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기 문화파트 마지막 문서입니다. 마지막까지 힘을 내봅시다. 지난 문서에 이어서, 국어, 역사, 종교 등을 살펴보려 합니다. 내용이 제법 많다보니 서론 생략하고, 바로 내용으로 들어갑니다. 먼저 국어를 살펴볼께요. 국어를 연구하는 단체들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나라가 어려울수록 나랏말과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국어연구와 관련된 대표적 단체는 국문연구소(1907)가 있습니다. 학부 안에 설치되었던 연구기관으로서, 간단히 말해 국어 문법 연구소라고 보시면 됩니다.
구한 말에는, 신소설도 등장합니다. 최초의 신소설이라고 한다면 혈의누(1906)가 있습니다. 다만, 혈의누는 깊숙히 들여다본다면 조금 위험한 내용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혈의누는 분명 개화를 주제로 한 소설이지만, 사실상 일본의 침략을 미화하는 장면들도 나타나는 경향이 있었으니까요. 혈의누 저자 이인직은 신소설의 선구자이면서 동시에 적극적으로 친일파 쪽에 선 인물이었습니다.
여하튼 혈의누 외에도, 신소설로는 은세계, 금수회의록 등 이 있습니다. 흥미로운 대목은, 금수회의록은 동물들을 등장시켜서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시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쉽게 상상할 수 있듯이, 구한말의 일제는 비판하는 세력은 가만히 놔두질 않습니다. 반일소설이라니 금서로 지정해! 그래서 금수회의록 등 비판적 소설은 곧장 탄압 당하고 맙니다. 자유로운 표현부터 막아버린다는 건, 이토록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일본은 아예 1909년에 출판법을 만들어 버립니다. 악법을 만든 의도가 눈에 들어오는가요? 언론을 통제하는 신문지법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번에도 역시 출판법까지 만들어서 반일적인 내용은 노골적으로 없애버리는 겁니다.
이왕에 탄압하는 법들을 보고 있으니까 세트로 묶어서도 생각해 봅시다. 출판법, 신문지법과 함께, 보안법도 유명합니다. 보안법(1907)에 의해서, 대한자강회가 직접적인 타격을 받으며 해산되기도 했습니다. 대한자강회라고 한다면 고종의 퇴위를 아주 강하게 반대하면서, 스스로 강해지자고 목소리를 높이던 단체였습니다.
반복하지만, 일제 눈에 거슬리자 법까지 만들어가면서 탄압해 버린다는 점! 아, 보안법은 시험에도 종종 나오므로 익숙해질테까지 재차 정리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보안법으로 해산되는 대한자강회, 신문지법이 도입되며 줄줄이 장악되며 폐간되는 언론 (대표적으로 대한매일신보), 출판법으로 반일소설, 체제비판, 사회비판은 금지시켜버리기도 하고요. 말하자면, 구한말의 분위기라고 한다면, 처참한 사회부조리에 저항하며 숨쉴 수 있는 마지막 숨통까지 꽉 막아버리는 모습이랄까요.
지난 문서에서는 애국계몽운동의 교육적 노선으로, 민족적인 오산학교와 대성학교가 세워지고 있다는 것을 배운 바 있습니다. 그럼 이것도 일제가 가만히 놔둘리가 없겠죠? 일제는 여기에도 간섭하며, "사립학교령"을 만들어 탄압에 나섭니다. 1908년에 사립학교령이 반포되자, 사립학교개설은 좀처럼 통과되지 못했고, 학교를 입맛대로 규제하려고 나선 것입니다.
이른바 구한말 4대 악법들입니다. 출판법, 신문지법, 보안법, 사립학교령. 당시 조선의 침통한 모습을 보다 못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일으키고, 우리의 선조들은 굉장히 많은 활동들을 펼쳐나갔습니다. 그러자 그런 활동들을 하나하나 다 탄압하기 위해서, 일제는 집중적으로 법들을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아, 그리고 신체시(=새로운 시)로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가 있습니다. "소년"이라는 잡지에 실렸습니다. (*덧붙여 일제강점기 1920년대 방정환이 어린이 운동을 펼칠 때, 잡지의 명칭은 어린이 였어요. 잡지의 명칭인 "소년"과 "어린이"는 시험에서 가끔 등장하므로, 종종 헷갈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구한말의 신체시와 소년이라는 잡지는 잘 체크해둡시다.)
이제 역사쪽을 살펴보도록 해요. 애국계몽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계몽사학이 주류를 이루며 유행을 하는데, 대표적으로는 신채호의 독사신론이 있습니다. 역사적 의의로는, 민족주의사학의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요,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가 식민사관을 계속해서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조선이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에 발전할 수 있었고, 조선은 발전이 없는 이류의 나라다 라는 역사적 프레임(틀)을 일제가 들이미는거지요. 이에 맞서 다양한 역사적 시선들이 등장합니다. 나중에 또 일제 강점기 때 배우겠지만, 실제 증거가 중요하다는 실증주의사학도 있었고, 사회주의 영향을 받아 사회경제사학도 있고요. 그리고 민족주의사학 노선도 있습니다. 이 민족주의사학의 방향을 제시했던 것이, 신채호의 독사신론이라는 점. 따라서 구한말의 계몽사학과 독사신론, 신채호는 꼭 기억하도록 노력해 봅시다! 시험에 자주 나오기도 하고요.
또한 계몽사학이 주류를 이루던 구한말에는, 위인전, 나라의 흥망사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같은 내용들이 등장합니다. 왜 그런걸까요? 말그대로 나라가 거의 망하기 직전일 만큼 매우 위태롭기 때문입니다. 러일전쟁 이후 펼쳐지는 조선의 상황은, 일본과 을사조약 등 여러 조약들이 체결되었고, 이로 인해 각종 국권들이 다 빼앗기고 있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도 절대 굴하지 말고, 힘을 내고, 용기를 내자, 우리가 얼마나 어려웠던 역사적 순간들을 다 이겨내지 않았던가! 라고 격려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따라서 구한말의 어두운 현실 앞에서도, 우리에게는 좌절 말고, 당찬 기개로 다시 한 번 무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내용들은 어쩌면 정말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싶습니다. 왜 흔히들 이런 말도 하잖아요. 영웅은 난세에 있다! 지금 이토록 세상이 어려운데,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라는 역사서들이 구한말에 줄줄이 등장한 셈입니다.
그러므로, 근대사를 생각해볼 때, 국어연구, 신소설, 신체시 등 문학작품, 계몽사학의 흐름 등은 모두 1908년 무렵의 구한말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라가 망해가고 있기에 민족주의적인 각성을 강하게 요구하기도 하고, 오산학교 대성학교가 세워지기도 합니다. 즉, 애국계몽운동이 대대적으로 펼쳐지자, 일제는 급히 법을 만들어서 전면 탄압에 나서는 장면까지 자연스럽게 떠올려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정말 열심히 배워가는 중이라 하겠습니다. 하하 :)
다음으로는, 종교를 살펴보아요. 중요한 몇 가지를 언급할께요. 1909년에 대종교가 만들어집니다. 나철 에 의해서 생겨났고요, 단군을 믿는 종교입니다. 대종교가 왜 중요한가 하니, 이후 일제강점기로 가면 항일무장투쟁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에요. 대종교 신자들은 단군을 믿기 때문에, 민족주의적인 성향도 강하고, 따라서 후에 항일투쟁을 적극적으로 해나가는 모습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1920년 청산리 대첩 때 다시 또 배울꺼에요)
유교에서는 유교구신론이 나옵니다. 박은식이 주장했고요. 우리나라 유교라는게 너무 성리학 중심으로 경직되어 있으니까 도저히 안 되겠다. 당대의 다른 종교들 (개신교 등) 을 관찰해보니까, 의료사업도 하고, 학교사업도 하고, 적극적으로 찾아가고 나서는 모습을 보여준단 말이지요. 그래서 유교도 더 이상 목에 힘주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고, 친근하게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유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천을 강조하고, 새로워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불교에서도, 한용운이 불교유신론을 주장했고요. 일본화 되는 불교에 대한 반발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일본 불교에 포섭되지 말고, 미신적인 요소도 제거하고, 내부의 혁신 및 자주적인 불교가 되자고 주장했습니다. 아 그리고, 천도교도 있는데요. 천도교는, 동학이 이름을 바꾼 것. 이 정도를 기억하시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이제 건축물을 마지막으로 정리합니다. 부담가지진 마시고, 그냥 지난 번 복습이라 생각하고, 근대에 있던 주요 건물들을 살펴보는 시간. 1896년 독립문이 있었고요. 네 독립협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정확한 순서상으로는 독립신문-독립협회-독립문 순입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원구단(1897)이 있습니다. 조선도 이제 대한제국이 됨으로서 황제의 나라가 되었기 때문에, 하늘에 제사를 드린다는 의미로 원구단이 지어졌습니다. 그전까지는 하늘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황제의 나라 중국밖에 없었지만, 이제 우리도 황제의 나라가 되었으므로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자격이 된다, 따라서 그런 취지에서 원구단이 건축되었습니다. 또한 1898년에는 명동성당이 만들어졌고요.
명동성당은 지금이야 전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겠지만, 초창기에 웅장하게 들어섰을 때는, 어쩐지 주변과는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하기야 당시의 주변 건축물이라고 해봐야 무슨 빌딩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주로 초가집들이 주위에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옛날 우리 조상들의 건축적인 특징이라면,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건축양식이 많았습니다. 예컨대, 거대한 나무가 있다면, 그 나무를 굳이 자르거나 해치지 않고 함께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건축물이 지어지곤 했습니다. 그에 비해 근대적 서양 건축물인 명동성당의 모습은 당시 사진을 참고해보면 평평한 들판에 홀로 로켓포가 서 있는 듯한, 이질감을 상당히 주었다는 점도 재밌습니다. 지난 문서들에서 언급했듯이 서양 문물이 들어옴으로서 장단점이 있고, 양면성이 있으며, 따라서 처음부터 간단히 근대의 문물들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녹아들어간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1910년에 완성되는 덕수궁 석조전이 있습니다. 서양의 건축양식을 계승한 건물이 뭐가 있느냐 라는 질문에는, 독립문, 명동성당, 석조전을 한 묶음으로서 잘 정리해둔다면, 혹여 시험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기까지, 길게 달려온 만큼, 이제 시험을 대비해서 근대사 각 시기별로 문화사 묶음을 한 번만 더 정리해볼께요.
개항을 하고 외국문물을 받아들이려는 개화초창기 1880년대 묶음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1883년, 개항 직후 분위기에선, 박문국, 전환국, 기기창, 원산학사, 한성순보, 동문학] 정도가 있겠네요. 이후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개화의 속도가 느려지고,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 기억나시죠. [동도서기 개화시기 (1885~1894) 에서는, 한성주보, 전신과 전등, 광혜원, 배재,이화학당, 육영공원] 등 상당히 온건하고 느슨한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문화파트의 다양한 시설과, 각 기관들의 년도를 일일이 하나하나 다 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각각의 시기마다 나타나는 특징들과 당시의 분위기를 한 덩어리로 묶어서 잘 파악해 두는 연습이 중요합니다.
1890년대 후반 [광무개혁 시기에 볼 수 있는 특징적 모습으로는, 원구단, 황성신문, 제국신문, 전화, 전차, 경인선] 등을 떠올릴 수 있으면 완전 좋겠지요. 특히 광무개혁 시기에 나오는 전차와 경인선은 시험의 단골이니까 이 점만큼은 꼭 기억해 보아요!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1904년 이후 [애국계몽운동 시기의 모습들 입니다. 철도로는 경부선, 경의선이 개통되었으며, 애국계몽단체들이 나왔고, 일제의 4대 악법이 있었고, 다양한 국어 역사 종교 등의 활동들]이 있었다 라는 것!
다시 말해, 1906년에 나온 소설의 이름은? 이런 문제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에 시험에선, 애국계몽운동과 연관이 없는 내용은 무엇인가? 라고 물을 수 있겠지요. 예컨대, 애국계몽운동의 모습이 보기에 나와있는데, 선택지에는 난데없이 전차의 개통으로 황권이 강화되었다 (=대한제국시기) 라고 나와있다면, 이걸 잘 간파해 내는 것이 포인트라 하겠습니다. 이른바 시험의 기술이랄까요. 그러면, 개항기의 많았던 이야기들은 이것으로 마칩니다. 이제 조선의 오랜 역사는 저물고 말았습니다, 다음 문서부터는 일제강점기 속으로 들어가보려 합니다. 근현이야기는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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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영감 - 철학자 러셀의 이야기를 남겨놓을까 합니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정들이 마치 거센 바람과도 같이 나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니며 깊은 고뇌의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
그래서 러셀은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현실 앞에서, 징병 반대 문건을 썼다가 대학 강사 자격을 박탈 당합니다. 반전 칼럼을 썼다가 6개월형을 선고받고 감옥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역사적인 순간에 자기 목소리를 내고, 외치는 사람들의 모습은 늘 있어왔습니다. 남들과 다른 목소리를 낸다고 해서, 경고를 주고, 징계를 주는 장면은 100년전, 근대에만 있는 일은 아닌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타인의 슬픔에 대하여 공감할 수 있는 연민이 있다면, 또한 우리의 다음 세대를 생각하고 배려할 수 있는 따뜻함이 있다면, 좀 더 자신의 감정에 정직하게 반응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응원하고 싶습니다. 혹여 고민하다보면, 감정이 제멋대로 왔다갔다 하면서 말못하게 괴로운 순간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싶어서 오늘을 열심히, 오늘을 뜨겁게 보낼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멋진 일인가요.
어쩌면 열정적으로 산다는 것은, 꾸준히 한 가지만 생각하는 것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몇 번이나 방향을 바꿔가면서, 이리저리 흔들려 가면서도, 계속해서 자신의 감정을 점검하고, 그 순간 할 수 있는 중요한 것들을 고뇌하고 선택하고 밀어붙여 나갈 때, 그것이야말로 열정의 눈부신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언급한 러셀은 사춘기 시절에 몇 차례 자살충동을 느꼈음에도, 수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자살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나의 바람, 나의 의지. 얼핏 소소해 보이는 마음들이 사실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요. 훗날 러셀은 195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이 되었던, 인생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다면, 열정을 품에 안고서 살아갈 수 있다면, 분명 더 멋진 나와 만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힘내세요.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