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혼자서 가라(개정판,다니엘6장)/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8. 1. 00:13

 

혼자서 가라 (개정판)

 

우리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혼자서 모든 책임을 진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안정판이 사라진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릴 때 부모님의 보호와 선생님들의 보살핌속에 삽니다. 그러나 점점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보호받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독립을 위한 준비에 투자합니다.

 

남자들 같은 경우에는 이런 독립을 위한 준비는 군대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하고 그리고 졸업하게 되면 그동안 열심히 취직을 위해 스펙을 쌓고 준비를 해도 제대로 된 직장을 잡는 사람은 열에 하나가 될까 말까입니다. 뭐 취직을 해도 문제가 있지요. 우리가 다 잘 압니다.

 

그리고 언론에서는 툭하면 몇십년만의 최대 불경기니 경기 전망이 암울하다느니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운 취업률이라느니 미래성장동력이 없다느니 백년안에 나라가 사라진다느니 하는 엄청나게 비관적인 전망을 쏟아 냅니다.
어디에도 우리를 향한 장밋빛 전망은 보이지 않고 잿빛 전망만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상최악이라는 말은 제가 철들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왔던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역시 희망찬 내일을 꿈꿉니다. 물론 노력하는 자만이 희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여름에 열심히 더워하며 땀을 흘리지요.

 

햇빛에 노출되고 덥고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팥죽같이 쏟아지고 그렇지요? 그러나 이렇게 해 두어야 추운 겨울을 잘 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평소에 기도하고 평소에 영성을 쌓아 두어야 위급할 때 진가를 발휘하는 법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너무나 유명한 사람을 봅니다. 다니엘, 그는 사실 만능맨 같습니다. 우리가 처음 다니엘을 만났을 때 그는 ‘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노인일 때 더 큰 두각을 나타내는 것을 봅니다. 한두해, 일이십년이 아니라 육십년 이상의 삶이 쌓여서 그렇게 된 겁니다. 물론 그의 삶이 말년의 영광을 위한 준비는 아닙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하나님의 뜻대로 주어진 여건에서 할 수 있는 경건한 삶을 쭉 살아 온 것 뿐 입니다.

 

1.정복국의 총리가 된 다니엘

 

바벨론의 마지막왕 벨사살의 연회때 연회장의 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손이 쓴 글자를 해독한 다니엘은 오늘 본문에 보니까 바벨론이 망해서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에게 정복당한 다음에 정복국 메대 바사의 재상이 되어있습니다.
그는 바벨론이 멸망당하기 직전에 벨사살에 의해서 나라의 셋째 치리자 즉 총리대신의 직위에 임명되었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메대와 바사의 연합왕국에서 다니엘은 삼인의 재상 중의 일인이 됩니다.
이미 80이 넘어 머리가 하얗게 된 다니엘은 이제 전혀 새로운 나라의 재상으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유다가 멸망할 때도 죽지 않고 어릴 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서도 죽지 않고 오히려 바벨론의 고위관리로 등용된 다니엘은 바벨론의 총리로, 또 이제 메대와 바사연합왕국의 총리로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합니다.

 

이정도면 그는 처세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일생에 한번 겪기도 어려운 대 격변, 제국과 왕국의 멸망이라는 대 격변을 두 번이나 겪는 격동의 와중에서도 그는 오히려 더 승승장구합니다.
과연 보기 드문 사람이며 모두가 감탄할 만한 처세입니다.

 

2.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4절에 보면 총리들과 방백들이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으려고 노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난세에도 승승장구하던 다니엘이 평화시에 주위 사람들의 모함을 받아 그의 전도에 먹구름이 끼게 되는 듯이 보입니다. 그것은 그가 너무 높은 자리에 앉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평화시에는 뜯어 먹을것이 많기에 질시하는 사람이 많은 법입니다.

 

바벨론이 멸망하기 약 여섯시간 전에 총리가 되었을 때에는 나라가 망하는데 총리가 되면 더 큰 곤욕을 치를 수 있어서 사람들이 질시를 하지 않았지만 위기가 아니라 평화시에 사람들은 자연히 명예와 권력을 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질시하는 겁니다. 더구나 그는 몇가지 결격사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뭡니까?

 

피정복민이라는 점. 그는 바벨론의 총리 출신입니다. 나라가 망할 때 사형당하지 않은것만 해도 어딥니까?
약소민족 출신이라는 점, 그는 당시 페르샤에서 큰소리를 칠 수 있는 페르샤, 메대나 엘람 출신이 아니라 자기들이 정복한 바벨론의 피정복민인 유다인입니다.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하고 합쳐도 얼마 되지도 않습니다.

 

페르샤의 지방편제상 관구에 속하지 않고 사마리아나 암몬보다도 더 떨어지는 약소민족인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만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점은 그에게 가장 큰 결결사유입니다. 그건 왕을 숭배하는 페르샤의 풍습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게 불리한 여건을 가진 사람이 총리대신이 된 것도 굉장한데 총리도 임명할 때는 가만히 있다가 지금에 와서야 그를 모해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다른 총리들과 방백들이 다니엘을 고소하려고 틈을 봅니까?
그것은 그가 왕의 신임을 얻어 삼인의 총리 중에 일인이 아니라 수석총리가 될 예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도 정복자인 자신들과 피정복민인 다니엘이 같은 취급을 받거나 자기들의 위에 있는 것에 분노했던 메대와 바사의 총리와 방백들은 다니엘의 지위가 더 높아져서 자기들의 위에 서게 될 상황이 되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질투심을 공공연히 드러낸 것입니다.

 

그럼 왜 다리오왕은 다니엘을 이렇게 높이려고 합니까?
그것은 그가 마음이 민첩하고 총리들과 방백들 위에 뛰어나기 때문이랍니다.
비록 다니엘의 출신과 처지가 자기들과 다르고 소위 말하는 혈연이니 학연이니 지연이니 하는 배경이 없지만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지혜 하나로 최고의 지위로 도약하려 합니다.

 

사실 다니엘을 처음 총리에 임명할 때는 피정복민인 바벨론사람들을 포용한다는 측면에서 총리중의 한자리에 임명한 겁니다. 메대와 파사는 큰 나라입니다. 그 안에는 메대와 파사뿐만 아니라 바벨론이니 엘람이니 또 여러 민족들이 섞여 있습니다. 결국 메대도 없어지고 페르샤만 남지만 무려 127개 민족들이 있었답니다. 인도부터 이디오피아까지.

 

그러니까 구색을 맞춘겁니다. 피정복민도 똑똑하면 얼마든지 총리가 될 수 있다. 게다가 나라가 크고 복잡하니까 총리 세명이 필요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일을 해보니까 이 사람 다니엘의 지혜와 일처리는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따를 수가 없습니다.

 

신의 지혜를 가지고 있는 다니엘과 인간의 지혜를 가지고 있는 다른 관리들과는 처음부터 상대가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왕이 삼인의 총리 중에서 수석 총리를 시키려고 한 겁니다.

 

우리는 그가 얼마나 큰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을까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는 80노인입니다. 아주 옛날 아브라함 시대에는 사람들이 장수하고 건강하게 살았지만 다니엘 시대에 인간의 수명은 정말 짧았습니다. 워낙 전쟁이 많이 일어나고 전염병에 대책없이 죽어 나갔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열악한 위생 상태와 빈약한 영양은 사람의 수명을 형편없이 줄여 놓았는데 이때 80노인인 다니엘이 일처리가 더 뛰어나다는 것은 한마디로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이 80넘은 노인의 나이에 일처리가 뛰어나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본문의 다리오 왕에게는 매우 반가운 일입니다. 그건 그도 역시 다니엘과 처지가 비슷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다리오는 실제로 역사에서 키악사레스2세로 추정되는 인물인데 그는 파사의 고레스가 계속 전쟁을 수행하기위해 임시로 메대 파사 연합국의 왕이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고레스보다 나이도 많고 그래서 다니엘처럼 늙은 노인에게 동병상련의 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더구나 다리오는 원래 파사보다 더 큰 메대의 임금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아스티아게스 왕은 키악사레스2세와 만데인을 자식으로 두었는데  바사인인 캄비세스에게 딸을 주고 바사의 통치자로 삼았습니다. 그 캄비세스와 만데인의 자식이 고레스2세인 것입니다. 우리가 고레스라고 부르는 인물이 바로 이 고레스2세입니다.

 

그러니까 다리오왕은 고레스의 외삼촌이 되는 것인데 원래 처음에 메대의 속국이었던 바사는 이후 반란으로 독립을 하고 앗수르와 메대의 상당부분까지 정복하여 다리오때에 와서는 오히려 메대가 파사의 속국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고레스2세는 자기의 외삼촌인 메대 캄비세스 왕의 딸과 결혼하여 동맹을 맺었던 것입니다.

 

다리오왕의 입장에서는 고레스가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계속하는 동안 다리오가 연합 왕국을 다스리는 그런 구조가 되자 처지가 비슷하고 나이가 많은 다니엘을 중용하게 된 것입니다. 다리오가 비록 명목상의 왕의 자리에 앉아 있기는 하지만 군대의 총사령관이자 강한 파사의 왕인 고레스를 거스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리오왕이 개인적으로 다니엘을 좋아 하면서도 고레스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 왕의 칙령이나 왕을 신으로 섬기도록 하는 관습에 대해서 신하들의 의견을 무조건 배격하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게다가 한참 전쟁중인 메대와 바사 연합왕국의 군대는 고레스가 지휘하고 있었으므로 다리오 왕은 주로 바벨론에서 나라를 다스린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바벨론 출신 다니엘을 중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별기대없이 중용하고 보니까 그가 정말 지혜롭게 일처리를 잘하는 것을 보고 본격적으로 그에게 총리대신 3인중의 수석 총리대신을 삼으려고 한 것입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의정부의 삼정승 중에서 영의정을 삼으려고 한 것입니다.

더구나 허수아비 임금인 다리오를 단순히 왕이 아니라 신격으로 대우한다는 법령은 명예에 굶주려 있던 다리오에게는 엄청나게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래서 다리오도 신하들의 의견에 찬동하게 된 것입니다. 많은 다수 관리들의 방관, 소수 적대자들의 주동, 그리고 왕의 꿍꿍이가 합쳐져서 다니엘에게 일대 위기가 닥치게 된 것입니다.
 
어때요? 성경의 뒷배경을 보면 ‘아, 그럴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다니엘은 세상적인 조건에서는 결코 안되어야 하는 곳에서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기기묘묘한 방법으로 그를 출세를 시키십니다. 그러니 당연히 기득권을 누리는 본토 출신의 사람들이 반발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평소에 하는 일을 가만히 살펴서 고소할 틈을 노리는 것입니다. 웃는 얼굴로 방심을 유도하고는 뒤통수를 치려고 하는 거지요

 

그러나 이것은 다니엘에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 앞에도 똑같이 놓여진 문제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속하였다는 이유만으로도 우리를 공격하며 배척합니다. 우리의 지혜와 처신이 뛰어나면 날수록 세상이 우리에게 가하는 공격과 시기는 점점 더 크고 강력해집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저들의 공격과 시기를 이겨낼 수 있습니까?


5절에 ‘율법에 대하여 그 틈을 얻지 못하면 그를 고소할 수 없으리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른 두 총리들과 방백들이 다니엘을 고소하려고 조사를 했는데 그는 전혀 허물이 없고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답니다. 다니엘은 모든 면에서 너무나 완벽하고 뛰어나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는 그를 공격할 거리를 찾지 못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의 신앙을 문제삼기로 결심합니다.
왜냐면 다니엘의 최대의 약점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왜 최대의 약점이 되느냐면 그가 섬기는 하나님은 다른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하고 약점이 무슨 상관이냐?

 

그건 페르샤에서도 왕을 신으로 숭배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신교이기 때문에 신이 하나 더 늘어나도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왕이 진짜 신이든 아니든 그냥 신이라고 아부하는 겁니다. 그러면 왕은 흐뭇해 할 것이고 자기에게는 전혀 달라지는 점이 없습니다. 어차피 왕에게는 극진한 경배를 하는 것이고 하루 종일 왕하고 붙어 있는 것도 아니므로 그냥 잠깐 불편할 뿐이지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에게 살아있는 신을 경배하는 문제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왕을 신으로 인정하는 순간 그는 우상을 숭배하는 배교자가 되겠기 때문입니다. 당연하게도 다니엘에게 있어 우상숭배, 즉 하나님에 대한 배신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다니엘이 자기의 신앙을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니엘에게 약점은 율법외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음해하려고 해도 도저히 훼방거리를 찾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농담이시죠? 세상에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은 더 잘아시면서.

 

우리를 훼방하려는 적들조차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바른 생활청년입니까?
말도 안됩니다. 결코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만일 그런 바른 생활청년이 있다면 그는 아마 한국의 천연기념물이 될 겁니다.

 

어디에서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갑갑해서 세상을 살아 내지를 못합니다. 그냥 시류에 적당히 편승하며 너무 과하지 않은 범위에서 융통성도 발휘하고 그렇게 살아야 숨도 쉬지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 때문에 그리스도가 욕을 먹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습니까? 뭐 그런 생각을 하기는 하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기의 명성을 자기가 지켜야지 이 흠많고 허물많은 인생이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 명예를 방어하겠습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하, 여러분. 이게 우리네 인생의 솔직한 현주소입니다.

 

여하튼 다니엘에게 유일한 약점은 그의 신앙입니다.
당시 메대와 바사의 사람들은 여러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중에서는 살아있는 왕을 현인신으로 섬기는 관습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다신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라
결코 우리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용납지 않으십니다.

 

바로 이 부분, 왕과 하나님 중에 택일하도록 하는 이 부분이 다니엘의 가장 큰 약점이 된다는 것을 적들은 알아 버린 것입니다. 그는 그런 사람입니다. 어릴 때 유다에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와서도 굴하지 않고 단 한순간도 하나님 섬기는 자세를 잊어버리지 않는 다니엘은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생을 그가 나를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셨는데 이제 다 늙어서 내 무슨 부귀영화를 더 볼꺼라고 평생의 하나님을 배신하겠습니까?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게 다니엘에게 약점이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대적들은 다니엘을 너무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요?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너무 약점이 많은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게 유일한 약점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적들은 우리를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문제로 공격할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제말이 맞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다니엘같은 처세의 달인이 안되는 겁니다. 우리가 다니엘처럼 불가능한 환경가운데서도 승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일로 섬기면 하나님 역시 우리를 제일로 인정하시고 보호하시고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이것저것을 해 주실 터인데 불행하게도 우리가 하나님을 제일로 섬기지 않으므로 하나님 역시 우리를 제일로 생각하지 아니하시는 겁니다. 그게 우리와 다니엘의 차이입니다.

 

3.나라의 모든 관원이 의논하고

 

7절에 보니까 다니엘을 고소하는데 총리들과 방백들이 모여서 한가지 계교를 의논합니다
다리오 왕에게 가서 한가지 법령을 건의하는데 뭔고 하니 이제부터 한달간 왕 외에 다른 신이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제정하자고 합니다.

 

여러분
당시 메대와 바사뿐만 아니라 근동의 나라들은 왕을 신이거나 또는 신의 아들들의 화신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입에서 나온 명령은 결코 변개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마찬가지로 메대와 바사에서도 어인이 찍힌 조서는 그 순간부터 결코 변개할수 없는 나라의 법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적들이 어인을 찍으려고 했느냐하면 일단 어인이 찍히고 나면 이 다음에 그들의 음모가 탄로난다 하더라도 한번 어인이 찍힌 법령을 취소할 수 없기 때문에 다니엘을 사지로 몰아갈 수가 있겠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들은 지금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거짓이냐면 모든 7절의 “나라의 모든 총리와 수령과 방백과 모사와 관원이 의논하고”라고 한 말. 여기에 다니엘은 찬성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무슨 모든 관리하고 의논을 했겠습니까? 일부 관리에게만 의사타진을 한 겁니다. 나머지는 거짓인줄 알지만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입닫고 있었을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대적들은 지금도 거짓으로 우리를 곤경에 처하게 하려고 합니다. 마귀의 특징이 바로 참소, 거짓으로 무고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사실을 확대 과장해서 공격하려는 것입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말없는 다수들은 결코 정의를 위해 나서지 않습니다.

 

그냥 침묵하며 돌아가는 상황에 따라 자기에게 유리한, 다시 말해서 많은 사람이 서 있는 쪽의 뒤편에 줄을 서는 겁니다. 아무래도 자기에게 유리하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참소자의 눈앞에서도 결코 틈을 보여서는 안되고 사람들의 상식이나 양심에 기대해서도 안됩니다.

 

그런데 다니엘을 봅시다
10절에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서도 자기집에 돌아가서”라고 되어있습니다
다니엘은 여기서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다.
조서의 내용대로라면 삼십일 동안 왕 외에 다른 신에게 기도하거나 절하다가 적발되면 사형에 처해진다는 극히 불리한 내용을 알고서도 그는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자기가 항의하더라도 어인이 찍혀버렸다면 그걸로 끝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지금 그는 소위 말하는 왕따를 당한 겁니다. 총리대신이 모르는 법안을 왕에게 건의 했다는 것은 그가 지금 궁정 내에서 따돌림을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요, 포로의 후손이자 패배한나라의 총리대신으로 있다가 나이 80이 되어서 오히려 본토인보다 더 출세한 사람이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의 분노와 질시를 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왜 그는 전혀 항의 하지 않았을까요?

 

이미 정해졌다면 순복합니다. 그것이 극히 불합리하다고 생각해도 늦어버린 것을 뒤집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어도 사람만 추해질 뿐 바뀔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대신에 그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나아간 겁니다. 그의 일생동안 이보다 더 우려스러운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왕의 식사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나타내려고 했을 때, 바벨론의 최후의 순간에 신의 손가락이 벽에 쓴 글씨를 해석할 때, 풀무에 들어가는 것을 마다않고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은 친구들의 이야기가 그에게 인간적인 방법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게 만든 겁니다. 그래요, 그 놀라우신 하나님은 그 위대하고 자비로우신 여호와 하나님은 일생에 그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기대합니다. 내 아버지의 놀라운 역사가, 나를 아득히 초월하는 그 놀라우신 아버지의 능력이 나를 인간세상의 불가능에서 건지시고 기기묘묘한 방법으로 역사하실 것임을 내가 알기에 나는 하나님 안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어떤 일이 있어도 그를 배신하지 않고 아버지의 품안에서 승리할 것을 믿습니다.

 

4.전에 행하던 대로

 

다니엘은 이미 어인이 찍혀버린 조서에 대해 항의하거나 왕앞에 자기를 위한 구명을 하거나 하지도 않고 조서의 내용대로 왕 외에 어떤 신에게도 기도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기도를 쉬지도 않습니다.
11절에 보다시피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라고 했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집안의 골방에서 은밀하게 기도한다면 솔직히 다른 사람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이제까지 그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열린 창’가에 꿇어앉아 기도했다면 한달 정도는 골방에서 기도한다면 그는 무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골방에서 은밀한 중에 기도하는 것이 더 권장되는 기도방법이니까 잘되었습니다. 이 기회에 굳이 탑방까지 올라가서 기도하지 말고 골방에서 아니면 침실에서 서재에서 기도하면 몸은 더 편합니다. 이걸 계기로 기도습관을 바꾸는 거지요.

 

어차피 하나님이 그 창가에만 계시는 것도 아니고, 꼭 예루살렘을 향하고서 기도해야 기도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또 반드시 꿇어앉아 기도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서서 눈을 뜨고 기도한다면 누가 기도하는 줄 알겠습니까? 원래 비상시에는 비상하게 대처하는 법입니다. 고민할게 뭐있습니까? 기도방법하고 목숨하고는 비교가 불가능한데. 그런데 그 고집불통이 다니엘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가 그 열린 창에서 기도한다면 자기의 대적들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왕의 금령을 어기는 것을 보게 되고 따라서 자기의 목숨과 지위가 어려움에 처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장소를 옮기지도 않았고, 기도형식을 바꾸지도 않았고,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방식대로, 정해진 곳에서 기도했습니다.

 

결과는 사형입니다.
대적들은 다니엘이 기도하나 안하나 몰래 살피고 있었고 그가 평소대로 기도하자 다니엘을 고발했고 다니엘이 계속 기도하자 고발의 증인들도 점점 많아지게 됩니다.

 

11절에는 “그 무리들이 발견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니엘이 과연 그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하는가 보려고 창문 곁에 서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가 기도하는 곳의 밑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던 이유는 다니엘이 항상 기도하던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다니엘이 그 법이 뱔효되었는데도 변함없이 기도하는지 아닌지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페르시아의 탑방 열린 창에서 기도하면 인근에 수많은 사람들이 보게 됩니다. 참고로 당시에는 유리가 없었겠지요? 그래서 사람이 그냥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을 대적하는 무리들은 결코 다니엘이 부인하지 못하도록 떼를 지어 몰려들어 다니엘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자 했고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다니엘은 끝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세상에 살 때 세상은 우리가 우리의 신앙과 신념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로 회유합니다. 회유는 욕망을 자극합니다. 육신의 정욕으로 본다면 우리는 그 욕망에 굴복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엄청나게 효과가 있음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익히 증명된 바입니다.

 

그러나 가끔가다가 그 회유가 통하지 않는 별종들이 있습니다.
자기들이 뭐 대단한 하나님의 용사인양 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인데
그 회유가 통하지 않으면 사탄은 이단계로 그들에게 협박을 가합니다. 그에게 가장 무서운 것을 가지고........
돈을 사랑하는 이에겐 돈으로
명예를 사랑하는 이에겐 명예로

 

권력을 사랑하는 이에겐 권력으로
사랑하는 연인에겐 사랑으로
목숨을 아끼는 이에겐 목숨으로
그렇게 협박을 가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회유할 때보다 더 큰 것을 가져가겠다고 위협함으로 자기의 목적을 이루려 합니다.

일단은 우리가 사탄 자기를 숭배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숭배를 멈추게 하려 합니다. 사탄은 항상 그렇습니다. 직접적으로 공격하는게 아니라 우회적으로 아주 조금씩 차근차근 공격합니다.

 

우리가 한발 물러서면 그는 한발 더 들어오고 우리가 한 개를 양보하면 그는 우리에게 그 다음을 요구합니다. 그래요, 우리는 그런 사태를 방비하기위해 하나님 안에서 무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만이 우리를 구원하고 살릴 수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의 정신적 지주가 없어지면 그 다음에 그 정신을 자기가 지배하는게 너무나 쉽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탄은 서두르지 않습니다.

 

한가지씩 한가지씩 우리를 압박합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그의 전술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세속화되고

 

성공주의 물량주의 대형주의가 판을 칩니다. 연예인을 초청하고 운동선수, 정치꾼, 유명 전도자, 인기인들을 초청합니다. 냄비와 설탕과 밀가루를 뿌리고 황금과 여행권으로 유혹합니다. 한주에 수천명씩 등록시키고 그 다음에 그들은 쑥빠져버립니다.

 

매년 이런일이 반복되면서 교회는 조금씩 조금씩 영적인 순결과 그리스도의 정신이 사라집니다. 하다 하다 세속화가 끝까지 가면 세습이 이뤄지고 세습에 반발해서 교회가 쪼개지고 목사와 장로가 서로 싸우고 장로회와 집사회가 싸우고 교인들끼리 서로 편을 갈라서 싸우고 비난하고 이런 일이 마구 벌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원칙에서 한발 물러서는게 이렇게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자, 이제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실 것입니까?
우리를 향해 몰려오는 세상의 파고를 이기지 못하고
격랑의 파도를 타고 넘지 못하고
물가에서 언제까지나 한탄만 하고 있을 것입니까

 

아니면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믿고
거친 파도 속에 몸을 던지고
저 격랑을 타고 넘어 승리의 건너편 해안에 당도할 것입니까?

내가 내 삶의 최우선 순위를 그분에게 두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역시 나를 그분의 보호대상의 최우선순위에 두실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나는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내 인생의 제일앞에 두고 그의 보호와 인도를 가장 앞에 두고 기도합시다. 그의 말씀을 내가 지켜야될 제일 중요한 계명으로 삼고 살아 갑시다. 내가 하나님을 제일 앞에 두고 살아간다면 그는 나의 앞에서 가장 놀라운 일들을 하실 것입니다.

 

오늘도 불안한 하루를 사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확실하고 불변하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속에 들어가서 그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가운데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을 제대로 지키는 삶을 사는 연습을 해봅시다.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 이게 우리 성도들의 삶의 한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변화하는 세상이 여러분을 그대로 두지 않습니까? 예, 좋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만은 변치 말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답이 없는데 내 아버지 하나님은 답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여, 아버지의 뜻대로 저를 이끄시고 사용하여 주시며 아버지의 놀라운 능력과 자비 가운데 우리를 품어 주십시오. 기도합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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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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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변함없는 한결같은 신앙의 힘, 다니엘의 내공은 그렇게 다져졌고, 그렇게 습관화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끝까지 섬기는 일을 선택했지요. 이를 비추어 볼 때, 평소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고 있는가, 성실하게 그 분을 따르고 있느냐가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일용할 양식에 충분히 감사하고 있는지, 주어진 오늘이라는 시간을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게 보내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선을 향한 발걸음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최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둔다는 것은, 준비되어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 저는 매일 준비되어 있습니다. 매일 성실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주님께서 선한 뜻대로 인도해 주심을 믿습니다.

 

오늘을 성실하게 보낼 수 있기를, 할 수 있는 데까지 끝까지 매일 성공적인 노력, 최선을 다해보기를, 그런 작은 태도 하나 하나들이 모여서, 우리를 이루어간다는 것, 그것이 곧 인생인 것 같습니다. / 2016. 08.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