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출애굽기23:20-)/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4. 10. 12. 21:44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출애굽기23:20-)

 

오늘은 출애굽기의 본문을 가지고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오랜 광야의 방황을 마치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는 엄연히 주인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기 좋은 땅에는 다 주인이 있습니다. 더구나 젖과 꿀이 흐른다면 당연히 선주민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사막가운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있다면 누군들 차지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 선주민은 덩치가 크고 용맹스러우며 철기 문명을 가진 선진 민족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랜 종살이에 겨우 청동기 수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과의 전쟁에 명함도 내밀지 못할 형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인도에 따라 이제 이만큼 나왔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0절에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를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우리가 가려고 하는 곳에 하나님은 미리 사자를 보내어서 길에서 우리를 보호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안전하게 이르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시는고 하니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겠다고 하십니다.
물론 이 길은 아무 길을 의미하는건 아닙니다.
원문에는 ‘그 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그 길,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기로 예정하신 바로 그 길을 의미합니다. 그 길위에서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요,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 때문에 두려워하며 의심합니다. 때로는 이 길이 맞는지 회의하며 이 길로 괜히 들어왔다고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그 길로 갈 것입니다. 왜냐면 그가 주의 사자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주께서 미리 가셔서 그 길을 예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그 길은 가나안으로 가는 길이지만 우리에게 그 길은 하나님의 길입니다. 영적 가나안, 천국으로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이름을 높이는 길을 말합니다. 결정적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주의 뜻대로 살기만 하면 우리앞서 주의 사자를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길에서 안전과 보호를 얻게 하시겠고 그가 친히 우리를 좋은 방향으로 이끄시겠다는 말입니다.

 

인생길이란게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이유는 우리가 아직 한번도 가보지 못했던 길을 처음 가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인생은 두 번 살지 못하쟎아요. 그러므로 누구나 인생길은 처음입니다. 그리고 두 번이 없습니다. 길의 끝은 모두 하나님께로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인생길이 좋았는지 아닌지를 평가받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보다 먼저 주의 사자를 보내셔서 우리의 길을 평탄케 하고 우리가 광야길을 가는 동안 우리를 지키고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는 길에 장애가 있다면 그 장애를 치우고 함정과 구덩이가 있다면 그걸 메우고 우리의 길을 평탄하고 안전하게 해주신다는 약속은 험한 광야길이라는 인생길을 가는 우리에게 큰 위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호와 인도를 주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먼저 요구조건이 있습니다. 뭡니까?
하나님에게 경의를 표하라는 말입니다. 21절에 “너희는 삼가” 이게 ‘목소리를 청종’하라는 말을 하기 위한 단순한 수식어가 아닙니다. ‘삼가’란 말은 ‘주의하다. 기대하다’란 말이고 이건 하나님께 대하여 주의하거나 나아가 경의를 표하란 말입니다.

 

다음이 바로 그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경의를 표하는 방법이 바로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입니다.
청종이란 말의 원뜻은 무엇일까요? 청종이란 말은 경청하다. 유의하다, 응답하다, 순종하다란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여기서는 청종하라고 표현했습니다. 잘듣기는 했는데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건 잘들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까? 그렇다면 그말씀을 듣고 반응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아니오가 없으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하나님께 제사지내는 것 보다 더 낫다고 한 사무엘서의 말씀을 기억하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노엽게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노엽게 하는 것입니다.  노하게 하다란 말은 의역하면 ‘불순종하다’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우리 앞서 보낸 사자가 우리의 허물을 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면 그 사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가졌기 때문이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용서치 아니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사자 역시 우리의 허물을 용서치 아니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기로는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 아니신가요? 여기서 허물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약간의 인간적인 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다가 한두번 죄를 짓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작정하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죄를 짓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용서의 하나님이 아니시라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작정하고 죄를 지으며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나 적은 죄를 사하실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청종하고 순종하면 어떻게 해주십니까?
22절에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될지라”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맞서서 그 누가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보수자가 되시겠다는 말씀은 정녕 우리로 하여금 이 험난한 광야길에서 든든하게 살수 있도록 합니다.

 

여기서 원수가 된다는 말은 하나님이 미워하신다는 뜻이고 대적이 된다는 말은 그 미움을 겉으로 나타내어서 행동으로 옮긴다는 말입니다.
특히 대적이 될지라는 말은 괴롭히다. 자르다. 억압하다. 고통을 주다. 포위하다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은 자신의 대적을 포위하고 억압하며 칼로 잘라 버릴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대적이 아니라 나의 대적에게 말이지요.

 

하나님과 한편이라는 사실은 정말 너무 든든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셔서 나의 원수를 원수로 삼고 나의 대적을 자신의 대적으로 삼아서 포위하며 억압하고 잘라 버린다면 나는 내 하나님을 믿고 두려움없이 인생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려고 하면 뭘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하나님의 말대로 행동하라는 겁니다. 사실 이건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대로 하면 세상과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나의 우호세력이 다 없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과 대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만 세상과 적대하며 세상과 원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한편이 되셔서 세상에서 나와 맞서는 그 모든 것들을 포위하여 섬멸해 버리신다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지금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세상의 법칙을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망설여 집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세상의 법칙을 따라서 저만큼 멀리 달아나고 있습니다. 경쟁에서 나를 추월해서 저만치나 앞서나가있습니다.
내가 저들의 법칙을 따르지 않으면 나는 더 쳐지고 결국에는 패배하게 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능률을 중시하는 세상에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용서니 인내니 하는 것만 강조하고 사랑만을 요구합니다.

 

단호함이 없습니다. 효율도 추구하지 않습니다. 질러가지 않고 빙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도로에서 교통신호를 지키도록 요구하는 불효율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그런데요 세상의 원수가 되어서는 살아갈 수 있지만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서는 결코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 이유를 세상을 파멸시켜서 완전히 멸절시킬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내가 약속의 땅으로 인도되어 가면 그 곳의 선주민들을 모두 멸절시켜 버릴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풍습을 쫓을 필요가 없답니다.
사탄은 이 세상을 돈과 쾌락이라는 두가지로 다스리려 합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돈이 더중요합니다. 돈이 있으면 쾌락을 즐기기가 쉽거든요. 물론 이 돈을 쓸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젊음!

 

그래서 세상은 젊음을 숭상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경우에 정상적으로 돈과 젊음이 같이 있기가 어렵습니다. 젊을때는 돈이 없고 돈이 있으면 젊음이 지나가 버립니다. 그래서 사탄은 젊은이들에게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강탈하라고 말합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 젊어서는 돈을 막 벌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돈이 없다면 쾌락도 찾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정과 불법으로 돈을 모으는 방법을 사탄이 제시합니다.

 

그건 무자비하게 남을 속이고 짖밟고 빼앗는 것입니다. 이걸 세상적으로 그럴듯하게 경쟁력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렇지요.
여기에는 부모형제도 없고 친구도 없습니다. 오직 나만 존재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이기적으로 만들고 세상을 고독하게 만듭니다. 나와 뜻을 같이 하고 함께 사랑을 나누는 관계가 점점 사라집니다. 그래서 가족이 해체됩니다.

 

가족의 해체는 제일처음 미움으로부터 시작해서 이혼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면 남는 것은 미움과 증오뿐입니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정에 굶주린 수많은 사람들이 넘쳐나지만 정작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세상의 비정함을 지겹도록 경험한 이들은 마치 세상을 다 안다는 듯이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하면서 세상을 등지며 세상을 한탄하며 그렇게 인생을 끝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릅니다. 혼자서 가지 말고 이웃과 함께 가라, 네 형제와 함께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힘들어서 쓰러지면 일으켜 세워서 조금 쉬면서라도 함께 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경쟁에서 뒤처지는데요? 그래도 함께 가라고 하십니다. 네가 나를 믿고 나의 말을 준행하면 너는 세상의 법칙을 뛰어넘는 사람이 될 것이야. 결코 세상의 법칙의 지배를 받아서 패배자가 되지 않아. 나를 믿는다면 나의 말을 믿고 순종하래. 그것이 바로 사탄의 지배를 벗어나서 자유하는 길이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의 세력이 왕성해 보여도 크고 두려운 여호와의 날에 결국 사탄은 자기의 권력과 부를 내려놓고 무정갱의 지옥불로 쫓겨갈 것이기에 우리로 하여금 멸망자의 법칙을 따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경쟁과 효율을 중시하고 거짓과 탐욕을 바탕으로 하는 물질문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물질적으로 부하게 되는 것을 성공으로 여겨서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는 말입니다. 왜냐면 세상 마지막날에 그러한 것들은 결국 멸망할 수 밖에 없거든요.

 

저 거대한 물질문명은 도저히 멸망할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오히려 초라한 외양을 지닌 하나님의 교회가 먼저 무너질 것처럼 보입니까?
그러나 지난 역사가 말해 주지요. 거대하고 화려한 것일수록 먼저 무너지는 법입니다. 거대한 대 제국은 예외없이 모두 무너지고 그들이 자랑하던 문명은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교인들은 매주일 강단에서 울려퍼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는 말씀이 좋다고 찬탄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뭐 좋은 목사님의 좋은 말씀이었겠지요? 그런데 미안하지만 그 말씀을 듣고 끝난다면 사실은 말씀을 안들은게 됩니다. 들은 말씀대로 실천하고 순종해야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한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으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것이 되고 하나님과 내가 한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되어버리고 하나님이 나의 대적이 되어 버립니다.
본문에서도 나와있지만 하나님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들을 모두 진멸하고 그들의 세대를 멸절시키겠다고 하십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면 그것들을 모두 진멸시키라고 명령하십니다.

 

정복지의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그들의 문명을 깡그리 파괴하는 것은 정말 야만적이며 있어서는 안되는 일같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거듭 거듭 가나안의 거민들을 진멸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피에 굶주린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꾸 가나안 거민들의 우상숭배를 따라하고 그들의 음란한 습속을 따라하며 궁극적으로는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가나안화 할 것이 염려가 되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난안 선주민들을 몰아 내지 못했고 결국 그들의 우상과 음풍을 따라서 행동했기 때문에 결국 그것이 두고 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옆구리의 가시가 되고 그들의 발목을 잡는 올무가 되었지요.
우리 하나님은 오늘날도 우리에게 똑 같은걸 요구하십니다. 네가 이 세상의 음란과 우상을 타파하고 하나님의 공의와 법도를 세워라. 하나님의 정법으로 다스려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핑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준행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행동입니다.
세상과의 싸움에서 적당한 타협이나 회색지대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편이 아니면 저편이지 때에 따라서 이쪽 저쪽을 오갈 수도 없고 적절히 묵인하면서 적당히 세상에 한발 하나님에게 한발을 걸칠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있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내편을 드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이 항상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이가 악을 범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내가 하나님안에 있지 않다면 하나님은 나의 행동 하나하나에 시시비비를 따지게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잘못했을때는 여지없이 나의 지지자가 아니라 나의 대적이 될 지도 모릅니다. 내가 하나님과 의로 시시비비를 가려서 승리할 수 있을만큼 의로울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우발적인 실수나 사소한 허물도 기억하시고 벌을 주려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죄악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온전한 공의안에서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의 법칙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라고 하는 이유도 결국 우리가 궁극적으로 행복해 지는 길이 바로 사탄의 법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실 죄악으로부터 출생한 자들이라서 죄성이 있습니다. 죄는 누가 시키거나 강제하지 않아도 아주 쉽게 행해집니다. 죄란 것이 궁극적으로 우리하고 잘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죄성을 뿌리부터 뽑아 버리고 깨트려 버려야 만이 너희가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10월 12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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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하나님의 법도를 잘 지켜나간다면, 만사형통하지 않을까 생각되는 설교문입니다. 반대로 일이 꼬이고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적어도 기됵교인이라면 말이지요. 결국 누구의 편에 서 있을 것이냐 로 결론 내려진다면, 우리는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의 길로 살아가는 것. 그런 날들이 늘어가는 것이 어쩌면 행복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 2014.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