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그들을 큰죄에 빠지게 하였느냐(출애굽기32:25-35)/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7. 31. 23:37

 

그들을 큰죄에 빠지게 하였느냐 (출애굽기32:25-35)

 

오늘은 금송아지 얘기를 한번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큰 징계를 받은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금 본문을 찬찬히 살펴보면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서 음란하게 뛰논 백성들에 대한 사후처리가 뭔가 좀 이상합니다.

 

우리의 생각처럼 백성들이 전부 몰살을 당하거나 땅이 갈라지고 하늘에 불이 떨어져서 백성들을 사른 것도 아닌데 이들은 어쨌거나 다시금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고 하나님은 자신의 진노를 잠시 연기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여정을 계속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읽어 내려가면 금송아지 사건으로 죽은이는 겨우 삼천명에 그칩니다. 이백만 백성들 숫자에서 삼천이 많다면 많을 수도 있고 적다면 적은 숫자인데 앞부분에서는 모든 백성들이 범죄한 걸로 되어 있는데 죽은이는 겨우 삼천이라고 하니 좀 의아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일단 사건이 벌어진 것을 어떻게 잘 수습했는지를 볼 수 있을 걸로 기대됩니다.

 

1.지도자의 기도, 네 백성과 주의 백성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사이에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른 것 같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서 거의 40일 가량 내려 올 생각을 안합니다. 모세를 기다리다 지친 백성들은 아론을 사주해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우상 앞에서 음란하게 뛰놀고 먹고 마시고 우상을 하나님으로, 애굽에서 자기들을 인도하여 낸 하나님으로 섬깁니다. 이렇게 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백성들이 부패하였으니 내가 백성들을 진멸하고 모세로 하여금 새로운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지도받을 사람이 없는 지도자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 의미도 ,재미도 없습니다. 그리고 언제 애를 낳아서 또 그들이 자라서 애를 놓고 그래서 지금의 이스라엘 민족처럼 거대한 민족을 만들겠습니까?

지금의 이스라엘 민족이 만들어 진 것은 야곱의 때 이후로 500년도 더 지나서 된 겁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는 살아 생전에 그 거대한 민족을 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보세요. 이스라엘이라고 하지만 야곱은 정작 자기의 후손들이 이렇게 번창하고 거대한 민족을 이루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약속의 땅을 바라고 친척 아비집을 떠난 아브라함은 후손들이 믿음의 조상이니 이스라엘의 조상이니 하고 떠받들지만 자기의 생전에는 겨우 수천명의 작은 무리를 이끈 소족장이었을 따름입니다.

 

모세는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를 발하지 말 것을 기도합니다.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우리는 여기서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는 방식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이스라엘의 범죄한 백성들을 가리켜 ‘네 백성’이라고 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일러 모세의 백성, ‘네 백성’이라고 한 그 백성들을 ‘주의 백성’이라고 강변합니다.

 

백성들이 집단적으로 범죄하여 진멸의 위기에 있을 때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지도자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그리고 용서를 바라는 기도를 제일 먼저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직접적으로 책임이 없어도 지도자이기에 그는 백성들의 대표로 회개해야 합니다. 만일 나는 책임이 없다고 나는 죄가 없다고 저들이 죄를 지었다고 나와 저들을 구별하게 되면 그는 더 이상 저들의 대표자가 아닙니다.

 

만일 모세가 하나님의 용서를 바라는 기도를 하지 않고 오히려 ‘저들을 어떻게 해야겠습니까’라고 마치 남 일처럼 이야기했다면 어쩌면 하나님의 진노가 그대로 백성들에게 발해졌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사실 백성들의 범죄에 모세가 관여한 바는 없겠지만 모세는 그들의 지도자이므로 모세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녀로서의 마음가짐을 철저하게 각인시키지 못한 점, 줏대없는 아론과 같은 이에게 백성들을 위임한 점, 자기의 장기간에 걸친 부재 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관리할 체계를 확립하지 못한 점들은 그의 허물일 것입니다.

 

2.진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나이다

 

아마 여호수아가 시내산에 오른 모세를 수행했나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에 대한 감독이 이렇게 느슨하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진에 가까이 오면서 무슨 소리가 들립니다. 여호수아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 소리를 ‘진중에서 싸우는 소리’라고 합니다. 참고로 여호수아는 야전군 사령관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귀에는 우상 앞에서 뛰놀고 노래하고 춤추며 떠드는 소리가 싸우는 소리처럼 돌립니다.

 

모세는 뭐라고 합니까? “이는 승전가도 아니요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라 나의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사람은 항상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맞게 생각합니다. 군인인 여호수아는 노래소리를 듣고는 싸우는 소리, 전쟁하는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모세는 이 소리의 정체를 정확하게 짚어 냅니다. 노래하는 소리. 이미 8절에 하나님이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이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짐작 가는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두사람이 서둘러 진으로 가까이 가 보니 금으로 만든 송아지가 서 있고 그 앞에서 백성들이 춤을 추고 있습니다. 아마 노래 소리와 악기 소리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의 춤은 성적으로 음란하고 광란의 춤입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추는 군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지역의 우상숭배는 항상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것을 흉내 낸 것입니다.

 

보통 이런 종류의 우상은 풍요와 다산의 신이었고 다산이나 풍요는 성행위를 동반합니다. 그래서 춤도 그런 성적인 음란함이 가득한 춤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더 광분해서 정신없이 춤을추며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참람한 말을 하는 겁니다. 그걸 모세가 보니까 기가 찹니다.

 

자기는 그 험한 산위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받아서 백성들을 제대로 인도하려 하고 있는데 그 사이를 못참아서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이민족들과 같이 우상을 음란하게 숭배하고 있으니 하늘이 노랄 일입니다.

 

3.대노하여 판들을 던지다

 

모세는 이러한 광경을 보고는 대노해서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판들을 산아래로 던져서 깨어버립니다. 산에서 내려오다가 진이 보이는 곳까지 와서 백성들의 광란적인 우상숭배의식을 보고는 화가 나서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산아래로 던져 깨어버린 겁니다. 너희는 이런 계명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들이다?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돌판은 깨어졌는데 원문의 의미로는 산산조각이 났답니다. 그러니까 두쪽이나 세쪽으로 갈라져서 뭔가 원상복구를 시도할 그런 상태가 아닙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박살이 난 겁니다.
거룩한 분노라는 거지요. 그런데 일부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뭐냐면 모세가 돌판을 깬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멸망을 막기위한 의도적인 행동이었다는 겁니다.

 

가령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에는 우상을 만들어서 섬기면 그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삼사대에 이르게한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이 법이 시행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일이기 때문에 깨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법이 없으므로 죄가 성립이 안되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판에 새겨진 벌을 피할 수 있다는 겁니다.

 

사실 법 정신에 의하면 모세의 말이 맞습니다. 법이 아직 공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죄형법정주의에 따라서 벌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을 반포하게 되면 백성들이 벌을 받아야 하므로 깨버렸다는 것, 모세의 잔머리라고 할까요 백성을 사랑해서 기지를 발휘했다고 할까요 여하튼 그렇다는 겁니다.

 

글쎄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본문에 모세가 대노해서 돌판을 산아래로 던져서 산산조각을 냈다는 것은 하나님의 분노를 표출한 거룩한 분노였고 그 과정에서 욱하는 마음으로 돌판을 깼지만 곧 후회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모세가 부숴버린 돌판이 무려 하나님이 직접 새기고 만들어 주신 돌판이기 때문이지요.

 

두 번째로 모세가 돌판을 가져올 때 그는 직접 돌판을 만들고 그 위에 새겼습니다. 후세들이 볼 때 중요도에서 상대가 안 됩니다. 신이 새긴 돌판과 인간이 새긴 돌판은 그렇게나 차이가 나는데 그만 모세는 분노로 욱해서 돌판을 깨버린 겁니다. 어쩌면 잘한건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신의 돌판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면 아마 이것을 모셔놓고 여기에 절하고 키스하고 참배하고 난리도 아닐 겁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의 바로 아래에서 미친 듯이 몸부림을 쳤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쪽으로 모세가 손에든 돌판을 던져서 분노를 표시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에는 이게 백성들을 맞췄는지 아니면 돌판이 부러지면서 백성들의 광란이 멈추었는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4.송아지를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일단 돌판을 던져 부순 모세는 진에 들어가서는 조치를 취합니다. 먼저 금 송아지를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서 물에 타서 이걸 백성들이 마시게 합니다. 금가루니까 몸에는 나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금이야 몸에 좋은건 없어도 그냥 무해하다고 하니까. 게다가 극소량이니까 먹기도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금송아지의 금을 가루로 만들어서 물에 타서 이백만이 마셨다면 개개인에게는 극소량, 아니 극미량이 들어갔을 겁니다. 이건 물리적으로 죄를 씻는 효과를 주는건 아닙니다. 다만 상징적으로 죄를 씻는다는 요식행위인 셈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행위를 통하여 백성들은 자기들의 죄를 사함 받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금송아지를 결코 다시는 섬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짐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특별히 의미가 없는 행위를 뭔가 의미있는 행동으로 만들어서 사람들을 움직이고 바꿀 수 있는 행동은 지도자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모세는 지금 금송아지 우상 앞에서 음란한 예배를 드린 백성들을 다시금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 수 있는 의식을 한 겁니다. 금송아지를 부수어서 그걸 불사르고 또 그걸빻아서 가루로 만들어 물에 타서 마시게 한다는 것은 우상에 대한 철저한 발본색원과 더렵혀진 개인들의 속 중심까지 정화시키고 속 깊은데까지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일이 됩니다.

 

5.진상파악

 

모세는 금송아지를 빻아서 금가루를 마시게 하는 일을 먼저 했지만 당연히 이 일의 전모를 자세하게 파악하고 누가 이 일을 주도했는지 주동자를 파악해서 처벌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모를 파악해 보니 가장 혐의가 큰 사람이 바로 자기의 친형인 아론입니다.

 

이건 정말 골치 아픈 일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형이 이런 범죄에 연루되었다니 이건 정권자체의 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아론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 대제사장입니다. 그런데 그 대제사장이란 작자가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음란하게 섬기도록 했다면 도대체 정신이 나간 것 같습니다. 그의 집안은 모두 제사장인데 이게 도데체 무슨 꼴입니까?

 

그런데 모세의 말은 약간은 자기 형을 두둔하는 듯이 보입니다. “이 백성이 네게 어떻게 하였기에 네가 그들로 중죄에 빠지게 하였느뇨”
모세는 아론의 죄를 충분히 인지하고 그에게 가장 큰 책임을 묻고 있지만 이 말을 잘 보세요. 아론이 그냥 백성을 충동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아론을 협박해서 뭔가를 하게 했을 거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사실 백성들이 아론에게 몰려가서 ‘모세는 산위에 올라가서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므로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한 건 사실입니다. 당시의 관념으로 신을 만나고 죽는 일도 많았던 모양입니다. 우리는 요즘 하나님을 만나면 살판이 나는데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만 인식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모세도 그렇지만 아론의 대답도 좀 의외입니다. 이 사람은 절대 이런 식으로 대답해서는 안됩니다.

 

아론은 일의 전모를 털어 놓기 전에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라는 말부터 먼저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모세가 아론을 책망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책망한 것으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론은 이 백성이 원래 악해서 그렇다는 식으로 화답한 겁니다.

 

그리고 아론은 연이어 자기에게 유리하게 진술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아론은 자기가 사람들에게 떠밀려서 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는 자기가 최고 지도자가 되려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32:1에 “백성이 ... 모여 아론에게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는 말에 반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일어나라’는 말은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말도 되지만 상징적으로 지도자나 왕을 세울 때 쓰이는 말이기도 합니다. 앉은자리에서 일어나 지도자가 되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아론이 여기에 확실한 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금송아지를 만든건 확실합니다. 게다가 새로운 법령을 공포했습니다. 금송아지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으로 선언하고 금송아지의 축일을 즐기도록 하는 법령을 공포한 것입니다. 이건 최고지도자나 왕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아론은 모세가 없는 동안 최고지도자로서 기분을 한껏 낸 게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아마 아론은 백성을 무마하는 한편 이걸 기회로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가 되려는 생각도 있었다는 겁니다. 아론은 형이므로 동생에게 명령을 듣고 이인자로 만족 하는 게 힘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론은 모세에게 “내 주여”라고 하면서 다시금 모세를 지도자로 대우하고 있습니다.

 

아론의 처세는 명백히 기회주의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자기의 죄를 백성에게 돌리는 면이 있습니다. 게다가 아론은 백성들에게 귀의 금고리를 빼어서 가져오게 하고 그걸 녹여서 칼로 새겨 금송아지를 만든 겁니다. 분명히 자기가 방법을 제시해놓고, 자기가 주도적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래놓고는 모세에게는 24절에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그것을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이거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자기가 금고리를 불에 녹여서 칼로 금송아지를 새겨서 만들어 놓고 무슨 신비한 주술적인 방법으로 펑하고 불속에서 금송아지가 만들어진 식으로 이야기하면 안됩니다.
게다가 아론은 금귀고리를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왜 금반지는 아니었을까요? 그건 귀고리 두짝을 가지고 점을 치는데 주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귀물을 가지고 와서 만들었기 때문에 더 영험하다고 하는 인상을 심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론은 이 정도로 용의주도합니다.

 

25절에 보면 모세는 아론이 거짓말 한 것을 파악한 것 같습니다.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방자하니’ 란 말은 해방하다, 고삐를 풀다, 벌거벗다 같은 의미를 가지는데 통제에서 벗어나 제 멋대로 노는 것을 말합니다. 백성들은 음란한 우상숭배의식이 너무나 마음에 든 겁니다.

 

이제까지는 모세가 계속해서 엄격하게 하나님 외에는 어떤 것도 섬기지 못하게 하고 따라서 엄숙하고 딱딱한 재미없는 제사 의식만 있었는데 새로운 지도자가 된 아론은 전혀 다른 쾌락과 음탕함을 제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송아지를 만든 것도 아론이요 그 금송아지를 위해 단을 쌓고 축일을 선포해서 백성들이 즐기며 경배하게 한 것도 아론이기 때문에 아론이 제일 죄가 큽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 백성에게 죄를 미룹니다.

 

그러므로 지도자의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대제사장직을 맡고 있는데 이 정도도 과분한 사람입니다. 아론을 처벌해야 하는 모세는 아론을 처벌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정당성을 잃었습니다. 이런게 쌓이고 쌓여서 가나안을 얻지 못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모세를 이해합니다. 친형을 처벌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더구나 아론은 민족해방을 시도할 때 곁에 아무도 없을 때 제일먼저 자기를 도와주고 조력한 사람인데 처벌하기가 정말 어렵지요. 이해는 합니다. 그런데 좀 아쉬운 부분입니다.

 

6.처벌과 정화

 

모세는 아론의 이야기를 듣고 누구 누구가 죄가 있고 그래서 누구만 처벌하면 될 것이 아니라 이 백성들이 전부 범죄한 것을 알고 백성들에게 기회를 주기로 합니다.
그래서 26절에서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고 말합니다.
당연히 우상숭배 의식에 참여하지 않은 자가 여호와의 편에 서 있는 자일 것입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우상을 숭배했지만 곧 회개한 사람도 여호와의 편에 서 있는 자일 것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다 우상을 숭배하고 정신없이 뛰논 것 같지만 이 의식에 참여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의리를 지킨 이들도 많습니다. 모세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온 레위인들이 다 모였답니다. 이런걸 보면 레위인의 큰 어른인 아론이 회개하고 하나님 편으로 돌아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레위인은 모세의 지파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일사불란하게 모여서 하나님의 편에 서기가 쉽지는 않았을 듯도 합니다.

 

또 레위지파는 하나님께 구별된 자들입니다. 여하튼 이들이 모세의 명에 따라 모여든 것입니다. 아마 이때까지도 다른 백성들은 어리둥절했거나 아니면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했거나 돌아가는 상황을 방관자의 위치에서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대중이라고 해야 합니까 민중이라고 해야 합니까 그냥 무지렁이 백성이라고 해야 합니까

 

이 사람들은 이게 문젭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냥 돌아가는 상황만 살피는 겁니다. 눈치만 늘어 가지고 소신도 신념도 없고 그냥 돌아가는 판세만 살핍니다. 그것도 제대로 살피지도 못해서 큰 사건이 일어나야 비로소 알아차리고는 납작 엎드립니다.

 

이때 모세에게 모여든 레위인들은 모세의 명령에 따라 칼을 차고 우상숭배자를 죽이게 됩니다.
27절의 이 말은 백성들을 몽땅 다 죽여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우상숭배자를 색출해서 죽이라는 말입니다. 이 우상숭배자가 어떤 표시가 있었는지 우상숭배자를 색출할 때 무슨 표식이 있었는지는 본문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여하튼 이렇게 우상숭배자를 철저하게 가려내어서 죽였는데 삼천명 정도였답니다. 이들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적극적으로 백성들을 선동해서 우상을 숭배하게 하고 하나님께 대적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아마 모세를 욕하고 있었거나 하나님을 저주하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쾌락과 음탕함에 흠뻑 취해서 하나님과 모세를 비방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금송아지 신인 아피스를 칭송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구체적인 모습은 알지 못하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비방하고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었음엔 틀림없습니다.

 

모세의 말에 따르면 마치 레위지파를 빼고는 다 죽일 것 같았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삼천명이 이백만 백성들을 나쁜 길로 이끄는 주도적 역할을 한 것입니다. 겨우 0.15%의 사람들이 영향을 끼친겁니다.
사실 어떤 조직이던지 목소리 큰 사람이 항상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않는 다수의 비겁한 이들 또는 방관자들은 결코 열심있는 소수를 당하지 못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산당에서는 회의에 먼저 참석한 사람이 높은 자리를 차지한답니다. 그리고 목소리가 큰 사람일수록 이기게 되어 있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먼저 회개운동을 선도해야 합니다. 어차피 썩어빠진 세상을 개혁하기 위한 몸부림은 있어야 합니다. 그걸 남따라 하지 말고 우리가 먼저 선도하는게 좋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이 땅에서 성도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다수를 선동해서 악의 구렁텅이로 몰고 갈 수 있다면 반대도 가능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소수의 의인들이 다수의 국민들을 악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서 선한 길로 이끌 수 있습니다.

 

7. 명령준수에 대한 보상

 

아마 이스라엘 공동체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을 것입니다. 고라의 반역처럼 단순히 지도자에 대한 반역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반역입니다. 이는 신앙공동체인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큰 사건입니다.

 

출애굽시에 나온 무리들은 순수한 이스라엘 족속들만은 아닙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애굽의 노예로 살던 ‘잡족’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은 각자 연고에 따라 이스라엘 열두지파에 속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혈연이나 종교적이나 여러 가지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신앙하나로 뭉쳐있는 신앙공동체인데 이제 그게 근본적으로 흔들릴 뻔하게 된 것입니다.

 

만일 그 위급한 순간에 결단의 순간에 아무도 모세의 곁으로 오지 않았다면 그래서 모세가 배덕의 무리를 징치할 수 없었다면 여호와 신앙은 아마 그때 끝이 났을 것이고 이스라엘은 각 족속별로 지파별로 뿔뿔이 흩어져서 사막의 유목민족으로 돌아 갔을 것입니다. 또 일부는 새로운 지도자를 뽑아서 애굽으로 돌아 갔겠지요.
그리고 하나님은 애초에 말씀하셨던 대로 직접 이스라엘민족을 다 진멸하고 모세를 조상으로 하는 새로운 민족을 만들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레위인들의 순종은 더 기특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들에게 복을 빈 것입니다. 결코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 복을 빈게 아닙니다.
‘헌신했다’는 말은 우리말 뜻과는 달리 ‘모든 사건이 충분히 완료된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충분히 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송아지 반란을 완전히 평정하고 사후처리까지 끝이 났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에게 축복한 것입니다.

백성이 범죄할 때 이를 말리고 지도해야 할 대제사장은 자기가 권력을 차지할 것 같아서 백성들의 편에 서서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죄를 짓습니다. 게다가 나중에 문제가 커지자 슬쩍 자기는 빠지고 백성들에게 죄를 돌립니다. 모세도 그렇게 배덕자들을 삼천이나 죽였으면서 자기의 형은 용서합니다.

 

배덕자들도 문제지만 그들의 지도자이자 권력이 탐이 나서 백성들에게 부화뇌동한 아론이 결백할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론을 직위해제했다 던지 투옥하고 징치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기록으로만 ‘아론이 백성을 방자하게 만들었다’고 되어 있을 뿐입니다. 누구 말처럼 역사가 심판한다는 말입니까?

 

이게 결국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벌주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모든 면에서 조금씩 문제를 나타냅니다. 나중에 보면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모세의 재혼건에 대해서 시비를 건 일도 있습니다. 그래서 미리암은 벌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벌을 내립니다. 모세가 아니라.

 

그러니까 그 위대한 모세조차도 형제들 사이에 권력 때문에 많은 문제가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이튿날 모세는 다시 시내산에 올라갑니다. 하나님께 백성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고 새로운 계명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오늘 금송아지를 섬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공동체의 성경이 어떻게 회복되었는지 모세와 아론같은 지도자들의 마음상태와 자세는 어떠했는지에 대한 기사를 살펴 보았습니다.

 

사실 성경은 우리에게 뭔가 교훈을 주려고 하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냥 담담하게 인간의 선과 악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가감없이 되어진 일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모세도, 대제사장인 아론도 우리 생각만큼 완벽한 인간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인간이 완벽할 수 있을까요? 말도 안됩니다. 우리가 거룩해서가 아니라 거룩해 져야 해서 성도라고 불리듯이 우리는 죽어서 하나님의 앞에 서기전까지 완벽하게 거룩해지지 못해서 계속해서 거룩해 지는 과정을 되풀이 하는 겁니다.

 

또 그렇게 많은 이적과 역사를 체험하고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려하는 백성들과 실제로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헌신된 이는 그렇게 많지 않다는 공동체의 불 완벽성도 살펴 보았습니다. 불완전한 지도자에 불완전한 구성원 그래서 불완전한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자기의 일꾼을 통하여 백성들을 통제하고 그들을 다시금 회개하고 새로워지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애굽을 떠나서 가나안에 정착하기까지 40년동안 아니 가나안에 정착하고서도 수백년간 틈만 나면 하나님을 떠나서 죄악을 저지른 이스라엘 백성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를 한번 볼까요?
우리도 역시 다수의 방관자들과 이기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제대로 확립해야 될 의무를 집니다. 누구보다 먼저 아버지 하나님을 위해 진리의 검을 들어 세상과의 단절을 외쳐야 할 때가 있음을 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모두가 성도인 것은 아닙니다. 교인들도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 진정한 성도, 아니 신도는 얼마 없습니다. 제가 예전에 시무했던 교회에서 통성기도를 시켰는데 기도를 하지 않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남편이 변호사라던가 여하튼 그런 분인데 통성기도를 하지 않기에 하필이면 제가 그때 옆에 앉았기 때문에 물었지요? 뭘 물었냐면 왜 통성기도를 하지 않느냐고 앞에서 집회를 인도하는 목사님이 통성기도를 하자고 하고 다른 이들은 열심히 하고 있는데 입도 벙긋안하는게 너무 이상해서 물었지요. 그런데 대답이 영 시원챦은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아차 싶어서 물었습니다. 뭘 물었을까요?
“혹시 집사님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습니까?”
그러자 이 분이 고민도하지 않고 대답하는 겁니다. 본심이지요. “그건 모르지요. 가봐야 알지요.”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 이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이상한건 절대로 아닙니다. 은퇴목사들에게 설문지로 조사를 했는데 천국과 지옥이 있느냐는 물음에 절반가까이 모르겠다고 답했다는 거 아닙니까.

 

물론 이 분이 집회 막바지에 저보고 ‘목사님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습니다’ 라고 말했지만 안타깝게도 버스가 떠난 뒤에 손드는 격입니다. 저는 이미 그 분의 본심을 들어 버렸으니까요.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유별나게 하나님을 섬기고 그를 의지하며 신앙으로 살려고 하면 참 별나다는 소리를 듣는 세상입니다. 천국과 지옥 얘기 요즘 잘 못 듣지요?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셨나요? 듣기 어렵습니다. 왜냐면 잘 안 믿거든요.

 

세상의 유명인 누구, 세상의 유명한 책 뭐에서 봤다면 사람들은 “아, 그럴 수도 있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이렇게 말했다고 이야기하면 코웃음 칩니다. 세상사람들이 코웃음치는 건 당연한 거지요. 문제는 교회 안에서 심지어 목사가 되려는 이들도 그런 식으로 반응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지금 매년마다 교인들이 준다고 난리지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지금도 교인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더 소수정예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초대형 교회 목사들은 펄쩍 뛰겠지만 무늬만 기독교인들이 자꾸 문제를 일으킵니다. 무늬만 목사들이 성직자들이 자꾸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더 줄이고 더 정예화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쟁이 시절로 돌아가야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질시와 인정 그리고 공포를 동시에 받았던 초기의 기독교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쟁이 하면 자기들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어도 적어도 죄를 짓거나 사기를 치거나 남을 해롭게 하지는 않는 사람, 절대로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되던 시절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게 허수만 잔뜩 낀 천만성도보다 훨씬 더 중한 것입니다.

 

목소리 큰 소수의 사람들 삼천명이 다수의 침묵하는 백성들 이백만을 움직인 것과 마찬가지로 비록 적은 숫자지만 잘 훈련받고 자기를 성별한 성도들이 자기밖에 모르고 돈을 사랑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약속을 저버리는 이 땅의 사람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습니다. 무늬만 기독교인이고 실제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는 교인들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소수의 정예화된 신자들이 성도들이 충분히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다수의 방관자들은 소수의 열심 있는 핵심분자들을 당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실수할 수 있고 사람은 쾌락과 음란함을 좋아하며 사람은 돈을 사랑하며 사람은 권세를 좇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남의 일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 들어가면 대의니 하나님의 공의니 하는 것도 부질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또한 사람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영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정신없이 금송아지 앞에서 춤추며 노래하며 음탕하게 뛰놀다가도 문든 영적인 경고에 정신 차리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는 존재입니다.

 

찌는 듯이 무더운 요즘 부산은 그야말로 거대한 휴양지 같습니다. 즐길 때 즐기더라도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가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시며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을 잊지는 맙시다.
날씨가 너무 너무 더워서 많은 이들이 열사병 때문에 참변을 당했다고 합니다. 저도 요즘 기도기간이라서 약간 강행군을 하고 있는데 무더위에 특별히 몸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일주일 승리의 한주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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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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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0.15%의 힘. 그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들이 있어서 이스라엘을 극도의 음란함과 악행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인데, 여기서 목사님은 흥미로운 가정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극소수의 사람들의 성실함과 성결함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을 올바른 길로 다시 인도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깨끗하고, 양심 있는 올바른 기독교인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얼마 전, 오랜 친구에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면, 주변에 괜찮은 교회를 나가보라고 살짝 권했다가 욕만 무진장 얻어먹었습니다. 요즘은 그렇습니다. 제일 부패한 곳이 교회이고, 먹사이고, 교회 내에서도 가짜가 판을 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이미지가 땅에 떨어져 있습니다. 저는, 귀중한 소수의 기독교인이 있어서 삶이 행복해지고 특별했었는데 말이지요.

 

할머니께서 마치 유언처럼 했던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 것 다 필요없다, 예수님 잘 믿고, 교회만 열심히 다녀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들은 찬송가를 떠올리게 합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돈이나 명예,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 이웃을 사랑하며, 내가 열심히 삶을 살아가는 것이 제일 중요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부디 그런 성도답게, 노력하고, 또 노력해 보기를.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 2016. 07.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