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산상수훈3(마태복음5:7-10)/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5. 2. 22. 23:39

 

산상수훈3 (마태복음5:7-10)


이제 설도 지났고 잠시 중단했던 산상수훈 설교를 계속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산상수훈의 후반부를 살펴볼 것입니다. 즉 제5복부터 8복까지를 살펴봅니다. 이게 왜 마지막이라고 할 수 없는고 하니 어떤 이들은 11절의 말씀을 새로운 복 즉 제9번째 복으로 여기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산상수훈의 선포를 기념하는 팔복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를 설계한 사람도 역시 11절을 제9의 복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팔복이라고 생각하고 설교합니다.


다섯 번째 복 또는 다섯 번째 천국시민을 위한 계명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성경학자들은 말하기를 본문의 내용과 비슷한 내용은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들이 ‘솔로몬의 지혜서’같은 유대교의 문헌과 ‘클레멘트전서’나 ‘폴리갑의 빌립보 서신’같은 외경에는 자주 나온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훈들도 유대인들에게는 익숙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주님의 말씀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전까지 있어왔지만 사람들에 의해서 본뜻이 왜곡되어왔거나 아니면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을 제대로 지키라고 촉구하신 것입니다.
먼저 긍휼이란 말은 히브리어 ‘라함’과 ‘헤쎄드’에 대응하는 말입니다. ‘라함’의 뜻은 슬픔이나 애통이고 ‘헤쎄드’는 하나님의 신적인 자비를 말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긍휼히 여기는 자는 두 번째인 애통하는 자와 같은 의미를 가지지만 조금 더 구체적이며 진일보한 것입니다. 앞에서 나온 ‘온유한 자’가 ‘애통하는 자’와 같은 의미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 주님은 8가지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한가지만을 말씀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그 한가지의 뜻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표현하면서 조금씩 표현의 강도를 높여나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는 자는 상대방의 처지를 깊이 이해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슬픔을 느끼거나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할 뿐만 아니라 그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실제적으로 행동하여 구체적인 도움을 주는 것까지를 포괄합니다.
이러니까 생각납니다. ‘형제여 배곯지 말고 가서 네 돈으로 빵을 사서 배를 불리우라고 하는게 쓸데없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 기억나실 겁니다.


그래요, “우짜노, 빨리 가서 쉬고 죽이라도 끓여먹고 힘을 내어라”와 같은 약간은 입술서비스적인 말 보다는 돈이라도 한푼 주면서 “이걸로 맛있는 것 사서 먹고 쉬어” 이렇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자를 말하는 것이지요.
마음으로만 긍휼을 베풀지 말고 실제적으로 긍휼을 베푸는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긍휼히 여김을 받는답니다. 그것도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랍니다. 그러므로 남을 도우시고 그들의 어려움을 애통해하며 긍휼을 베푸십시오. 우리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마음이 청결한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입니다.
여기서 마음이란 말은 제일 첫 번째에 나온 심령이란 말하고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외적 경건과 외적 정결에 대해서 내적 정결을 보다 강조하기위해서 마음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은 같은 뜻을 조금 더 강조하기위해서 용어를 약간씩 달리해서 말씀하신거라는 걸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복이 있으라’ 가 8번, 9번 나와서 8복이니 9복이니 하는 것이지 구체적으로 열거된 조건은 비슷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런 ‘마음이 청결한 자’란 뜻은 마음에 더러움이 없고 깨끗한 자를 말합니다. 즉 인간의 죄악된 욕망을 비워버린 ‘심령이 가난한 자’와 같은 뜻입니다. 그래요, 당연히 이렇게 마음이 깨끗해야 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자들은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이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은 아시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봅니까? 하나님의 본질에 대하여 깊이 알게 되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친히 경험하여 하나님을 체험으로 알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즉 제가 항상 말씀드리는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다’의 ‘체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깨끗하고 청결하면 하나님을 보고 느끼고 체험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볼려면 여기서는 어렵고 천국에 가야 되겠지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도 됩니다. 천국시민을 위한 계명이라고 했쟎아요. 그게 바로 이겁니다. 천국시민이 되려고 하면 마음이 청결해야 된다.
그리고 마음이 청결하면 장차 천국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하나님을 체험하고 느끼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입니다.
참고로 옛날 성경은 ‘화평케하는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걸 바꾼다고 성경책을 새로 만들지는 않았겠죠?
‘화평하게 하는 자’는 평화를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냥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한세상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만들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게 결코 진리와 의에 대한 무조건적인 의견일치를 말하는건 아닙니다. 진리를 거스르거나 의를 위태롭게 할 때는 그것을 위하여 화를 내는 자를 말합니다. 의가, 진리가 위협받음에도 그냥 좋은게 좋다고 웃고 넘어가는 일이 결코 화평하게 하는 자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지금 평화가 깨어졌습니다. 생태계의 평화도 깨어지고 국가간의 평화도 깨어지고 사람들 사이의 평화도 깨어졌습니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사람들과 하나님사이의 평화가 깨어졌습니다. 이런 관계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걸 조금 신학적으로 풀이하면 하나님과 죄로 말미암아 원수되었던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는 자라는 뜻인데 쉽게 말하면


죄인된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사람이며
그럴려고 하면 죄를 회개해야 하고
죄를 회개하고 죄를 씻기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필요하고 그래서 예수를 믿게해야 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결국은 인간의 죄된 본성 때문에 애통하는 자가 되고 죄악된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자가 되고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가 되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랍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입니다. 결국은 천국간다는 말이지요. 물론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성도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우리를 성도라고 부르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는 결코 거룩하지 않습니다. 다만 앞으로 거룩하여 지리라고 믿고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거룩하지 않다고 해서 계속해서 죄인이라고 부르기는 그렇지 않습니까?
목사가 단에 서서 ‘성도 여러분’이라고 하지 않고 ‘죄인 여러분’이라고 하면 얼마나 웃기겠습니까? 황당하지요.


다음으로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입니다. 원문상으로 보면 ‘의를 위하여’ 란 말에는‘ 의 때문에’ 라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의를 위하여 라고 한다면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즉 의를 위하여, 의를 이루기 위하여 핍박의 자리에도 적극적으로 들어간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는 앞에서 나온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할 때의 ‘의’와 같은 단어입니다.


다만 본절의 의가 앞에서의 의보다 의미가 더 강할 따름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같은 단어나 비슷한 단어를 사용하시지만 조금씩 조금씩 더 강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소극적인 의에서 적극적인 의로 나아가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의는 윤리적인 측면과 종교적인 측면을 모두 포함하는 매우 넓은 의미를 가집니다. 또한 여기서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말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의 때문에 박해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지요.


어쨌든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네로 때만큼은 아니지만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의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기보다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지요. 사실 이 당시의 예수믿는 이들은 같은 유대인들에게서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소위 말하는 왕따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신성모독의 범죄자?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부도덕한자?

예수님이 당시의 율법 잘 지키기로 소문난 바리새인들과 항상 언쟁하셨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서 되니 안되니 하는 문제로 싸웠쟎아요.


오늘날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그냥 적당히 신앙생활하고 적당히 융통성있게 처신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너무 헌신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 철저히 지키려고 하면 오히려 시기와 비방을 당하고 질투를 받는 그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그렇게 여긴다는게 더 큰 문제입니다.
잘못을 저지르는 이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잘못을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적을 만들어야 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냥 잘못도 덮어 주고, 앞에서는 비위를 맞추며 그렇게 웃으면서 살아야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다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많은 문제들이 생기는 그런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행동의 정당성을 얘기할 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성경은 이렇게 살라고 하신다 ’이렇게 말하지 않고 ‘교회는, 그 교회가 모여 만들어진 총회는 이렇게 결정했다’고 말합니다.


판단의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의 순결성이 훼손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결성을 지키려고 하면 ‘너만 잘났냐’며 시비를 걸고 달려드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복은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입니다. 제일 첫 번째의 복인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와 완벽하게 똑 같습니다.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이지요. 게다가 천국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복이 박해를 이기고 의를 이루려고 힘쓰는 자들의 것이라는 말이지요.


이렇게 산상수훈에서 나온 8가지 계율, 8복을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물론 산상수훈의 내용자체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산상수훈의 팔복이 천국으로 시작해서 천국으로 끝난다고 하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행복하고 잘되고 성공하고 부자가 되고 싶겠지만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부자가 되게 하신다면 우리가 부자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고 저세상에서 행복을 누리라고 하신다면 또 저세상에서 행복을 누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그냥 이 세상의 복만을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저 세상의 복만을 말하고 현세에서의 불행을 이겨내라고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확실한 것은 천국시민이 되려고 하면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면
심령이 가난해야 하고
애통해야 하며
온유해야 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긍휼히 여겨야 하고
마음이 청결해야 하며
화평케 해야 하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면 요구되어 지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말은 여덟가지로 나뉘어 표현되었지만 실제로는 한가지입니다.
주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여덟가지가 표현은 달라도 의미는 비슷합니다. 단지 조금 더 세고 덜 세고의 차이만 있지 대동소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여덟가지 중에서 한가지만이라도 제대로 지킨다면 충분히 천국시민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즉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상급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한다고 해도 주께서 이 여덟가지 상황의 사람들에게 먼저 “복 있음이여”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신들의 상태를 나타내는 복의 상태
유대인들이 그렇게나 원하던 완벽한 솰롬의 상태
그 상태로 우리를 이끄시려고 우리에게 주신 여덟가지 계명, 아니 단 하나의 계명을 잘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복을 받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마음에서 죄악된 생각을 버리십시오.
욕망으로 가득찬 마음을 비우십시오.
그리고 세상의 의인들을 위하여 애통해 하고 의를 이루기 위해 핍박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남을 긍휼히 여기고 의를 베풀려고 노력하십시오.


화평케하기를 힘쓰십시오. 저들을 주 앞으로 인도하고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권면하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천국시민이 반드시 지켜야 되는 8가지 계명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덟가지 복이 된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합니까?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이 궁극적인 복락의 상태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부분적으로 또는 나 혼자만 복받고 잘살려고 하면 결코 그런 삶이 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부패하고 세상은 죄악으로 뒤덮여서 사람들은 서로 싸우고 빼앗고 중상모략하며 서로 끌어내리려고 발악하는데 아무런 힘이 없는 내가 혼자서 복을 받아서 누릴 수 있겠습니까? 내가 가진 복이 오히려 다른 이들의 탐심과 질투심을 자극해서 나의목숨과 안녕을 위협하게 될 것입니다.


옛 중국속담에 보물을 가진 것이 죄라고
어려운 세상중에 홀로 가진 복 때문에 오히려 목숨까지 위협받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나 혼자만 잘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잘사는 사회 곧 지상천국이 이루어 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구현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속에 있는 나도 복락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때까지 너무 개인구원에만 치중했습니다. 그러나 사회가 제대로 하나님의 나라로 구원받지 못한다면 그 안에 사는 개인이 완전한 복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하며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회와 이웃만을 위하는 길이 아니라 나와 내 가족이 잘사는 길이 됩니다.


그래요, 먼저 내 마음의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웁시다. 그리고 나아가 의가 이루어지지 않음에 대하여 애통해 하며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더라도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버리지 맙시다. 세상과 하나님이 화평하게 되도록 노력합시다.
그 속에서 우리가 우리가족이 우리사회가 우리나라가 행복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 하늘에도 계시지만 우리네 마음속에도 계시며
천국은 저 세상에서만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이루어 집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
회개하라 왜냐면 이 땅에서 천국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라는 말씀을 기억합시다.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사람이 되려면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지금부터 주님이 주신 계명을 실천하는 좋은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의 말씀을 지킴으로 이 땅에서도 천국에서 주어지는 복을 누리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5년 2월 22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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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과연 무엇일까를 고민해 본 적이 있습니다. 내 능력과 내가 가진 것으로 무엇인가를 자꾸 시도해 보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주께서 하시는 일임을 인정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님은 설교 중에 예화로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악들을 직접 바닥에 쓸 수도 있음을 재치 있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일부러라도 그러지 않으시겠지요. 그래서 회개하라는 말씀이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기다림이며, 함께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성도가 되어간다면 좋겠습니다. /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