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발락과 발람 그리고 나귀(민수기22:21-35)/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4. 8. 24. 11:11

 

발락과 발람 그리고 나귀 (민수기22:21-35)

 

오늘 저는 약간은 생소한 본문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여기에 나오는 두 사람은 다 이방인입니다.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발락은 모압의 왕이고 발람은 메소포타미아의 영매 또는 술사입니다. 영매, 귀신을 접하고 귀신의 이야기를 사람에게 전하는자. 발람을 선지자라고 보아도 좋지만 일단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는 아닙니다.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편인 이스라엘이 어떻게 했는지에 관해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모압의 왕과 메소포타미아의 술사 발람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일입니다.
발락과 발람으로 이름도 비슷한 이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사람은 아니지만 아주 중요한 조연이 나옵니다. 바로 발람의 나귀.

 

사실상 하나님은 발락이니 발람이니 하는 사람이 아니라 타고 다니는 나귀를 통하여서 더 놀라운 일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나귀에게 배워야 하는 사람을 통해 우리는 영적으로 무지한, 욕심의 노예들을 꾸짖고 계신 하나님의 경고를 접하게 됩니다.

 

나귀도 보는 것을 보지 못하고 욕심에 이끌려 죽음의 길로 가는 욕심의 노예들은 오늘날 권력과 재물 때문에 자기를 파멸에 내어주는 어리석은 인간들의 모습이며 본문에 나오는 입이 열린 나귀는 이러한 탐욕에 대한 통렬한 조롱이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본문에서는 재물에 눈이 어두워 억지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는 발람의 모습이 나오지만 이 본문을 꼭 선지자나 술사에 한정할건 아닙니다. 오늘날의 평신도들에게도 이는 유효한 내용입니다.
돈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이 보여주는 진리를 애써 외면하는 현대인들에 대한 경고일 수도 있습니다.

 

안되는 줄 알면서도 돈 때문에 자기를 굽혀 억지로 억지로 하나님의 섭리를 대적하려고 하는 이들에 대한 경고도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양심을 놓아 두셨습니다. 이 양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의 눈은 재물 때문에 어두워졌습니다. 부드럽고 번쩍이고 화려한 것들 때문에 우리는 내면에서 울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양심의 외침을 억누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한 현대인들에 대한 놀라운 경고의 본문이 오늘 내용입니다.
그리고 재미있습니다. 말하는 나귀는 성경에서 이곳이 유일합니다.

 

1.발락이 발람에게 요청하다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모리와 바산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리고 맞은편 모압들에 진을 쳤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가나안 입성을 위한 최종 목적지에 당도한 것입니다.

 

말이 좋아 200만이지 실제로 이러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면 거의 메뚜기떼 같을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진을 치자 모압의 왕 발락은 기겁을 하게 됩니다. 잘못했다가는 바산이나 아모리 사람들처럼 이스라엘의 밥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모압 왕은 이스라엘을 두려워해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압을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의 아들의 후손들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과는 혈연의 관계입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이웃 나라들이 멸망하는 것을 보고 모압왕이 모압들을 건너 여리고로 건너가려는 이스라엘을 보고 지레 놀란 것입니다. 너무 너무 수가 많으니까 당연히 이들을 보고 놀랄만 합니다.
그래서 고민 고민하다가 발락은 뭔가 그래도 조언을 얻을까 싶어서 미디안의 장로들에게 이스라엘을 물리칠 계략을 물어 봅니다. 모세가 처음 미디안족가운데서 생활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디안 일대에서 오래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잘 안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런데 미디안의 장로들이 제시한 책략은 용한 술사를 불러다가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는 것이었고 그 용한 술사로 브올의 아들 발람을 소개한 것입니다.
발람이라는 이름의 뜻은 ‘백성을 삼키는 자’라고 합니다. 아마 그의 이름처럼 당시에 사람들은 발람은 매우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발람은 당시에 유브라데스 강가에 위치해 있었던 브돌에 살았습니다. 모압에서 무려 650km나 떨어진 곳입니다. 모압에서 천 육백리나 떨어진 곳에 사는 발람의 명성이 미디안의 장로들에게까지 퍼져 있었다면 아마 발람은 당시에 매우 유명한 술사였나 봅니다.

 

2.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모압왕 발락은 술사 발람을 초청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그들을 쳐서 이겨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

 

어떻습니까?
우리는 모압 왕 발락의 어리석음에 혀를 찹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하는 대로 다 따라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며 그가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그는 또한 우리보다 지혜가 뛰어나시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결과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우리의 앞날을 계획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므로 무한한 존재이신 그분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강제하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나를 하나님같이 높이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산에서 기도하고 능력을 받아서 치유와 환상과 예언의 능력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고 교회의 덕을 세우라고 주신 능력이지 내가 존귀함을 받고 내가 부유해 지라고 받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당연히 그러한 능력을 행한다고 내가 신이 되거나 그에 버금가는 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무리 강해진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신 그 자체가 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지 결코 하나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유명한 술사라고 해도 그의 저주가 이스라엘을 멸하는 효과를 가져오리라고 믿은 발락은 너무나 어리석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유명하거나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결국은 인간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뿐이지 결코 그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꺾고 인간의 마음대로 하나님을 부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발람이 아무리 이스라엘을 저주해도 그 저주가 결코 효력을 발할 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발락은 발람의 저주가 이스라엘을 멸하는 효과가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3.영적인 전쟁
모압과 미디안의 장로들은 모압왕 발락이 주는 예물을 가지고 발람을 찾아 갑니다. 이 예물은 발락의 주술에 대한 복채의 의미가 있습니다. 발람은 소위 말하는 영매입니다. 술사인데 영과 접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그에게 온 모압과 미디안의 장로들을 환대합니다. 그렇겠지요. 모압의 왕이 보낸 엄청난 예물에 정신이 나간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만 있으면 저 많은 것이 다 나의 것이 되리라는 욕심이 그의 영안을 흐린 것입니다.

 

그가 비록 이교의 술사이기는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만나서 신탁을 받을 정도는 되는 영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예물을 가지고 온 미디안과 모압의 귀족들을 자신의 집에서 유하게 하고 자기는 여호와의 신탁을 받겠다는 겁니다.
8절에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

 

그런데 발람이 여호와를 언급했다고 해서 그가 여호와의 선지자인 것은 아닙니다. 이 사람이 지금 여호와의 신탁을 받겠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코 여호와를 유일신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신을 믿는 발람은 이스라엘을 멸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민족신인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저주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메소포타미아의 신이 이스라엘을 저주해봐야 효력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당연히 모압의 신이 저주해봐야 이스라엘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날 밤에 하나님은 발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

 

이미 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복을 받고 있는 자이기 때문에 저주 하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발람이 하나님을 믿던 아니던 간에 그가 참된 선지자라고 한다면 그에게 주어진 말대로 하면 됩니다. 물론 본문에서도 보다시피 발람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의 귀족들에게 말했고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저들과 함께 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이 여기서 완전히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4.가중되는 유혹
모압 왕은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발람이 여호와의 신탁을 받았다는 데에 착안한 발락은 다시 더 높은 고관들을 더 많이 발람에게 보냅니다. 어쨌든 발람이 여호와를 접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발락은 예물 정도가 아니라 높은 벼슬과 존귀로 발람을 유혹합니다.

 

이러니 저러니 말만 할 것이 아니라 직접 모압의 왕에게로 발람을 데리고 오라고 신하들을 보낸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말이 너무 웃기지 않습니까?
“아무것에도 거리끼지 말고 내게로 오라”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못하지만 결국은 아무리 여호와가 너로 하여금 못가게 해도 그것에 구애받지 말고 나에게 오라는 말입니다. 모압 왕도 웃기는 사람입니다. 신의 사자에게 신을 따르지 말고 세속의 권력을 따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을 따르지 말고 세속의 부귀영화를 따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가끔가다 보면 우리나라 점쟁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결코 천기를 누설해서는 안되는데 돈 일억만 있으면 내가 한번 해보겠다”
웃기지요. 인간들에게나 돈이지 하나님에게, 신에게 무슨 종이 쪼가리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도 여전히 세상은 하나님의 사람을 돈과 권력으로 유혹하려 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생각할 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 두가지에 무너졌으므로 너희도 충분히 무너질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 하나님을 대적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기만 한다면 너에게 부귀와 영화를 주겠다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발람이 은금을 산더미 같이 쌓아 놓고 주어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더하거나 덜하거나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래놓고는 오늘밤 내집에서 유하라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한번 들어 보겠다고 말합니다.

 

부귀와 영화가 너무 탐이 나서 하나님의 경고를 잊어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번복시키려 노력하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위선자라고 합니다. 마치 세속의 물질과 지위에 초연한 듯 말합니다. 돈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는 그것이 아까워서 너무 너무 갖고 싶어서 죽을 지경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속에서 욕심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이미 안된다고 하셨음에도 혹시라도 자기의 소원을 들어 주실지 미련이 남아서 다시 하룻밤의 말미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에게 강요하려고 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하나님은 그날 밤에 발람의 소원을 들어 주시사 그에게 모압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자기가 하신 말씀 외에는 전하지 못하게 하는 제한은 가했지만 발락과 발람이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이 조금씩 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의 뜻이 아님에도 자꾸만 조르면 하나님이 들어 주신다고 생각한다면 글쎄요,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나의 지식으로 하나님의 지식을 이기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결과를 나타냅니다.
발람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다가 모압왕에게 가도 좋다는 하나님의 허락을 얻은 것을 보면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안들어 주시면 자꾸 졸라대면 들어 주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계속해서 따라가 보면 결말이 그렇게 나지 않습니다.

 

악인의 악한 생각을 허용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그를 버려 포기하셨고 그에게 심판을 내리시기로 결정하셨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내 고집대로 해 주시는구나!’하고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나를 포기하신 것이 아닌가 걱정해야 할 부분입니다.
억지로 내뜻대로 밀고 나가면 그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5.발람과 그 나귀
드디어 고대하던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발람은 아침에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채우고는 모압의 귀족들과 함께 모압을 향하여 길을 떠납니다. 모압의 왕은 그에게 큰 권세와 많은 재물을 약속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허락도 받았겠다 왕의 간곡한 청도 있겠다 술사 발람의 앞길은 활짝 열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 본문22절에 보면 “그가 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진노하시므로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니”라고 되어있습니다.
아니 허락해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또 길을 간다고 진노하고 막으려고 천사가 길에 서고 이 무슨 행동입니까? 왜 하나님은 그러셨지요?

 

발람이 모압으로 가는 것은 하나님에게 받은 말씀만을 전하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하든지 이스라엘을 저주해서 모압의 왕이 준비한 높은 벼슬자리와 엄청난 재물을 반드시 차지해야 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길을 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굽게 하고 그의 말을 왜곡하면 우리에게 부귀영화가 올 것 같습니다. 당장은 그럴싸해 보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는 말씀처럼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게 좋게 해주려다 보니까 우리의 말씀가운데 하나님이 뜻은 사라져 버립니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분노와 징계를 당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하나님은 인간의 요구를 거절하시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추정할 수 있는 것은 13절의 “허락지 아니하시느니라”는 말은 ‘거역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보통의 경우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때에 사용하지 하나님이 인간의 말을 허락지 아니할 경우에 사용되지는 않았거던요. 그러니까 이 말이 이와 같이 ‘하나님이 인간의 요구를 허락지 아니하다’와 같은 경우로 쓰인 경우는 여기가 유일하다는 점에서 근거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과 인간은 계약관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에게 이렇게 해주시면 제가 이렇게 할께요’

 

‘너희가 이렇게 하면 내가 이렇게 해주께’

 

이런 관계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허락하지 아니하다’ 또는 ‘거역하다’란 말은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할 때에 주로 쓰였지 하나님이 인간의 말을 허락하지 않을 때에는 여기에 유일하게 사용된 것입니다. 매우 드문 표현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대로 움직여 지는 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인간의 강력한 요구를 허락지 아니하시는 경우가 드물다는 말로 이해해도 됩니다.

 

여하튼 이렇게 해서 발람은 드디어 모압으로 갈 수 있게 되었는데 천사가 길을 막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귀는 천사가 칼을 빼들고 길을 막고 있는 것을 보고 피하려고 길을 벗어나 밭으로 들어갑니다.
소위 영매라고 하는 발람이 못 본 하나님의 천사를 나귀는 보고 천사를 피해 길을 벗어난 것입니다. 갑자기 나귀가 길로 가지 않고 길옆의 밭으로 들어가자 발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나귀를 채찍질합니다. ‘이 놈의 나귀가 갑자기 왜이래’ 하면서 길로 돌아가도록 채찍을 가한 것이지요.

 

그런데도 나귀는 길로 돌아 가지 않습니다. 발람이 타고 있는 나귀의 양쪽에는 담이 놓여 있고 천사가 막고 있는데 천사는 칼을 빼들고 있으니까 나귀는 도저히 길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발람이 채찍으로 때려도 칼에 죽는 것보다 나으므로 나귀는 가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도 채찍을 가하니까 나귀가 발람의 발을 담에다가 대고 눌러 댑니다. 아마 천사를 피하려고 길 가쪽으로 가려다보니 발람의 발이 담에 눌렸을 것입니다. 이렇게 나귀가 천사를 피해가자 천사는 더 좁은 길목에서 나귀를 저지합니다. 이제는 좌우로 피할 틈이 없습니다. 나귀가 서던지 아니면 천사의 칼에 죽던지 양단간에 뭔가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도저히 길을 갈 수 없었던 나귀는 아예 발람 밑에서 엎드립니다. 아마 발람을 태운채로 주저앉았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나는 도저히 못가 그러니 배째’ 이런 식의 표현이었겠지요.
아직도 자기 목숨이 위험한줄 모르는 발람은 발람대로 화가 납니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네까짓 나귀주제에 나의 길을 막으려고 하느냐?’

 

그가 분노해서 나귀를 채찍이 아니라 지팡이로 마구 때립니다. 나귀의 입장에서는 길을 가면 천사의 칼에 죽을 것이고 안가면 발람의 지팡이에 맞아 죽을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하나님이 드디어 역사를 시작합니다. 나귀의 입을 여십니다. 나귀가 말을 할 리가 없겠지요. 그래서 성경은 나귀가 말을 한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귀의 입을 열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비슷한 표현처럼 보이지만, 여기서 나귀가 말을 하는 결과는 똑 같지만 나귀가 주체적으로 말을 하게 된 것이 아니라 말할 줄 모르는 나귀의 입을 하나님이 여셨다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6.천사를 본 발람
우리가 성경 본문을 보면 나귀하고 발람이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좀 웃깁니다. ‘왜 때리느냐’부터 시작해서 작금의 사태에 대해 나귀와 발람이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전혀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발람이 천사를 보았다면 나귀의 행동을 바로 이해했을 것이고 아마 그가 앞장서서 나귀를 몰아 천사를 피해  도망을 갔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가 미처 보지 못했을 때 나귀가 알아서 스스로 목숨을 구한 것을 크게 칭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귀는 천사를 보는데 영안이 열려 영적인 존재를 보고 그들의 일을 알려준다고 주장하는 발람은 천사를 못 봅니다. 나귀보다 못한 존재입니다.

 

어쩌면 발람이 이전에는 잘 보았는데 모압 왕이 제공한 재물과 벼슬자리에 눈이 어두워진 건지도 모릅니다.
마침내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셨습니다. 그러자 발람의 눈에도 하나님의 천사가 칼을 빼들고 섰는 것이 보입니다. 사자가 말합니다. 나귀가 나를 보고 피하지 않았다면 내가 벌써 너를 칼로 죽였으리라

 

섬뜩하지 않습니까?
이 말씀 속에 하나님은 우리가 악한 길로 갈 때 한계를 정해 놓고 그 선을 넘어서면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한번 자신을 돌아 봅시다. 설마 우리가 벌써 하나님의 금도를 넘어선 것은 아니겠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고 해도 무얼 해야 할지 무얼 하지 말아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그의 법을 따르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금도를 넘어설까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놓고 하나님의 사자는 발람이 ‘그럼 가지 말까요?’라고 묻자 그래도 모압으로 가랍니다. 가기는 가되 내가 한 말 외에는 결코 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발람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한 술사입니다. 술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본 경험이 있습니다. 지금 이 길도 하나님의 허락과 경고를 동시에 받고 움직이는 중입니다. 그러나 그는 불과 얼마 되지 않아서 영성을 잃어 버리고 나귀도 보는 하나님의 천사를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한때 능력을 행했던 수많은 주의 종들이 능력을 잃고 세속에 찌든 모습들을 많이 발견합니다.
왜냐면 그가 재물에 눈이 어두워지고 부귀영화에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 성도라 할지라도 우리가 재물이나 세속의 향락에 눈이 멀면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금도를 어길 수도 있습니다. 매우 위험한 상황까지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상황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서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상황에는 어떤게 있을까요?
나귀가 말을 한다?
하나님의 천사가 칼을 빼들고 길을 막고 있다?
높은 자리와 엄청난 재물에 유혹받은 이방의 술사?

 

우리는 동일한 본문을 보고서도 각자 다른 영적 감동을 받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바로 이 부분에서 영적인 감동을 받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법과 명령에 우리가 따르는 것이지 결코 우리의 기도로 하나님을 휘두르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이득과 하나님의 눈으로 보여지는 이득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억지로 억지로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하면 웬만해선 우리의 자유의지를 꺾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허락하시겠지만 그 결과마저 항상 좋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발람이 너무 너무 모압의 왕에게로 가고자 하니까 하나님은 그에게 가라고 허락하셨지만 하마터면 길에서 천사의 칼에 죽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영적인 눈을 뜬다면 우리의 눈앞에 가도 되는지 안되는지를 표하는 천사의 움직임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진실로 우리에게 가라고 하시는 길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은 부귀영화로 나를 유혹하여 하나님의 뜻을 굽히려 하고 그 길을 따르지 못하게 유혹합니다. 그러나 내가 서야 할 길을 이미 정해 져 있습니다. 그런 것을 굳이 미련을 가지고 두 개를 다 가지려하다가는 큰 일이 납니다.
하나님 내 아버지, 제가 오늘 여기에 서 있습니다. 부귀와 영화가 나를 유혹하고 권세가 나를 위협해도 나는 주의 길을 떠날 수 없어 오늘 여기에 있습니다. 주여 나를 보호하시고 나를 인도하소서.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8월 24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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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홍종일 목사님이 직접 큰 교회 단상에 서서 올라가서 설교할 때의 동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집사님인가, 장로님인가는 그 때의 목사님에게 두려움을 느꼈다고 솔직히 털어놓았습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저는 자랐기 때문에, 언제나 목사님께 잘 대하는 집사님들의 신앙심을 매우 잘 관찰해 왔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이 잘 듣고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본문에서 "겸손하게 주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는 거의 확실한 메시지를 받게 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이루고 싶은 것들은, 대부분 (유한한 존재인) 내가 봤을 때 좋은 것이겠지요.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역사하심을 믿는다면, 주께서는 알아서 더 좋은 것을 준비하실텐데, 내가 앞서 가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소박한(?) 바람이 있습니다.

 

매 순간 마다, 주님께서 인도하심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오늘 하루는 우리에게 얼마나 근사한 선물인가요. 저는 몇 주 전 꿈이었던지 환상 중에, 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던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이 땅의 성실한 사람들로 인해서, 우리는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 왔습니다. 앞으로의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요. 알지 못할 때는, 겸손히 무릎부터 꿇고, 주님께 복이라도 구해야 하지 않나 싶긴 합니다. 다만 우리가 오만하지 않도록, 높은 자리보다는, 겸손한 사람이 되기를... 오직 그것 하나만큼이라도 조용히 두 손 모아 기도하며 덧붙임을 마칩니다. / 2014. 10. 01. 리뷰어 허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