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영화

방황하는 칼날 (Broken, 2014) 리뷰

시북(허지수) 2016. 7. 17. 05:58

 

 방황하는 칼날은 지인의 추천작이었습니다. 보고 나서, 마음 한 구석이 굉장히 아려옵니다. 단지 미성년자 라는 이유로, 잔혹한 범죄를 저질러도 형량이 줄어든다는 현실에 참혹한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인공 상현은 그토록 집요하게 범인들을 뒤쫓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적으로 복수하는 것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끔찍한 일을 겪었다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관객에게 고통스럽게 묻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평점이 다소 떨어지는 것을 각오해야겠지요. 불편하니까요.

 

 살아가다보면, 억울한 일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천벌 이라는 말이 쓰여있어서, 하늘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 경고했는데, 요즘에는 신관 이라는 세계관이 비웃음을 당하는 처지로 땅에 떨어져 있으니, 사람을 우습게 아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내가 너보다는 잘났다는 착각, 그 오만함을 바라볼 때면, 참으로 화가 납니다. 그렇게 세상을 우습게 여기는 10대 미성년 범죄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 방황하는 칼날입니다. 원작소설이 있기 때문에, 시나리오 구성은 소설처럼 흥미롭게 잘 들어맞습니다. 정재영, 이성민 연기파 배우들의 열연도 돋보입니다. 하지만 마음 아프다는 것은 각별히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 리뷰는 영화 본편에 대한 누설이 가득 담겨 있으므로 아직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은 반드시 주의하세요!

 

 

 상현의 하나뿐인 딸, 수진이 납치되어 마약을 먹이고, 짐승처럼 강간당하고,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절망적 사실 앞에, 상현은 직접 행동에 나서게 됩니다. 의도적으로 10대 미성년 범죄자인 철용에 집에 찾아가서 방망이로 이 녀석을 냅다 살해하기에 이릅니다. 살인이 나쁜 일이라는 것,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지만, 이 때 우리는 대부분 상현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됩니다.

 

 죽을 때가 되서야 비로소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태도가 정말이지 싫었습니다. 게다가 나중에 더 서늘하게 밝혀진 바로는, 이 녀석은 그동안 물건 훔친게 미안하다고 이야기 했다 합니다. 즉, 자기가 얼마나 끔찍한 잘못을 저지르며 사는지도 몰랐던, 그냥 인간 쓰레기 같은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현을 시작부터 말리기 보다는, 그의 다음 행동을 숨죽이며 지켜보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 과격하게 말하자면, 이들 10대 미성년 범죄자들에게는 양심이라는 등불이 꺼져있습니다. 타고난 것인지, 사회에 의해서 조성된 것인지는 명확히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아이도 만에 하나지만, 범죄자가 될 수 있구나 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역시 교육환경이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극중 민기네 아버지처럼, 범죄자로 클 꺼면, 학교고 뭐고, 책이고 뭐고, 다 필요없다는 일갈이 참 와닿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미국 같은 나라는 아예 홈스쿨링 하는 집도 제법 있다고 하지요.

 

 영화를 보면서는, 스릴러 명작 양들의 침묵의 범죄 패턴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범죄는 처음 저지를 때는 힘들지만, 익숙해지면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도 정기적으로 해나갈 수 있다고 합니다. 범죄자 조두식 일당도 마찬가지 였겠지요. 우리네 수진이를 납치하고, 감금, 폭행할 때, 그들은 웃으면서, 마치 게임처럼 사람을 다루었을 게 분명합니다. 남의 입장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하는 컴컴한 마음을 바라보는 것은 참 씁쓸한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공감이 없는 잔인한 뇌, 이런 정신나간 뇌를 일깨우는 약이라도 있었으면 차라리 좋겠습니다.

 

 그런데 한편, 상현 역시도 사람을 한 번 죽이고, 또 인간 쓰레기 같은 녀석을 죽이게 되면서, 아예 이번에 엽총까지 손에 들게 됩니다. 내가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지요. 추운 눈밭에서 환상처럼, 수진이가 이만하면 됐어 라고 위로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타협책일 뿐, 진정한 위로가 되지 못할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극의 후반 장형사에 의해 직접적으로 언급되듯이 자식 잃은 부모는, 그 삶이 온전하지 못할게 분명하니까요. 수진이도 안타깝고, 상현도 너무 불쌍하기만 합니다. 삶이 이렇게 (영화처럼) 불행들이 겹쳐오지 않기를, 저는 두 손 모아 바라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문제가 무엇이며, 이런 사회적 범죄를 막을 방안은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그것은 학교에서 협동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에 답이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경쟁사회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우리는 학교 성적이 등수대로 나옵니다. 이런 나라는 선진국 중에는 한국과 일본 밖에 없다고 합니다. 가령 핀란드 같은 나라에서는 협력하면서 함께 공부할 것을 가르치고 있지요. 협력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반에서 1등, 2등을 자랑하더라도 정신과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또 남을 죽음으로 내몰며 괴롭힐 수도 있습니다. 성적과 인성이 같이 가는 것이 아님을 사회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성을 배우고, 공유할 기회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뉴스에 고발되어 나온 것처럼,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을 만들어서, 거기서 음담패설이나 늘어놓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면, 어서 이별하고, 반성하며, 또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사는 삶, 함께 사는 사회라는 것을 의식적으로 키워나가야 겠지요. 결국 인간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상현이 병원갈 시간도 없이, 오직 한 가지 목표를 향해서 움직여 나가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의 마지막 발언을 기억합니다. 나는 저런 놈과 같은 세상에 살 수 없다 라는 말. 이 말에 굉장한 떨림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악을 경계해야 합니다. 악에 물들어 감도 경계해야 합니다. 저는 그래서 높은 기준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존경해 왔습니다. 우리가 꼭 선의 길로 다닐 수 있기를, 그래서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기를, 제가 잊지 못하는 표현을 빌린다면, "우리 사랑해" 같은 좋은 말만 해요. 라는 것.

 

 마찬가지로 영화에서 이 나쁜 시키들은 습관적으로 욕부터 쓰고, 전화 늦게 받는다고 남탓부터 합니다. 이것부터가 인간으로써 곪아감의 시작이라 생각합니다. 방황이 꼭 나쁜 단어만은 아닐테지요. 방황을 통해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방황하더라도, 만약 그것이 우리를 병들게 한다면, 재빨리 다시 반성으로써, 넉넉한 자신의 품으로, 꿈으로 돌아오기를 또한 희망합니다. 결국 좋은 생각들이, 좋은 사람을 키우는 것 같습니다.

 

 너무 아픈 영화를 보았습니다. 자식 잃은 부모에게 위로를 쉽게 건네줄 수 없다는 것이 슬픔입니다. 강상중 교수님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아들이 자살을 선택하자, 그 슬픔을 견디는 것이 힘들었고, 그것을 계기로 마음이라는 소설책도 쓰게 되셨다고 합니다. 고통스럽더라도, 사회를 믿고, 다시 인간은 견뎌나간다는 것을 그래도 남겨놓고 싶네요. 복수만이 최선은 아니라는 것, 그렇다고 내가 목숨을 끊는 것도 최선은 아니라는 것, 바보 같아 보일지라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우리를 때로 다시 일상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음을 저는 아직도 믿습니다. 억울한 일 겪어도, 우리 꼭 힘내기를. / 2016. 07. 17.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