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보라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재개정판)/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4. 8. 17. 10:35

보라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재개정판)

 

1.누구나 꿈을 꾸지는 않는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또 살다가 갔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이들이 다 꿈을 꾸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누가 꿈을 꿉니까?
현실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이 꿈을 꿉니다.

 

그렇다고 항상 불평불만에 절어 있는 사람이 꿈을 꾼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의 오늘에서 뭔가 부족함을 느끼고 조금 더 노력하면 더 좋은 세상이 올 것을 믿는 이들이 꿈을 꾸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삶에 어떠한 부족함도 모르는 이는 결코 꿈을 꾸지 않습니다. 적당히 현실에 안주한 사람에게 꿈은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그러한 사람들도 꿈을 꾸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는 꿈이라고 하기 보다는 망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의 삶에 충실한 사람이 꿈을 꿉니다. 꿈을 위해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자기의 꿈을 이루기를 바라는 이들을 향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헛꿈 꾸고 있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꿈을 주시는 이가 꿈을 꿉니다. 꿈을 꾸는 것이 매우 쉬운 것 같지만 실제로 꿈을 꾸는 이들은 매우 적을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리더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많다면 솔직히 경쟁도 치열해지고 오히려 권모술수가 난무하게 되어서 더 살기가 어려워 질 것입니다. 모두가 우두머리가 되려하고 다스리려고만 하면 얼마나 경쟁이 치열해 지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의 택한 이들에게 꿈을 주시고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그 몸에 같이 넣어서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꿈을 꾼다면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을 경우가 많습니다.

 

2.꿈꾼이가 모두 꿈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꿈을 꾸는 이가 그 꿈을 모두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보통의 경우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왜냐면 꿈을 이루기위한 과정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월드컵때만 되면 내거는 캐치프레이즈가 있습니다.
‘꿈은 이루어 진다’

 

글쎄요, 우리는 잘 압니다. 그 말이 정말로 꿈이 이루어 지기 때문에 한 말이 아니라 꿈을 이루면 좋겠다는 바램이라고 하는 것을. 그리고 꿈은 이루기가 어렵다는 것을. 현실과 그만큼이나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걸 꿈이라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꿈을 이루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꿈을 이룹니까?
노력하는자?
운이 따르는자?
돈과 빽이 있고 스펙이 좋은자?

 

천만에요, 꿈을 이루는 자는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자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건 안됩니다.
운이 좋다는 말은 그냥 어쩌다가 잘될 수도 있다는 말인데 글쎄요, 그건 우리의 손에서 벗어난 말 같습니다.
그러면 누가 꿈을 이룹니까? 하나님의 섭리의 선상에 서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꿈을 이룰 수 없습니다.

 

나를 세상의 풍습으로 더렵히지 않겠다고 하는 요셉의 각오는 요셉을 더 높은 자리로 끌어 올리는 계기가 됩니다. 현실의 눈으로 요셉이 간통의 유혹을 이겨내고 모함을 입어 지하감옥으로 내려간 것으로 보이지만 요셉은 사실 실습위주의 고등학교에서 전공중심의 대학으로 진학한 것입니다.

 

여주인이 줄 수 있는 부귀와 쾌락은 요셉과 같은 노예들에게는 감히 꿈 꿀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만 합니다.
세상의 윤리니 도덕이니
주인에 대한 충성이니 의리니가 밥먹여 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위해서 그 유혹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모든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금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몸은 비록 노예이나 마음만은 자유민이기에 비굴한 세상의 쾌락과 부귀에 자신의 양심을 팔지 않은 것입니다.

 

권세가인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총무가 된 것은 그로 하여금 사람을 다스리고 정치적인 감각을 익히게 한 것입니다. 보디발은 왕의 시위대장으로 단순한 가정이 아닙니다. 거대한 하나의 집단이며 보디발의 집에 내왕하는 자들은 적어도 왕국의 실세들입니다. 이런 집에는 노예만해도 수천명이며 그 재산은 끝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히브리 부족이 아니라 보디발의 집에서 더 큰 규모의 경제를 움직이는 경영수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랫사람의 고통을 알기위해 그는 가장 밑바닥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높아져서 마침내 보디발의 집에서 가장 높은 가정 총무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요셉은 장차 한 나라를 경영할 수업을 쌓은 것입니다.

 

요셉을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보세요, 우연인 것 같지만 그가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간 것은 그가 왕궁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입니다.

 

히브리인 노예가 시위대장의 집에 노예로 팔려가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보통의 경우에 요셉은 농부나 광산에서 돌을 깨거나 아니면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이런 식의 육체적인 노동을 하는 곳으로 팔려갈 확률이 더 높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디발의 집으로 팔려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안배였습니다.
미디안과 이스마엘 상인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팔고 사고 하면서 결국 요셉을 보디발의 집으로 안전하게 배송한 것입니다.

 

간통을 저지른 파렴치 범을 왕국의 국사범을 가두는 옥에 가두는 법은 없습니다. 와아궁시위대뜰에 있는 옥은 일반 범죄자가 아니라 왕국에 반역죄를 저지른 국사범을 가두는 감옥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여기에 들어간 것은 그 감옥으로 오는 바로의 술맡은 관원장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3.꿈을 이루기위해서는 연단이 따릅니다.

 

요셉이 처음부터 가정 총무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처음 겨우 17세의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 노예였습니다. 애굽말도 할 줄 모르고 셈족의 언어, 아람어만 할 줄 아는 풋내기였습니다. 허드렛일을 할 때는 주변의 노예들이 모두 햄족의 언어를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높은 자리로 올라간 것은 그가 셈족어를 할 줄 알아서일 수도 있습니다.

 

애굽의 원주민들은 햄족이지만 애굽의 지배층들과 귀족들은 모두 셈족입니다. 즉 히브리인들과 같은 말을 사용하는 자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왜냐면 애굽 토착민들이 셈족의 정복자들에게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노예 중에서 지배층의 언어인 셈족어를 할 수 있는 자들이 얼마나 있었을 까요?

 

그래서 가장 밑바닥의 허드렛일부터 시작해서 마침내 보디발의 집에서 주인내외를 제외하고 가장 높은 가정 총무가 된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이러한 원인이 하나님의 역사와 성실에 있다고 말합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정 총무까지의 삶이 요셉에게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과정이었다면
왕궁 시위대 뜰의 지하감옥은 그에게 세상과 격리되어 왕국의 대신들로부터 직접 국가 경영의 비법을 배우는 대학과정이었습니다. 그는 평범한 경제적인 지식부터 정치학과 농업 게다가 토목같은 국가경영을 위한 전문 수업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낮아 질수록 실제로 그는 더 높아진 것입니다. 지하 감옥으로 들어갔지만 그는 사실은 왕궁의 대신과 만나는 코스로 접어든 것입니다.
조금 다른 말로 최고경영자 과정?

 

4.때가 차기 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연단은 사실 힘이 듭니다. 게다가 일정한 기간을 지내야 하기 때문에 연단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득합니다. 어쩌면 차라리 그 놈의 연단을 받지 않고 꿈을 이루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연단도 때가 있습니다. 출세도 때가 있듯이 모든 과정에는 하나님의 정해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차기까지 우리는 견디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내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무려 13년간을 연단받으며 바로의 앞에 설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는 무려 13년간을 애굽이라는 거대한 국가를 경영하고 히브리 민족을 구원할 큰 일을 하기위한때를 준비한 것입니다.

 

말이 좋아 13년이지 요셉에게는 그 13년이 황금기입니다. 17세에서 30세는 인생의 황금기입니다. 그 황금기를 하나님의 대의를 위해서 바쳤기 때문에 그의 나중이 더 영화로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8월 17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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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이 글은 9월 30일, 오전 11시 경에 쓰는 글입니다. 날짜를 맞추느라 설교는 8월 17일 등록 및 갱신으로 업데이트 했습니다.


정직하게 덧붙이면, 근래에는 홍종일 목사님을 자주 만나뵙지 못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설교를 올려달라고 대여섯개의 원고를 찾아보고 보내주셨습니다. 저는 가장 익숙한 제목인 맨 아래의 설교를, 가장 먼저 올리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번 읽어본 원고임에도, 자꾸만 마음 속에서 눈물이 차오릅니다.

 

그것은 주께서는 사랑하는 이를 흔드신다는 강한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흔든다는 말은 결코 괴롭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께서는 그가 사랑하는 이를 더 크고, 더 아름답게 만들어 가기 위해서, 연단하는 과정을 거치게 하십니다.

 

요셉은 13년이라는 시간을 인내했고, 성실히 보냈습니다. 저는 성실이라는 한자어를 공부할 때, 성실의 의미는 하루도 거르지 않음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13년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인생을 노력하면서 보내왔습니다. 그런 인생이, 훗날 국가를 이끄는 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사람들은 청년 시기의 요셉부터 그를 지켜보아 왔을테지요. 그가 13년동안 무슨 모습으로 살아가는지를 바라봤을테지요.

 

성경은 결코 거짓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살아가는 인생은, 그 길이 열리게 되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예를 들어 저의 경우 다리를 가볍게 절고, 가난했기에 때때로 속상하고 불편할 때도 있었다지만, 그 대신에 사람들과 소통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낼 수 있어 무엇보다 행복합니다. 다시 말해, 주께서는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십니다.

 

어제는 큰이모네가 편찮다고 해서, 9월 29일 월요일날, 동아대학교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센터관 8층 일반병동 로비에 지금 이 설교와 거의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이런 기이한 일들을 기록하고 나누고 싶었습니다.

 

"사람이 상상할 수 있다면, 그는 그 상상을 이뤄낼 수 있는 힘을 이미 가지고 있다."

"사람이 꿈꿔볼 수 있다면, 그는 그 꿈을 현실로 만들어 낼 힘을 가지고 있다."

 

 반드시 나으라는 의미로 적어놓았겠지만, 그 강렬한 문구는 오늘 이 설교를 생각나게 해 줍니다. 당신의 마음 속의 바람들을 기억하세요. 저는 10대 시절 세상을 바꾸고 싶었고, 20대 시절 혁명가 체 게바라에 열광하고, 30대 시절에는 나밖에 모르는 망나니처럼 살았지만, 그런 인생일지라도 여전히 행복하고 멋진 사람들이 주변에 있어서 즐겁고 행복합니다. 우리가 오늘을 계속해서 성실하고 올바르게 살아가고, 주님께서 살아계시다는 것을 명심하고 살아간다면, 그의 삶은 분명 특별해 질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것이 요즘 제가 느끼고 있는 작은 믿음입니다. / 2014. 09. 30. 리뷰어 허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