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다윗의 용사들(사무엘하21:15-22)/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6. 8. 04:15

 

다윗의 용사들 (사무엘하21:15-22)

 

오늘 우리는 다윗의 용사들에 대해서 살펴 봅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우리가 다윗의 용사들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까? 그래요, 사실 우리가 남의 나라 영웅인 다윗의 용사들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습니다. 남의 나라 용사들이 오늘날의 우리와 무슨 상관입니까? 비록 성경에 나와 있기는 하지만 전혀 우리에게 주는게 없는 것 같습니다. 접점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오늘 다윗의 용사들에 대해서 살펴 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본문의 내용뿐만 아니라 배열 순서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면 다윗집권 후반기에 일어난 미스테리한 사건인 한 사건에 대해서 비로소 납득을 하게 됩니다.

 

바로 다윗의 인구조사가 그렇게나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나쁜 것이냐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각국은 앞 다투어 인구센서스를 실시합니다. 왜냐면 정확한 통계와 조사는 치국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렇게 반응하셨을까요? 오늘 본문은 그에 대해서 직접적으로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지만 간접적으로는 왜 하나님이 다윗의 인구조사를 그렇게나 싫어하셨는지에 대한 해답의 힌트를 제시합니다.

 

1.시대순과는 모순된 기사의 시작

 

오늘 본문은 ‘블레셋 사람이 다시 이스라엘을 치거늘’이란 말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본문은 앞의 구절과 좀 맞지 않습니다.

다윗과 백성들의 관용 정신으로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구절 뒤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블레셋 사람들로 하여금 쳐들어오게 하셨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본문이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은데...

그러나 이 본문은 시간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앞의 기사와 완전히 별개의 독립된 내용입니다.
사실은 이 기사는 다윗의 초기에 일어난 일을 기록한 본문입니다. 뭔가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시대순과 어긋나게 본문을 여기에 삽입해 놓은 것입니다.

 

15절에 ‘블레셋 사람이 다시 이스라엘을 치거늘’이란 말을 직역하면 ‘그리고 블레셋 사람에게 이스라엘에 대한 전쟁이 다시 있었다’입니다. 여기서 ‘그리고’는 와우 계속법으로 사용되었는데 이 말은 현재의 사실을 기록하기보다 과거의 일을 회상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다윗은 즉위 직후 두 번에 걸친 블레셋의 선제 공격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게 되었고 그 이후 오히려 다윗이 공격을 감행하여 블레셋을 제압하였습니다. 

 

다윗이 블레셋에 오래 망명생활을 했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은 다윗의 무력에 대해서 잘 압니다. 게다가 블레셋이 자랑하던 골리앗을 소년 때에 무찌른게 다윗이므로 블레셋의 입장에서는 다윗이 왕이 되어서 지도력을 공고히 하기 전에 다윗을 공격해야 그나마 다윗을 이길 확률이 높다고 보고 먼저 공격을 가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했지요.

 

따라서 본문의 ‘다시 이스라엘을 치거늘’은 블레셋으로부터 두 번째의 선제공격을 받았던 다윗 치세 초기 상황을 회상하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러므로 이 기사는 여기에 들어올 내용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여기에 기록되었을까요?
성경이 여기에 이 기사를 배열한데는 당연히 어떤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목적을 말하기 전에 우선  본문을 조금 살펴 보십시다

 

2.다윗의 네 용사

 

여기 본문은 다윗의 용사들 네 명에 관한 기사가 나옵니다.
이스비브놉의 손에서 다윗을 구한 아비새
거인족의 후손 삽을 죽인 십브개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인 엘하난
다지증의 거인을 죽인 요나단

 

이렇게 네명의 용사의 이름과 그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가드의 거인족들이 다윗과 그 부하들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견지에서 우리는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신체나 힘에 있어서 결코 가드의 거인족의 후손들에 비해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즉 객관적으로는 군사적으로 열세였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요즘처럼 총이 있어서 멀리서 공격할 수 있는 시기도 아니고 칼과 창으로 서로 붙어서 싸우던 시절에 신체가 큰 것은 엄청난 이점입니다. 더구나 일반인과 거인의 대결에서 거인이 유리한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볼 때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거인들에 비해서 매우 불리한게 사실입니다.

 

이스비브놉을 한번 볼까요?
16절의 ‘장대한 자’라는 말은 원문상으로는 ‘땅을 가라앉게 할 정도 체격이 큰 거인’을 뜻합니다.
그리고 삼백 세겔 중 되는 놋 창을 들었답니다. 삼백 세겔은 3.4Kg입니다.
창이 3.4Kg이면 무거운 것입니까? 글쎄요. 별로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창이 아니라 창날의 무게가 3.4kg이었다는 말입니다. 창날의 무게만이라면 제법 무거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새 칼을 찼다고 합니다. 새 칼이라...뭐 별거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원문에는 ‘칼’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새로운 무기로 볼 수 있습니다. 칼인지 철퇴인지 아니면 요대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이걸 쇠로 된 칼로 봅니다. 후기 청동기시대에 쇠로 된 철제

 

무기는 굉장했겠지요. 일반적으로 놋으로 싸우다가 안되면 철을 사용하려고 한거라고 봅니다.

거인이 무거운 놋창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무기까지 가지고 나왔다면 상황이 좀 심각해 집니다. 상대방의 패를 모르면 대적할 때 매우 불안합니다. 그리고 그 상대가 보통사람을 압도하는 거인이라면 이야기가 심각해 집니다.

 

다윗은 매우 피곤했고 죽음의 위기까지 느끼는 상황이었는데 아비새가 이스비브놉을 죽이고 다윗을 구합니다. 아비새는 다윗의 조카요 군대 장관인 요압의 동생입니다. ‘스루야’가 바로 다윗의 누나입니다.

십브개는 유다지파로 다윗의 30 용사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다윗의 제8군을 지휘했고 휘하에 무려 2,4000명의 군대를 거느린 장군입니다. 그도 역시 삽이라는 블레셋의 거인을 죽였습니다.

 

엘하난은 역시 유다지파로 골리앗의 동생 라흐미 역시 거인인데 그 사람을 죽였답니다.
요나단 역시 다윗의 조카입니다. 당연히 유다지파겠지요? 이 요나단이 손가락과 발가락이 각각 여섯 개인 거인을 죽였답니다.

 

여하튼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은 다윗을 보호하셨고 거인들과의 싸움에서 이스라엘에 승리를 주셨습니다.

잘 보세요. 이 네 명의 혁혁한 공을 세운 용사들이 모두 유다지파입니다. 성경은 본문에서 다윗의 네 용사가 모두 유다지파이며 그 중에서 둘이 다윗집안인 것을 기록합니다. 먼 훗날 유다지파가 이스라엘 전체와 적대하여 유다와 이스라엘이 서로 나뉘는 것을 미리 암시하는 듯 하지 않습니까?

 

결과적으로 객관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우세했던 그 가드의 거인 족들의 후손들은 거인이 아닌 보통 사람들에 의해서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결국 가나안땅에 살던 거인 족이 사라진 겁니다.
모세의 명으로 이스라엘 각 지파들의 대표자들이 가나안을 정탐했을 때 본 그 거인족들의 후손들이 결국 다윗의 신복들에 의해서 다 죽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원래부터 싸움에 능한 자들이었기 때문일까요? 천만에요.

 

하나님이 함께하신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해서 승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과 그 부하들이 하나님과 함께 했고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에 승리한 것입니다. 처음 가나안을 정탐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인들을 보고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가 보기에 우리는 메뚜기떼같더라고 했지요?

우리들이 여름에 풀밭을 걷게 되면 놀란 메뚜기떼들이 날아서 도망가는 그 광경을 상상하시면 됩니다. 그랬던 그들이 마침내 거인들을 이긴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이 도저히 이뤄내기 어려운 일을 하나님을 힘입어 한 것입니다.

 

3.인구조사에 대한 경계

 

사무엘하의 본문의 기록과 같은 기록이 역대상20:4-8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역대상에는 다윗의 인구조사 사건 바로 앞에 이 기사를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성경이 왜 다윗초기의 사건을 여기에 기록해 두었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너희가 객관적으로 열세였던 , 아니 아예 상대가 되지 않았던 그때에도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어 너희들의 손으로 거인족들을 멸하게 한 나, 전능의 하나님인데 이제 너희가 조금 살만해졌다고 나를 의지하는 대신 병사의 수에 의존하려 하는 구나!

 

다윗의 인구조사는 군사적인 목적이 주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자기의 백성들 중에서 군대로 징집할 수 있는 자가 얼마인지를 알아보고 싶었다는 말입니다.

 

왜 알아보고 싶었습니까?
내가 이만큼이나 강대한 나라를 만들었다는 인간적인 자랑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저변에 흐르는 것은 이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한번 해보자는 생각.

 

다시 말해서 군사의 수로 적국을 압도하는 정상적인 방법을 사용해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더 이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하는 처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아가 꼭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 그의 능력을 덧입으면 좋기야 하지요. 그럼 됐지 뭐가 문젭니까? 하나님과 함께하면 죄를 저지를 수가 없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의 공의를 앞세워야 하니까 내 마음대로 살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불꽃같은 눈동자로 나를 지켜보시면 어떻습니까? 나의 모든 것을 다 보신다는 말도 됩니다. 내가 어려울 때 힘들 때를 보시고 도움을 주실 수도 있지만 내가 죄를 짓고 인간적인 쾌락을 누릴 때에도 나를 보시고 이번에는 벌을 주실 수도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호와 어쩌면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인간적인 방법으로도 충분히 강대한 나라인지를 확인하려 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배은망덕한 행위이며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명백한 신앙적 범죄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다윗의 군사들이 객관적인 열세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극복하고 승리했던 사실을 상기시키며 다윗이 이제 인간적인 방법으로 인구조사를 통하여 군사의 숫자를 믿으려하는 것은 더 이상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려 한 것입니다.

 

즉 사람숫자와 보이는 육체적인 이점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배후에서 개입하심 때문에 다윗과 그의 용사들이 블레셋의 거인들을 이길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선진 철기문명을 가지고 신체적으로도 거인이었던 그들을 죽이고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은 바로 배후에서 그들을 대신하여 싸워주셨던 하나님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간의 강성함만을 자랑하려 한다면 결국은 멸망할 수 밖에 없음도 나타내고 계십니다.

제가 아주 어릴 때 주일학교에서 다윗의 인구조사 때문에 하나님이 다윗을 벌주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대체 왜 인구조사를 한 것이 하나님에게는 그렇게 큰 죄가 되는지를 주일학교 담임 선생님에게 물어 보았지요.

 

그런데 그 선생님은 답변을 명확히 해주지 못했습니다. 사실 세상에서는 나라를 다스리려면 정확한 통계를 작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데 하나님은 참 이상하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냥 넘어 간 기억이 있습니다.

 

여기 본문에 그 답이 있습니다. 왜 다윗이 인구조사를 실시한 것이 하나님에게 큰 죄가 되었는지 하는 이유가 여기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내가 해보겠다고 하는 교만

 

어려울 때 도와주셨던 하나님에 대한 배은망덕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하는 인본주의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온 것이지요.

 

4.하나님만을 믿고 나가라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절대적 열세의 상황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를 소유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길 것이요 아무리 우리가 남들이 보기에 우세하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빠져 있다면 ,
더 이상 우리가 하나님을 소유하지 못하다면 결국은 지게 될 것입니다.

 

모든 열쇠는 하나님에게 있고, 그 열쇠를 돌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보호와 인도하심에 대한 전적인 믿음에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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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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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삶.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그런 삶일 테지요.

하나님이 지워져 있는 삶.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것은 그런 삶일 테지요.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이 크리스천에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이런 선택을 하면, 주님께서 기뻐하실지, 슬퍼하실지 생각해보고 행동을 선택하면 되겠지요.

 

믿음을 가지고 살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실 것이라는 믿음 말이에요.

마지막으로 우리가 선하게 살아간다면, 결국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것! 말이에요.

 

열심히 살아갑시다. 힘을 내서 다시 일어섭시다.

누구나 다 약하고 힘들 때가 있지만, 그럼에도 계속 전진하는 삶. 그런 멋진 모습이 됩시다.

2016. 06.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