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8월 3일 주일 예배
네발로 일어서라 (에스겔2:1-)
오늘 우리는 에스겔이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는 장면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당시 에스겔은 멸망한 나라 유다의 포로민으로서 이스라엘이 아니라 바벨론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갈대아 그발강가에 유다포로들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유다로부터 포로들이 처음 들어온 시기부터 무려 12년이 지난 어느날 에스겔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습니다.
계속해서 유다가 전쟁에 패해서 포로들이 바벨론으로 잡혀 옵니다. 제1차 포로, 제 2차 포로 이런 식으로.
지금도 전쟁포로들의 상황은 끔찍합니다만 그 당시에 포로들의 삶은 정말로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목불인견, 눈뜨고는 못본다고 할 정도인데요 생매장 당하지 않고 살아서 포로로 잡혀간다는 것 자체가 큰 복인 그런 시절에 에스겔은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습니다.
그것도 남아 있는 자들의 선지자가 아니라 포로민들의 선지자로 바벨론에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1.유다가 멸망하기 직전에 유다백성들의 태도는 어떠했을까요?
이들은 패역한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패역한 백성이요 배신하는 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패역한 세대를 향하여 회개를 촉구하는 진실된 선지자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능멸하며 때리고 지하 감옥에 가두기까지 했습니다.
멸망의 심판을 경고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대적하고 조롱하며 이에 호응해서 거짓선지자들은 ‘하나님이 너에게만 말씀하셨느냐’며 자기에게 주어진 말씀은 축복의 말씀이고 너희가 평안을 누리며 멸망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거짓을 주절거립니다.
자기들의 잘못은 생각지도 않고 무조건 적으로 축복만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유다의 백성들은 패역한 자기들의 잘못은 아랑곳하지 않고 거짓으로 평화와 축복을 약속하는 선지자들을 좋아하며 추종했습니다. 이들의 죄악이 온 땅에 그득하여 곧 멸망의 심판이 임박함에도 거짓 선지자들은 사람들이 좋아하기 때문에 근거 없는 축복을 남발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위로를 얻고 있었던 것입니다.
백성들은 너무나 패역해서 이들의 눈으로는 누가 참 선지자며 어떤 것이 참으로 주께서 주신 예언인지 분별할 수 조차 없어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영성이 흐려지고 남은 것은 추악한 본능뿐입니다. 뺏들고 속이고 파괴하는.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판단할 수 조차 없어져 버렸습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할 의지도 능력도 없어져서 본능만 남아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한다는 거짓 메세지는 참, 그게 이뤄지겠습니까?
눈물로 회개를 촉구하고 심판을 선포한 예레미야 선지자는 거짓선지자에게 능욕당하고 지하 감옥의 뻘 구덩이에 갇혀서 온갖 곤욕을 다 당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참 선지자를 배격하고 거짓선지자를 추종하는 무리들의 한심한 작태 때문에 우리 하나님은 ‘너희들 중에 선지자가 없게 될 날이 이를 것’이라고 예언하시는 지경에 까지 다다랐습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자기를 뉘우치고 회개할 줄 모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경고의 예언이 거부되자 하나님은 선지자 보내기를 거부하신 겁니다.
예언의 소중함도 선지자의 귀중함도 모르는 이에게 하나님은 재차 말씀을 전하고 선지자를 보낸 것이 아니라 나라의 멸망이라는 가시채찍으로 징치하신 것입니다.
2.12년의 영적 암흑기
유다가 바벨론에 패해서 포로들이 끌려가기 시작한지 12년 동안 하나님은 바벨론에 어떤 선지자도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보통은 포로로 끌려온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이들을 위로하고 인도할 선지자를 보내실 만 한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장 어려울 때, 가장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할 때 하나님은 잠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은 대부분 유다에서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유다를 침공한 바벨론은 유다의 왕족, 귀족, 부유한 자, 재주 있는자들을 잡아 가고 가난한 자, 재주 없는자, 평민들과 노비들은 남겨 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자들은 이전에 유다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를 경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대적했던 자들입니다. 앞장서서 악을 저지르며 하나님을 대적했던 자들입니다. 이들은 지금 자신이 뿌린 패역의 씨앗을 그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이를 자업자득이라고 합니까?
어려울 때일수록 하나님의 영적인 인도와 보호가 필요합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때에 우리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당연한 말입니다만 부유할 때, 잘나갈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준행하는 자라면 멸망 당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의 행태에 분노하셨고 12년의 영적인 암흑기를 주신 것입니다. 12년이 지나고 하나님은 백성들을 용서하셨고 에스겔 선지자를 세우셨습니다. 에스겔은 이제 포로민들의 선지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노를 푸셨다고 해서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에게로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처지가 급전직하 귀족에서 포로민 노예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약해서 바벨론의 신에게 패했으니까 이제부터는 바벨론의 신을 섬겨야겠다고 마음먹었는지도 모릅니다.
여전히 이들에게 하나님의 선지자는 찬밥이지만 우리 하나님은 이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시고 이들을 영적으로 계도하기로 하신 겁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 하나님이 에스겔을 포로민들의 선지자로 세우신 이유가 거창하지는 않습니다. 2:5절 말씀을 보면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선지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에스겔 선지자를 세우신 것이랍니다. 이들을 잘 지도해서 어떻게 나라를 회복하고 뭐 해보겠다는 뜻이 아니라 멸망받고 이방에 포로로 잡혀온 이 열악한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하는 정도라는 겁니다.
3.내가 네게 말하리라
1장에서 에스겔은 포로로 잡혀있던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이 주신 환상을 봅니다. 그런데 이 환상이 너무나 굉장하고 너무나 찬란하므로 엎드려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내가 네게 말하리라’는 것입니다.
조금 의역한다면 ‘내가 너에게만 말하겠다’는 뜻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참 선지자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 그런 패역한 세대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만 내가 말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의 내용은 에스겔 개인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에게 주시는 구원의 말씀인 것입니다. 너희들이 얼마나 형편없는 존재인지, 그러나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너희에게 내가 소망을 준다는 그런 말씀들이 앞으로 이어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내가 이 말을 너에게만 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에스겔은 어떤 사람입니까?
1:3에 있습니다. ‘부시의 아들 제사장 에스겔’ 그리고 객관적으로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처지입니다. 다른 포로들하고 다를게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스겔을 인자라고 불렀습니다.
인자, 사람의 아들.
우리가 많이 듣던 용어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일러 인자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여기서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이기는 하지만 원문상으로는 ‘뺀 아담’ 즉 ‘아담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보다 정확히는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왜 이렇게 불렀을 까요?
그것은 에스겔 역시 위엄스러운 창조주 하나님과 비교할 때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흙으로 만든 질그릇 같은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 흙을 인간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이니까 하나님의 영이 빠져나가면 흙으로 돌아갈 나약한 존재임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포로민들 가운데서 특별히 빼어서 주의 선지자로 세우신 에스겔도 근본은 별볼일 없는 포로민이며 죽어서 흙으로 돌아갈 평범한 인생이라는 거지요.
네가 선지자요 제사장이기는 하지만
내가 너하고만 이 거대한 비밀을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결국 너도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에 불과하고 그 흙을 생각하고 말하고 꿈꾸게 하는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나의 영이라고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한번 살펴보십시다. 내가 뭐요 뭐요 하면서 뽐내어 봐도 하나님의 영광에 비교하면 단순한 흙덩어리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온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빠져 나간다면 다시 흙으로 돌아갈 존재가 바로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우리되게 하는 하나님의 영을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 할 것임에도 우리는 본말이 전도되어 영이 아니라 보이는 흙덩이를 더 사랑하며 아낍니다.
4.그 영이 내게 임하사
에스겔이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겠지요. 그런데 어느 때 하나님의 영이 임하셨나요?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에’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말씀하실 때에 임하신 것입니다.
1절에 ‘네 발로 일어서라’고 하셨기 때문에 당연히 일어서는 것은 ‘내’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누구도 아닙니다. 그래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일어서야 합니다.
‘나는 계속 여호와 앞에 엎드려 있을테니 너희가 일어서라’가 아닙니다. ‘나에게 소명이 내렸는데 나는 지금 일어서기가 곤란하니 네가 내 대신 일어서라’가 안통합니다.
게다가
나의 발로 일어서는 것입니다. 다른 누구도 나를 일으켜 세워 주지는 않습니다. 일어서라고 하나님이 지팡이를 던져 주시지도 않았습니다. 보행기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네 발로 일어서라. 다른 사람의 발로 일어서는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 다른이의 도움으로 일어서는 것도 아닙니다. 내 발로 일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바로 이 두발로 일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어서라고 하실 때에는 나는 일어설 능력을 함께 얻습니다. 지난주에도 제가 말씀드렸듯이 말씀 따로 능력 따로가 아닙니다. 내가 일어서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나는 혼자서 일어설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면 나를 창조하신 주님은 이미 내 안에 나의 생각이 하고자 하는 바를 행할 능력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뭔가를 요구하신다면 결코 하나님 저는 그러한 능력이 없습니다며 주저하거나 도망갈 필요가 없습니다. 내 안에 이미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 것입니다.
여기 보세요.
2절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에 그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기로” 그가 내게 어떤 말씀을 하셨냐면 바로 앞 절 1절에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
사실 우리는 일어서고 싶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일어설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내키지 않아서 일어서지 못하던지, 능력이 없어서 일어서지 못하던지 여하튼 일어서지 못할 때가 있지만 여호와의 영이 임하시면 일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도 저절로 몸이 붕 떠서 일으켜 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의 영이 나로 하여금 일어서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발로 서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악을 봅니다. 무절서와 아귀다툼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아수라장에서 떨어져서 혼자만 유유자적하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굳이 내손에 더러운 것을 묻힐 필요가 무에 있느냐. 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내가 아니라 누군가가 나서서 그 일을 하겠지!
여러분,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역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도 바로 나를 통해서 역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쓰임을 받기 위해 내가 부름받은 것일 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손에 더러운 것을 묻히기 싫어서 외면할 때 하나님의 세우신 세상은 점점 더 악의 구렁텅이를 향해서 달려가고 결국은 세상은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에 이르며 폐기처분해야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비극적인 결말에 나의 책임이 큽니다. 왜냐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세상의 시시비비를 가리며 저들을 하나님의 법대로 이끌어야 될 책무가 있는 거룩한 무리 ,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사 나로 일어서게 하시지만
내 발로 일서도록 하시지만
아무 때나 일어서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 일어서야 합니까?
언제 일어섭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말씀하실 때에 일어서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막 일어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일어서고 싶다고 해서 아무 때나 일어서는 것은 무질서이지요. 아버지께서 싫어하시는.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께서 일어서라고 말씀하실 때에 일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시고 나를 내발로 일어설 수 있게 됩니다.
5.인자야 내가 너를
마침내 하나님은 3절에서 에스겔을 선지자로 세우십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니”
그런데요 하나님의 말씀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자에게 선지자로 보내시는 것이아닙니다. 예수가 뭔지 모르는 이들에게 보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잘 압니다. 예수님도 잘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아니 너무 많이 들어서 그 말씀을 청종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다 그렇지 뭐! 그래도 말씀대로만 어떻게 사냐, 세상이 이미 많이 달라졌어! 나혼자만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대로 따르면 나는 도저히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가 없어’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라고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혼자서 해서 될지 안될 지는 나중에 생각하고 교회가, 우리가 함께 한다면 반드시 됩니다.
저 거대한 중국도 겨우 열명의 꿈쟁이들이 바꾼 것입니다. 문맹자가 흘러 넘치고 돈과 총칼이 말하는 그 세상에서 돈도 무력도 없는 열명의 꿈쟁이들의 꿈이 대륙을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그 꿈이 비록 허황된 것일지라도 열명의 꿈쟁이가 믿고 합심하여 나가자 대륙을 바꾸었는데 하나님의 진실된 꿈을 꾸는 우리가 함께 한다면 그 꿈을 반드시 이룰 것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한 사람이 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함께 꿈을 꾸기를 원하셔서 교회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꿈을 세상을 향해서 펼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힘도 주실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너를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나는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힘없는 나를 일으켜 세우시고 나의 발로 엎드린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 패역한 세대, 배신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펼치기를 원하십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이야기 하고
잘한 것은 잘했다고 칭찬하며
더욱 힘을 내도록 서로 권면하고
약한 이들은 서로 도와서 좌절한 자리에서 일어서게 하고
더불어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확장하도록 하는 큰 일을 감당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만으로도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이제 자기의 뜻을 이 땅에 펴기위해
나약한 인간 나를 이용하려고 하십니다.
우리는 먼저 그의 발아래 엎드려 그 휘황찬란한 영광에 눈부셔 하며 두려움과 존경의 경외감으로 숨죽이고 있습니다.
이제 주의 영이 임하셔서 나로 하여금 일어서게 하십니다. 내 이 두발로 일어서게 하십니다.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너로 패역한 백성, 배신하는 자들에게 보내는 선지자를 삼으리라.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8월 3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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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아마 당시에 처음으로 홍목사님께서 에스겔 본문으로 설교를 한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복음서나 창세기 이야기를 좋아하시던 것 같았는데, 에스겔이 본문이라 저도 꽤 놀랐었고요.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일어서서 주의 뜻을 행하라는 것이겠지요. 누군가가 해주겠지 라는 나약함을 버리라는 의미도 담겨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목사님은 옛날부터 기독혁명가, 역사의중심,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 같은 이야기를 자주 해주셨습니다. 아, 공통점이 있네요. 그것은 세속에 물들지 말고,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바꿔보자는 뜻입니다. 결국 우리 한 사람이 바뀌고, 좀 더 멋진 사람이 되어간다면, 거기서부터가 좋은 세상의 출발점이 아닐까? 저는 그런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모두가 좀 더 힘내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독교인들, 힘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