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문서에 이어서, 임시정부는 어떻게 세워지냐하면, 세 개의 조직이 만나게 됩니다. 숫자로 표기할테니 이 점 중요해요. 연해주 지역에 있었던 정부, ① 대한 국민 의회 (손병희) 가 해산을 하게 되었고요. ② 서울에 있던 13도 대표들이 모여서 결성했던 정부가 한성정부라고 있었습니다. 국내에 있던 대표들이 모여서 정부를 구성했기 때문에 이 한성정부가 법통성을 가지게 되었고요. (물론 한성정부에 대해서는 정말로 존재했던 조직이었냐 라는 반론도 현재에는 있습니다. 어쨌건 교과서를 중심적으로 서술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③ 상하이에서 독자적으로 활동을 해나가던 임시정부가 있었고요.
이렇게 나눠진 조직들이 모여서, 3.1 운동 실패 후,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된 정부의 필요성을 느꼈으니 1919년 9월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가 탄생하게 됩니다. 위치는 상하이에 두고, 법통성은 한성정부를 이었고요. 상하이에 있었던 까닭은, 당시 상하이에 외교(외국) 공사관이 많다보니까 일제가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웠어요. 물론 이 때에도 만주에 건설해서 무장투쟁을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음, 이렇게 상황을 이해해 볼 수 있겠네요.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만주지역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하여, 노선은 당연히 무장투쟁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강한 지도부를 원했던 거고요. 다시 말해, 연해주, 간도 지역은 무장 투쟁을 선호했고요. 반면에 기존 상하이에 있던 임시정부 노선들은 외교를 통해서 독립을 쟁취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구체적인 그 방법들을 모색하는 쪽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동휘 총리가 무장투쟁 노선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상하이 세력쪽에서 나오는거에요. 양측의 상호보완적인 배경설명이라 하겠습니다. 어쨌든 정부가 지금 상하이에 있다면, 주로 쓰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외교를 통한 승부였습니다. 전반적으로 노선이 외교를 중시하였다 라는 것. 여기에 대한 문제점과 뒤이어 펼쳐지는 하향추세 등은 문서 하단부에 알 수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과연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어떤 조직인가요!?
3권분립에 근거한 최초의 공화정(대통령제) 정부다 라고 배울 수 있습니다. 신민회가 최초로 공화정을 주장했지만, 대한광복회가 주장했지만 실현 못했었잖아요. 그런데, 이번에야 말로 드디어 공화정에 성공한 것입니다. 3권분립은 국무원(행정), 법원(사법), 임시의정원(입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가지고 있는 주요한 조직들을 쭉 살펴보면, 서간도 지역에 광복군총영 → 참의부 라는 조직으로 연결되고요. 마찬가지로 서간도에 이륭양행이 있습니다. 교통을 담당하는 비밀회사라니 어쩐지 참 선조들의 노력이 대단하잖아요. 부산에도 백산상회가 있었습니다. 독립운동을 위한 서로의 전달 역할을 하는 곳도 당연히 있어야 겠죠. 국내 곳곳으로 연결해주는 조직망이 있었으니, 연통제(행정)와 교통국(정보)이라는 조직을 갖추고 있습니다. 멀리 미주지역에는 구미위원부가 있습니다. 상하이에는 사료편찬소, 독립신문,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발행했네요!), 애국공채라고 해서, 나중에 나라가 세워지면 돈을 준다고 증명서를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일을 참 많이 해나가는데, 문제는 뭘까요? 일제 강점기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과 자금과 노력들이 힘을 합쳤는데, 따라서 임시정부가 그 어려운 걸음만큼, 잘 가야하는데, 일본이 이러한 조직들을 내버려 둘리가 없겠죠? 특히 연통제와 교통국은 거의 설립하자마자 주요 표적이 되어서 와해됩니다. 1920년대 들어서자마자 말이에요. 일본이 방해공작을 막 밀고 들어오는데, 임시정부 내부에서도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승만의 국제연맹 청원사건이 벌어집니다. 이게 뭐냐하면, 이승만이 국제 연맹에다가 우리 독립을 청원하는거에요. 그런데, 중요한 점은 조직을 거치지 않고 독단적으로 결정하였기 때문에, 신채호 같은 인사들은 이게 뭐냐며 강한 비판을 하게 되었고, 걔중에서는 이승만을 탄핵하자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자, 이런저런 사건 때문에 임시정부는 안팎으로 흔들려요. 내부 분열이 계속 되어선 안 되니까, 회의를 열자고 목소리를 모읍니다. 1923년에 국민대표회의를 열게 되었고요. (물론, 아래에도 그렇지만 년도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흐름을 파악하는 게 포인트!) 이 때에,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었습니다. 창조파는 이것봐라 외교노선은 안 된다, 이제 새로운 조직을 만들자라고 주장했고요 (신채호), 개조파는 그래도 대표성을 가지고 있는 임시정부니까 고쳐나가자 (안창호) 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번에도 의견대립... 국민대표회의는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실망한 많은 독립 운동인사들이 임시정부를 떠나버리고 맙니다. 이른바 1920년대 침체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위기를 극복해가야 할텐데 말이지요. 1925년 쯤 되면, 이제 이승만을 탄핵시키고요. 제2대 대통령 박은식을 잠깐 앉힙니다. 그 이후 국무령 체제로 가면서 대통령제에서 → 의원내각제로 전환을 합니다. 그래도 버티기가 어렵자, 남아있는 사람들의 집단 지도체제로 가자고 해서 1927년 국무위원 체제로 나갑니다. 그러나 한 번 떨어져버린 위신은 회복이 어려웠지요. (1927-40)
결국 끝까지 지키고 있었던 김구가 결정을 내립니다. 1931년에 한인애국단 (이봉창, 윤봉길) 이 만들어집니다. 이들의 활약이 펼쳐지게 되구요. 결국 1940년도가 되면 주석체제로 바꾸고, 한국독립당, 한국광복군 이라고, 중국 관내에서 무장단체를 만들고 있습니다. 한 번 싸워보자는 거에요. 1942년에는 조선의용대의 김원봉이 합류합니다. 1944년에는 주석,부주석 체제로 바꾸고요. 1940년대 이야기에서 한 번 더 배우게 될 꺼에요. 많긴 많죠~ 너무 좌절하지 말고요. 임시정부의 흐름이 이렇더라 정도를 처음으로 느껴볼 수 있습니다.
요약해볼까요. 세 군데서 합쳐져 1919년에 탄생, 3권분립에 근거한 최초의 공화정 중요하고요. 연통제와 교통국이라는 조직을 갖고 있었어요. 바로 탄압이 들어오기 때문에, 내부 분열도 있고, 1920년대부터 침체기에 빠졌고, 1940년 주석체제로 바뀌면서 활약들도 찾아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럼 다음 문서에서는 1920년대 다양한 항일민족운동을 계속해서 살펴볼께요.
오늘의 영감 - 오늘은 최선생님께서 말씀해주셨던 전설적 지휘자 토스카니니 이야기를 반사할께요. 선천적으로 눈이 나빴던 토스카니니는 그러다보니 악보가 잘 보이지 않는거에요. 이 치명적 약점을 극복한 비결은 간단했습니다. 열정적으로 악보를 암기해버리고, 해석하려고 노력하고, 그러다보니까 한 분야의 최고가 될 수 있었지요. 시력이 떨어진다는 약점을 자신의 다른 재능인 기억력과 열정으로 이겨내려는 모습. 어떤가요. 이 문구도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재능이 있다면 모든 방법으로 사용하려고 하라. 아끼지도 말고 썩히지도 말라. 거지가 되려고 하는 백만장자처럼 사용하라! 저는 이런 이야기들이 좋습니다. 이를테면 나태하고 안일한 삶이 매력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만족을 주는 것은 일이라는 점. 몇 시간씩 산을 다녀오거나, 거리를 다녀오면, 그렇게나 저녁식사나 커피가 맛있다는 점이 늘 놀라웠습니다.
우리에게 약점이 있어도 괜찮아요. 시행착오를 거쳐서 이겨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게 중요합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