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네 기도와 구제가 상달되어(사도행전10:1-8)/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5. 2. 15. 22:48

 

네 기도와 구제가 상달되어 (사도행전10:1-8)

 

오늘은 저희들이 지금 보고 있는 산상수훈에 관한 설교를 잠시 미뤄놓고 고넬료에 관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사실 기도원에서 이 말씀이 우연히 제 눈에 띄어서 밑줄을 그어놓았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섭리가 이 말씀 가운데 있을 것이므로 이 말씀으로 한번 설교해야겠다고 제가 생각했는데 이번 주에 이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할 때 항상 뭔가 이 말씀이 나에게 주는 깊은 의미가 있을 걸로 믿고 설레는 마음으로 말씀을 준비합니다. 이 말씀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가 과연 무엇이 있을까? 여러분은 기대가 되지 않습니까?

 

먼저 ‘가이사랴’라고 하는 지역에 고넬료라고 하는 로마군대의 백부장이 살고 있었답니다. 이 사람은 ‘이달리야대’라고 하는 천인대의 백부장입니다.
먼저 가이사랴는 당시 베드로가 머물고 있었던 욥바에서 북쪽으로 약50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해변도시로서 로마제국이 유대를 다스리는 행정수도로 지정한 곳입니다. 이 도시는 헤롯이 누가복음2장에 나오는 ‘가이사 아구스도’를 기념하여 기원전 25년부터 10년간에 걸쳐 만든 계획도시입니다.

 

로마의 총독이 주둔하고 있었고 동시에 천명의 로마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입니다. 도시민들은 유대인들보다 이방인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니까 비록 이스라엘의 지경이기는 하지만 비유대인들이 훨씬 더 많은 곳에서 로마군대의 백부장인 고넬료의 집이 복음을 받아 들에게 됨으로써 최초의 비유대인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복음이 이스라엘을 벗어나서 세계인들에게 전해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저는 뭐 이방세계의 첫교회를 세운다느니 하는 역사적 의의를 강조하려고 하는게 아닙니다. 사실 그런건 역사학자에게나 중요하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처음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습니까? 성도들도 ‘그래서 뭐 어쩌라고?’ 정도의 반응을 보일뿐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이 말씀을 설교하려는 이유는 바로 이 구절 때문입니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바가 되었으니”
바로 이 말 때문입니다. 아무런 기약 없이도 하나님의 상 주신다는 약속을 받고 묵묵히 선행을 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이 말씀은 하나님의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기도와 선행을 모두 다 기억하시고 반드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드리는 기도가 상달될까? 우리의 구제가 아버지 앞에 상달될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으시지만 우리의 기도와 구제는 지금도 아버지의 보좌 앞에 상달되어 아버지의 보좌를 흔들어서 우리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베풀다가 낙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이사랴에 백부장 고넬료라고 하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 아니라 이탈리아인이었습니다. 성경에 ‘이달리야대’라고 나와 있는데 아마 성경이 옛날식으로 기록된 것으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이탈리아라는 말입니다. 고넬료가 이달리야대의 백부장인 것을 보면 그는 다른 민족이 아니라 정통 로마군대의 백부장인 것이지요.

 

당시 천인대는 꼭 천명의 군대가 있다기 보다는 600명에서 천명까지의 군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고넬료는 정통 로마인들의 군대편제는 600명이고 외인들의 편제는 천명인 그런 부대의 중간지휘관인 셈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중대장 정도겠지만 실제로는 당시 평민인 로마군인들로서는 일반 보병부터 시작해서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계급이 바로 백부장이랍니다. 아마 천부장이나 그 위로 가려고 하면 귀족계층이 되거나 놀라운 공을 세워야 될 정도이므로 고넬료는 지금 그의 인생의 최정점에 서 있는 셈입니다.

 

이들이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는 이유는 유대가 로마에 반하여 독립을 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로마군인인 고넬료의 입장에서 유대인은 하등하고 어쩌면 적대적인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당시 유대에서는 열심당원들의 반란이 번번이 일어나고 있었고 로마 군인들은 그런 시도를 감시하기 위해 항상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와서 로마를 몰아내고 새롭고도 강력한 제2의 다윗왕국을 건설할 걸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바로 그 메시야로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고넬료같은 로마군인의 입장에서는 예수는 반란 수괴인 것입니다. 물론 당시 예수는 지상에서 계시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가 살아 계신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하늘에서 말이지요. 이건 또 혹세무민입니다. 자기네가 임명한 헤롯이라는 왕이 있는데 새로운 왕은 또 뭐란 말입니까?

 

그런 사람이 기독교인이 된 것입니다. 이는 사실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가장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이 가장 먼저 기독교인이 된 겁니다. 가장 먼저 비유대인 교회를 세운겁니다. 고넬료의 일가친척과 그 집이 바로 교회가 된겁니다.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일반적으로 도저히 일어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에는 뭔가 놀랍고도 복잡한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 과연 그 뒷이야기가 뭐겠습니까?

 

고넬료라고 하는 사람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회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정말 특이한 사람입니다. 로마인들은 대부분 다신교입니다. 저들이 믿는 신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심지어 저들은 황제를 살아있는 신으로 섬기는 이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정말 어렵고도 힘든 일입니다.

 

군인의 특성상 하나님을 믿기가 더 어렵습니다. 군대에서 섬기는 신들이 다 따로 있기 때문에 군대행사에서 이런 신들에 대한 제사의식 때는 어떻게 했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여하튼 이 사람은 경건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경건은 존귀한 분에대한 존경심을 표시하는 행위이며 부모님이나 신에 대하여 의식적으로 취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자신만이 경건한 것이 아니라 그의 온 가족들 심지어 그의 종들까지도 경건했답니다. 성경을 더 읽어보면 고넬료는 유대인의 회당에 참여하며 유대의 율법과 관습을 존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단지 그가 할례를 받지 않아서 이방인이라고 불릴 뿐 그가 하는 행동이나 믿는 것으로만 보면 그는 유대인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을 많이 구제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많다는 표현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그는 식민지 주둔군의 장교로서 백성들을 착취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들을 구제한 것입니다.

 

게다가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냥 한두번 기도하고 마는 사람이 아니라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항상 기도했다’고 직접적으로 표현되어있기도 하지만 ‘기도하다’는 단어가 현재분사로 쓰여서 항상 기도한다는 의미를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고넬료는 정말 항상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도데체 얼마나 항상 기도했기에 두 번이나 항상 기도했다고 강조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습니까?
경건합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두려워하여 방종하거나 범죄하지 않습니까?
이웃을 구제합니까? 그것도 정말 많이 구제합니까?
또 항상 기도합니까?

 

많이 달라는 기도는 많이 하는데
뭐 달라고 간구는 많이 하는데
내것을 가지고 남을 구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역시 자기의 것을 나와 나누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제없는 기도는 어쩌면 우리의 욕망에 대한 넋두리거나
이기적인 욕심으로 정욕으로 하는 기도에 불과해서 결코 하나님이 들어 주실 수 없을 것입니다.

동족도 아니고 피 점령지의 백성들을 구제한 고넬료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구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중에 고넬료는 환상을 봅니다. 고넬료가 기도한 시간은 유대시간으로 제구시입니다. 우리나라 시간으로는 오후3시인데 이때 유대의 제사장이 성전에서 저녁 희생제사를 드렸는데 이 시각에 기도하면 제사장의 희생제사에 참여하는 것으로 여겨져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 시간에 주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제구시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다가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이 있습니다.

 

이때 고넬료 역시 경건한 유대인처럼 기도하고 있었는데 환상 중에 천사가 나타나 두려움에 떨고 있던 고넬료에게 말합니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바가 되었으니”

자, 오늘의 중심 주제입니다.
하나님은 고넬료의 기도만 기억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기도와 구제를 기억하신다는 데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면 기도가 실제 삶에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구제이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구제는 그 자체로 기도이며 믿음이며 하나님을 전하는 전도이며 이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는 증인의 길인 것입니다.
물론 당연히 기독교는 자선단체는 아닙니다. 종교입니다. 그것도 참되신 하나님을 믿는 으뜸가는 가르침이지요. 하나님께 하는 기도는 성도의 기본적인 의무인 것입니다. 그것도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기도를 참된 기도가 되게 하는 것이 바로 구제입니다.

 

구제는 우리의 삶으로 나타내는 산제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구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되게하고 존귀하게 만드는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함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면서 하나님께 기도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가 전혀 아무런 효과도 없는 듯이 보일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깟 기도를 꼭 해야하나하는 의문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하도 답답하니까 사람들이 하는 넋두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절대로 반드시 하나님에게 상달됩니다. 다만 우리의 기도뿐만 아니라 구제도 상달됩니다.
이 말은 기도와 구제가 각각 상달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구제가 동시에 상달된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의 기도가 진실된 지를 나타내주는 또 다른 표징이 바로 구제라는 것입니다.

 

음, 뭔가 말이 안되는 것 같습니다. 내 살기가 바빠서, 여유가 없어서 구제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내가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는 전부 참이라고 외칠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시기만 한다면
나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주시면
내가 구제하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그런 식의 말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당장 제 먹고 살기도 바쁜데 누구를 구제한단 말입니까?

 

그런데요, 하나님은 고넬료의 기도를 기억하신다고 하지 않고 기도와 구제가 기억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뭔가를 달라고 요구하는 기도를 할 때 먼저 그가 아버지의 뜻대로 살았는지를 시험하십니다. 그리고 그 시험에 통과되어야 만이 비로소 뭔가를 주십니다. 그리고 엄밀히 따져서 구제하지 못할 만큼 물질이 없기는 어렵습니다.

 

구제는 하나님이 주신 새 계명을 실천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가장 움직일 수 없는 객관적인 증거가 됩니다.
고넬료가 로마군대의 백부장이기에 백성들을 많이 구제할 수 있었지요?
그래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으면 많이 구제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적게 구제하면 됩니다. 문제는 주의 명령을 제대로 실천하고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솔직하게 자문해 봅시다. 왜 구제하고 기도합니까?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맞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깊이 나 혼자 생각해본다면, 대외용이 아니라 나 혼자만의 생각으로 말한다면 복받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구제하고 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와 구제가 하늘보좌에 상달되고 있는지 아닌지가 모호합니다. 이 기도가 과연 효과가 있는지 이 구제가 하늘보좌에 상달되었는지가 분명치 않습니다.

 

밤낮주야로 기도하고 가끔씩 없는 살림에 큰맘 먹고 구제도 하는데 이게 하나님께 드려진바 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남들은 기도하지 않아도 부자가 되고 남들은 구제하지 않아도 성공하는데 열심히 기도하고 구제하는 나는 잘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구제하는 것에 지칩니다.

 

하나님이 안주실 것 같으면 차라리 내가 있는 것을 아껴 쓰고 혼자 살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고넬료가 기도할 때
어느날 갑자기 주의 천사가 나타나서 너의 그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기억된바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고넬료가 주의 천사를 보고 두려워하기는 했지만 그가 기뻤을 것입니다. 천사의 말대로 그가 행한 것을 보면 압니다. 우리에게 주의 천사가 환상 중에 나타나서
내 기도와 구제가 나의 믿음과 선행이 하나님께 상달되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방법이 잘되었다고
네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올바른 길이라고 주께서 보증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뭐 실제적인 복은 관두고 주의 칭찬 한마디
주님의 인정 한마디라도 듣는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우리의 평생의 기도와 구제가 주께서 기억하신바가 되었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그런데, 주는 환상 중에
꿈속에서, 심지어 말씀으로도 나타나시지 않으시네요.
내가 하는 것이 잘되었다는 말도 잘못하고 있다는 말도 없습니다. 이거 제대로 신앙생활하는거 맞습니까?
회의 가 듭니다. 의심스럽습니다. 이러다가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까지 의심이 확대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힘 빠지고 낙망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제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기도하고 구제하고 한 그 모든 일들을 우리 주께서 분명히 받으시고 기억하고 계신다는 사실.
결코 나의 기도와 구제를 모른다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
그래요,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고 뭔가 간접적으로 내가 엄청나게 잘되어서 확실히 그의 역사를 몸으로 느끼지도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믿습니다.

 

결코 나의 우리의 기도와 구제를 기억하지 않으시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선행을 하다가 낙망하지 마십시오.
구제하다가 낙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버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때가 점점 무르익어가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할 뿐입니다. 그 정확한 때는 알지 못하지만 그분의 신실하심과 자비하심은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때와 우리의 때는 계산방법이 다르기는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께서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를 결코 이대로 두지 않으실 거라는 사실입니다.

 

이제까지 기도와 구제를 열심히 하셨나요?
지금도 하고 계십니까?
잘하였습니다. 잘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쉬지 말고 기도하고 구제도 열심히 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와 구제를 기억하시고 역사하실 것입니다.

 

구제하는 것은 우리의 어려울 때를 대비하여 하늘은행에 저축하는 것입니다. 나의 구제는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이자를 그것도 복리로 불려가며 쌓여서 내가 가장 필요할 때 내가 가장 이익일 때 돌려 받게 될 것입니다.

 

나는 볼 수 없으나 믿습니다. 나는 들을 수 없으나 확신합니다. 왜냐면 나의 영과 아버지의 영이 하나이며 내 속에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세상이 요동하고 세력들이 경동해도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보호와 역사하심을 소망합니다.
올 한해도 기도와 구제를 쉬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며 나아가는 소망을 가지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5년 2월 15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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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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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하나님께서 작은 것 하나까지도 지켜보시고 기억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근사한 일이고, 또 소중한 일이기도 합니다. 작은 일에도 조심하게 되고, 작은 것이라도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것을 아끼고 나눠서 함께 한다는 구제는 실제로 굉장히 어렵다고 느껴질 때가 많았습니다. 욕심이 자꾸 끼어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좀 더 좋은 것들이 참으로 많고, 그것을 가지려고 계속 발버둥 치게 되고... 다른 사람은 관심에서 멀어져가고...

 

그렇지만, 형편이 어려운 이웃을 계속 생각하면서 살아갈 때에, 반드시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믿고 나아간다면 멋진 일들이 함께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대대손손 그렇게 복을 받아 살아간다면 기쁘기도 할테고요. 우리의 모습이 때론 불완전하고, 부족한 점이 있을지라도, 계속해서 기도하고 구제하고 함께 살아간다면 좋겠습니다. / 2015.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