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예수를 만난 사람들 (누가2:21-)
우리가 지난 주에 성탄절을 보냈지만 실제로 우리 주님이 정확하게 몇일 날에 나신지는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동방 정교회에서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날짜에 성탄절을 보냅니다. 동방정교회의 성탄절은 1월7일 입니다.
12월25일이 맞는지 1월7일이 맞는지, 아니면 둘다 틀렸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통대로 12월25일을 성탄절로 보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공생애 이전 삶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 있습니다. 과연 30살이 될 때까지 뭘하셨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외경에 몇몇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그런데 그 중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성경에 나왔는 것이 딱 두 가지입니다. 한 개는 마리아가 정결례를 받으러 성전에 가면서 함께 가셨을 때하고 또 한번은 12살 유월절 때 성전에서 랍비들과 앉아서 성경을 공부하는 장면입니다.
둘 다 성전에 계실 때의 모습이지 사가에서 어떻게 하셨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앞서 우리는 주께서 나실 때에 베들레헴 들판의 목자들이 경배를 했고 또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찾아온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께서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난지 40일 만에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다른 모든 유대인 산모들과 마찬가지로 정결례를 하러 성전에 간 것을 보게 됩니다. 이때 아이가 첫 태에 첫 아들이라고 하면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된 자로 드리는 헌신례를 같이 행합니다. 그래서 함께 간 것 같습니다.
순서상으로는 동방박사들이 주께 경배하기 이전일 것입니다.
1.할례를 받으심
할례는 사실 죄인된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됨을 기념하는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아닌 주님에게는 필요 없는 예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할례를 받으신 것은 스스로 인간이 되어 죄인들을 위해 피 흘리실 것을 나타내심이며 또한 스스로 하나님의 율법아래 들어가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할례를 하게 되면 피가 나게 됩니다. 이것을 보고 어떤 이는 그리스도 구속사역을 위한 첫 번째 피흘림이라고 거창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두 번째는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지요.
팔일이 되어서 할례를 행하고 난 다음 제일 먼저 한 것은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한 것입니다. 그전까지 주님에게는 이름이 없었겠네요. 예수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에게는 가장 알맞은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주의 천사가 성탄 이전에 계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이름을 예수라고 짓는 이들이 한국에는 많습니다. 부모님이 주신 이름 말고 ‘재림 예수’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글들이 요즘 많이 보입니다. 기가 찬 일이지요. 심지어는 재림 예수교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더 망령되이 스스로를 하나님으로 칭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넘어서 황당하게 ‘어머니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도 이십만의 교도를 끌어모았다니 도데체 그 동네에 가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율법에 의하면 산모는 아들을 낳으면 7일 동안 부정하고 그 후에도 33일 해서 총 40일을 집에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40일이 되면 비로소 산모의 정결례를 행하기위해 성전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때 산모가 낳은 아이가 첫 태에 첫 아들이라고 하면 그 아들은 주의 거룩한 자로 구별되어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례를 행하게 됩니다.
실제로는 장자들 대신에 레위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대신 장자들은 은 5세겔을 성전세로 드림으로 하나님께 봉헌된 자라는 것을 표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어린양이나 아니면 비둘기 한쌍으로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요셉은 비둘기 한쌍으로 제사를 지내려한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양은 비싸고 비둘기는 싸니까 요셉은 비둘기로 제사를 지내려고 한 것입니다.
2.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자, 이렇게 되어서 성전에 올라온 주님에게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갑자기 본문에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다고 나옵니다.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이고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고 합니다.
여기서 의롭다고 해서 이 사람이 진짜 의인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인간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경건한’ 이란 말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종교적 의무에 투철한 이란 말입니다. 결국 여기서 말하는 뜻은 그가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게다가 그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다’는 것은 메시야가 오시기를 고대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그위에 계시더라’는 말은 조금 깊은 뜻이 있습니다.
원래 성령은 성경에서 주로 ‘프뉴마’로 쓰입니다. ‘바람’ 또는 ‘호흡’이란 뜻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성령님을 지칭할 수 있는데 본문에서는 여기에 ‘하기온’이란 말이 더 쓰여져 있습니다. ‘신적 존재에게 다가갈 수 있는 자질을 가진, 하나님께 드려진’의 뜻을 가집니다.
그래서 이 말을 직역하면 그리고 ‘영이 그 위에 거룩한 상태로 머물러 계셨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그 사람의 위에 계속해서 머물러 계셨다면 그가 한평생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에녹의 상태와 비슷한 사람입니다. 지금도 이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시므온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완벽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한가지 성령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26절에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여기서 ‘지시’는 ‘묵시를 찾는 자에게 응답하다, 하늘로부터 가르치다’의 뜻입니다. 그는 한평생 성령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그를 찾고 묵상하며 성령의 지시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이런 상태라면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아버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버지, 이거는 이렇게 해야 합니까?
얘야, 이건 이렇게 해야지. 아니 그렇게 하면 안돼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보호 속에 있다면 우리는 걱정할게 없습니다.
이 사람은 아마 일생동안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가 그렇게도 고대하며 약속받았던 메시야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원문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라는 의미입니다. 시므온은 메시야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는데 이제 그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전에 들어갔다가 메시야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들어갔다가 그는 그렇게나 일생동안 고대하던 메시야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의문을 가집니다.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만난건 그렇지만 어떻게 그가 구주이심을 알게 되었을까요?
얼굴에 메시야라고 쓰여져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시므온은 그 아기가 구세주임을 알게 되었을까요?
혹시 아이의 얼굴에 환한 광채가 났습니까? 아니면 머리 뒤에 후광이 비춰졌나요?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마 성령께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네가 여기로 들어가면 아기를 만날터인데 그가 바로 네가 고대하던 하나님의 메시야다’
성령의 메시지를 듣기위해서는 그가 항상 성령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묵시를 갈구해야 합니다. 평소에 세밀한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서는 아무리 은밀한 중에 말씀하실지라도 들을 수 있게 항상 우리의 영적인 안테나를 하나님을 향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귀를 열어 두어야 합니다.
세상의 온갖 소음과 욕망의 소리보다 앞서서 주의 음성을 들을 수있도록 항상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3.만나고 난 후에
시므온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성전으로 들어오는 아기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를 양팔로 정성스럽게 안고서는 말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시므온은 하나님을 일러 ‘주재’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주’라고 번역하는 ‘퀴리오스’와 비슷한 말이기는 하지만 종의 입장에서 절대적인 주권과 능력을 가진 분에 대해서 사용하는 존경심이 깃든 매우 강력한 단어입니다.
그는 여기서 ‘이제는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제가 좀 웃긴 이야기를 한번 해볼까요?
우리들은 입에 달고 삽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어서 천국에 가서 주를 뵙기를 원합니다.’
그런데요 막상 우리는 죽기를 싫어합니다. 아무리 천국이 좋다고 해도 그래도 여기서 사는 것이 더 좋습니다.
가령 시므온은 주를 만나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않으리라는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구주를 보지 않는 한 죽을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구주를 뵙는 것은 축복일까요? 아니면 저주일까요?
그렇게나 메시야를 고대하던 그 이지만 막상 메시야를 만나고 난 그의 마음은 정말 환희로만 가득 찼을까요? 아니면 ‘이제 나도 갈 준비를 해야 되는구나!’같은 감상이 들었을까요?
그는 어린 아기인 예수를 안고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아직 예수는 어리고 구원은 멀기만 합니다. 구주께서 이 세상에 나시기는 하셨지만 아직 아무것도 바뀐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시므온은 너무 늙어서 구주가 장성하여 실제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광경을 볼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를 보고서 자기가 이미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주가 하실 일이 구원이 아니라 주님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시므온은 평생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성전을 출입하던 사람입니다.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며 이제나 저제나 하고 고대하였습니다. 이제 그는 구주를 봄으로 더 이상 노심초사하고 기다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주의 구원을 이미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이 땅에 오셨기에 구원은 반드시 이루어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시므온은 어린 아기 예수를 안고 주의 구원이 이루어진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는 이제 주께서 종을 평안히 놓아 준다고 고백합니다.
사실상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내 모든 소원을 다 이루었고 이제는 여한이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성경은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보고 난 다음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는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 그는 아마 주를 보고도 제법 오래 살았을 것입니다. 왜냐면 그가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남았기 때문이지요.
그 일이 뭡니까?
자기가 만난 예수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주의 성령이 자기위에 계시며 성령께서 아기 예수를 만나게 인도하신 일에 대해서 증거해야 하는 사명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만일 그가 아기 예수를 만났고 그 부모들에게 축복했고 아기의 일생에 대해서 예언한 일들을 다른 이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면 심지어 당사자인 시므온이 죽어버린다면 요셉과 마리아의 말에 대한 신빙성이 매우 많이 떨어질 것입니다. 우리 아들을 보고 그리스도라고 했다는 사람은 있는데 그를 성령께서 그리스도라고 알게 하셨다고
내가 구주의 부모에게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고 증거해야 할 사람이 사라진다면 어느 누가 알 것인가 말입니다.
시므온은 주를 만났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아무 기반도 없는 주의 사역을 위해 그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는 틀림없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라고 말이지요.
‘주의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신다’는 말을 우리는 이제 여한도 없으니 천국으로 가렵니다와 같은 말로 해석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이제 후로 시므온은 더 이상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구주를 만날지 노심초사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주를 만나서 주의 부모에게 가슴 아픈 예언을 해야 할 책임도 없어졌습니다. 이미 했기 때문에.
이제 그에게 남은 의무와 책임은 없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책임이 아니라 책임을 다 이룬 이가 할 수 있는 자랑입니다. 뿌듯함이지요.
이제부터 시므온은 아무런 근심 걱정없이 동족 유대인들을 위하여 애타게 눈물 흘릴 필요 없이 행복한 여생을 보내면 됩니다. 주의 구원을 보았고 메시야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주가 하실 것이므로 그는 이제 그를 만난 사실을 증거하고
그가 맛본 기쁨에 대해서 증거 하면 됩니다. 증거를 하려고 하면 증인이 있어야 되는데 그가 죽어 버리면 증거가 안됩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는 기쁨으로 증거할 일만 남은 것입니다.
계속해서 시므온은 요셉과 마리아를 축복하고 말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실컷 축복해놓고 지금 시므온이 하는 말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와 같습니다.
주께서는 구세주를 받아 들이지 않으려고 스스로 섰다고 생각하며 교만하여 꼿꼿한 이들을 넘어 지게 하실 것이고
인생에 실패하고 죄 때문에 넘어져서 좌절하고 애통하고 있는 이는 세우실 것이랍니다.
그리고 구주는 세상의 비방을 받으실 것이랍니다. 게다가 그 아들을 지켜보는 마리아의 마음이 너무 슬퍼서 마치 칼로 찌르는 것 같을 거랍니다.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진실을 드러냄으로 세상의 배척을 받을 것이랍니다.
황당합니다. 구세주로 오신 분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한 시므온은 정작 구세주의 사역이 가시밭길이 될 것이고 주의 사역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받을 것임을 이야기합니다.
이래서야 구세주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아이의 앞날에 대한 장밋빛 예언도 없고 황금빛 미래도 없습니다.
고통에 슬픔만 있습니다. 게다가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주 때문에 넘어지는 자들도 있고 ........
4.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시므온이 떠나고 난 뒤 이번에는 안나라는 여 선지자가 구주를 만나게 됩니다. 이 여인은 과부된지 무려 84년 이랍니다. 남편과 7해 동안 같이 살았으니까 당시의 일반적인 관례대로 14살에 결혼했다고 해도 무려 104살입니다. 물론 더 늦게 결혼했다면 나이는 더 많겠지요. 성경의 표현대로 매우 늙은 여인입니다.
신앙을 떠나서 인간적으로도 매우 굉장한 사람입니다. 헬라어로 ‘안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는 ‘한나’입니다. 뜻은 ‘은혜, 은총’입니다. 이 여선지자가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에 금식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섬겼다고 합니다.
물론 주야에 금식했다고 해서 80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금식을 많이 했다는 말입니다. 이 여자가 젊어서 과부가 되었다는 것은 안나라는 여인이 매우 가난했음을 나타냅니다.
왜냐면 ‘과부’라는 말에 이미 ‘곤궁하다’란 뜻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는 가난한 이를 나타내는 관용어구였습니다. 그러나 과부라는 말에는 ‘헌신된’이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과부이기 때문에 남편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헌신되었다는 뜻입니다.
아마 이 여인은 곤궁했기에 더 주님께 열심을 내며 섬겼을 것입니다. 가난해서 먹을것이 없었으므로 금식을 더 많이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홀로 되었기에 오로지 하나님께만 의지했을 것입니다.
요즘 남편과 사별하고 독신으로 수절하는 여인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도 이런 여인은 좀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나오미의 며느리인 룻도 재혼을 하쟎아요.
그래서 남편과 사별하고 독신으로 하나님에게 헌신된 여자는 존경의 대상이었답니다. 이 여선지 안나 역시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양할 때 그곳에 있었습니다. 여선지 안나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 앞에서 이 아기가 메시야임을 말하며 이스라엘의 구속을 감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원문을 자세히 살피면 이 여인의 감격과 기쁨이 굉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세요, ‘감사하고’란 말은 계속해서 반복하여 감사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고 ‘말하니’란 말에도 역시 계속해서 말했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문법적으로는 미완료 과거라고 하는데 이렇게 사용하면 계속해서 반복한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 구주를 보내심을 감사합니다. 이 아이는 메시야이십니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계속해서 말한 것은 그녀가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하여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무려400년동안이나 이스라엘 땅에는 선지자도 없었고 당연하게도 하나님의 계시도 없었는데 이제 드디어 암흑의 시대가 깨지고 구주가 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쁘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려 100년을 넘어 산 이 여인에게 구세주를 만나도록 하셨고 사람들 앞에서 이 아이가 메시야임을 선포하게 하신 것입니다.
육신의 일을 잊고 성전에서 무려 84년을 지낸 여종은 육체가 쇠할수록 영적으로는 더욱 민감해지고 하나님께 깊이 몰입해있으므로 아기 예수를 보는 순간 그가 메시야이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백년 동안 주를 섬기며 성전에서 기도하고 섬긴 여종의 노고에 보답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남녀종들이 주를 알아보고 감사하며 사람들 앞에서 그가 구주이심을 증거한 것입니다. 아기는 율법에 정한 모든 규례를 다 지키고 고향으로 돌아갔답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의 고향이 아니라 마리아와 요셉의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5.무엇이 감격이고 기쁨인가?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시므온과 안나가 성전에서 정결례와 헌신례를 행하러 온 주님을 만나고 감격하여 하나님께 기뻐하며 찬양하고 사람들에게 선포한 일들을 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우리는 한가지 의문점을 가집니다.
도대체 이들은 무엇이 기뻤을까요?
그들은 주님을 만났고 그를 안았지만 실제로 그들에게 주어진 축복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어떤 선물도 받지 못했습니다.
시므온도 시므온이지만 안나라는 여인은 금식을 주야로 할 만큼 가난한 여인이었는데 구주를 만남으로 그에게 밥 한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제 성탄절이 지났는데 주님을 경배한 사람들 동방박사들, 목자들, 시므온과 안나
이 사람들은 주님을 만나고 경배함으로 기뻐했지만
감격에 겨워 소리 질렀지만 솔직히 이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주기만 했고
흥분하고 기쁨에 겨워 소리 질렀지만
아이의 부모에게 축복하고 예언했지만
사람들에게 그가 구주임을 선포했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관점으로는 이해가 안되지만 이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어떠한 약속도 받지 못했음에도 기뻐하고 감격합니다.
단지 구세주를 경배하고 그를 보았다는 사실만으로.
이게 바로 성탄의 기쁨입니다.
성탄은 그런 것입니다.
섬기러 오신 주님을 본받읍시다.
낮고 천한 자리에 오신 주님을 본받읍시다.
받는것에서 기쁨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에서 기쁨을 찾읍시다.
받아서 기쁜 것이 아니라 구주를 이 내손으로 안아보았다는 영혼의 감격자체로 기뻐합시다.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고 경배했다는 자체로 기뻐합시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갈 때 성령의 역사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가 내 머리위에서 나를 이끄시고 보호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물질에만 쏠려있는 나의 눈을 돌이켜 영적인 일도 돌아 봅시다.
우리가 아기 예수를 만난 것은 그가 왕이 될 때를 대비하여 미리 도장을 찍으려 함입니까?
그가 세상을 정복했을 때를 대비하여 한자리를 차지하려는 욕심 때문입니까?
무얼 얼마나 얻게 될까를 생각하지 말고 내가 무얼 얼마나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십시오.
황당합니까?
내가 아낌없이 사용하면 나의 일용할 양식은 계속해서 늘어납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나의 지경과 분깃이 늘어나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줘도 줘도 벌려논 사업이 너무 많아서 모자란다면 주께서는 더 주실 것입니다. 줘도 줘도 남 줄 줄을 모르고 나 혼자 잘 먹고 잘살려고 창고에 쌓아두면 주께서는 그 물질을 흩으실 뿐만 아니라 다른 충실한 청지기에게 옮기실 것입니다.
성탄은 이제 지났습니다.
그러나 주의 성탄이 우리에게 준
낮아짐과 섬김의 자세는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이 해가 다 가려면 몇 일 남았습니다. 이 해 안에 더 좋은 일을 하고 내년에는 좀 더 멋진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년에는 주께서 믿고 맡길만한 더 성실하고 충성스런 주의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12월 28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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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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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무엇으로 기뻐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는 것에서 기쁨을 얻는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니다. 잠시 읽고 있던 약한 자의 친구라는 책을 봅니다. 거기에서는 대접하는 사람의 중요성에 대해서 언급하는데요. 우리가 무엇인가를 줄 때, 그 때 주는 사람에게도 회복이 일어나고, 감동이 일어난다는 표현이 존재합니다. 즉, 바꿔 말한다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받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사실은 주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축복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 복 받은 사람은 주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새해에는 복 있는 사람이 되어서, 교만하고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사람들에게 선물할 수 있는, 주는 것을 자랑할 수 있는 신나고 즐겁고 행복한 인생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015년 1월을 맞이하여 / 시북 덧붙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