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교회의 사역(마태4:23-25)/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5. 1. 25. 07:50

 

교회의 사역 (마태4:23-25)

 

아직 새해가 시작 된지 한달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교회의 나아갈 방향 같은 걸 많이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은 우리 주님이 하신 기본적이고 중요한 세가지 사역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 이전에 설교를 한 적이 있지만 그걸 보지 않고 전혀 새롭게 성령의 주시는 감동으로 작성했습니다. 어느 정도나 다를지....

 

오늘날 한국교회의 타락상과 세속화를 보고 교회를 갱신해야 한다느니 개혁해야 한다느니 하는 목소리가 드높습니다. 그런데 그런 소리들은 제가 철들 때부터 있어 왔지만 교회의 세속화와 부패는 점점 심해졌지 전혀 개선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갱협을 갱신해야 한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습니다. 뭐 그정도로 지금 한국교회가 심각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초대교회로 돌아가려는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서는 , 우리 주님이 처음 교회를 세우실 때는 무슨 사역을 주로 하셨을까요?

교회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합니까?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무얼 해야하지요?
교회의 일 중에서 중요한게 뭐가 있을까요?

 

사람들에 따라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다 다릅니다.

어떤 이들은 선교를 중시하고 , 어떤 이들은 사회봉사를 중시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전도를 중시하고 , 어떤 이들은 성경공부를 중시하고
어떤 이들은 가정사역을 중시하고
어떤 이들은 각종 프로그램들을 중시합니다.

 

그런가하면 여전히 성령운동을 중시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뭐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한때는 찬양사역이 중시되었는데 이제는 약간은 유행이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사람들 마다 중시하는게 다릅니다. 좋아하는 것도 다릅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이것 저것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듯이 강조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 주님이 갈릴리에서 사역하실 때 하신 일들이 나옵니다.
23절에 우리 주님은 “가르치시고...전파하시며 ...고치시니”
그래요, 우리 주님이 하신 사역은 크게 세가지입니다.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제 얘기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교회들) 오늘날 고치는 사역은 잘 못합니다. 그만큼 우리들의 영성이 떨어져서 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병원에서 그걸 담당하니까 우리가 고치는 것에 치중하지 않아서 일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대부분의 교회에서 고치는 것은 잘 못합니다. 어쩌면 성령의 역사를 믿지 않아서 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은 잘하느냐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그게 잘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잘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주님의 사역을 흉내는 내지만 제대로 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더 주님의 사역을 제대로 잘해보고 싶습니다. 주님의 제자된 우리들은 선생님의 발자취를 따라야하는데 당연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은 말씀드렸다시피 어렵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우리 주님의 사역에 대해서 자세하게 한번 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1.가르치시며
우리 주님이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하신 제일 첫 번째 사역이 바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사역.
이 가르친다는 말은 뒤에 나오는 전파하는 것과는 약간 다릅니다.

 

우리 주님은 온 갈릴리를 두루 다시시면서 유대인의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요세프스에 의하면 당시 갈릴리에는 200여개의 성읍과 촌락이 있었고 무려 300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답니다. 요세프스는 아무래도 유대인으로서 로마인들에게 유대를 조금 멋있고 큰나라로 포장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보니까 과장이 있을 수는 있지만 갈릴리 그 좁은 땅에 정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 전체도 정말 좁은 땅인데 그 중에서 갈릴리는 정말 작은 땅입니다. 그런데 그 척박한 곳에 300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바글댄다고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이 정말 살기가 어려울 겁니다.
우리와 비교를 하면 쉽게 알 수 있는데 우리나라 경상북도보다 이스라엘 전체의 면적이 더 작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땅은 숲과 물이 풍부하지만 이스라엘은 나무도 별로 없고 물도 없고 척박한 땅입니다. 그렇게 생각해보시면 갈릴리 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힘들게 살았는지 상상이 가실 겁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자들의 땅에서 품삯을 받으면서 농부로 일했고 어부나 목수는 그래도 제법 형편이 괜찮은 셈입니다.
그 가난하고 척박한 지역에서 주님이 하신 사역에서 제일 첫번째가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다가 바로 회당에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빵일 것 같습니다. 갈릴리를 두루 다니다보면 가난하고 약한 이들의 참상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들에게 먼저 빵을 주신게 아니라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건 바로 이겁니다. 교회는 결코 사회사업을 목적으로 하는 봉사기관이 아니라는 겁니다. 교회가 이웃을 사랑해서 여러 가지 사회사업도 하고 가난한 이를 위해서 도움도 주기는 하지만 교회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서 안식하며 힘을 얻는 곳입니다.

 

저 역시 이웃을 위해서 섬기지만 하나님이 없다면 그건 교회가 아니라 자선단체일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없이 먼저 자선사업부터 하는 곳이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역시 하나님 때문에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없는 사랑은 의미가 없습니다.

 

회당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성전에 갈 수 없는 이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성경을 낭독하며 성경강해를 듣는 곳입니다. 성전에 갈 자격이 없는게 아니라 너무 멀거나 돈(여행비)이 많이 들어서 성전에 가지 못하고 자기 동네에 회당을 만들고 그곳에서 신앙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회당은 처음 바벨론 포로시절에 만들어 졌습니다. 먼 만리타향에서 고국의 성전으로 갈 수 없는 전쟁포로들의 후손들이 모여서 신앙교육을 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던 곳입니다. 우리 주님이 제일먼저 한 사역이 바로 그 회당을 돌면서 말씀을 가르친 것입니다.

 

가르친다는 말은 ‘교훈적인 설교를 하다, 교사가 되다, ~에게 교훈을 전하다’는 뜻으로 ‘성경을 쉽게 풀어서 가르치고 성경의 원뜻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성경의 내용을 정확하게 가르치고 성경의 참뜻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주님이 가장 중점적으로 하신 사역이 바로 이겁니다. 잘못알고 있는 율법을 재해석해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서 있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서 있는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 때문에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격분했던 일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주님의 성경해석은 당시의 기득권자들을 화나게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성경해석이 진실로 하나님의 뜻을 표현한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개신교는 말씀중심의 종교입니다. 카톨릭이 의식 중심, 전통 중시의 교회라고 한다면 우리 개신교회는 말씀 중심, 성경 중시의 교회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땅의 교회들은 말씀을 등한시 합니다. 성경을 전혀 중시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가라하면 가고 말씀이 서라 하면 서는 것이 개신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 이상 성경말씀대로 살지 않습니다. 오직 성경을 표방한 우리들은 어느순간엔가 인간의 전통과 인간의 이성에 더 크게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본성이 눈에 보이는 것에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거대하고 웅장한 예배당은 그 자체로 뭔가 있어 보입니다. 예배당뿐만 아니라 거대한 나무와 바위 앞에서 복달라고 빌었던 우리네 선조도 다 눈에 보이는 것에 취약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불교도들은 거대하고 화려한 불상을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고 만질 수 없는 말씀을 중시합니다. 물론 말씀자체가 아니라 말씀을 준행하는 것을 중시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점점 눈에 보이는 것, 손을 만질 수 있는 것을 중시하다 보니까 순순하게 말씀만을 듣기를 지겨워합니다. 그래서 말씀은 조금이고 대부분은 만담으로 떠들썩하게 웃기다가 끝이 납니다. 아니면 자기의 신변잡기를 이야기합니다. 이런게 조금씩 썪이는게 나쁜건 아닙니다. 설교를 재미있고 실감나게 하기위해 이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주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그냥 주제를 하나 정해서는 이 구절, 저 구절을 마구 갖고 와서 자기의 설교내용을 뒷받침합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성경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말하고 성경은 이를 뒷받침하거나 합리화해주게 됩니다. 교인들은 목사가 자기의 입맛에 맞는 말씀만 선택해서 하는 설교를 듣고 한껏 기분만 붕 떳다가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설교에서 말씀이 천대받기에 오늘날 성경공부를 표방한 많은 이단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게 되는 것입니다. 신천지에 간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이 기가 막혀요”
그런데 미안하지만 그 사람은(?) 성경원어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성경의 원뜻을 얼마나 잘 풀이할 수 있을까요?

 

우리 주님은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는 문제로 서기관들과 율법사들과 지긋지긋하게 토론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지긋지긋하게 싸우셨습니다. 장로의 유전과 인간이 전통이 성경을 변경하는 일을 가지고 화를 내셨습니다.
그래요, 우리 주님이 가장 먼저 하신 사역이 바로 성경을 바르게 해석해서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이성과 필요로 변개된 것이 아닌 하나님이 말씀하신 원뜻을 알기 쉽게 풀이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의 첫 번째 사역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주님이 하신 사역은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는 것입니다. 전파하는 것은 가르치는 것과는 달리 기존의 신자가 아닌 이에게도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전파는 어떤 메시지를 공적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말로 전파는 본래는 선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것이 말씀을 사모하는 기존의 신자들에게 성경을 자세하게 풀어서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면 전파는 천국 복음을 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 이들에게 회개와 천국이 이땅에 임했다고 하는 기쁜 소식,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가르치는 것이 성경공부라면 전파하는 것은 설교라고 할 수도 있고, 가르치는 것이 신자들에게 하는 것이라면 전파하는 것은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불특정 다수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전도가 아니고 설교라고 하는 편이 더 가깝습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이 설교를 듣고 복음을 받아들여서 전도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럼 우리 주님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전파 하셨을까요?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천국 복음을 풀이한다면 ‘나라의 좋은 소식’입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왕국의 좋은 소식’입니다. 왕국에는 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왕은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런데 왕국의 좋은 소식이란 무엇입니까?

 

이제까지 천국에서만 이루어졌던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주께서 이땅에 임하심과 더불어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기 시작했다는 소식이야 말로 천국 복음인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에게 기쁜 소식인 이유는 하나님의 통치가 자비와 은혜와 사랑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주시는 멍에는 가볍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다스리는 세상에서는 약육강식의 투쟁과 미움과 분쟁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남을 짖밟아야 하고 항상 음모와 모략이 판을 치고 머리를 굴려도 안심할 수 없는 그런 일들만이 있습니다.
그리고도 궁극적으로는 영원히 멸망할 수 밖에 없지요.

 

사탄은 아주 잠깐의 쾌락과 장구한 고통과 영원한 멸망으로 이끕니다. 그런 세상에서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된다는 소식이야 말로 진정 기쁜 소식인 것이지요. 내가 수고한 것을 내가 먹을 수 있는 나라
나를 뒷받침하는 배경이나 힘이 없어도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쓰지 않는 나라

 

많이 거둔자도 그렇게 많지 않고
적게 거둔자도 그렇게 모자라지 않는 그런 나라
그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나도 이제 그런나라의 백성이 되어 행복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게 바로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사탄이 다스리는 세상에서는 착할수록, 평화를 사랑할수록, 정직할수록 살기가 어렵고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법이 그런 사람들을 보호하고 그런 사람들이 보다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정직한 자가 정직함에 대한 보상을 받고
남을 시기하고 중상모략하지 않아도 더불어 행복하게 살 수 있고
힘이 없고 억울한 일을 당해서 슬피 울며 하늘에 절규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는 것이니까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항상 무엇을 입으며 무엇을 먹으며 어디에 살까하며 전전긍긍할 필요 없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가 이루어 지는 것을 보며 의식주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천국이고 하나님의 나라이며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천국은 자기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 떠먹여 주는 세상이라서 더불어 살 수 있습니다.

 

이제 그 놀랍고 자비로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이 바로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천국에서뿐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그 하나님의 통치가 , 그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다는 것이 바로 기쁜 소식 복음인 것이며 우리 주님은 바로 그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 것입니다.

 

그 천국복음에서 유일하게 인간이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면 죄에 대한 회개입니다. 그래서 회개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자부심만 있고 참다운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삶은 없는 이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된 삶에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화목한 삶을 살라고 전파 하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역은 특별히 실천하는, 몸으로 하는 사역이라고 하기 보다는 입으로 하는 사역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마지막 사역은 몸으로 하는 섬김의 사역입니다.
주님이 세 번째로 하신 사역은 바로 고치는 것입니다. 무얼 고치셨는고 하니 백성들 중에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쳤답니다.
단순히 병만 고친 것이 아니라 모든 약한 것까지 고쳤다고 하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신체적인 병과 정신적인 병 그리고 단순한 허약까지도 고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혼 구원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현세에서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이시고 그들도 고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치병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괴롭히는 잘못된 인간의 제도나 구조를 개선하는 일도 포함합니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인간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앞서의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주님의 첫 번째 사역이 병자를 고치고 가난한 이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주님은 그 가난한 갈릴리를 다니시면서 그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베푸셨고 이것을 우리 주님은 자신의 세 번째로 중요한 사역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없는 자선이 잘못된 것처럼 자선 없는 예수도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갈릴리에서 두루 다니시면서 이러한 세가지 사역에 중점을 두셨습니다.
그런데 앞에서의 두가지 사역, 회당에서 가르치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에서는 없는 구절이 세 번째 사역에서는 달려있습니다.

 

24절에 그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져서 각종 병걸린 사람들이 주님에게로 나아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천국복음에 기뻐하고 회개하러 왔다는 기록은 없는데 병자들이 엄청나게 몰려왔답니다.
이게 인간이지요. 이게 바로 신과 인간의 차이점입니다.
주님은 인간들에게 영적인 양식을 먼저 주셨는데
인간들은 육적인 양식, 육적인 봉사를 받기위해 몰려듭니다.

 

본문을 보면 이런 이들도 다 고쳐주셨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 주님이 항상 하신 말씀과 본문을 대조해 보면 답이 나옵니다.
항상 우리 주님이 중시하신 것은 영혼이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흡족하게 해드리는 것이 되고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풍족함에 접붙인바 되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데 우리는 제일 먼저 해야 될 것을 가장 나중으로 놓고 가장 나중으로 놓아야 할 것을 제일 먼저 놓습니다.

 

프로그램을 돌리는 것도 중요하고
가난한 이에게 도움을 베푸는 것도 중요하고
노숙자에게 밥을 퍼주는 것도 중요하고
노래하며 춤추며 악기를 연주함으로 주께 영광 돌리는 것도 필요합니다.

 

해외 선교도 중요하고 가난한 나라에 들어가서 그들을 위하여 병원과 학교를 만들고 공장을 만들어서 도움을 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중요한게 어디 한두개 겠습니까? 제가 미처 들지 못한 사역가운데도 중요한 것이 많습니다. 그러한 사역들의 중요성이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주님이 가장 중시한 사역 세가지는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 세가지 사역을 가장 중시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2015년도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역으로

 

먼저 성경을 공부하고
두 번째로 우리스스로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또 주위사람에게도 하나님의 법이 존중되도록 하고
세 번째로 십일조의 1/3을 가지고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들을 하기로 합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5년 1월 25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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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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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언젠가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삶이란, 우선순위가 명확한 삶이다 라는 것입니다. 우선순위가 분명할수록 우리는 비교적 덜 헷갈리며, 삶을 우왕좌왕 허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처럼 바쁘고 복잡한 세상에 우선순위는 커녕 생각할 여유 조차도 제대로 누리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개신교란 근본적으로 하나님 중심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나아간다면 많은 것을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삶이란 오히려 이처럼 단순해지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 2015.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