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열왕기상 18:7-19)/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7. 27. 05:16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열왕기상 18:7-19)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라는 말은 누가 누구에게 했을까요? 본문 17절에 보면 아합이 엘리야에게 한 말입니다. 너무 웃기지요? 아합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북 이스라엘에서 최악의 왕입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여전히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3년반의 참사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더구나 엘리야는 자타가 공인하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가장 악한 왕이 가장 위대한 선지자 보고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라고 말합니다. 완전한 코메디입니다.

 

그런데 아합의 이 말은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닙니다. 억지를 부리는 말도 아닙니다. 아합은 정말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황당합니다.
아합은 지금 사리판단이 안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한 나라의 왕으로 있으니 그 나라가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죄는 왕이 지었어도 결국 그 피해는 죄지은 왕이 아니라 그 왕이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들이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라고 해서 무고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백성들이 결국은 그 왕의 통치에 동조했기 때문에 왕이 그런 형편없는 짓거리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지도자들의 욕을 많이 합니다. 정치꾼들이야 워낙 욕을 먹게 행동하지만 그 정치꾼을 지도자로 뽑은 이들은 우리들입니다.

 

뭐 나는 안찍었다. 예, 좋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더 많은 이들이 그를 찍었기 때문에 그가 앞에 나서 있는 겁니다. 결코 우리가 찍어 주지 않았는데 그 자리에 서있는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질미달의 정치꾼이 있는건 결국 우리가 자질미달의 시민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여호와는 이스라엘에서 점점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앞 다투어 바알과 아세라의 음탕한 축제에 참여하고 환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인 엘리야는 더 이상 이스라엘에서 살지 못합니다.

물론 주범은 왕입니다. 아합이 이스라엘을 곤경에 처하게 한 책임이 제일 큽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왕의 형편없는 정치의 피해자가 아니라 그 통치에 동조한 공범입니다.

 

자기의 권리는 누구도 대신 찾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그 부당한 왕의 통치를 받기 싫으면 스스로 일어나 그 왕을 폐위시키기라도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왕의 통치에 공감하고 동조한 것 같습니다. 오히려 왕과 더불어 우상을 음란하게 섬기고 서로 사기를 치고 자기보다 못한 자의 것을 빼앗고 속이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삼년이 넘어가는 기근 때문에 먹을 것이 점점 떨어져가는 상황에서 서로 뺏고 죽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헬 이스라엘’ 현세의 지옥이 된 겁니다.

 

여하튼 그 주범은 아합이지요. 그래서 엘리야는 18절에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라고 말합니다. 과연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는 누구입니까?

사람은 종종 자기 자신이 한 일을 남 탓으로 돌리기를 좋아합니다. 어떤 일이 안되고 어렵게 되면 자기가 한 일은 생각지 않고 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그래야 스스로 위로가 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야 핑계거리가 생기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합이 아무리 후안무치한 자라고 할지라도 아무 이유없이 엘리야를 원흉으로 지목하고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라고 말할 리는 없을 것입니다. 뭔가 현 사태에 엘리야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일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17:1에 보면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분명히 엘리야가 아합에게 ‘내말이 없으면 지금부터 수년간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으리라’고 말한 것은 맞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엘리야가 자기 마음대로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는 능력자는 아닙니다. 하늘의 비를 마음대로 한다면 그게 사람이겠습니까 신이지. 즉 엘리야 때문에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수년간 계속되는 기근의 원흉은 엘리야가 될 수 없습니다.

 

만일 엘리야가 그 정도로 뛰어난 능력자라고 아합이 생각했다면 엘리야를 잡아서 죽이려고 그를 찾아 다닐 것이 아니라 그의 앞에 무릎 꿇고 그의 비위를 맞추어서 비를 내릴 수 있도록 해야 될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아합도 사실은 엘리야가 비를 마음대로 내릴 수 있는 그래서 비를 마음대로 오지 못하게 하는 능력자라고는 생각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럼 누구 때문에 비가 내리지 않는 것입니까?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게 바로 하나님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지 스스로 무슨 능력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래요, 그는 단순히 사람입니다. 결코 신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그대로 아합에게 전달했을 뿐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왜 아합에게 기근이 있을 거라는 심판을 내리셨을까요? 아합이 하나님을 떠나서 바알과 아세라를 음란하게 섬겼고 가난한자의 포도원을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성경에 따로 나와 있는 거고 그의 죄는 이외에도 너무 많아서 성경은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라고 말합니다.

 

게다가 아합의 궁내대신의 말을 유추해 보면 아합은 그의 총신이라도 수틀리면 잘 죽였나 봅니다. 또한 그의 아내는 사치할 뿐만 아니라 잔인하기까지 합니다. 아합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 된 것은 어쩌면 이세벨의 충동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세벨은 이스라엘 땅에서 여호와의 선지자를 조직적으로 박멸하였답니다.

 

여호와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지자를 조직적으로 죽이는 것들에게 하나님은 노하셨고 약속대로 기근을 벌로 주셨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처음 율법을 주실 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 우상을 섬기면 너희가 나를 떠난 날 수 대로 내가 너희에게 기근을 벌로 내릴 것이다’ 그래서 현재 이스라엘이 당하는 대기근의 원흉은 엘리야가 아니라 아합인 겁니다. 넓게 보면 이스라엘 백성인 것입니다.

 

원인이 뚜렷이 나타났는데도 왜 아합은 하나님께 돌아 가지 않고 애꿎은 엘리야만을 잡아 죽이려고 온 산으로 들로 사람들을 파견했나요? 그건 아합이 사람이 덜떨어져서 그런 겁니다. 어리석고 무지하고 고집이 세고 욕심이 강하며 잔인한 사람. 아합은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괴롭힌다고 생각했지 하나님이 기근을 줄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면 비를 관장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이고 이스라엘의 풍요를 가져올 신은 하나님이 아니라 아세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알은 가나안 사람들의 생각에는 ‘엘’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아세라는 ‘엘’의 아내입니다. 원래 엘은 그리스 사람들에게 있어서 최고신인 제우스처럼 가나안의 여러 신들가운데서 최고의 신이었지만 아들에게 최고신의 자리를 빼앗겼다고 그래서 어딘가에 봉인되어서 잠을 자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엘이란 신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엘로힘, 엘 샤다이, 엘 엘룐, 엘 엘로헤 이스라엘 이런 식으로 부르는 그 ‘엘’이 바로 셈족어 고유명사로 신이란 뜻입니다. 그러니 아합의 눈에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 눈에 차겠습니까?

 

더구나 옆에서 페니키아의 공주 출신인 아내가 속삭입니다. “이제 여호와의 시대는 갔다. 그는 전쟁의 신, 산의 신이지 여기서는 농사의 신, 풍요의 신을 섬겨야 한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올 때 전쟁을 통해서 가나안을 정복했고 또 가나안에 들어온 이후에는 가나안의 철병거가 무서워서 산위에 숨어 살아서 그렇게 인식되어 진 것 같습니다. 더구나 모세나 엘리야도 하나님을 산에서 만난다고 생각하니까 아마 이방 족속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전쟁의 신, 산의 신으로 여기게 된 것같습니다.

 

이세벨은 바알의 제사장이자 페니키아의 왕인 아버지에게서 무려 450명의 바알 숭배자와 400명의 아세라 숭배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바알의 신상을 보면 바알은 수염을 길게 기른 남자로 손에는 번개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와 벼락의 신이랍니다. 그러니까 바알이 비를 내릴 수 있는 걸로 여겨졌습니다. 아세라는 대지의 여신이자 풍요의 신입니다.

 

그래서 농사를 지으려면 물도 필요하고 땅도 그 소산을 내기를 즐겨해야 하므로 아세라는 반드시 섬겨야만 하는 걸로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바알과 아세라의 모습을 나무로 깎아서 마을 어귀에다가 세워 두었답니다. 마치 조선시대 천하 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을 깎아서 마을 어귀에 세워둔 풍경하고 비슷합니다. 그리고 서낭당까지 이스라엘의 산당을 닮았습니다. 이상하게 둘이 서로 비슷한 풍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알 신전과 아세라 신전을 짖고 이 신전에 제물을 마련하고 850명의 다른나라 우상 숭배자들을 살게하려고 하면 엄청난 재물이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서  재물을 긁어 내는 겁니다.
사실 이세벨의 눈에 이스라엘은 본국에 비하면 영 초라합니다. 페니키아는 장사를 잘해가지고 온갖 물산들이 풍부하고 세상의 진귀한 것들이 모여 드는 곳인데 이스라엘이야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페니키아의 화려하고 음탕하며 쾌락적인 제사문화를 가지고 들어오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신이 나간 겁니다. 그래서 왕과 왕비뿐만 아니라 모든 거의 모든 백성들이 여호와를 떠나 바알과 아세라에게로 달려간 겁니다. 그러니 백성들도 잘못이 큽니다.

 

만일 아무리 왕과 왕비가 이방의 우상을 섬겨도 자기들은 꿋꿋이 하나님을 섬겼다면 원래 정치가란게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고 아부하는 자들이므로 왕과 왕비 마음대로 공공연하게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라고 난리를 칠 수가 없습니다. 백성들이, 어리석은 백성들이 정말 그런가 하면서 바알과 아세라를 함께 섬겼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 3년반의 대기근이 온 것은 아합과 이세벨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도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아합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엘리야에게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여 너냐”라고 말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죄로 이렇게 어려운데 누구에게 누명을 뒤집어 쒸울려고 하는지.

 

아합이 죄가 많다고 말씀드렸는데 사실 아합의 죄는 우상숭배 와 나봇의 포도원을 강제로 빼앗은 것 말고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보면 아합의 죄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먼저 아합의 처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 말고 18:5에 보면 “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리하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하고”

 

이 말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짐승들이 죽으려 하니까 물을 찾으러 가자고 하는게 왜 문제지? 짐승들도 얼마나 힘들까? 아합이 의외로 참 자상한 사람이구나!
우리는 순진하게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뭄이 시작된 17:1부터 아무리 살펴보아도 사람들이 마실 물이 없어서 고통 받고 있으니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물의 근원을 찾아보자는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짐승들을 위해서 물을 찾으러 가자고 합니다. 이 짐승들은 자기의 짐승입니다. 백성들의 짐승이 아닙니다.

 

이 사람 아합의 인간성이 여기서 파악됩니다. 백성들이야 목말라 죽든 말든, 굶어 죽든 말든 내 알바 아니고 내 짐승들, 내 재산이 없어지는 것은 내가 참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내 재산만 아무 피해가 없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가만 있었던 아합이 자기의 짐승떼가 물이 없어서 꼴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죽게 되지 마침내 물의 근원을 찾아 나서는 겁니다. 그것도 궁내대신까지 동원해서 찾아 나섭니다. 정상은 아닙니다.

 

여하튼 이때 아합과 오바댜는 따로 떨어져서 물의 근원을 찾으러 다닙니다. 그런데 갑자기 오바댜의 앞에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그를 알아보고 오바댜는 땅에 엎드려 문안합니다.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이까” 비록 엘리야가 능력의 사람이고 하나니의 선지자이지만 또 오바댜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충실한 신도이지만 궁내대신인 오바댜가 그렇게까지 극진하게 경의를 표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오바댜가 개인적으로 엘리야를 아주 존경하고 경외한 듯합니다.

 

엘리야는 그런 오바댜에게 말합니다.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그러면 오바댜는 가서 엘리야의 말을 전하면 됩니다. 그런데 오바댜의 반응이 좀 이상합니다.
“이르되 내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하려 하시나이까”

 

오바댜는 지금 왕의 신하이면서 왕이 이름을 함부로 부릅니다. 그리고 아무런 직위에 있지 않은 엘리야의 종을 자처하면서 왜 나를 죽이려 하느냐고 항의 합니다. 오바댜에게는 왕보다 엘리야가 더 큰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바댜의 말을 더 들어 봅시다.

 

“내가 가서 아합에게 말하였다가 그가 당신을 찾지 못하면 내가 죽임을 당하리이다”
이 무슨 황당한 말입니까? 엘리야가 방금까지 있다가 사라져서 엘리야를 아합이 못 만나볼 수도 있습니다. 반역자로 몰려서 도망다니는 신세로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그런데도 오바댜는 지금 괜히 엘리야를 봤다고 했다가 엘리야가 갑자기 사라지면 자기는 아합에게 죽은 목숨이라는 겁니다.

 

이로 미루어보아 아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잔인하고 무서운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결코 사라지지 않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하고서야 오바댜는 아합에게 엘리야를 만난 사실을 이야기 하고 엘리야가 있는 곳으로 아합을 데리고 옵니다.

 

이때 아합이 엘리야를 보고 한 첫말이 바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입니다.

사실 아합은 가뭄이 심해지는 동안 자기의 행동을 뉘우치고 여호와의 분노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고 눈이 벌게서 찾으려 다녔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를 잡아서 바알에게 제사를 지내야만 바알이 노여움을 풀고 다시 비를 내릴 것이라는 그런 생각.

 

아합이 사람을 보내어 찾지 아니한 나라나 족속이 없었답니다. 모든 나라와 족속들을 찾아 다녔다는 것을 보면 얼마나 아합이 악에 받쳐서 엘리야를 찾으러 다녔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발로 엘리야가 나타났으니 얼마나 할 말이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첫마디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입니다.

 

그러니까 아합은 웃기려고 농담으로 이 말을 한게 아닙니다. 그는 정말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큰 원흉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엘리야는 아마 매우 답답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자가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고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오히려 우상의 나라를 만들고 국고로 우상의 신전을 짓고 그 우상에 경배하는 음란한 정책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기근이 무엇 때문에 온 것인지에 대한 자각도 없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아합에게 누가 진정한 비를 내릴 수 있는 참 신인지를 알아보자고 제의했습니다. 그러니까 갈멜산 정상에서 제단을 쌓고 신에게 제사를 지낸 뒤에 어느신이 제사를 받는 지를 가지고 참 신을 가려내자고 제의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의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불이 내려와 제물을 살랐습니다. 그래서 바알 숭배자들은 모두 기드론 시내에서 백성들을 속였다는 죄명으로 목이 잘렸습니다.
아합이 엘리야의 제안에 응한 것은 그는 정말로 바알이 비를 내져 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도 사실 참 웃기는 자들입니다. 자기들이 무지몽매하고 고집이 세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겨놓고는 이제와서 자기들은 전혀 죄가 없고 모르고 그랬고 바알 숭배자와 아세라 숭배자들에게 속았다고 저들을 죽여야 한다고 ‘무고한 참된 성도’ 코스프레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발연기는 하나님도 엘리야도 믿지 않습니다.

 

18:22에 보시면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 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보세요, 이전에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알을 섬긴지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오히려 더 어색해 합니다. 아마 그들은 속으로 엘리야를 비웃으며 ‘웃기고 있네. 어떻게 감히 바알님에게 도전하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실상 대중들은 이렇게나 어리석습니다. 그냥 나라에서 왕이 왕비가 바알과 아세라가 최고라고 하니까 아무런 의심없이 바알과 아세라를 추종합니다. 조상 때부터 아무리 많은 역사를 일으켰다고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해도 코웃음만 칩니다. 바알과 아세라 숭배가 하나님숭배보다 어마무지하게 재밌고 화끈하기 때문에 하나님 숭배로 돌아가기가 싫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숭배는 지금으로 말하면 음탕한 나이트에서 춤추고 더 큰 쾌락도 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동네는 제도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신전에는 그런일들을 위한 남녀사제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밋밋하고 따분하게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고 돌제단위에서 태우고 기도하는 것 하고는 차원이 다른 쾌락과 재미를 줍니다. 솔직히 제사의 모습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세요.

 

제사장이 짐승의 각을 떠서 죽입니다. 그리고 껍질도 벗기고 잡아서 제단불에 태웁니다. 제사가 끝날 때까지 사람들은 바깥에서 기다립니다. 뜨거운 태양빛이 사시사철 내리쬐는 곳입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을 잘 보시면 안뜰이 돌로 포장되어 있어서 나무 한그루없습니다. 게다가 무더위에 짐승의 피가 상하지는 않을까요? 물도 잘 없는 지역에서 그 피냄세와 짐승잡은 냄세는 어떻게 할겁니까? 파리와 모기는 없었을까요?

 

그런 반면에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는 차원이 다릅니다. 꽃들이 깔려있는 장엄한 신전에서 반라의 무희들이 사람의 감정을 충동하는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사제들과 신도들이 서로 눈을 맞추고 짝짓기를 합니다. 그게 그들의 신에 대한 숭배의식입니다. 그러니 순진한 촌사람들이 눈이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드리는것하고는 비교할게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바알과 아세라를 좋아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그 멋진 바알과 아세라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려 할까요? 그래서 대답도 안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능력과 바알의 무능을 본 직후에는 또 부화뇌동해가지고 엘리야를 따라서 바알의 숭배자 450명을 잡아서 기손 시내에서 죽게 했지만 그게 지나고 또 마찬가지로 변했습니다. 원위치.

 

‘그게 불이 불이 아니야, 여기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야료가 있어’

이들이 만일 그때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왔다면 그 이후의 이스라엘이 그렇게 허무하게 멸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 후에 이스라엘의 상황에 절망해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자청한 일을 우리는 압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그런 일도 없겠지요.

 

요즘 보면 참 별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치 나라가 구한말처럼 격랑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인적이 드문 시골이라고해서 세상과 단절되어 속편하게 살 수 도 없습니다. 그런 시골은 사람이 적게 산다고 오히려 혐오시설을 떠맡게 될 판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될지 종잡을 수 없습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사건사고가 너무 많고 너무 역동적이라서 소설을 읽을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제가 기도하러 잘 가는 천성산이 있습니다. 정말 아름답고 멋진 산입니다. 계곡마다 폭포와 동천이 있는데 마치 금강산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몇일씩 산에서 노숙하며 기도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사드기지로 거론되는 곳은 제가 서울에서 내려온 목사님과 함께 산행을 하고 기념사진을 찍은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곳에 뜻하지 않게 사드를 배치한다고 해서 한바탕 난리를 겪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정관의 10km옆에는 원자력 발전소가 한두개도 아니고 10기나 있답니다. 저도 놀랐네요. 게다가 북쪽으로 3km밖에는 사드 레이더를 설치한다고 하니 이건 뭐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캄캄했답니다. ‘이것들이 내가 기도하러 가는 곳은 전부 막는 구나!’

 

제가 정관의 뒷산에 기도하러 자주 갔는데 이제 더 이상 가지 않습니다. 왜나면 제가 산에서 자던 매암바위의 바로 뒤에 거대한 고압 전선주가 설치되어서 전자파 때문에 건강상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바위 뒤 대나무 숲속에 무당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집니다. 이제부터는 매암에서 자면 전자파를 고스란히 맞게 됩니다. 그런데 더 심한 전자파를 발생시키는 사드 레이더라니 이제는 기도하러 어디로 가야 할까요?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처량해 집디다.

 

사드는 다른 곳으로 갔지만 아직도 원자로는 남아 있습니다. 노후된 고리1호기는 폐쇄한다고 해놓고 대신에 5,6호기를 새로 짓는 답니다. 기가차지요. 그래도 당장 어디 멀리 이사 가지 않고 정관에 계속 있는 이유는 원자로가 터지면 동남권 일대가 다 쑥대밭이 되니까 서울권이나 충청권이 아니면 갈 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만 보면 전라도와 경상도의 바닷가에는 전부 원자력 발전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서울권에는 북한의 장사정포 사거리에 든다니 뭐 여기나 거기나 위험하기는 비슷합니까? 그래도 사실 전쟁위험은 없으니까 서울권이 나으려나요?

지금 정치권에서 수도 이전얘기가 나오는데 그곳에 제 신학교 동기가 개척을 하고 있습니다. 그곳이 나으려나요?

 

제가 철이 들고 몇 년씩 서울과 부산 그리고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살았는데 미국이라고 해서 결코 낫지 않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백인이 아니라 유색인종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흑인들에 대한 경찰들의 무분별한 총기 남용으로 인한 사망사고 때문에 시위가 일어났고 이 시위진압을 하러 나온 백인경찰이 흑인저격수의 총에 맞아 죽고 시위는 더 더 격화되고 있습니다.

 

그 동네는 총기자유화 때문에 삶이 너무 어렵습니다. 솔직히 제가 미국에서 살 때 저 멀리서 길에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사람이 다가오면 겁부터 났습니다. 혹시 모르기 때문이지요.
기숙사에서 학교 캠퍼스까지 ㄴ자형으로 약 500m정도 떨어져 있는데 학교에 걸어갈 때 그때는 그게 어떻게 그렇게 겁이 나던지. 저는 차가 없어서 항상 걸어 다녔는데 지금 생각하면 제가 무사히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게 정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집과 학교의 중간에 우리로 치면 고속도로가 있는데 이 도로위로 다리가 있어서 저는 다리를 건너서 집으로 가야 하는데 미국사람말로는 그 도로 넘어 북서쪽이 저소득층 지대랍니다. 도로 남쪽은 부유한 지대고. 학교는 부유한 지대에 집은 가난한 지대에 있습니다. 제가 그 초입에 삽니다. 학교 기숙사가 여러군데 흩어져 있는데 제가 살던 트리니티 거뮤니티는 주로 멕시칸들이 사는 지역에 있습니다. 자기들 말로는 우범지대라는데.

 

그래서 한밤중에 제 집사람이 풀러 상담대학원에서 야간 강좌를 들을 때 집사람을 데리러 갈 때는 아이들까지 깨워서 온 식구가 정말 비장한 각오로 집사람을 데리러 갑니다. 아무래도 사람이 많거나 애가 있으면 불상사가 일어날 확률이 적으니까.

 

파사데나의 낮은 천국이지만 어둠이 깔리면 보이지 않는 공포로 뒤덮입니다. 그래서 집안에 있어야 합니다. 여기처럼 밤에 돌아다니는 것은 엄청나게 위험한 일입니다.

 

저의 집 위층에 살았던 노르웨이 사람인 얀의 말로는 언젠가 한밤중에 무장 강도가 기숙사로 도피해와서 경찰들이 총을 꺼내서 기숙사를 포위한 적도 있었답니다. 저는 잠이 들어서 몰랐는데 그 친구는 그걸 봤답니다. 그런데 미국집들 아시다시피 대부분 나무 판자집입니다. 총을 쏘면 다 뚫리게 되어 있습니다. 집안에 있다고 해서 결코 안전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매년 이어지는 산불과 점점 심해지는 가뭄은 미국이 결코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없어 보입니다. 제일 큰 문제가 인종차별이지요. 다음이 자연재해. 보이지 않는 백인들의 그런 차별은 섬찟합니다. 그럼 어디로 가야 하지요?

 

그 어느 것하나 저의 한정적인 머리로는 결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생각할수록 골치 아픕니다. 우리는 그렇다치고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
이렇게 우리는 아둔한 머리로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기껏하는게 남 탓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탓을 한다고 해서 이 암담한 현실이 바뀌는건 아닙니다.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유유자적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고비고비마다 판단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제대로 판단해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잘하는 판단인지 아닌지 도저히 확신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지혜로운 판단을 내릴 수 있는지 갈피를 못 잡겠습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꽉막힌 현실에 절망한다면 사방을 보지 말고 하늘을 봐야 합니다. 유일하게 우리의 숨구멍을 제공해 주는 하늘을 바라봐야 우리가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그 하늘에서 내 아버지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시고 나를 보호하시며 나를 인도하실 것을 내가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절박한 삶속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합니다. 그는 나의 방패시오 그는 나의 반석이요 산성이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우리가 그 안에서 안전할 것입니다.

 

인간들은 어리석고 또 간사해서 현실을 명확하게 바라보고 분석해서 비판하는게 아닙니다. 그냥 선전선동에 놀아나기도 하고 자기의 유불리를 따라 현실을 호도하며 비판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진짜로 자기가 그렇게 하는게 정당하다고 믿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부지런하면 무섭고 잘못된 신념을 가진 확신범이 설치면 끔찍하다고 이 5000만의 남한사회는 도저히 조절이 힘들 정도로 제각각이고 복잡합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이 모든 이들을 아우를 수 있는 합당한 권위가 없기 때문입니다. 현실 정치꾼들과는 달리 보통 종교계나 사상계 학계 또는 재야에 진실로 국민들이 존경하는 어른이 있어서 사회통합이나 진로에 대해서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그런 존경받을 수 있는 어른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처럼 이야기하면 엘리야와 같은 국보급 선지자가 없습니다.

 

당연하게 어느 구석엔가는 존경받을만한 어른이야 있겠지만 우리가 알지는 못합니다. 정신과 물질이 함께 성장해야 될 터인데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정신은 쑥 빠지고 물질에만 치중하는 기형적 구조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와서는 누구도 이 물길을 거스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가 안타까운 것은 교회가 그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었는데 몇몇 대형교회 목사들이 그걸 망쳐놓았다는 거지요. 충분히 기독교를 대표할 수 있는 유명한 목사들이 사회의 원로가 아니라 자기의 이익만을 사익만을 대표하는 자가 됨으로 스스로 시비 속으로 내려와 버렸다는 겁니다. 20년 전만해도 사회에 그런 분위기가 살짝 조성될 뻔했는데 욕심이 그만 그런 분위기를 망쳐버렸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우리는 스스로 책임을 지는 성숙한 기독교도가 되어야 합니다. ‘성숙한 시민’ 이야기는 우리가 항상 듣지만 성숙한 책임있는 기독교도,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이 사회의 마지막 등불이라는 말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행동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아버지께서 그 의로운 일에 함께 하실 것입니다. 세상없어도 나는 하나님의 편에 서겠다는 주의 성도들에게 힘과 지혜를 더하실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질에 약간은 초연해야 합니다. 물질주의에 오염이 되지 않고 성령의 사람으로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물질에 초연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를 냉정하게 뒤돌아 보세요. 자기를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평가해 보세요. 어쩌면 우리는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들이 더 많은 그저 그런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저 그런 우리가 그저 그런 사람이 안 될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는 것입니다.

 

아합이  자기의 죄를 모르고 엘리야에게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여 너냐’ 라고 했지요? 그러나 선지자가 선지자의 일을 했을 뿐인데 아합은 거두절미하고 엘리야가 한 말만을 가지고 비난하고 퍼붓습니다.
옛날 어느 종교단체에서 내탓이여 운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운동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내탓도 있고 네탓도 있겠지 무슨 전부 내탓입니까? 오히려 이게 물타기가 되어서 정말 탓해야 할 사람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됩니다. 우리는 사실 항상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어쩌면 몇몇 가지 일에서 잘못을 저질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에 두면 됩니다. 우리의 목표를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두면 됩니다. 거룩해 지라고 성도라고 부른다고. 그래요 성도가 되는 것에 목표를 두고 하나님 앞에서 생활하면 됩니다.

 

우리 성도들이 모두 그렇게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살고, 그런 사람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여 너냐” 라고 하는 왕의 힐난에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너의 아비집이 괴롭게 하였으니”라고 말한 엘리야를 봅니다. 그는 자신이 있기 때문에 당당합니다. 그는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기에 당당합니다.

 

영적인 암흑기에 왕의 추적을 받고 있는 마당에도 그는 왕앞에 당당합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처럼 뛰어난 주의 종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제가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죄송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책임을 다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 참 성도가 되면 되는 겁니다. 이 나라의 명운을 걸고 우리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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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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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우리 각자가 성숙한 시민으로써 노력한다면, 근사한 기독교인으로써 살아간다면, 사회가 조금이라도 밝아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젊었을 때의 거창한 꿈처럼 굳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할지라도, 한 사람에게라도 더 친절하고, 더 좋은 벗이 되어준다면, 또 함께 하는 이웃이 되어준다면, 우리의 세상은 더 따뜻한 환경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질에 초연한 삶을 살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욕심을 덜어내려고, 계속해서 마음을 비워나가는게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것을 다 이루려고만 생각하지 말고, 조금은 다른 태도, 가령 정말로 필요한 곳에 물질을 잘 사용하게 되기를 늘 바랍니다. 주님께서 물으실껍니다. 너는 왜 그렇게 가난하기만 했었니? 저는 벌어둔 돈도 사실 없네요, 그래도 이웃과 나누면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라고 당당히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성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어요.

 

한 청년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주님을 쫓고 싶었지만, 가진 재물로 인해서 심히 근심해서 돌아갔다는 이야기 말이에요. 관점을 완전히 청년 입장으로 놓는다면, 그 청년은 얼마나 주님을 따라가고 싶었을까요, 얼마나 또 바른 청년이었을까요. 하지만 끝내 주님과 돈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것에서, 우리는 결단 앞에 서야 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내가 지금 바르게 살고 있다는 것에만 만족하지 말고, 늘 어려운 이웃이 주변에 있음을 함께 떠올리는 자애심이 함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포도원비유가 생각납니다. 인터넷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 포도원 주인은 일꾼을 어떻게든 쓰고 싶어하는구나! 그래서 오후 5시에도 인력시장에 나와서 사람을 쓰려하는구나. 그렇게 사람들에게 일자리와 임금을 주는 것도 오늘날 사회에서 멋진 실천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포도원 주인처럼, 사회에 맞서 도전적으로, 마치 세상을 거슬러 오르듯 살아가는 분들을 응원하고 싶습니다. 멋지고 바르게! 그리고 주님의 뜻을 생각하는 성도가 된다면, 우리가 작은 공동체들을 천국처럼 아름답게 만들어 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 2016. 07.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