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태복음5:17-20)/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5. 3. 8. 00:31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태복음5:17-20)

 

우리는 요즘 마태복음의 순서를 따라서 우리 주님의 제자교육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지난주까지 산상수훈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지난주에는 소금과 빛된 성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주님은 약간은 다른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러니까 ‘어떤 성도가 되어라’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신 겁니다. 아마 산상수훈을 말씀하시다가 제자들의 반응이 뭔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마치 세상의 혁명가가 된 듯한 시선을 느끼신듯합니다. 주님은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음에도.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성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모세오경을 말하고 ‘선지자’는 대소 선지서들을 말하는 것으로 유대인들이 관습적으로 성경이라는 말 대신에 사용하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십계명 대신에 산상수훈 같은 것을 말씀하시는 주님은 아마 사람들에게서 뭔가 혁명적인 종교인으로 오해받으신 것 같습니다. 새로운 나라의 시민권에 대해서 말씀하신 주님은 마치 혁명가 같습니다. 저 산아래의 무리들과 구별된 산위의 제자들은 마치 자기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완전하게 새로운 계명의 선포현장에 있다고 느꼈습니다. 마치 주님이 기존의 가르침을 폐하고 새로운 것을 전파하는 것으로 여겨진 것입니다.

 

왜냐면 주님의 교훈을 듣는 이들은 아무 생각이 없거던요. 이 사람들은 문자적으로 완벽하게 똑같지 않으면 그게 무슨 말인지를 제대로 알아 듣지를 못했나 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막간을 이용하여 자신이 결코 율법을 폐기하려는 자가 아니라 율법을 보다 완전하게 해석해서 하나님의 뜻을 잘 이루도록 하려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고 율법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간 사랑을 알려 주고 싶었던 것인데 사람들은 너무 오랫동안 장로들의 유전과 통치자들의 자의적 해석에 젖어서
율법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는게 아니라 기득권자들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한 율법을 교육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보는 율법책이 다른게 아니지만 같은 성경을 보고서 해석하는 방식도 다르고 받아들이는 방식도 다르고
또 전혀 다르게 해석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오해한 데에는 예수님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말씀 접근방식이 워낙 새롭고 뛰어났기 때문에 제대로 알아듣는 귀가 없다면 무슨 소린지조차 알지 못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청중들의 수준을 너무 높게 잡은 것입니다. 이를테면 초등학생들을 앉혀놓고 대학원 수업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제자들도 툭하면 주님의 말씀을 오해 해서 헤매는 장면들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시대를 너무 앞서간 천재를 동시대의 바보들이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직접적으로 결코 내가 율법을 폐기하러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고 왔다고 하신 것입니다. 내가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제사장들을 욕하고 비난하지만 그들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라 저들의 행동이 틀렸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언급해야 제자들은 겨우 알아 듣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대상 역시 산상수훈이나 앞의 소금과 빛의 말씀처럼 ‘일반인’들이 아니라 ‘제자’들입니다. 보세요, 일반인들도 아니고 주님과 더불어 생활하며 동고동락하는 이들도 우리 주님을 오해했다는 거지요.

주님의 이 말씀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도 여전히 적용됩니다. 우리 주님은 구약 성경을 폐하신게 아닙니다. 오히려 구약성경을 더 잘 이해하도록 더 완전하게 하도록 하기위해서 새로운 약속의 말씀인 신약을 주신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고 더 잘 알게 하시려고 신약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신약이 앞서는 것이고 중요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구약을 폐하거나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만일 구약의 어떤 말씀을 폐하려고 한다면 신약에 그 근거가 있어야 될 것이고
그것이 사실은 폐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율법을 더 완전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구약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성경해석에 적용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는데 법률의 해석에는 ‘신법우선의 원칙’과 ‘특별법 우선의 원칙’이 있습니다. 이것은 법을 기준으로 재판할 때 옛것보다도 새것을 더 기준삼아야 하고 일반적인 것 애매모호한 것 보다도 특별한 것을 더 우선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신약과 구약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원칙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약에 따르되 신약에 적용규정이 없으면 구약을 참고하고 특별히 하라거나 하지말라는 규정이 없으면 성경의 일반적인 기본정신에 비추어 판단하는 것이 좋다는 거지요.
하하, 그냥 하나의 원칙입니다. 이건 성경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구약이 형식을 중시 했다면 신약은 그 내면적인 정신을 더 중시했다는 정도로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주님은 18절에서 굉장한 선언을 하십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진실로’ 라는 말은 원문으로 ‘아멘’이라는 말이지요. ‘아멘, 내가 말한다.........’

 

우리는 아멘을 기도의 말미나 찬송의 마지막에 사용하지만 우리 주님은 보통 아멘을 맨 앞에서 사용하고 그리고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 많습니다. 우리 주님만의 말씀에 대한 보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확실하게 보증한다. 이런거지요.
천지가 없어지는 때는 예수님의 재림 때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계속되는 한 율법은 결코 폐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본문의 ‘일점일획’중에서 ‘일점’이  헬라어의 ‘이오타’나 히브리어의 ‘요드’를 가리키며 ‘일획’이 히브리어에서 모음으로 쓰이는 점이나 선을 가리킨다거나 하는 것에 의미를 둘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주님의 말씀을 보면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다 이루어 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주님은 19절에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유대의 랍비들은 율법가운데서 반드시 지켜야 되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도 있다는 식으로 가르쳤습니다. 사실상 이런 식의 해석 역시 자의적인 해석입니다. 내가 그 규정을 좋아하지 않거나 뭔가 이성적으로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면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틀렸다거나 무효라고 하기는 곤란하고 적극적으로 지키기도 곤란해서 이런 어중간한 해석이 나온 겁니다. 이런 식의 해석은 문화적인 배경이나 시대적 상황에 맟추어서 하는 상황논리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사람중심의 해석이요 생각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서 특히나 믿음이 좋다고 생각되어지는 신자들 가운데서도 많이 있습니다.

 

성경말씀보다도 자기의 경험과 자기의 판단을 더 우선해서 성경을 끼워 맞추는 사람들
단지 성경을 자기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증거집으로 사용하는 사람들
여기서 한구절 저기서 한구절을 뽑아서 자기의 논리를 포장하는 사람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의 말씀은 이와 같은 자를 지적해서 천국에 못들어가는 것은 아닌데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고 일컬어질 것이라고 지적하신 겁니다.

 

그래요, 그런 자들도 천국에 못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믿는 자가 아니라고는 못한다는 겁니다. 다만 그 중에서는 가장 작은 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의 말처럼 황금보석으로 만든 면류관이 아니라 개털 모자를 쓰게 된다는 그런 식입니다.

 

제가 한달쯤 전에 우연히 정류장에서 다른 교회의 교인 한분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중에 이분이 “교회 건물이 없으면 사람들이 이단이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정색하면서 “누가 그러더냐. 예수님도 건물이 없이 가정교회를 했는데 이 사람들이 주님도 이단이라고 하겠네. 도데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맞냐?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은 전혀 들어 먹지를 않네” 이렇게 말하니까 그분이 할말이 없는지 머쓱해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일년 전에도 똑 같은 식으로 말했고 저도 똑같이 대답했는데 그때는 수긍한 듯 했지만 결국 그 속생각은 변함이 없었던 겁니다. 누가 평신도에게 이런식의 생각을 하게 했을까요? 결국은 성경이 아니라 목사가 그랬을 겁니다.
아마 큰 건물을 가진 교회의 목사가 아닐까요?
자기의 입장에서 말하는 거지요.

 

한때 예배당의 강단을 윗 강단과 아랫 강단으로 나누고 윗 강단에는 함부로 올라 가지 못하고 목사 외에는 장로까지만 올라가도록 한 적도 있었습니다. 아랫강단은 성소요 윗 강단은 지성소라! 누가 만든 법일까요? 성경에는 어디에 근거가 있어서 그랬을까요?

 

성경에서 무어라고 해도 자기의 생각과 판단은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변화된 것처럼 보여도 성경이 이 사람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의 생각대로 성경은 읽히고 해석되어지는 겁니다.
그러다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성경구절이 나오면 이건 별로 중요한게 아니야 이렇게 말하고 은근슬쩍 넘어가거나 자기의 생각을 집어 넣는 겁니다.

 

오늘날 여목사를 인정하는 교단이 많이 있습니다. 뭐 시대에 발맞추기도 하고 현실적 상황에 부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러면 디모데전서 3:2에서 감독의 자격요건을 설명하면서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라고 한 성경은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남편이니 아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일부일처를 지키라는 구절이라고요?
장난합니까? 그 구절에 분명히 적혀 있는 남편과 아내의 구별은 어쩌고요?

 

우리가 그런 식으로 하니까 지금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라 ‘어머니 하나님’을 믿는 이단도 아니고 사교집단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 변칙과 변화가 허용되었는데 이제는 그 허용된 변화가 마치 정설처럼 되고 원형은 오히려 이단으로 몰리고 있는 현실을 한번 보면 우리 주님이 지금 본문에서 하신 말씀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이는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만일 지금 한국교회에 주님이 오신다면 아마 주님은 이단으로 몰릴 것이다” 뭐 그럴지는 모르지만 참으로 씁쓸한 말입니다. 우리는 결코 그렇게 되지 않도록 성경에서 주님이 하신 말을 제대로 알아 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혼자서 막 해석하지 말고 제대로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을 혼자서 통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대로 배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참, 제가 여기서 농담으로 개털모자 얘기를 했지만 분명한 것은 천국에도 차별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차별이라기보다는 상급이라고 봐야겠지만 천국에 들어간 모든 이가 똑 같은 대우가 아니라 분명히 ‘지극히 작다’라고 일컬음을 받는이와 ‘크다’ 일컬음을 받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네 삶이 미래에 대한 상급으로 다 계산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 단순히 예수믿고 천국가는 것에서 나아가 보다 더 하나님을 잘 믿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듯이 당시의 제자들도 그러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본문의 마지막에 약간은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틈 날 때 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비난하셨습니다. 성경본문에도 그러한 장면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역시 주님을 싫어하고 비방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가지는건 쉬운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웬만하면 다 들어갈 것 같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주께서 비난하셨고 책망하셨던 서기관하고 바리새인보다도 못하겠습니까?

 

그런데요 여러분 안타깝게도 우리 주님의 이 말씀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결코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율법을 잘지키는 신앙심이 좋고 경건하며 의로운 이들로 여겨졌습니다.
우리 주님도 사람들의 이러한 인식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너희들이 가장 의롭다고 여기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의로워야 만이 천국에 들어갈 거야”

 

주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비난하신 것은 저들의 외식함을 인하여서지 결코 저들의 율법지키지 않음을 인해서가 아닙니다. 저들은 정말 율법을 지키는 것에는 철저한 사람들입니다. 다만 그 율법이 요구하는 내면적인 사랑이 없어서 그렇지 형식적인 율법준수는 감히 우리들이 따르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저들보다 더 뛰어난 의를 가져야만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은 충격적입니다.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하고 있는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저들이 외식하며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단지 외형적인 율법준수에만 매달려 있음을 비난하신 것입니다.
실제로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도 사랑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율법을 지키고 있다고 하시는 겁니다. 왜냐면 무서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아서 다시 이 나라가 망하거나 내가 패가망신하게 되면 안되니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까봐서 너무 낙심하거나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외형적으로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고 의로운 행위를 함에서는 모자랄 수 있지만 적어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에서 요구하는 하나님 사랑의 정신은 이해하고 구현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관점”
바로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신 율법의 기본 정신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기득권자들이 자기네에게 유리하게 오도한 그릇된 해석을 좇고
우리의 관점에서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해석을 하고
나의 개인적인 호불호에 따라서 성경을 취사선택해서 적용하고

 

시대의 논리나 상황논리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의 박수갈채와 비난에 더 신경쓰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고 은근슬쩍 무시하고 자기의 상황에 맞추어 합리화를 하고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주님은 기존의 것을 폐하고 전혀 새로운 것을 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것의 원뜻을 더 잘 헤아릴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믿기만 하면 천국간다’는 말씀을 굳게 믿고 나가는 것은 좋은데 그 최저점이 바로 우리 주님의 책망을 항상 들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라는 것을 생각합시다.

 

믿기만 하면 모든 죄를 사하고 책임도 지지 않고 의롭다 칭함을 받고
그래서
이 땅에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고 ........이 정도까지 나가면 이단입니다. 주님이 최저로 요구하는 것도 우리네 눈높이에서는 엄청나게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죄인 됨을 깨닫고 겸손하게 주님께 엎드려서 간구하며 회개하며 나같이 부족한 것에게 주신 과분한 은혜를 감사하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뜻대로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나 자만하거나 방심하지 말고 심각하게 하나씩 하나씩 나 자신을 돌아보아 주의 뜻을 지켜나가다 보면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마침내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습니다. 아직 잠깐의 꽃샘추위는 남았지만 오는 봄의 기운을 막지는 못할겁니다.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주신 사람을 사랑하고
나에게 맡겨진
나를 불러서 맡기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해 봅시다.
그렇게 삽시다. 그거면 됩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오늘의 끝 구절과 비슷하지 않나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행위만 있고 마음이 없다고 책망 받았다면 우리는 혹시 마음만 있고 행위가 없지는 않나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웃기는 소립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 믿음을 구체적으로 실제의 삶속에서 나타내어질 것을 요구합니다.

 

기존의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이 갑자기 우리네 의로 번졌습니까?
바로 그것도 주님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의 추가적인 설명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욕했지만 그들이 맹탕 엉터리는 아니야.
적어도 너희들은 내가 비난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는 나은 삶을 살아야 된다. 할 수 있겠니?
하신 것입니다.

 

‘내가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
‘그런게 아니라 아버지께서 원래 이 율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요구한 원뜻을 실행하려고 한 거야?’
‘내가 한 모든 불평과 불만은 결코 기득권자를 죽이고 판을 엎어서 너희로 새로운 권력자를 삼으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구현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야’

그래요, 이게 바로 우리 주님의 뜻이요 그가 구현하고자 한 목표입니다.

 

올 한해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주님의 뜻을 조심스럽게 따라 가는 우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에게 맞지 않는다고 내가 스스로 판단해서 이건 지키고 저건 지킬 필요가 없고를 판단하면 내가 하나님보다 너 높은게 됩니다. 그러지 말고 겸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참조하여 그의 손을 붙잡고 한걸음씩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 끝에 하나님으로부터 크다 일컬음을 받는 성도의 모습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말씀과 더불어 살아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하나님으로부터 “너희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크다”인정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5년 3월 8일 주일 예배


――――――――――――――――――――――――――――――――――――――――――――――――――――――――――――――――――――――――――


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


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아직 추위가 남아 있는 봄날씨에도 사랑의 차를 나누고 있는 여집사님들을 보았습니다. 어머님 같은 분들이고, 언제나 제게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주시는 분들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는 정직히 말해 다소 삐딱한 시선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니 날도 춥고 저렇게 한다고 교회에 한 사람이라도 더 올리가 없잖아요. 교회 일에도 열심을 낼 수 있는 여유가 부럽기만 하네요... 라면서요.

 

그렇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그렇게 교회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일이라도 동참해 보려는 것이 아닐까 하고 이제는 되묻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만 믿고 냉소적으로 동떨어져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고민도 해보고, 더 나은 하루가 무엇인지도 생각해 보면서 적극적으로 행하는 삶이 오히려 더 건강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육신이 약하여 라는 변명 대신에, 힘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행하는 삶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