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의 대한민국 경제 이야기 입니다. 이 시기로 넘어오면, 중화학공업도 발전하였고, 구체적인 모습들이 눈에 띄기 시작합니다. 부산과 서울이 이어지는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고요. 포항제철 (지금은 포스코라고 하죠) 과 조선소, 그리고 공업단지가 많이 들어서게 됩니다. 명실상부 중화학공업으로서 덩치를 키워나가는 웅장함이 느껴지죠.
또한, 70년대는 이촌향도 현상이 일어납니다. 시골을 떠나서 도시로 향한다는 이야기에요. 이러면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시골에 있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도시로 들어오다 보니까, 저임금 구조가 깨지질 않아요. 왜냐하면, 인력 공급이 계속 되고 있으니까요. 굳이 비싼 돈 들여가면서 임금을 올려줄 필요가 없었던거에요. 다시 말해, 싼 임금에도 일할 사람이 충분히 많았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런 구조 속에서, 노동자들의 삶, 생활, 이런 것들은 굉장히 열악할 수 밖에 없는거죠.
이 때! 이건 아니다! 라고 외쳤던 한 사람이 있죠. 그가 바로 전태일 이라는 청년입니다. 분신을 합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라고 외치며 말입니다. 당시에는 공장에서 하루에 14시간, 많게는 16시간씩 근무하고 그랬어요. 시골에서 올라온 어린 여공들이, 학교도 못가면서 이렇게 일했다는 것을 눈으로 목격하며, 그는 세상이 잘못되어 있음을 외쳤습니다. 그래요. 여공들은 쥐꼬리만큼의 저임금을 받아, 동생 학비를 댄다거나, 아빠 엄마 약값을 대고, 저축을 해가고 그랬습니다. 8시간 노동으로는 꿈의 실현이 도무지 안 되었던 거죠. 그 당시 사회 구조상으로 여공들은 그렇게 힘들게 일하면서, 자신의 바람들을 실현하려고 했습니다.
음... 생각할수록 이것은 도대체가 인간의 정당한 삶이 아니다, 라는 생각을 전태일이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들춰보고 공부하게 되죠. 그리고, 깨달음이 온 겁니다. 와? 세상에나! 이렇게 좋은 법이 있었잖아! 그러면, 근로기준법대로 하면 되겠구나! 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분신을 통해 자신의 뜻을 알리려는 모습들, 70년대 우리 역사의 선명한 한 자국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시대를 앞서서 목숨 바쳐 투쟁한 사람들이 있었고, 우리는 더 나은 사회를 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 하루 8시간 노동을 하게 되었지요.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고, 농담인데, EBS에서 근무하시는 감독님들, 조연출님들, 지금 우리가 밤늦게 몇십니까!!!) 어쨌든 8시간 넘어가면, 초과근무수당도 있고, 법적으로 여러가지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제도들이 갖춰지게 되었습니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네요.
자, 어쨌든, 전태일 열사의 현실 고발까지 살펴봤고요. 70년대 농촌도 지금 사태가 심각한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다 떠나가면 소는 누가 키우.... (아, 이런 아재 개그 하지 맙시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쨌든, 농촌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정부 차원에서 새마을 운동을 전개합니다. 우선, 새마을 운동은 농촌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소득증대와 생활의 개선을 목표로 했습니다. 그리고 도시로 확산이 됩니다. 도시에서는 의식개혁을 목표로 했고요. 새마을 노래가 도시에서도 울려퍼지는 거에요.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만드세~ (자자! 일하러 가자는 뜻! 그나저나 최태성 선생님이 안 까먹고 허밍으로 다 불러주셔서 너무 재밌어 죽을 뻔 했습니다. ㅜ.ㅜ. 주입식 정책이라는 건 정말 대단하군요. 하하.)
이런 저임금의 사회적 모순 구조 속에서 79년도 YH 여공사태가 일어난다는 것을 과거 문서에서 우리는 배운 적 있습니다! YH 여공사태를 출발점으로 해서, 이 와중에 결국 박정희 정부가 무너지는 역사의 장면도 살펴봤었고요. 자, 그러면서 이제 전두환 정부로 넘어갑니다. ( YH 여공사태 하나도 모르겠다면? → http://srw.kr/1642 )
전두환 정부 때는, 3저 호황의 시대가 옵니다. 저금리, 저유가, 저달러의 시대입니다. 1986~88년도 까지고요. 단군 이래 가장 잘 나갔던 시대였습니다. 실은 이전 박정희 시대 때만 해도 예컨대 73년도 1차 석유파동이 와서, 중동에 건설하러 우리가 나가서, 그 돈으로 기름을 사오는 방식으로 문제를 대처하기도 했습니다. 이른바 오일머니를 가져옴으로서 전화위복이 되었네요. 그러나, 1978년도에 2차 석유파동은 제대로 해결방안이 없어서 우리 경제에 큰 타격을 입히기도 했고요.
경제적 측면으로 본다면 78년도의 경제 불안으로 인해, 79년도 YH 여공사태의 모순을 가져온 것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복습도 할겸, 쉽게 말해, 경제가 안 좋으니까 회사가 결국 문 닫는 거잖아요. 회사가 문 닫으니까, 거기 있던 노동자들이 야당 신민당사에 들어가서 항의를 하는 과정 속에서, 김영삼이 제명되었고, 이러면서 분노한 대학생들이 있었지요. 부마항쟁이 벌어졌고요. 부마항쟁 진압과정에서 10.26 사태까지 이어지잖아요. 박정희 정부가 끝내 무너진다는 그 이면에는 78년 석유파동과도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는 거지요.
전두환 정권의 3저 호황 시기는 좋~은 시기라, 돈을 막 빌릴 수 있었어요. 금리도 싸고, 기름값도 싸고, 이런 것들이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좋은 기회가 되었다는 겁니다. 자, 그런데 전두환 정부 시기부터, 우루과이라운드 UR 협상이 시작이 됩니다. 이게 뭐냐하면, 농축산물의 개방을 요구하는 겁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가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입장을 선진국에서 많이 봐주는 편이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우리도 개방의 흐름 앞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되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어서 김영삼 정부 때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합니다. 살펴보니까 투명하지 않은 돈이 굉장히 많았어요. 예컨대 특히 지난 제 5공화국, 부정과 비리가 참 많았어요. 그 원인을 살펴보니까, 금융, 즉 돈이 투명하지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전격적으로 금융실명제를 단행하죠. 통장은 본인이름으로만 만드세요! 입니다. 가명 통장으로 비자금, 탈세하는 수법을 원칙적으로 막겠다는 이야기지요. 이제 돈세탁은 그만! 이 돈이 어디서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더 명확하게 알 수 있겠죠.
이제 김영삼 정부 때 있었던 나머지 일들을 차례로 살펴보죠.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타결됩니다. 1993년입니다. 그리고 WTO도 출범하게 되었네요. 1995년도 입니다. 나아가 OECD 선진국 클럽에도 가입합니다. 1996년 입니다. 그러다가 헐, 하고 터진 게 IMF 체제를 맞이하지요. 1997년도 입니다. IMF는 대단한 충격이었습니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IMF 전과, IMF 후는 세상이 다릅니다. 세상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 당시 최모 선생님은 월급이 팍 깎여서 100만원도 안 되는 월급을 받았다고 하네요~ 헐~ IMF 미워요. 중요한 것은 IMF 이전에는 취업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기업에서 학교의 학생들을 든든한 인재라며 모셔가려고 했다니까요. 그런데, IMF 이후에는 학생들이 부디 저 좀 뽑아주세요, 하는 새로운 풍경이 시작됩니다. IMF 다른 말로 외환부족으로 온 외환위기죠. 우리나라에 달러가 없었던 겁니다.
이걸 극복하기 위해서 김대중 정부에서는 IMF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을 합니다. 달러를 확보해야 하니까요. 첫째, 금모으기 운동을 했지요. 대단한 우리나라 사람들이에요. 예컨대, 태안 앞바다에 기름이 유출이 되었을 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제거를 위해서 노력했고, 이제는 근사한 휴양지로 변해있지요. 이런 것들이 대한민국 사람들의 놀라운 저력이지요. 나라의 위기다 하면, 장롱 속에 있는 아기 돌반지까지 다 끌고 와가지고, 위기 극복에 동참하는 모습들. 나라 어려울 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모습들. 저 멀리 구한말 국채보상운동과도 일맥상통하는 모습들이라 하겠습니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노사정위원회가 만들어집니다. 구조조정, 이른바 정리해고가 심했거든요. 나라가 부도사태니까 회사에서 사람들을 짜르는거에요. 누군가가 짤린다는 것은 한 가정이 붕괴되는 것을 의미하는거에요. 아버지가 졸지에 실업자가 되면 어떻게 해요. 학교는 어떻게 할 거며, 먹고사는 것은 어떻게 할 거며, 갑자기 와르르 붕괴가 되는거에요. 이렇게 엄청난 일들이 IMF 사태를 통해가지고, 순식간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때,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수행하게 됩니다. 키워드로 보자면 경쟁입니다! 외국의 입김이 들어오면서, 국내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 쳐놓았던 보호벽들을 하나 둘 제거해 버리는거에요. 왜냐하면 이제 이런 외국의 요구를 막아낼 힘이 없었어요. 달러를 빌려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외국 입김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지요. 그렇게 경쟁 앞에 놓이게 되었어요. 온 사회가 경쟁이라는 새로운 시스템 속에서 힘겹게 달려가는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 되겠습니다. 어쩌면, 갑자기 살아남기가 고되어지고, 힘들어졌다는 것. IMF가 낳은 비극적인 풍경이라 하겠습니다. 현대 경제사 이야기도 여기까지. 이제 통일을 다루는 다음 문서에서 만납시다!
오늘의 영감 - 전태일 열사의 뜻은 오늘날 이루어진걸까요. 단언컨대, 저는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최저임금도 못 받는 노동자가 많이 있으니까요. 좋은 법은 다양하게 있다지만, 정작 법은 자주 지켜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저의 가장 친한 벗은 여전히 많은 시간을 노동하면서 여유 없이 숨가쁘게 지냅니다. 3주 동안에 겨우 하루, 이틀, 쉬면서 사장의 눈치를 봐야하다니, 정말이지 먹고 살기가 잔혹하구나 싶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는 IMF발생 이전까지는, 중산층 이상의 풍족한 삶을 누려왔습니다. 아버지가 유능한 재단사, 사업가 라는 당시까지는 충분히 고급스러운 직업을 갖고 계셔서, 부족한 바를 모르고 순진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놀기도 엄청나게 잘 했고, 온갖 일제 게임기도 있었답니다. 그러다가 야학을 거쳐, 전태일 평전을 처음 읽고선, 몇 번이나, 정말로 몇 번이나 멈추어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사회 발전은 누구에 의해서 이루어 지나요. 피땀흘린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 오빠, 언니 들의 헌신적인 태도가 "나를 위한 거름"이 되어줬다는 것을 매우 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 방에는 써붙여 놓았습니다. "부모님 사랑합니다."
여하튼, 철부지 였던 저는, 2000년대가 되어서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야, 사회에 뛰어들어 갔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다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종종 불안해했던 20대를 보냈습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몽상가적인 꿈을 품었다가, 나 하나도 바꾸지 못해서 좌절했다가, 그런 방황의 연속이었습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던 것은, 일부의 서양사람들은 30살까지 그렇게 방황하면서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탐색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오랜 방황이 헛되지 않았던지, 하고 싶은 일들을 몇 개 찾아서 매일 조금씩 실천하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목표가 있으니까, 돈 버는 일도 예전만큼 고단하지 않게 되었고, 어려운 일들에도 익숙해져가는 방법을 느리게 배워나갑니다. 읽고 있는 책에서는 행복이라는 것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매우 구체적으로요.
"좋은 사람과 직접 만나서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눠 먹는 것" 행복한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때때로 행복은 발 밑 혹은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기를. 그래서 매 순간 행복한 식사 자리에도 감사할 줄 아는 멋진 사람이 되기를. 끝으로, 먹고 사는 고단한 문제가 잘 해결되기를 늘 응원합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