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겸손과 온유(에베소서4: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8. 12. 02:09

 

겸손과 온유 (에베소서4:1-)

 

오늘 설교제목은 겸손과 온유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이 갖추어야 될 덕목입니다. 겸손과 온유는 누가 보아도 합당한 말이지만 이를 삶의 자세로 견지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실로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요즘 날씨가 매우 덥습니다. 게다가 습도까지 높기 때문에 온몸이 땀투성이면서 또한 불쾌지수가 상승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그만 일에도 화를 내고 욕을 하고 막말을 내뱉습니다. 더구나 도로에 차량은 넘쳐나고 주차공간은 부족합니다. 길은 좁고 마주보고 서있는 차량들은 서로 양보만을 요구하고 버팁니다. 막말을 하고 서로 싸우게 되고.

 

제가 볼 때 부산사람들이 서울사람들보다는 좀 더 거칩니다. 이게 아마 도로여건하고 연관이 있지 싶은데 부산이 원래 동래하고 대신동일대의 좁은 지역이었다가 피난민촌이 산록에 들어서면서 갑자기 확장되는 바람에 도로가 좁고 주차장이 없고 심지어 인도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마 더 거칠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제가 서울에서 사역할 때 어떤 집사님이 부산을 다녀와서 저에게 말합니다. “목사님, 부산에는 인도가 없어요. 도대체 사람들이 어떻게 다니라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요, 우리 부산사람들은 그게 당연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다른 도시의 사람들 입장에선 이게 엄청나게 불편하고 위험하고 이상한 일입니다.

 

제가 또 이야기하나 할까요?
서울에서 제법 주먹 좀 쓰는 좀 논다고 하는 학생이 울산으로 이사 간 친구집에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말합니다. “엄마, 울산 애들은 모두 깡패야, 너무 무서워” 제가 뭣 때문인지 슬쩍 알아 보니까 별거 아닙니다. 이야기할 때 욕을 좀 잘하고 목소리가 퉁명스러운데 크다?

 

여러분, 웃을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여기에 살아서 잘 못느끼겠지만 부산 사람들도 좀 더 부드러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말투도 조금 더 부드럽게 소리도 좀 더 줄이고 욕도 좀 줄이고 그래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을 봐도 한번 미소라도 지어 줍시다. 이건 뭐 완전 무표정에 딱딱해가지고 마치 화가 난 것 같습니다.

 

이런건 어떻습니까
“아저씨, 이거 하나 사소” 여러분 이거 호객행위가 아닙니다. 싸우자고 달려드는 시비입니다. 다른 도시 사람들은 절대로 이해를 못합니다. 저도 경상도지만 무섭습니다. 좀 바꿉시다.

불쾌지수가 높고 찌는 듯한 무더위에도 피서는 가야됩니다. 요즘 피서를 안가면 이것도 남자들에게는 감점사유가 됩니다.

 

세상 모든 것을 잊고 그냥 방에서 쉬고 싶은데 결코 가만 내버려 두지를 않습니다. 게다가 휴가날짜가 몰려 있습니다. 7월말에서 8월초. 이 두주 동안에 전국의 바다와 유원지가 몸살을 앓습니다. 한철 장사하시는 분들은 이때 제대로 장사를 못하면 일년이 어렵기 때문에 기를 쓰고 장사를 합니다. 그래서 휴가를 가면 바가지에 쓰레기 악취에 소음에 교통문제까지 얼굴 붉혀야  할 일이 한두개가 아닙니다.

 

필연적으로 이런 삶에서 다툼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했다가는 이런 대우를 오래 참았다가는 호갱이 되기 쉽습니다. 이래서는 겸손과 온유라는 기독교인의 삶의 자세를 견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덥고 습도가 높아서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또 예의가 없어집니다.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사람들과 부딪힌다는 말이기 때문에 마음의 평정을 잃기가 쉽습니다.

 

외국의 어떤 연구에 의하면 인구밀도가 높을수록 사람이 예의가 없어진다고 합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로 생각됩니다. 우리나라 특히 남한만으로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인구밀도가 높습니다. 그런데도 인구절벽 운운하며 애를 놓으라고하니 우습지요?

 

대통령도 애를 안낳는 판에 우리보고 자꾸 애를 낳으라니까 너무 황당합니까?

그게요 인구가 늘지 않으면 애를 낳지 않으면 경제활력이 떨어지고 결국은 이 나라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변나라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도 안되는 것 같습니까?

 

요번에 핀란드 독립 백주년을 맞이하여 이웃나라인 노르웨이가 산봉우리 하나를 선물로 준다고 합니다. 이 산봉우리가 선물로 핀란드에 가면 핀란드에서 가장 높은 산이 된답니다. 두나라 국민들 모두가 지지하고 행복해 한답니다. 이런 멋진 이웃들이 우리 주위에는 없습니다. 그 나라들은 인구가 적고 땅은 넓은데도 거대한 러시아 옆에서 잘만 살아가는데 우리는 그게 안됩니다. 그래서 이 나라는 끊임없이 성장해야만 안잡혀 먹힐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인 것이지요.

 

인구는 많아서 사람의 가치가 많이 떨어졌는데도 그래도 애를 낳아야 되는게 비극이지요.

여하튼 사람이 너무 많아서 예의가 없어진다는 거지요. 경치 좋은 곳에서 좀 쉬려고 하면 꼭 옆에 선객이 있거나 아니면 다른이들이 오거나 그런 경험이 있으시지요? 서울과 주변 위성도시에 1500만 이상이 모여 살지요? 그래서 집값도 비싸고 쓰레기처리도 어렵고 공해에 소음에 대낮같이 밝게 해둔 조명에 삶의 질이 형편없습니다. 밤에 완전히 깜깜한 곳에서 자지 않으면 암예방 물질이 분비가 되지 않는답니다.

 

그런데 완전히 칠흑같이 어두운 방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정말 현대의 도시 여건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요즘 암이 급속도로 많아 지는 지도 모릅니다. 발암요인은 많아 졌는데 이를 억제할 물질은 더 적게 분비되니까.

 

담배 피우시는 분들, 사람들도 싫어하고, 간접 흡연이 직접 흡연보다 세배로 나쁘답니다. 돈도 많이 들고 건강에도 치명적인걸 왜 피웁니까? 사람들 없는 곳으로 가서 피우겠다고 전전긍긍하지 말고 이참에 끊으세요. 담배한대 피우면 머리가 맑아져요? 천만에요. 담배한대 피우면 뇌세포 1억 5천만개가 죽는답니다. 피우면 피울수록 손햅니다.

 

게다가 제가 살고 있는 곳에는 원전들이 대규모로 가동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뻗어 나가는 고압 철탑들. 보이지 않는 방사능 공포에 전자파에. 사람이 온유해 질려면 삶이 평화롭고 만족해야 하는데 이건뭐 우리를 싸움닭으로 만듭니다. 뭐 한도 끝도 없으니까 그만하고 이런 저런 이유로 우리는 겸손과 온유의 태도를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외모로 남을 판단하는 일에 능합니다. 차도 비싼걸 타야 되고 시계도 비싼 거 , 가방도 비싼 거, 옷도 비싼 거, 신발도 비싼 거, 집도 비싼 거, 계속 이런 걸 해야 됩니다. 이런 비싼 걸로 자기를 계속 어필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무시하니까 ,알아 주지 않으니까 계속해서 외양이 사치해 집니다.

 

내면은 사람들이 투시의 은사가 없어서 알아주지를 않으니까 어쩔 수없이 외양만 바꾸어나갑니다. 나중에는 성형까지. 요즘 보면 자기들끼리 저건 어느 병원이다 저건 뭐뭐 했다 이렇게 서로 알게 되는 모양입디다. 그렇다고 투시의 은사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할 수도 없고.
이래저래 겸손과 온유가 말하기도 좋고 듣기도 좋지만 이를 견지하기가 어렵습니다.

 

먼저 본문에서 ‘부르심을 입은’이란 말은 개인적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교회공동체의 일원으로 부름받은 이란 말입니다. 교회(에클레시아)와 ‘부르심을 받은’ 이란 말은 동일한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란 말은 세상 안에서 세상 밖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의 일원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성도는 모든 겸손과 온유, 오래참음을 가져야 합니다. 겸손, 온유 그리고 인내.

 

그러나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입니다. 보시면 ‘모든’이란 말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맨 앞에 오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어떤 곳에서는 맨 마지막에 온게 가장 중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문맥을 잘 살펴야만 합니다. 성경은 무작위로 기술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엄격하게 기록되었기 때문에 말하는 순서와 수식어도 나름대로 의미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겸손은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서 낮춤’이란 뜻인데 이는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는 것이며 성도의 제일가는 덕목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나 겸손을 좋아하시는 이유는 사탄이 교만해서입니다. 사탄이 교만함으로 하나님의 보좌를 노리다가 타락한 이후로 하나님은 자기를 나타내며 자고하는 교만을 너무 너무 싫어하시고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서 낮추는 겸손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은 서로 용남함의 전제조건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일치와 화합을 이루기위한 전제조건이라는 말이지요.

 

온유는 '강함 가운데서 절제함으로 나타나는 부드러움'을 말하며 구체적으로 큰 배와 선착장의 가장자리에 서로 충돌을 방지하기 위하여 두른 고무 타이어와 같습니다. 파도가 철썩 철썩 치니까 배를 그대로 선착장에 매어 두었다가 둘이 서로 부딪치게 되면 나무로 만든 배가 박살이 날 수 있습니다. 아니면 흠집이나고 깨어지고 물이 샐 수도 있지요. 그래서 그걸 방지하기 위해 배와 선착장이 서로 마주치고 부딪쳐도 부숴지지 않도록 고무로 감싸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온유입니다. 그러면 싸울일이 없겠지요?

 

온유는 사랑의 덕목이며 성도가 갖추어야할 기본적인 성품입니다. 이것은 고무로 덧댄 것처럼 성도의 교제에서 서로 모난 면으로 인한 충돌을 방지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온유를 유지하는게 어려울 수가 있습니다. 때때로 화를 내고 막말을 퍼부어야 할때가 있습니다. 가만있으면 호갱처럼 대할려고 할 때 화를 내야합니다. 그래서 온유의 상태가 깨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성도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 스스로 조심하고 항상 온유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숨도 한번 크게 쉬고 어깨도 한번 펴고 하늘도 한번 바라보고 일단 한 템포를 쉬고 상대하면 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렇게 멋있는 말을 지어냅니다. 내부에는 강한 그리스도의 심장, 외부에는 따뜻한 말과 온유한 행동. 우리가 잘 쓰는 말로 자기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한. 외유내강이란 말입니다.

 

다음으로 ‘오래참음’ 인데 분노를 참을 수 있는 감정, 분노로부터 먼 감정을 말합니다. 이 오래참음은 사랑의 덕목이자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왜 하나님의 성품일까요? 죄많은 인생에게 살아날 수 있는 기회를 주려고 오래참음이 하나님의 성품이 된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오래참음 때문에 우리가 지금 죽지 않고 멸망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산다고 해도 결국 우리는 연약한 인간인고로 죄를 짓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눈에 화를 돋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는 겁니다. 어휴 저걸 그냥 찍어버리고 새포도나무 묘목을 심어 말어?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가도 ‘그래 올 한해만 더 참자, 올해에는 열매를 맺을 수도 있어’ 그래서 성도의 성품이자 하나님의 성품인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과정에서 탈락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오래 참음 때문입니다. 우리의 오래참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오래참음 때문에 우리가 아직도 탈락하지 않고 그의 보호와 인도 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래참음을 입었기 때문에 우리 역시 서로 서로 오래 참아야 합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 대한 비유에서 빚 갚으라고 하니까 뭐라고 합니까? 참아주소서라고 하쟎아요. 용서하소서. 못갚겠습니다 가 아니라 참아주소서 일년 안에 갚겠습니다 아니면 얼마까지 꼭 갚겠습니다. 실제로 그때 가서도 못갚으니까 얼마 정도 말미를 더 주시면 이번에는 꼭. 바로 그게 하나님의 오래참음입니다. 우리 같으면 ‘때려치아라’ 이럴 텐데 하나님은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도 다른 이들에게 오래 참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 이러한 겸손과 온유, 그리고 오래참음으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에로스적인 사랑이 아니라 아가페적인 사랑입니다. 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 이 사랑은 타인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여 남의 유익을 구하는 이타적 사랑으로 하나님의 성품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역시 이를 본받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을 받기만 하고 줄줄 모르면 그건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미성숙한 표시이기도 하고 장애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사랑가운데 서로 용납하랍니다. 용납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관대함을 말합니다.

 

교회에는 서로 다른 이해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을 자기의 가치관과 이해로 평가하거나 바꾸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합니다. 일단 있는 그대로 상대방을 인정하고 그리고 나서 잘못 생각한다느니 이렇게 하는게 더 좋지 않으냐는 둥의 협상과 타협이 시작되는 것이지 상대방을 아예 무시하거나 배제하고 생각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협상이라는 것도 서로를 동등하다고 인정하고서야 시작되는 것입니다.

 

1절부터 6절 까지 바울은 교회의 하나됨, 즉 교회의 연합과 일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말하는 것을 보면 그 당시에도 교회들끼리 일치와 연합이 잘 안되었나 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까지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강조했겠지요.

 

오늘날 우리 교파의 분열상은 말도 못합니다. 장로교니 감리교니 침례교니 성결교니 순복음이니 하는 많은 교파가 있지만 장로교 안에서도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은 교파가 있습니다. 장로교나 감리교 침례교의 구분이 나름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장로교내부의 분열은 합리적인 근거 자체가 없습니다.

 

예수교 장로회와 기독교 장로회로 나뉘고 좋아요, 여기까지는 보수와 진보로 나뉘는 거니까 합리적이지만 그 다음단계로 무지막지하게 큰 교단인 예장에서는 또 합동이니 통합이니 고신이니 하는 더 세밀한 단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분열하지 않고 합동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분열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통합을 이루어야 됩니다” 장로교의 총회장이 수십명인지 수백명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셀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으로 사랑가운데 서로 용납해야 됩니다.

 

바울의 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합니다. 여기서 ‘평안’이란 말은 ‘합하다, 연결하다’에서 유래하여 일치와 조화의 뜻을 가집니다. 우리가 서로 연결되었을 때 뜻이 합하여 지고 그것이 일치되며 조화를 이루어야 궁극적으로 평화가 이루어 집니다. 그래서 아마 평안이란 말에 일치와 조화라는 뜻이 들어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성도의 일치와 화합은 성령에 의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겁니다. 성령이 없이 일치와 조화를 이룬다면 그것은 이해의 일치에 의한 일시적인 참음이지 결코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익이 없게되면 이익이 줄어 들게 되면 바로 일치가 깨어지고 분열과 투쟁이 일어납니다. 마음이 움직여야 일치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성령만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 없이는 궁극적인 일치와 평안을 이룰 수 없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은 ‘평안을 이룩하는 줄’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 줄은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없이는 상대방을 배려하고 상대방과 조화와 일치를 이룰 수가 없으며 조화와 일치가 없는 곳에 참 평안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항상 이기적이며 생각하는 방식이 다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이기적인 인간과 인간 사이에 소통과 조화와 일치를 이룰 수 있는 길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항상 서로 사랑하라는 말만을 했지요. 바울 역시 사랑을 제일로 강조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은 원래 둘 이상의 죄수나 노예를 매는 착고나 쇠사슬을 가리킵니다. 두사람이 평안을 누리려고 한다면 이 두사람은 걸을 때는 보조를 맞추어야 할 것이고 방향을 정할 때는 서로 의견이 일치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공동체의 목적이나 방향을 불문하고 단순히 하나가 되는 점에만 집중하면 안되고 성령의 인도에 따른 선한 방향으로의 일치가 되어야 합니다.

 

따지고 보면 악당들도 이익추구라는 점에서 어떤 다른 집단보다 일치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비록 나중에 서로 싸우고 분열할지언정 이익을 얻을 때까지는 일의 효과적인 성공을 위해서 하나로 합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면 처음부터 나중까지 계속해서 싸울 수 있습니다.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수쟁이들은 술도 안마시고 꽁해있기 때문에 한번 마음이 상하면 오래 간다” 왜냐면 불신자들은 마음에 갖고 있던 섭섭함이나 불만이 술이 들어가면서 제어에서 풀려나서 마구 튀어 나옵니다.
제가 예전에 젊은시절에 군대 동기들의 술자리에 간 적이 있습니다. 저야 술을 안마시지만 자기들끼리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자리를 즐겁게 가졌는데 이게 점점 심해 지면서 취기가 오르고 결국에는 서로에게 섭섭했던 감정들이 마구 튀어 나오는 겁니다.

 

처음에는 그래도 “오해하지 말고 들어라”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다가 해묵은 감정까지 막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술 주정을 하고 목소리를 높이고 막말을 하고 결국에는 쌍욕으로까지 번지는 겁니다. 결국 싸움으로 술자리가 파합니다. 제가 그 자리에서 유일하게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었으므로 결국 뒤치다꺼리는 제가 했습니다만 술꾼들은 그런 식으로 불만과 스트레스를 해소하는데 예수믿는 이들은 그런 식의 탈출구가 없어서 속에 꽁하고 간직했다가 오래 오래 곱씹으면서 오래 가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냥 지키는게 아닙니다. 힘써 지키라고 합니다. 이 말은 현재 명령형으로 쓰여졌는데 일치를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함을 말합니다. 그 정도로 일치를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게다가 3-6절에서 ‘하나’가 7번이나 사용되었는데 이는 그만큼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하고 또 어렵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없지만 빌립보2:2에 보면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 성도가 서로 한마음을 품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 사실은 성령의 평안의 매는 줄을 말합니다.

1절에서 3절까지 일치에 대한 명령을 기술했다면 이제 4절부터 6절까지는 일치에 대한 근거를 제시합니다. 왜 일치를 해야 하느냐?

 

첫 번째로 우리 즉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소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
교회는 사실 하나의 몸을 세우기 위해 사역하는 공동의 목적을 갖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모인 곳을 교회라고 하는데 교회 역시 더 큰 교회의 일 부분이 되겠지요. 이 교회들이 서로 일치하고 화합해야 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우리가 모두 공통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손이고 너는 발이고 너는 심장이고 간장이고 하지만 결국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회의 개교회 주의와 분열상은 정말 통탄을 금치 못할 정도입니다.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성경본문에서 그렇게나 힘써 교회와 성도의 일치를 강조한 것을 보면 당시에도 분열상이 심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요,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서로 하나라는 사실을 성도가 서로 일치해야 하고 화합해야 하고 그래서 성령안에서 하나라고 하는 사실을 잊어 버립니다. 성령의 매는 줄로 하나된 일치를 지키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것이 바로
일치와 화합이 바로
교회의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하는 이유는 성령 역시 하나이시기 때문이며 그 하나이신 성령께서 교회의 일치를 위해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정에서 성령이 임하시는 광경을 잘 생각해 보세요.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들이”

 

이 광경을 다시 묘사한다면 한 개의 불이 붙는 뿌리 지점이 있고 그 불의 끝부분이 혀처럼 갈라져서 이곳저곳에 성령의 역사를 일으킨다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각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그래서 교회를 이루었지만 그 뿌리, 근원은 똑 같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의 구체적인 모양은 다르지만 그 목적은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교회의 설립,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성령으로 인하여 되어진 우리 성도들 역시 하나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역시 하나의 소망가운데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는 선교에 어느 교회는 교육에 어는 교회는 봉사에 어느 교회는 병고침과 신령한 은사에 치중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이 세상의 모든 교회와 같이 한 개의 소망을 가집니다, 한 개의 똑 같은 목표를 가집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구원받은 이들이 많아 져야 합니다. 가짜로 교회에 입회해서 교인이라고 칭해지는 이들 말고 진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이 많아져야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사는 곳은 어디나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거대한 영적인 제국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소망을 가집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가 하나여야 할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5절부터 “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가운데 계시도다”
그래서 하나가 되어야 하고 반드시 하나가되리라고 믿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바로 ‘일치’와 ‘하나됨’이므로 당연히 하나가 될 겁니다.

 

자, 그런데 여러분 이 설교의 시작은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본문의 끝에 가서는 하나됨과 일치에 관한 이야기로 변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성경은 사실상 성도의 겸손과 온유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성도의 일치와 화합에 관해서 말하려고 했다는 말입니다. 그럼 왜 겸손과 온유와 오램참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까?

 

그것은 겸손과 온유 그리고 오래참음이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무기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모두 겸손하게 하시고 온유하게 하시며 오래 참게 하심으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맞춰주며 그래서 이해하고 배려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성령께서 하시려는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병고침이나 하늘에서 불이 내리고 비가 내리는 초이적을 이루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성령의  목표가 아니라 우리 성도들이 하나되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목표라는 말입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고 단지 하나되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합니까?

 

중요합니다. 하나된다는 것은 단순히 서로 화합하여 한덩어리로 뭉친다는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매는 줄로 묶여있고 서로 사랑한다는 대 전제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한 하나님을 믿고 한 성령의 역사를 따라 한가지로 세례를 받아서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나가는 사회를 이루기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세상을 향해서 복음을 전하고 세상과 싸우고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를 수립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보다 더 먼저 해야 할 것이 바로 성도들 간의 일치와 화합이며 교회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이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그의 보호 속에서 웃으면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저절로 많은 일들이 이루어 집니다.
그런만큼 하나되는 것도 어렵지만 하나 되기만 하면 할 수 있는 일도 이루어 질 수 있는 일도 많아지는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우리는 일치와 하나됨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남위에서 군림하려 하고 남보다 잘났다고 자고하고 교만하며 남이 나를 제대로 대우해 주지 않으면 질투하고 화내며 나와 다른 형제를 틀렸다고 하고 나보다 약한 형제를 깔보고 굴종시키려하고 아집에 사로잡혀 형제를 라가라 하고 정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는데 그런 태도를 유지하는 한 결코 하나됨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이 필요한 것입니다.

설사 형제가 잘못을 저질렀다 합시다. 모든 것을 끝장내 버릴 것처럼 군중들의 앞에서 형제의 체면을, 인격을 완전히 깔아뭉개려고 모진 말을 하고 그래서 스스로 자족하면 결코 일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 속에는 분열과 싸움 그리고 서로 성냄과 악독과 저주만이 있을 것입니다.

 

형제의 잘못을 지적할 때도 공동체의 회복과 유익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은 우리가 한 소망 하나의 목표,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해야 되는 겁니다.
‘잘됐다. 너 이번에 한번 당해봐라’ 이런 마음으로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안됩니다. 그거야 말로 형제를 실족케 하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 겸손합시다.

 

그리고 온유합시다.
그리고 오래참읍시다.
그래서 교회의 일치와 화합을 이루어 갑시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해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 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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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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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좋은 성품이 완성되어 가는데는 시간이 참 중요하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루 아침에 변해서 새사람이 되었느니 라는 말을 어쩐지 저는 잘 신뢰하지 않는 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합니까, 오늘 얼마나 주님의 사람으로써 노력하면서 살았는가를 되짚어 보면서, 반성하고, 또 주님을 향해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삶의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를테면, 오늘은 너무 힘들고 피곤하고, 불쾌지수도 높고, 완전히 녹초가 되는 것만 같아! 그럴 때라도, 이런저런 핑계로 주변 사람들을 붙잡고 한탄만 하고, 같이 힘들어 하고 있는건 아닌지 되돌아 보는 것입니다. 그래, 내가 그래도 주님의 사람인데, 여기서 지친다고 쓰러질 수 없지! 라면서 힘을 내보는 것이 중요한게 아닐까요. 그래서 다툼 대신에 넉넉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는 여유가 항상 있기를 소망해 봤습니다. 겸손한 사람, 온유한 사람, 그런 멋있는 성도로 우리 모두 힘써 살아갑시다. / 2016. 08.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