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산상수훈2(마태5:2-)/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5. 2. 8. 22:22

 

산상수훈2 (마태5:2-)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도 산상수훈에 대해서 알아볼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주에는 산상수훈의 전반적인 부분과 제일 첫 번째의 계율만 살펴보았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오늘은 두 번째 계율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뭡니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에이, 뭐 이렇습니까?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그 보상이 겨우 위로를 받는 것입니까? 그건 별로 보상 같지 않습니다. 그깟 말로 하는 위로 받으면 뭐합니까?
실제적으로 뭔가 주어져서 그걸 이겨내도록 되어야지!

 

나는 지금 배가 고파 죽겠는데 ‘형제여 배고프지요, 어서 가서 쌀을 사서 밥을 해 먹으시오’ 이런 위로가 위로가 되겠습니까? 결코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위로가 제대로 되려면 쌀을 한 포대 사주고 반찬살 돈도 주고 뭐 이래야 위로가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위로로 현실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좋습니다.
이제부터 이 두 번째 계율에 대해서 좀 더 열심히 살펴봅시다.
먼저 애통은 우리도 잘 알다시피 심히 근심하며 고통스럽게 슬퍼하는 것을 말합니다. 단순히 근심하거나 걱정하는 것을 넘어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애통한 일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그럼 성경본문에서 나오는 애통은 무엇에 대한 애통일까요?

 

의인의 고난에 대한 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는 더 나아가서 사랑하는 의인의 죽음에 대한 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한 애통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죄를 어이할꼬?’‘어떻게 해야 이 죄가 사해질꼬?’하는 애통 말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애통이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이 애통에 대한 위로는 장차 있을 의인의 부활과 천국소망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 때 의인은 그 고통에 대한 아버지의 치하와 상급으로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지? 여기 생명의 면류관이 있다’
지은 죄에 대한 애통은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로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얘야, 내가 너의 회개하는 모습과 가슴을 치며 애통해 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해 주께, 다시는 이런 죄를 범치말고 속죄의 의미로 이러이러한 일을 하고 누구 누구에게 가서 용서를 받고 ....’

 

죄악 세상에서 살면서 압제와 억울함과 약함 때문에 눈물 흘리는 자에게 눈물을 닦아 주시는 주님
무엇을 먹으며 무엇을 입으며 어디에서 살아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염려하는 이에게 위로를 주시는 주님
바로 자기를 믿는 의인에게 위로를 주는 것이 메시야의 사역임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도 역시 최후에 하나님 아버지의 위로가 있을 것임을 소망하기에 현실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좌절하거나 낙망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러한 고난은 결국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위로를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시간이 흐른 후에 위로를 받을까하는 시간의 문제만 남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위로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로는 단순히 말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의인에게 애통을 하게 만든 악한 세력의 멸망과 빼앗긴 행복에 대한 근원적인 회복까지도 보장되는 위로입니다.

 

그러나 이 위로는 안타깝게도 본문에서 미래시제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재에는 그러한 위로를 받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단지 현재에는 장차 내가 위로를 받게 될 것이라고 하는 소망을 가지는 것으로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받는 위로는 소망을 가짐으로 얻는 위로이지만 미래의 언젠가는 실제적으로 고통스러운 현실의 문제가 해결 받는 위로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먼 언젠가는 언제일까요?

여호와의 큰 날을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심판하실 최후의 날을 말합니다. 천국에 가서 아버지 앞에 설 때를 말합니다.
사실 우리가 위로를 받으려고 하면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하소연도 하고 위로도 받고 그럴꺼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지요? 천국입니다. 아버지께서 통치하시는 곳이 어디나 천국이 되므로 그의 위로를 받기위해서는 결국 천국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네요.

 

결국 애통하는 자도 역시 천국에 들어간다는 복을 받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천국시민은 의인의 고통에 애통하며 의인의 고난에 애통하며 자기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계명인 것입니다.
옆에서 의인이 모함을 당해서 죽어도 나만 행복하면 된다고 그 의인에 죽음과 불행에 눈감는 이에게는 결코 하나님의 위로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의인의 고난에 동참했다고 책망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의인들이 이 땅에서 점점 사라지면 결국에는 남아 있는 이들은 악인만이 될 것이며 결국 악인들이 득세한 세상은 문자 그래도 지옥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에 고난에 함께 애통하며 의인에 죽음에 애곡하지 않는다면 의인만이 고통받고 힘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그 피해가 나에게까지 직접적으로 미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피해를 체험할 때에는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어버리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들은 이 세상 속에서 지옥을 맛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의 고난에 애통하고 의인 때문에 애통하며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자가 많아진다면 이땅이 바로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보상이 똑 같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

 

그런데 여기에도 함정이 있습니다. 이미 천국은 이 땅에도 임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죽어서 가는 천국 말고 이미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강림하시면서 임하기 시작한 천국은 우리의 마음 속에, 성도들의 모임 속에, 그리스도의 법이 지켜지며 행해지는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 미래가 아니라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천국이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지요.

 

세 번째 계명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오, 이번에는 제법 제대로 된 보상입니다. 땅 좋습니다. 돈이나 금은보석으로 주면 좋은데 땅도 괜찮습니다. 팔면 돈이 되고 어차피 땅값이야 계속 오르지 않을까요?

 

땅을 얻으려면 온유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가난이니, 애통이니 하면서 질질 짜는 것 보다는 상당히 조건도 준수해 보입니다. 그래요, 예수쟁이가 온유해야지요. 그러면 땅도 받고 참 좋네요. 제대로된 팔복설교 같습니다.
그런데 온유란 무엇을 말할까요?
성질이나 기질이 사납거나 다혈질이 아니고 온순하고 부드러운 사람?

 

여기 온유는 조금 충격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그리스어로 ‘호이 프라에이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성경에서는 주로 ‘가난한’ ‘괴로움을 당하는’ ‘겸손한’ ‘온유한’이란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성도들의 품성을 나타내는 단어로도 쓰였는데 ‘억눌리고 속임을 당하고 착취를 당하나 이에 무방비한 무력한 사람’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은근하고 부드럽고 옥처럼 빛이 나는 그런 사람이란 말이 아닙니다. 그냥 첫 번째의 심령이 가난한 자나 두 번째의 애통하는 자라는 말하고 거의 같은 뜻입니다. 아니 이게 도데체 뭡니까?
우리 주님은 왜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시는 거지요?

 

그리고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하고 ‘괴로운자’ 란 뜻이 어떻게 ‘온유한 자’가 되는 겁니까?
이게 온유한 자가 된 이유는 이렇습니다.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겸손하게 여호와의 도움을 바라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란 뜻이 되는 겁니다. 자기의 것을 다 뺏기면 사람들은 ‘그래, 그럴바엔 차라리 같이 한번 죽어보자!’면서 거칠게 달려 들어서 자기 것을 보호하려 하거나 뺏긴 것을 도로 찾으려 합니다. 그런데도 믿는 자는 그렇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가 외부의 핍박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처절하게 인간적인 방법으로 대적하고 해결하려 노력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바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아버지께서 결코 나를 이대로 억울하게 하실 리가 없어! 아버지께서 나 대신 보복하시고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이야! 그러므로 나는 아버지를 믿어!

 

하나님 아버지를 믿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나에게 다시 주실 것이야!’
‘아버지께서 저 사람에게 복수하실 것이야!’
악당을 보고는 ‘이제 하나님 아버지의 공의를 네가 깨려고 했으므로 너는 큰일 났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만 두지 않으실 것이야’ 이렇게 생각하고 아버지의 일하시는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요, 이러한 외부의 고난과 핍박에 대하여 거칠게 반발하거나 폭력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미움과 복수심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자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애통하고 괴로워하며 고통 받는 자가 여기 ‘온유한 자’라는 말로 쓰인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나를 위해서 나서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며 아버지를 의지함으로 온유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도만하고 앉아 있는 것처럼 보여서 너무 답답합니까?
한심한 사람이라고요?

 

글쎄요, 그런 사람일수록 멘탈이 강한 사람입니다. 주위에 쉽사리 흔들리지 않고 사건하나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굳은 믿음과 소망으로 초지일관 자기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능히 부드러워야 강함을 이긴다는 ‘지유가이극강’이라는 태극권의 원리를 들지 않더라도 ‘인자무적’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더구나 그 온유함의 뿌리가 우리 아버지에 대한 믿음과 신뢰에 있는데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온유한 자에게는 땅을 기업으로 주신답니다. 그렇네요, 과연 재물과 땅을 빼앗기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고난을 받으니까 아버지께서 과연 다시 주시네요.
자, 그런데 땅도 어디에 있는 땅을 주실까요? 땅이야 어디든 팔면 돈이 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요지에 땅을 받으면 더 좋습니다. 옛날에는 물이 풍부한 지역의 논이 제일이었다면 지금은 시내중심가의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는 상업지구의 땅이 최곱니다. 한평당 일억이 넘는 땅도 있으므로 그 정도면 황금으로 도배를 해도 남습니다. 어디의 땅을 주실까요?

 

5절을 보면 그냥 땅을 받는 것이 아니라 땅을 기업으로 받는답니다. 그러니까 회사용지를 받는 다는 말이 아니라 ‘상속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원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냥 막연한 땅이 아니라 ‘그 땅’이라고 합니다. 사실 이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 속에서 자주 사용된 말입니다. 그러면 가나안땅을 주신다는 말입니까? 어차피 마태에게는 유대인들이 주 대상이므로 유대인의 땅인 가나안을 로마인들에게서 뺏어서 돌려 주신다는 말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보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온유한 자가 받을 땅은 현세의 땅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 천국의 땅을 얻는 다는 말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현세의 땅보다는 천국의 땅이 더 확실해 보입니다. 본문의 동사가 미래형으로 쓰였거든요.
게다가 우리는 모두 장차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것을 소망하는 성도들이기 때문이지요.

 

하늘나라의 땅을 받으려면 천국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고 보면 온유한 자에 대한 복도 역시나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뭡니까?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가 보상이 모두 똑 같습니다.
천국에 들어간다.
아니 이게 뭡니까? 괜히 팔복이니 뭐니 하며 거창하게 이야기했지만 결국은 천국 간다는 이야기로 결론난다면 너무 허무합니다.

 

그러나 너무 실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다는 말이 결코 이 세상에서 땅을 얻지 못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실제로 온유함으로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믿음으로 가진 것을 버림으로
땅을 기업으로 얻은 이들은 역사상 많았습니다.

 

미국의 청교도들 보세요. 그들이 차지한 땅은 제 생각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땅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도 받고 저 세상에서도 받고 그러면 좋을 겁니다.

네 번째는 뭔가 실제적인 보상이 있어 보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드디어 하나님이 성도에게 뭔가 실제적인걸 주시나 봅니다. 배불리 먹게 해 준답니다. 그런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는 구절이 영 찝찝합니다.
그냥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른자가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

 

유대인들은 의에 매우 관심이 많았습니다. 유대인들이 관심을 가지는 의는 윤리적인 의이면서 동시에 종교적인 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윤리적인 올바름과 하나님의 정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이 세상의 불의한 현상에 대하여 깊이 탄식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기 위하여 노력함과 동시에 자신의 마음 가운데 깊이 내재한 죄성에 대해서도 깊이 회개하며 오직 하나님의 의만을 사모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말은 다 들어갔는데 여하튼 매우 좋은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리고 목마른 자라는 말은 생명회복의 가능성이 있는 자랍니다. 즉 자기가 주리고 목마른지도 모르는 자는 죽은 자나 다름이 없다는 것이지요. 세상이 지금 형편없이 타락했는데도 전혀 그런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아, 정말 풍부하고 풍족하며 행복하다!’ 이렇게만 생각한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본문의 의에 대입하면 그 채우려는 욕구가 클수록 더 많이 채울려고 노력할 것이며 더 만족한 회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갈망이 크면 클수록 영적 생명력은 더 왕성해 진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람들은 더 많은 것으로  배를 채우려고 하고 갈증을 해소하려 한다는 겁니다.

 

사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도 하지만 역시 육체에 의존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물질문명 속에서 본래 하나님이 주신 선천적인 생기를 다 잃어 버렸습니다. 생령이었던 사람은 이제 단순히 걸어다니는 흙덩이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영이 아니라 눈과 배가 되었습니다. 눈으로 보고 욕망을 품고 배로 넣어서 만족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의에 주리고 목마를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단순하게 배가 부르고 입에 포도주가 달다면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웃이 불행해하고 배고파하며 억울한 일을 당해도 나만 아니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하튼 이렇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그런 사람들은 더 이상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고 배가 부를 정도로 의를 많이 맛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배부를 정도란 말은 단순히 허기를 면하는 정도를 넘어서 차서 넘칠 만큼 먹고 마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배가 불러서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어’와 같은 상황이 될 때까지 먹고 마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미래형으로 사용되어서 미래에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자, 그런데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이 세상에서는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의로 배부르고 목마르지 않게 될 정도가 되기가 어렵습니다. 이 세상은 결코 천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의를 충족하기 위해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아니면 이 곳이 천국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야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고 의에 배부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기 위해서 천국에 들어갈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이미 임하기 시작한 천국이 더 확장되도록 그래서 내가 그 천국의 통치를 받고 천국의 통치 속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행동해야 합니다.

 

결론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보상과 똑 같습니다. 그래도 아직 실망하기는 이릅니다. 여전히 네가지 복이 더 남아 있습니다. 이번 주는 이까지만 해야 되겠습니다. 나머지는 다음 주에 계속 살펴 볼 것입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5년 2월 8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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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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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짧막한 경고 두 가지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악인이 득세하는 비결은 선한 사람들이 침묵하고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고,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 세계를 악한 자의 소굴로 만들어 가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작은 악에 타협하기 시작하면, 그 뒤로는 점점 거대한 악과도 타협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만하면 괜찮겠지. 이쯤이면 되겠지 라는 방심하는 마음 때문에, 우리는 조금씩 괴물로 변해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보면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처음부터 나쁜 세계가 어디 있을까요.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우선 나부터 라는 편안함을 좇아가다보니 어느새인가 하나님의 공의 같은 어려운 이야기는 쳐다보기도 싫어진 것만 같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소소한 빵 한조각이라도 곁에 있는 사람과 함께 나누어 간다면, 우리의 삶의 곳곳이 천국으로 변해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천국을 확장시켜 나간다면 좋겠습니다. 올해에는 그런 멋진 한 해로 가득차 넘치기를... / 2015.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