 속이는 자, 즉 사기꾼으로 살았습니다.

 

형도 아버지도 외삼촌도 아내들도 자식들도 속이는 자로 지금껏 살아 온 것입니다.
야곱은 자식과 아내를 먼저 강을 건너 보내면서 먼저 가있어라 내가 곧 따라갈게라고 속이고는 자신은 여차하면 도망갈려고 강 이편에서 미적거린 자입니다. 속이는 자 야곱.
하나님의 사자는 바로 그 사실을 깨닫게 해 준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아무개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앞으로는 이렇게 살아라. 하나님과 한편이 되어서 세상과 싸웠다는 뜻의 이스라엘이라고 불러라.”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이름은 단순히 그 사람을 부르는 호칭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와 성격, 그리고 속성까지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전 인격을 나타내는 귀중한 이름표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속이는 자라고 한다면 얼마나 한심스러운 일입니까?
야곱은 일생을 통하여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진지하게 성찰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죄를 저질러도, 남에게 해를 끼쳐도 자기만 잘살면 되지 아무런 죄의식이 없이 삽니다. 그러다가도 자기에게 해가 올 것 같으면 처자도 쉽게 버릴 수 있는 정말로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자가 물었을 때 그리고 그가 새로운 이름을 주었을 때 비로소 야곱은 자기가 사기꾼으로 일생을 살았다는 것을 자각합니다. 그래 나의 삶은 속이는 삶의 연속이었어.

 

솔직히 태어날 때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기 때문에 야곱이 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낯선 이에게 제 이름은 ‘속이는 자’입니다. 저는 ‘사기꾼’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우리를 냉정하게 뒤돌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겠다고 정신없이 하나님께 매달리기는 하지만 실제로 내가 하나님의 복을 받을 만한 사람인지, 내가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는 사람인지를 돌아 보아야 합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오늘날 나에게 물으시는 내 주의 준엄한 물음입니다.

 

8.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줍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싸운자.
물론 하나님을 대적하여 싸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서 싸웠다는 말입니다. 누구하고요? 세상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세상의 법을 지키며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려는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하나님과 한편이 되어 싸운다는 뜻의 이스라엘은 오늘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이름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이 세상에서 형통하고 복을 누리려면 속이거나 남의 발뒤꿈치를 잡거나 사기를 치거나 잔꾀를 부려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이 되어 하나님과 더불어 싸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인간적인 꾀로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이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아부도 뇌물도 통하지 않고 나의 목숨과 기업이 경각에 달리는 순간이 왔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일사각오의 자세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능하고 죄인인 것을 자복하고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나는 아버지에게 속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속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할아버지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의 하나님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내가 이 땅에서 잘먹고 잘사는데 필요한 신이지 결코 내가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신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명령 때문에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그런 하나님 여호와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야곱은 달라 졌습니다. 우리도 달라져야 합니다.

 

나만을 위하는 극도의 이기주의자에 잔머리를 굴려서 이 세상에서 연명하려는 사기꾼에 나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본주의자인 내가 하나님 앞에 무조건적으로 항복하고 그의 인도와 보호 속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세상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야곱으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름은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주님은 제발 저에게 축복해 주세요라고 하는 나에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어때요, 내 이름은 무엇입니까? 야곱입니까? 아니면 이스라엘 입니까?

 

주님은 그 옛날 얍복 강가에서 날이 새도록 씨름한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여전히 묻고 계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여러분, 우리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떻게 일생을 살아왔습니까? 그래서 내 이름에 무엇이 나타납니까?
속이고 남의 발을 붙잡고 사기꾼처럼 살았다는 평을 들을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한편이 돼서 세상과 싸운 사람이라는 평을 받을 것입니까?

 

오늘 저 역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과연 내 이름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하나님과 더불어 세상을 향해 싸우는 이스라엘의 삶을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7월 27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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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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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명 설교문이라서 올릴 수 있는 시기를 한참 고민하다가, 마침내 오늘 새벽 기도 다녀온 후, 올리게 되었습니다. 야곱이나 삼손이나, 이해할 수 없는 인물들이 성경책에 있습니다. 혹자는 그래서 성경책이야말로 "진짜" 사람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나관중이 각색한 삼국지도, 워낙 다양한 인간군상이 등장하잖아요. 그와 마찬가지로 성경책에 나와 있는 다양한 인물들의 사실감은 가히 압도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테지요.

 

저는 지수 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리뷰어 시북 이라는 제법 영문스럽고, 일문스러운 이름을 좋아했습니다. 그래도 이제부터는 한글이름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혜 지 智 지킬 수 守 라는 마음에 쏙 드는 이름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왜 많은 사람들이 쓰는 빼어날 수 秀 가 아닌지 조금 불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께서는 저보고, 스스로의 행복이라도 잘 지켜내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는 의미로 그런 겸허한 이름을 붙여준 것이라 생각합니다.

 

평생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는, 역시 한 순간이라도 책을 놓지 말아야 겠으며, 무엇인가를 잘 지켜내려면, 소중한 것들을 잘 간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메모도 꼼꼼하게 하려고 노력할 때가 있습니다. 정말로 이름은 중요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다정해 보이는 제 이름이 참으로 마음에 듭니다. 지수. 여자 이름 같기도 하고 말이에요. 하하하.

 

저는 찬송가 구 364장인걸로 기억하는데, 내 주를 가까이 하게함은. 이 곡을 어릴 때부터 좋아했습니다. 야곱이 잠깨어 일어난 후, 돌단을 쌓았던 걸로도 기억합니다. 검색이나 스마트폰에 의지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 찬송가처럼, 평생을 겸손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천국처럼 아름다운 하루 하루라고 생각합니다.

 

1999년 무렵이던가요, 학생회 담당이던 홍종일 당시 전도사님을 만났고, 15년의 인연을 넘어서, 저도 벌써 30대 중반이 넘어갑니다. 목사님은 어느덧 미국까지 다녀오시고 계속 목회를 하시고 계십니다. 그런 한 번의 인연이, 이토록 길게 이어진 것만으로도 감히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렇게 우리네 일상에 놀라운 일들은 가득한데, 저는 무신경하게 살아갈까봐 그것이 가장 두렵습니다. 하나님, 제발 도와주세요. 한 번만 살려주세요. 라고 절박하게 기도하는 그 모습만큼은 분명히 잘 간직하고 싶습니다. 인간의 최선을 다한 이후,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만큼, 아름다운 모습을 저는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히 그런 신앙인이 될 수 있기를 아침에 기도해봤습니다. / 리뷰어 허지수 2014. 09. 22. 아침 6시 31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