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역사적 배경과 성경의 진실 (다니엘5:1-32)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란 글자를 우리는 잘 압니다. 벨사살의 연회장 벽에 나타난 손가락들이 쓴 글입니다. 이걸 본 사람들에게 이 손가락과 글자는 공포요 신비요 충격입니다.
벨사살과 귀족들의 연회장은 공포로 물들었고 왕은 “열굴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쳤다”고 합니다.
1.셋째 치리자/성경이 진리라고 하는 증거
벨사살은 지금 그의 귀족 천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 왕궁의 연회장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금 그릇으로 술을 마십니다. 그런데 세상 모든 시름을 잊은 듯이 즐겁게 술을 마시고 있는 왕궁 연회장 촛대 맞은편의 석회벽에 갑자기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글자를 썼습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문제는 그 자리의 아무도 그 글자를 읽고 해석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분명 뭔가 아주 중요한 글귀인 것 같은데 뭐라고 썼는지를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래서 왕은 놀라고 무서워서 부들부들 떱니다. 완전히 흥이 깨어졌습니다. 즐겁던 잔치 자리가 공포의 무대로 변한 겁니다. 뭔가 신의 계시같습니다.
왕은 크게 소리 질러서 갈대아의 술사와 점쟁이를 불러오게 명령합니다.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해석하면 그 사람을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겠답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둘째 치리자도 아니고 셋째 치리자가 뭡니까? 조선시대에 보면 영의정같은 재상을 일러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두 번째 자리란 말입니다. 왕 다음의 권세가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둘째가 아니라 세 번째 자리입니다. 도데체 왜 그렇지요?
그런데 이 말이 바로 이 성경 기록이 진실이란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됩니다. 왜냐면 당시 벨사살은 왕이라고 소개되어 있고 왕으로서 통치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그는 왕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왕은 ‘나보니두스’인데 그는 고레스2세와의 싸움에서 패전하고 실의에 빠져서 통치에 회의를 느끼고 테이마라고 하는 오아시스에 머물렀고 아들 벨사살이 공동 통치자로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에 총리대신의 직위에 올린다면 왕과 태자에 이어 세 번째 자리에 앉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1854년까지 사람들은 벨사살 왕이 실제의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바벨론의 왕들 중에서 벨사살이란 이름은 없었고 마지막 왕은 나보니두스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854년에 한 영국의 영사가 나보니두스가 달의 신에게 바친 신전의 폐허 속에서 몇 개의 점토기둥들을 발굴했는데 그 내용에 “바벨론의 왕인 나 곧 나보니두스가 당신께 죄를 짓지 않도록 해주소서. 그리고 나의 장남이며 사랑하는 아들인 벨사살의 마음에 당신에 대한 경외심이 있게 하소서”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벨사살이 실재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어때요? 성경의 기록은 모두 사실입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네의 지식이 불완전해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까지의 사실과 다른 기록들을 우리는 성경난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난제들은 언젠가는 진실로 밝혀지고 그 배경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2.손가락과 글귀
자, 왕의 명령이 떨어졌지만 바벨론의 어떤 술사나 점쟁이도 그 글자를 읽지 못합니다. 술사니 술객이니 점쟁이니라고 말하지만 이들은 당대의 지혜자 들입니다. 왕의 자문을 맡는 이들입니다. 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모두 들어와도 아무도 해석은 커녕 읽기조차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9절에 “벨사살 왕이 크게 번민하여 그 낯빛이 변하였고 귀인들도 다 놀라니라”
사실 그 글자는 당시의 국제어인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갈대아 사람이나 유다사람은 다 아람어를 사용합니다. 히브리어는 아람어의 방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기껏 글자를 쓴 이유가 뭐겠습니까? 단순히 사람들에게 겁주려고 그 글자를 쓴 게 아닙니다. 뭔가를 경고하기 위해 그 글자가 쓰여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하게도 그 글자를 연회장의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썼을 거라는 겁니다. 그런데 왜 아무도 심지어 지혜자라고 하는 이들조차 읽고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했을까요?
여기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그 글자들이 단순하게 기록된 게 아니라 코드나 암호형태로 기록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둘째로는 수평으로 읽어서는 안되고 수직으로 읽어야 되도록 기록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셋째는 자음만 기록되었고 모음이 없어서 무슨 뜻인지 몰랐다는 겁니다.
성경이 자음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모음이 없어서 정확히 무슨 뜻인지를 모르기에 아버지가 읽었던 방식대로 읽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성경을 가정에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은 손자에게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그 글자가 아람어의 고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래서 소위 지혜자라고 하는 이들이 자기 나라말의 고어를 제대로 모를 정도로 바벨론의 인문학이 침체되었다고 그래서 나라가 멸망할 정도로 문화가 침체된 걸 나타낸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모든 학설이 다 일리가 있습니다.
3.다니엘의 등장과 해석
이렇게 설왕설래하고 있을 때 태후가 잔치 자리에 나왔습니다. 지금 성경은 태후를 왕비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심각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번역입니다. 아마 이 사람은 나보니두스 왕의 아내 니토크리스였을 걸로 봅니다. 그러니까 벨사살의 어머니.
그녀는 예전에 시아버지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해준 다니엘의 실력을 잘 알기 때문이지요. 그녀는 왕궁에 변고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벨사살에게 다니엘을 추천합니다.
‘그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다‘
실제로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꿈을 알아내고 해몽함으로써 왕명으로 모든 지혜자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벨사살이 모든 지혜자를 다 불렀다고 하는데 다니엘은 없습니다.
사실 다니엘은 벨사살이 섭정으로 나라를 통치하면서 권력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벨사살 앞에 서있는 다니엘은 약 85세였을 정도로 늙었기 때문에 벨사살로부터 무시를 당한 겁니다. 그러니까 벨사살이 집권할 때는 75세였겠지요.
아마 벨사살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높이는 느부갓네살이나 그 권위를 인정하는 아버지 나보니두스에 상당한 반감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왜냐면 여호와의 권위를 인정하면 그의 계시인 느부갓네살의 꿈에 결국은 바벨론이 멸망한다는 예언도 맞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버지 나보니두스는 바벨론의 국가 수호신인 벨 신, 말둑 대신에 갈대아 우르지역의 수호신 달 신 나나를 섬긴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아시스 도시 테이마에서 달 신을 섬기며 살았던 것입니다. 벨사살은 그런 패배자 아버지와 달리 나는 바벨론의 국격을 드높일 것이라고 생각해서 다니엘을 배격하고 그의 신인 하나님을 모욕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한 여호와를 의도적으로 짓밟고 조롱함으로써 그의 멸망의 예언이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 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지혜자가 도저히 읽어 내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왕과 귀인들이 공포에 떨고 있을 때 어머니가 나타나서 다니엘을 불러서 물어 보라고 권면합니다.
“네 할아버지 느부갓네살이 그를 모든 지혜자의 어른으로 삼았다. 그런데 그 ‘지혜자 중의 지혜자 에게는 왜 물어 보지 않느냐?”
그래서 마침내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이 죽고 권력에서 배제 된지 13년 만에 벨사살의 잔치 자리에 나와서 왕에게 그 글귀를 읽고 해석하게 됩니다.
사실 웃기는게 다니엘의 바벨론식 이름은 벨드사살입니다. 벨사살과는 같은 뜻입니다. 벨드사살은 벨이여 그를 보호하소서이고 벨사살은 벨이여 왕을 보호하소서이지요. 똑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벽에 쓰여진 글자는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다니엘이 읽은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뜻을 성경에서 바로 찾을 수 있습니다.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온 바벨론의 왕궁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 넣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습니다.
우선 메네는 므나, 복음서에 예수님의 열므나 비유에 나오는 므나가 메네로. 즉 므나는 돈이니까 세어 보는 겁니다.
데겔은 세겔, 이 세겔은 정말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무게단위가 됩니다. 그러니까 달아 보는 거지요.
보통은 므나는 세겔보다 훨씬 큰 가치를 가집니다.
우는 그리고
바르신은 좀 어렵습니다. 물론 ‘나누다’란 뜻으로 절반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성경에 나와 있지만. ‘파르티안’과도 비슷합니다. 페르샤인이란 말이되는 겁니다. 두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예언이 이런식이 많습니다. 표면적인 의미와 그 안에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면 다르게 한번 이야기해봅시다.
만원 만원 천원 그리고 절반.
아니면 점점 작아 진다는 걸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세어보고 달아 보고 그래서 점점 작아 집니다. 마침내 반으로 나누어서 페르샤인에게 나라를 준다는 겁니다.
‘바르신’을 ‘바르시’안 즉 ‘페르시안’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뭐 당시 페르샤인들이 바벨론성을 포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연히 바르신을 바사인이라고 해석할 만 합니다. 결코 별다른게 아닙니다.
4.왜 다니엘인가?
메네는 므나의 고어이며 데겔 역시 세겔의 고어입니다. 유대인들은 원래가 아람인들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람에서 나온 것을 기억하면 그들의 언어는 아람어와 같을 수 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어가 아람어의 방언이기 때문에 아람어의 고어가 유대어에는 많이 살아있었습니다.
우리가 한자를 공부할 때 현재 지나식의 간소화된 한자가 아니라 고대 지나의 원형인 한자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우리의 한자 실력으로 현재 지나식의 간자체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아람사람들에게 아람어는 변했지만 유대에서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라면 고대 아람어로 쓰여진 이 글자의 뜻을 바로 해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고대 아람어를 유다사람들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하나님은 아람어로 계시를 하시면서도 고어를 사용하여 바벨론 사람이 아니라 유대인만이 그 글자를 읽을 수 있게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을 다시 한번 역사의 전면에 내 세울려고 하신건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왜냐면 ‘내일이면 늦으리’기 때문이지요. 내일이면 바벨론이 망하고 페르샤가 패권을 잡기 때문에 하나님은 페르샤가 패권을 잡기 전에 바벨론이 망하기 전에 다니엘을 총리의 자리에 올려 놓을 필요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다니엘이 새롭게 서는 페르샤의 총리가 될 수 있고 그래야만이 다니엘이 고레스를 만날 수 있고 그래야 만이 고레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알게 되고 그래야 만이 고레스가 이스라엘 민족들을 포로에서 해방하여 본토로 돌려보낼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의 섭리를 이루시기위하여 신실한 종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러한 종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나이는 필요가 없습니다. 나이 85세에 다니엘은 다시 한번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페르샤에서 또 한번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에게만 전념하면 그가 우리를 높이 들어 사용하십니다. 늦었다고 한탄하고 포기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바로는 벽에 쓰여진 글자는 읽을 줄만 알면 해석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람사람이 아람의 고어를 모르는 것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글자를 가지고 제대로 된 해석을 하기는 어렵다는 것이지요.
주로 신의 언어, 즉 예언이나 비결 같은 것은 뭔가 은근한 비유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생각이 다르거나, 인연이 아니거나 학문이 깊지 못한 자들이 즉각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방지하려고 합니다. 또 풍부한 상상력이 바탕이 되어야 하며 현실에 대한 올바를 이해가 해석의 근거가 됨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벨사살이 그 나라의 박사와 술객들을 다 불러서 그 벽의 글자를 읽고 해석하게 했지만 해석은 고사하고 읽어내는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은 그 나라의 멸망이 결코 이유가 없는 어쩌다 일어난 사고 때문은 아님을 나타내 줍니다.
바벨론의 박사와 술객들은 하늘의 별을 보고 점을 치거나 아니면 마법을 연구하고 금을 만드는 것을 연구하는 연금술사들입니다. 오늘의 천문학자이거나 예언자. 화학자같은 지식인들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들이 자기 나라의 고어조차 읽을 줄을 모르게 되었다면 이 나라가 얼마나 학문이나 문화적 소양이 떨어져 있는 상태인지를 알수 있습니다.
우리가 고등학교에서 고어를 배운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고어는 어렵기는 하지만 전혀 이해가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결국 언어란 살아있는 것이고 역사적인 것이기 때문에 연관성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현대어와 비슷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 뜻은 고사하고 읽기도 못했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학문을 등한히 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두 번째는 현실을 보는 안목입니다. 이들 벨사살과 왕후와 후궁들과 귀인들은 지금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바벨론은 벌써부터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페르샤와 메대의 연합군에게 전 국토가 점령당하고 지금 수도는 적군에게 포위되어 있습니다. 이미 2년이상 포위된 상태에서 저들은 연회를 베풀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웃기는 사람들이지요. 전 국토를 적에게 빼앗기고 겨우 수도만 남은 상태에서 그 수도마저 포위되어 있으면서 잔치를 베푼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수도가 2년 동안이나 적에게 함락되지 않아서 이들이 다시금 교만해 졌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성은 이중 성벽입니다. 원래부터 이 성은 높고 두껍고 견고했습니다. 그런데 이 성벽을 연장해서 느부갓네살이 증축을 했는데 내벽은 두께가 7.7m이고 외벽은 8.3m가 되었답니다. 그리하여 성벽위를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 두 대가 동시에 지나갈 정도가 되었답니다. 이 성벽의 길이는 무려 27km이고 높이는 14m입니다. 난공불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성에는 무려 10년을 버틸 수 있는 양식이 쌓여 있었다고 하니 벨사살과 귀인들이 기고만장할만합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공격해봐라 이 성이 꿈쩍이라도 하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귀인들을 불러서 잔치를 열었는데 명목은 이들에 대한 위로잔치입니다. 이 귀인들은 실제로 각 지역에 있었던 자기들의 영지를 페르샤군에게 빼앗기고 수도로 도망쳐온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잔치를 여는 겁니다.
처지가 이런데도 불구하고 저들은 전혀 겸손하거나 새롭게 각오를 다지지도 않고 오늘 당장 적에게 성이 함락되지 않음을 가지고 스스로 교만하며 음탕하고 허영에 들뜬 한심한 일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잔치에서 술을 마시기위해 특별히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빼앗아 온 금은그릇을 가지고 와서 그것에다 술을 마십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다른 금은 그릇들이 충분히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지고 온 금은그릇을 가지고 술잔을 삼아 마신 것은 이들이 하나님을 모욕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벨 신은 결코 이스라엘의 여호와보다 약하지 않다는 걸 보여 줄려고 한 것입니다. 왜냐면 벨사살 왕의 이름 ‘벨사살’은 ‘오 벨이여 왕을 보호하소서’란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벨신의 능력이 아직 쇠하지 않았고 저 위대하다고 하는 이스라엘의 여호와보다 훨씬 더 강하기 때문에 그 신전의 금그릇으로 우리가 술을 마신다는 걸 보여 줄려고 굳이 성전의 금그릇을 가지고 오게 한 것입니다.
벨사살은 너무나 어리석습니다. 지금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는데 잔치는 무업니까? 게다가 나라가 망하기 직전인데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을 왜 저지릅니까? 지금 저들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메대와 페르샤의 연합군에게 포위되어 있는데 왜 엉뚱한데 화풀이를 하는 것인지.
그런데 이때 다니엘을 맞이한 벨사살의 말은 기가 찰 정도로 어리석고 교만합니다.
뭐라고 합니까?
“네가 나의 부왕이 유다에서 사로잡아 온 유다 자손중의 그 다니엘이냐”
여러분
이 벨사살의 말에서 뭔가 좀 베베꼬인 것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바벨론에서 정복한 나라들과 민족들이 한두개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나 유다가 그렇게 비중이 있는 나라나 민족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꼭 집어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금은 그릇으로 술을 마시고
또 다니엘에게 말하면서 ‘부왕이 사로잡아 온 유다 포로’냐고 묻습니까?
왕궁에 있는 금그릇이 설마 예루살렘 성전의 금그릇보다 숫자가 적었을까요?
생각해 보세요. 성전에서 신에게 제사지낼 때 쓰는 거룩한 그릇을 사용한다는 것은 자기가 여호와 하나님하고 맞먹는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신과 같이 높였다는 것은 교만의 극치입니다. 이 사람은 이스라엘의 신 하나님에게 큰 원한을 품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래서 다니엘도 그렇게 무시하고 자기가 부탁하는 처지에 있을 때조차 다니엘을 욕보이려 합니다.
다니엘이 그 벽의 글귀를 읽고 곧바로 바벨론의 멸망을 연상한 것은 그가 사물을 직시하는 눈과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혜자는 하나님의 작은 징조를 보고도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냉철하게 분석한다면 그 글귀가 나라의 멸망을 예언한다는 것을 당연히 알 수 있습니다.
바르신, 파르신을 페르시안으로 해석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또한 메대와 파사로 나뉘니까 ‘우바르신’이 쓰인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왕이 하는걸 보니까 왕의 자격이 없어서 나라가 나뉜다는 얘기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잔치에 참여한 천명의 귀인들과 왕의 후비와 후궁들에게서 아무도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의 난다 긴다하는 지혜자들 중의 누구도 그 글귀를 읽지 조차 못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읽어 냈다 하더라도 해석은 절대로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로서는 바벨론이 멸망한다는 생각조차 하는 것이 끔찍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집단 밖에서 보면 모든게 너무나 명약관화하게 보이는데 그 안에서는 마치 술취한 듯 안개에 쌓인 듯 전혀 알아 차리지 못하고 미망에 쌓인채로 결국은 멸망의 구렁텅이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5.하나님의 섭리와 타이밍
세상을 보면 지금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에 하는 것이 벨사살이 당시에 여호와에게 한 것과 비슷합니다. 유대인 다니엘에게 한 것이 마치 기독교인에게 한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실력으로 그 모든 차별과 비웃음을 뛰어넘었습니다.
세상은 유독 기독교에 반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중 어떤이들은 이 땅에서 기독교를 박멸하는 사명을 띠고 나온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사실 다니엘은 어릴 때 바벨론으로 잡혀와서 교육을 받았고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몽한 뒤에는 바벨론의 술객들과 점쟁이들과 술사들 박사들의 우두머리로 왕의 자문이 되어 수십년을 고위관리로 지냈지만 결코 총리대신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질시때문이지요. 포로의 후손이라는 꼬리표가 항상 따라답니다.
그러다가 벽에 쓰여진 글자를 해석함으로 바벨론이 멸망하기 하루 전에 총리대신의 직위에 올랐습니다.
오르자 마자 나라가 망하는 바람에 총리가 괜히 된 것 같지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다니엘은 새로운 나라의 세명의 총리대신가운데 한명으로 발탁된 것입니다. 다리오 왕이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했다고 해서 그의 지혜를 높이 산 것입니다.
만일 다니엘이 멸망의 직전에 총리가 되지 않고 그 이전에 국정의 책임자로 오래 있었다면 나라가 멸망할 때 함께 처형되었을 것입니다. 보통 나라가 망하면 왕과 왕족 그리고 고위 관리들은 대부분 처형됩니다. 그 전쟁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멸망 하루 전에 아니 겨우 몇 시간 전에 총리가 된 것은 정말 절묘합니다. 그게 바로 다니엘을 더 돋보이게 했고 책임은 지지 않을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다니엘을 향한 안성맞춤식의 역사를 일으키신 것입니다.
2년동안 포위를 해도 꿈쩍도 하지 않던 바벨론성이 함락된 것은 바로 그날 벨사살이 천명의 귀족들과 잔치를 벌였기 때문입니다. 이 잔치가 오랜 포위생활에 찌든 귀인들을 위로하기 위한 잔치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벨사살은 귀인들뿐만 아니라 오랜 싸움에 지친 성의 수비병들에게도 술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 잔치가 말이 안되는게 벌써 왕궁의 연회가 밤늦도록 열렸다고 하는 점입니다. 5절에 보면 “왕궁 촛대 맞은편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지라”라고 하지요. 이게 연회가 밤에 열렸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게다가 바벨론이나 메대와 파사에서는 왕궁에서 금하는 법도가 있는데 남자들의 술자리에 부인들은 참석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마 당시 그 지역 남자들은 술만 취하면 고약한 술버릇으로 성추행이나 성희롱이 많았고 이로 인해서 기강이 무너지는 일이 많아서 이를 방지하고자 남녀가 합석하는 잔치를 금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잔치에 참여하는 여자는 춤추고 시중드는 하녀나 노예로 국한한 것이지요.
그런데 왕후들과 후궁들이 귀족들과 함께 잔치에 참여해서 술을 마셨다고 하는 점입니다. 이 사람은 지금 엄청나게 한심한 일을 한 겁니다. 왕실 법도를 어긴 것이지요.
그날 밤에 고레스는 수비병들이 술에 취한 틈을 타서 바벨론성을 둘러 흐르는 유브라테스 강물을 막아서 수위가 낮아진 강을 도보로 건너서는 성벽을 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첩자의 안내를 받아서 수비병들을 피해 벨사살의 연회장으로 바로 가서 술을 마시고 있던 벨사살을 살해했다고 합니다.
그 글자가 쓰여진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경고의 글이 그대로 이루어 진 것이고 그 주인공인 다니엘이 자동적으로 부각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85세의 나이에 역사의 전면에 재등장한 다니엘을 살펴 보았습니다. 벨사살의 연회장 벽에 쓰여진 글자를 해석하다 보니 자연적으로 다니엘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된 것입니다.
사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란 글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글자로 말미암아 다니엘이 페르샤의 총리대신이 되었고 고레스의 뇌리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심어 준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마치 옛날 동화를 읽는 것 같습니다. 개연성도 없고 말도 안되는 것 같습니다. 왜냐면 주인공들이 너무 극적으로 잘되기 때문입니다. 공주를 구하고 나라의 절반을 받았다고 하는 동화책의 내용하고 너무 비슷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를 알게 되면 성경본문 뒤에 숨길 수 없는 역사적인 진실들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를 위해
하나님의 섭리의 주인공을 위해
세상의 역사가 그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그를 통하여 이루실 하나님의 일이 중요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쓰임을 받는 이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생각하고 그의 명령을 더 우위에 두며 세상에 대해서도 청렴하며 순전하고 성실히 살아야 합니다.
내가 일생을 그렇게 산다면 남들이 볼 때는 이미 다 끝난 것 같을 때에라도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우리를 들어서 사용하십니다. 성도의 삶에서 포기나 절망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믿음을 보시는 분이시지 그의 나이나 재산이나 능력을 보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사람들에게 중요하지 하나님의 눈에는 전혀 중요한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족한 것들을 채우셔서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들어 시시는가가 중요하지 내가 가진 것 자체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가하시면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든 하게 하실 수가있습니다.
벨사살이 하나님을 욕하며 자기의 벨 신을 찬양할 때 고레스의 메대 바사 연합군은 바벨론성의 해자를 넘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의 멸망을 말할 때 이미 고레스는 바벨론 성내로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여전히 강대한 나라고 우리는 충분히 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부하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려고 베푼 잔치가 실제로는 바벨론의 멸망을 재촉하는 홍문연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술자리에서 벨사살은 고레스의 군대에게 살해되고 다니엘은 새나라의 총리가 됩니다.
하나님은 실로 세상의 나라와 군대를 이용하여 자기의 일을 이루시는 역사의 주재자이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역사의 주인공이 된다면 세상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섭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옛날 다니엘처럼 요셉처럼 하나님의 일을 위한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굳게 믿고 하나님과 연합하여 그의 계명을 지키며 나가면 됩니다.
그런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통하여 이룰 하나님의 꿈이 있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믿습니다.
그 믿음대로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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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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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이상한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무서운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마약에 빠져들어서 쾌락을 좇는가 하면, 조현병(정신분열)에 걸려서, 타인을 묻지마 살인을 해놓고선 담담하다고 말합니다. 현대 사회라고 해놓고 공포와 불신은 차곡차곡 쌓여갑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보다 "인간다움"을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간다움이 무엇인가? 옛 사람들은 가난해도 당당한 마음을 추구했고, 부귀를 누릴지라도 음란하지 않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즉, 물질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자본주의 라고 해놓고, 모든 것을 돈으로만 줄 세우기 바쁩니다. 청년들이 간신히 취업해서 들어간 곳에서는, 겨우 최저임금에 맞춰서 돈을 주고서는 힘들게 일을 시키고, 눈치밥을 줍니다. 갑질의 횡포는 어디서나 보기 흔한 장면이 되었습니다.
이토록 어려운 세계라서, 어느 소설의 표현처럼 아무리 여행해봐도 천국이 없었노라고 고백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성도들부터가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다른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어려운 사람 곁에 서서 지지해주고, 당신이 희망이라고 이야기 하고, 쓰러져 가는 사람을 세워줘야 합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닐테지요. 때로는 오해를 받을테지요. 욕도 먹을지도 모릅니다. 너희 기독교는 왜 그렇게 가식적이냐고 항의받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우리는 타인을 도와야 합니다. 세계를 바꾸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멍들고 병든 사회에서, 아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 힘을 냅시다. 작은 실천이라도 해봅시다. 열심히 돈벌어서 겨우 3% 남을 위해서 온전히 쏟아부어봅시다. 그리고 힘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줍시다. 그런 작은 행동들이 모여서, 이 세계가 선하게 달라져 감을 믿습니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희망이 남아 있다고, 그렇게 희망의 이야기가 들려오기를 저는 두 손 모아 소망합니다. / 2016. 05.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