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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의 시민윤리(디도서3: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8. 5. 00:55

 

디도의 시민윤리 (디도서3:1-)

 

오늘 제가 설교할 디도서는 바울이 크레테 섬에 남겨둔 목회자 디도에게 신앙의 교훈과 격려를 위해 보낸 편지입니다. 특별히 이 디도서3장은 성도들이 이방인들과 같이 살 때 그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 현실 정부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에 대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본문을 그리스도인의 시민윤리에 관한 글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래요,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시민윤리에 관한 글이기는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글이 바로 1절에 나온 내용입니다.
정말 본문의 3장에는 말로 설명하기 곤란한 구절이 들어 있습니다. 사실상 이 구절 때문에 설교자들 사이에서도 격론이 벌어집니다.

 

3장1절에 보면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래 정사란 말은 바울서신에서 천사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글자 자체의 뜻은 지도자란 말이 됩니다.

 

원래 정사는 ‘시간의 시작’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지도자’가 되는 것이지요. 제일 먼저 나서서 나를 따라라.
그리고 권세는 ‘위로부터 주어진 귄위에서 나오는 힘’을 말합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편지하기를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예비하게 하며’ 라고 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우리 기독교도는 위로부터의 권세 즉 정치지도자에게 순종만 해야 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정부 시책을 반대해서도 안되고 항상 정부시책에 앞장서고 정부에 순종해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복종하며 순종하며’ 라고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고 있는데요 복종은 종이 그 주인에게 복종하는 것이며 수동태입니다. 그리고 순종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을 말하며 이는 능동태입니다. 그러니까 강제로 복종을 당하는 것이고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이지요. 이미 정해진 법령을 지키도록 강제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수동태. 게다가 처벌이 무서워서 억지로 순종하는 것에서 나아가 적극적으로 자발적으로 순종하라고 해서 능동태.

 

이렇게 정치지도자에게 순종하라는 말을 자꾸 하는 이유는 모든 권세가 하늘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종과 순종은 선택사항이 아니며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 말을 들으면서 드는 생각은 갑자기 바울은 뜬금없이 왜 이런 말을 했을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솔직히 바울은 목회서신에서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맥상 이 구절은 갑자기 들어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 바울이 이런 말을 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편지를 쓸 당시 크레테인들은 로마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이 반란에 크레테 교인들과 디도가 휩쓸려 큰 피해를 볼까봐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안그래도 기독교에 대한 로마정부의 인식이 나쁜데 반란에 휩쓸린다면 개인적인 피해뿐만 아니라 전체 기독교인에 대한 보복도 우려되는 상황입니다. 이제까지 은근한 핍박이었다면 이제부터 공개적이고 적극적인 박해가 시작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울 자신이야 순교할 각오가 충분히 되어 있겠지만 죄없는, 어리거나 연약하거나 여자거나 노인인 기독교인들은 보호받아야 하지않겠습니까? 그래서 크레테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디도에게 교인들이 반란에 연루되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안그래도 로마당국의 의심을 사고 있는 이때 반란에 기독교도가 연루된다면 그것은 기독교의미래를 아주 망치는 일이 될 것이기에 바울은 3장1절에서 디도에게 이런 당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당시 베드로나 바울의 목회서신들 가운데서 권세에 복종하라는 말을 봅니다.

 

이 말은 사실상 로마정부에 대한 일종의 구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속되는 기독교인에 대한 핍박은 기독교회 지도자들에게는 큰 근심거리였습니다. 더구나 당시 다신교를 섬기는 로마의 상황에서 홀로 일신교를 믿는 기독교에 대한 정부 당국의 핍박이 점점 심해 집니다.

 

로마정부는 각 민족들에게 광범위한 자치를 허용하고 그들의 종교와 민족적 풍습에 관대했지만 세계종교로 떠오른 기독교에 대해서 로마제국을 적대한다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일반인들의 입장에서 기독교도는 이상한 사교집단으로 인식되고 있었는데 근친상간을 하고 식인풍습을 가지고 있고 또 인신공양을 하며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에 반대하는 반정부적 종교라는 인식이 퍼져 있었습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근친상간이니 식인이니 하는 것은 어디에서 나온 오해겠습니까?
근친상간은 웃기게도 우리의 언어에서 나온 오해입니다. 아무나 보고 성도들끼리 “형제님 자매님” 하는 말을 듣고 이들은 ‘이것들이 뭔 촌수가 이래?’ 하고 근친상간으로 몰아간 겁니다.

 

게다가 성찬식에서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면서 ‘이것은 주의 몸이요 이것은 주의 피입니다’라는 말을 멀리서 듣고는 ‘이것들이 사람을 죽여서 살과 피를 먹는 구나’라고 생각해서 생긴 오해입니다.
인신공양이야 유대교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한 기사가 너무 널리 퍼져서 생긴 오해입니다.

 

그리고 황제가 신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황제숭배를 반대하는 행위, 하나님 외에 어떤 신도 인정하지 않는 행위가 로마 당국에는 반정부로 보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이런 인식을 불식시키기 위해 틈나는 대로 정부에 순종하라는 말을 적어 둔 것입니다.

 

혹시라도 이 서신을 로마 당국자가 본다면 ‘아, 이들이 반정부 단체는 아니구나’ 하고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판에 기독교인이 크레테의 반란에 개입되어 있다면 로마당국은 무시무시한 박해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바울은 지금 모든 권세가 하늘로부터 나온 것이기에 우리는 항상 정부에 순종해야 할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까? 정부가 독재를 하고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어도 무조건 기독교인들은 복종만 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북한주민들도 당연히 북한 당국에 순종만 해야 합니까?

십자가를 철거하는 중국당국에 중국기독교인들은 순종만 해야 합니까?

 

십자가를 떼라는 명령에 “예, 십자가를 기꺼이 떼고 혹시 기독교회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아예 교회문을 닫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적극적으로 정부시책에 앞장서야 합니까?

“누가 기독교를 믿으라고 했어? 우린 이슬람교를 믿어야 돼, 이게 정부 시책이야” 이렇게 말하면 “예, 알겠습니다. 즉각 기독교를 믿지 않고 이슬람으로 개종하겠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 미처 설명하지 않은 세 번째 조건이 있습니다.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
그러니까 바울에게 있어 정부, 위로부터 나온 권세는 국민들에게 선한 일을 행하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권선징악이 바로 정부가 해야 될 역할입니다.

 

이들이 만일 사람들로 하여금 악한 일을 하게 한다면 이들은 하늘로부터 나온 권세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국가의 통치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뭐하기 위해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았느냐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악을 억누르고 선한 일을 하도록 하기위해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국가가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일을 하게 되면, 사람들이 악한 일을 하도록 하게 하면 그 권위는 정당성을 잃게 되는 것이지요. 왜냐고요? 그런 정부는 현실적인 권력은 가지고 있지만 하늘로부터의 정당한 귄위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권세를 주신 목적에 위배하는 순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귄위는 정당성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단 여기서는 크레테 섬에서 일어난 로마에 대한 반란에 휩쓸려서 목숨을 잃지 말란 말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당연히 국민으로서의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군대도 가고 세금도 내고 투표도 하고 법도 지키고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주어진 정부가 주어진 권위를
하나님의 의도에 맞게 사용하는지를 감시하고 비판하고 감독할 책임도 있습니다.

 

정부가 항상 선성을 장려하고 국민을 사랑하며 국민들이 하나님 안에서 행복해 지도록 노력하는지를 감독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정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의 시책이 정책이 국민들을 괴롭히려고 시행되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대의명분을 가지고 행동해야 합니다. 또 그럴 것이라고 기대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욕심을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나라의 공익보다 사익을 추구하고 더 나쁜 것은 사익을 위해 공익을 희생하며 또 사익을 공익으로 포장하는 것입니다. 나라를 대표하는 정치인들이, 정책을 집행하는 이들이 이렇게 협잡을 하게 되면 당연히 수많은 힘없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시 감독하는 것입니다. 뭐 우리 성도가 정부보다 높아서 감독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국민입니다. 민심은 천심이란 말이 있듯이  투표로 권위를 세우는 행위를 하는 주권자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시감독입니다.

 

1절에서 정부에 대한 신자의 태도를 말했다면 2절에서 바울은 성도가 불신자들을 대함에 있어서 가져야 할 4가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온유함을 나타내라

앞의 세가지는 수동적이거나 마음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온유함을 나타내라는 말은 실천적인 자세를 요구합니다.

 

먼저 ‘비방하다’는 말은 하나님이나 사람에 대한 모든 모욕, 하나님에 대한 불경한 언사, 사람에 대한 경멸적인 언사를 말합니다. 비판하고 수군대고 하는 게 아니라 남에게 경멸적인 거친 언사를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옛날 성경에는 ‘비방하지 말며’가 아니라 ‘훼방하지 말며’ 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경멸적인 언사를 하지 말란 말입니다. 당시 크레테인들은 거칠고 사나운 기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크레테 교인들이 거친 말로 크레테인들을 자극할까봐서 이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다투지 말며’는 ‘싸우기를 싫어하며’ 라는 뜻입니다. 성도가 불신자들과 싸우기를 좋아하면 전도가 안됩니다. 싸움닭이란 별명을 가진 분들이 사람들 가운데 가끔 있는데 그런 평을 듣고 전도한다면 전도가 안 될 겁니다. ‘이건 아니지’하면서 마음 내키는 대로 쏘아 붙이는 분들이 있습니다. 당장은 속이 시원하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다투지 말며.

 

세 번째로 ‘관용하며’ 라는 말은 원문으로는 ‘기꺼이 자신의 자리를 내어준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한 푼 이익을위해서 남과 다투지 않고 기꺼이 양보하며 희생하라는 말입니다. 남의 입장도 헤아리고 생각하며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충분히 고려하는 것입니다. 이를 우리는 역지사지라고 하지요. 그리고 약간은 희생하며 약간은 양보하는 것입니다.

 

교회 오는데 택시요금이 5100원이 나왔습니다. 평소보다 300원이 더 나왔습니다. 이쪽으로 오면 되는데 저쪽으로 왔거든요. 그러면 평소에는 4800원이면 충분히 오는데 뭔놈의 돈이 5100원이나 나왔나며 시비가 붙고 5000원만 받아라고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지요. 대인은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하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도 나에게 관용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온유는 예수의 대표적 성품이요 성령의 열매인데요 성도는 온유함을 구체적 행동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앞의 세가지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는 것을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타내는 것이 바로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화목하고 어려운 이를 보면 불쌍히 여기고 그래서 도와 주고 웃는 얼굴로 남을 대하고 겸손하고 친절하고 예의를 갖추고.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그러니까 훼방하지 말고 다투지 말고 관용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바로 온유라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서도 엄청 어렵겠다 싶습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예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하는 자요 속은 자요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예수믿고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랍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리석은 자는 미련한 자를 말하는게 아니고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 거짓의 영 사탄에 속아 넘어가는 자를 말합니다. 그랬기 때문에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이고 미신에 속아서 우상에 속아서 잘못된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분별이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게 하나님의 영인지 사탄의 영인지도 모르고 미신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다는 말을 봅시다.
정욕은 성적 욕구를 말하는게 아니라 문자적으로는 단순히 ‘강한 갈망’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정욕 자체로는 가치중립적이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에 대한 죄의 표현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마구 마구 해보고 싶습니다.

 

더구나 행락은 ‘쾌락이 불타오르게 하는 것’을 말하는데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찾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은 충분히 합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정당하게해도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습니다. 불법적이고 음성적으로만 행복하고 즐거워지는게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정하신 울타리를 벗어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옛날의 춤사위를 보세요. 아~리라앙 아리라~앙 아라~리~요오 이렇게 부드럽고 느린 가락이 나와도 우리네 조상들은 덩실 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그리고는 서로 즐거워했지요. 요즘은 몸을 요란하게 흔들고 특히 성적으로 자극을 주면서 춤을 춥니다. 그래야 뭔가 즐거운 걸로 생각합니다. 남녀가 서로 몸을 비비면 정신없이 허우적대는 것이 쾌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쾌락을 추구하다 추구하다 마약에 빠지고 남의 아내와 망측한 일을 하고 그래야 쾌감이 생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덕적으로 젊잖게 충분히 합법적으로 즐거울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입니다. 산정에서 고요한 가운데 깊은 묵상으로 하나님과 영교하는 즐거움, 가난한 이, 억울한 이, 약한 이를 도와주고 그들의 감사인사를 받을 때, 그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마음이 뿌듯하고 즐겁지 않습니까?

 

비가 개인뒤 맑고 푸른 하늘을 바라볼 때, 연녹색 이파리에 물방울이 맺히고 그것이 햇빝에 반짝일 때 충분히 즐겁지 않습니까? 비가 온뒤 운동장 사이로 아주 작은 실개천이 만들어져서 맑고 깨끗한 물이 흘러 갈 때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자녀의 효도를 받아서 흐뭇해하는 부모님의 미소를 보고 마음이 따뜻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인간은 속아서, 마귀에게 속아서 즐거움이라면 당연히 부도덕하고 불법적이고 그래서 음성적인 걸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악독과 투기를 일삼았고 그랬기 때문에 사람들이 볼 때 가증스럽고 그러니 서로 미워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랬던 우리가 예수 믿고 성령받아서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악한 존재라고 가정할까요 아니면 선한 존재라고 가정할까요? 즉 우리 기독교는 성선설을 믿을까요 아니면 성악설을 믿을까요?
성악설입니다. 우리가 얼핏 생각하면 성선설을 믿을 것 같지만 기독교는 철저하게 인간에 대한 불신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물론 엄밀하게 따지면 인간은 선하게 창조되었기에 성선설이 맞겠지만 그 첫 번째 피조물이 범죄함으로 인간에게 죄성이 들어오게 되고 그 다음부터 인간은 악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도로 인간의 악을 제어하고 선성을 키우려고 하나님은 정부라는 조직을 만드신 것입니다. 강제로, 제도로, 법으로 인간의 악을 억누르고 선을 키우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정부를 만드신 본래의 목적을 유지하는 한 우리는 정부를 따르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원래 죄악에 빠져서 사탄의 간계에 속아서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서로 미워하고 투기하며 악의를 가지고 사람들을 짓밟고 나 자신만을 위해서 나 자신의 정욕과 쾌락을 위해서 사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씻음을 받고 성령으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인간은 악성을 벗어버리고 선성을 입은 성도가 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혜택을 입지 못하고 악독과 궤휼로 사람들끼리 서로 싸우고 짓밟고 속이고 죽고 죽이는 이전투구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여전히 사탄에게 속아서 저 세상에서 악독과 궤휼을 깨닫지 못하고 죄악 속에서 정신없이 정욕과 행락에 사로잡혀 이전투구의 삶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 진흙탕 속에서 우리를 구해주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구주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주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자기의 흠없고 죄없는 피를 흘려서 우리의 죄를 씻으셨기에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로 얼룩진 것을 씻어 버리고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않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자비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추악한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낙원에서 쫓겨나기 전의 상태를 회복시키셨습니까?

 

5절에 답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의로운 행위를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따라서 그렇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악하여 결코 선해지기 어렵지요. 그러나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는 충분히 선해 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치 새롭게 태어난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중생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일러 우리는 성화라고 부릅니다.

 

6,7절에 보면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의롭다하심을 얻어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성령께서는 더러운 곳에, 죄가 있는 곳에는 거하시지 않기 때문에 성령이 내주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거룩해 졌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임하시면 우리는 의롭다고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상속자는 하늘나라의 유업을 얻을 상속자를 말하는 것이지요. 원래 상속자는 한분 예수 그리스도였지만 이제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씻음을 얻고 성령의 부어주심을 입어 의롭다고 칭해지게 되고 마침내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얻게 되었다는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남을 비방하거나 다투거나 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관용하며 온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바울의 말은 항상 그럴듯하고 도덕적으로 보이지만 그 스스로 우리 인간이 결코 선하거나 도덕적이지 않다는 것을 잘 압니다. 우리는 사실 우리 속의 죄성과 죄에 대한 욕망 때문에 이를 억누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것을 억누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이고 이 법을 실천하는 지상의 대리인이 현실의 합법적인 정부기 때문에 정부의 귄위에 순종하고 복종하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턱대고 정부의 시책에 호응하고 앞장서야 할 의무를 기독교도가 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기독교도는 정당한 정부의 시책에는 앞장서는 것이 좋습니다. 정당한 권위에는 순종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정당하고 무엇이 정당하지 않는지는 어떻게 판단합니까? 성경적인 판단 기준은 한 개밖에 없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하게 하는가 아니면 악한 일을 하게 하는가를 보면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 외의 판단에는 관습을 따르면 됩니다. 쿠테타로 집권을 한 사람, 부정으로 집권을 한 사람, 아예 국민들의 인정을 받지 않고 집권한 사람에 대해서는 하늘로부터 온 정당한 권위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우리는 디도서에 나오는 시민윤리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시대의 차이는 있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해도 무리가 없는 말들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성도로서 세상사람들과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온유를 나타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이런 식의 삶을 우리 모든 기독교도들이 산다면 우리는 반드시 이 세상에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옛말에 인자무적이라고 했는데 우리 성경의 기본 정신과 너무 비슷하네요. 항상 관용하며 온유한 그런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관용하며 온유한 삶을 삶으로써 이 땅에서 세상속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며 복받는 멋진 성도의 삶을 사시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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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얼핏 오해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정당한 권위에 대해서 순종하는 것이 좋은 기독교인의 태도인 것 같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세상을 다소 삐딱하게 바라보는 편이라서 할 말이 특별히 없지만요 :)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참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한테는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야 가능하겠지요.

 

그렇지만 너무 어렵게만 생각치 말고, 작은 대목부터 실행해 나가면 그리 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웃과 함께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일상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찾아나가는 것, 그렇게 하나씩 그려나가면 되지 않을까요. 바울처럼 성도를 아끼려는 마음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 2016. 08.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