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벗이 밤중에(누가11:5-)/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7. 18. 07:39

 

벗이 밤중에 (누가11:5-)

 

우리는 몇가지 신앙의 기본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예정론입니다. 지금 이시간에 예정론이 뭔가를 생각해볼려고 하는 것은 아닌데 예정이 되었다고 하니까 솔직히 기도가 무슨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계획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는 결코 인간처럼 변하지 않는 분이라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하건 하지 않건 하나님의 역사에는 변화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수많은 목사들이 이 문제의 해답을 찾기위해 기도했고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당연히 수많은 결론들이 나왔지만 아직도 확실하게 정해진 결론은 없습니다.

본문의 바로 앞부분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도를 어떻게 해야 될지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받고 우리들도 잘 아는 주기도문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주기도문처럼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본문5-13절은 기도 응답의 확실성을 보여줍니다. 물론 응답을 받기위해서는 인내를 가지고 꾸준히 기도해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기 때문에 기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해야 한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그리고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로 자기의 생각을 바꾸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본문을 잘 살펴보면 이 본문의 결론은 정말 엉뚱하게 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로 좋은 것을 주시는데  그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바로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기도하면 성령을 주신다는 거지요. 그래서 결론은 성령입니다.

 

말이 안되는 것 같습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에게 불가능이 없을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우리에게 좋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얼마나 굉장해 질지를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성령의 충만이  그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의 근원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더 기도하면 할수록 더더 좋아지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니까 너무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인간의 노력은 도외시 하는 것처럼 들립니까?

 

인간은 인간의 일을 하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을 도모하는 것하고 그 일이 이루어 지는 것 하고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가 힘쓸 수 없는 영역의 일들을 이루어 주시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할입니다.

 

우리의 세치 혀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까? 글쎄요, 어렵습니다. 승진이니 합격이니 화해니 용서니 하는 모든 일들은 우리 인간의 일방적인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몇몇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세상의 대부분이 일들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저는 성령께서 교통하심과 감동 감화하심으로 그것들을 이루어 주신다고 믿습니다.

 

성령의 역사에 사실 어떠한 제한을 둘 수는 없습니다. 감히 우리가 하나님에게 이것저것의 한계를 설정한다는게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매주 듣는 축도를 잘 생각해 보세요. “성령의 감동 감화 교통하심이...”
성령께서 우리의 일방적인 노력을 상대방에게까지 미치게 하셔서 우리의 노력들이 결실을 맺도록 해 주십니다.

주님은 한 제자의 요청에 기도문을 가르쳐주셨는데 본 절에서는 이제부터 기도응답의 확실성과 기도하는 태도 등에 관해 가르칩니다.

 

5-8절은 하나님은 인내를 가지고 드리는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고 11-13절은 언제나 좋은 것으로 기도를 들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기도의 응답의 확실성과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므로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이야기를 너무나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에 무감각해 집니다. 우리는 주로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일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합격하지 못했거나 실패했을 때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그래” 그런데 솔직히 더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과연 그렇게 될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습니다. 심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그 말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현실은 이런 이야기와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진짜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셨다면 이 나라 기독교인의 많은 비율이 이 나라 최고의 지위에 있어야 되고 엄청난 부를 이루어야 하고 또 사회 지도층이 되어야 할 터인데 실제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사회의 요소요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종교인들이나 무신론자들보다 더 많이 차지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도에 대해서 궁금해 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대해서 애타하고 그 뜻을 제대로 알기 위해 목말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기도에 대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인데 우리가 이제까지 그냥 지나쳐왔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 것도 많이 있을 것이므로 이제부터 자세하게 한번 살펴보기로 합시다. 단 앞서 주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생각하면서 보셔야 합니다.

 

벗이 있는데-여기서는 세명의 벗이 등장합니다. 여행 중에 갑자기 찾아온 친구, 그를 먹이기 위해 한밤중에 떡을 찾아 나선 벗, 간절한 요청을 받고 일어나서 떡을 준 벗 이렇게 세사람의 벗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들은 각자 각자는 벗의 관계에 있지만 세사람이 동시에 벗의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떡을 얻으러 온 친구는 떡이 있는 친구에게 가서 그 벗의 이름을 이야기하고 떡을 얻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두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찾아온 벗에 초점을 둔다면 끈질기게 기도해야 된다. 아니고 떡을 준 벗에 초점을 둔다면 하나님은 끈질기게 기도할 때 들어준다. 기도자의 입장에 서던지 아니면 하나님의 입장에 서던지 이 이야기의 주제는 명확합니다.

 

바로 끈질긴 기도만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내게 할 수 있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까 예정론이 맞는지 의심이 듭니다. 그러나 예정론은 예정론이고 이 본문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응답을 이끌어내는 것이 끈질긴 기도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 계속해서 본문을 따라갑니다.
밤중은 아무리 친한 사람이 찾아와도 요구에 응하기 싫은 주인의 심정을 나타내 줍니다. 오늘날처럼 전등이 있거나 촛불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등잔불을 사용했고 달빛이나 별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칠흑같은 밤에 일어나서 불을 찾아서 밝히고 떡을 찾아서 벗에게 주는 일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면 불을 밝히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등잔을 찾기도 어렵고 그기에 불을 켜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대게 그들은 해가 지면 자려고 준비하고 저녁을 먹고 난 다음에는 일찍 잠자리에 듭니다. 그리고 일단 잠자리에 들면 보통은 다음날 날이 밝을 때까지 일어나지 않습니다.

 

떡 세덩이는 한 끼 식사에 해당하는 양이며 당시 이웃이나 벗에게 빌리는 것이 가난한 자들에게는 드물지 않은 경우였습니다. 즉 비유가 상당히 현실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비유는 항상 그들의 일상에서 자주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이 떡은 누룩을 넣어서 부뚜막같은 곳에 붙여서 구운 것으로 오늘날의 떡이나 빵과는 다릅니다. 가끔가다 세계테마기행같은 곳에서 사막지역의 떡을 소개할 때 나오기는 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보통 이 떡을 조금씩 찢어서 무화과나 꿀에 찍어 먹기를 즐깁니다. 물론 가난한 이는 그냥 먹습니다. 오병이어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보리떡과 작은 물고기 간한 것이 보통 사람들의 도시락이었습니다.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하면-밤중에 찾아올 수 밖에 없었던 이유.
밤중에 일어나는 것이 쉽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밤중에 친구 집을 방문하는 일은 중동에서는 낯선 일이 아닙니다. 참고로 예수님의 열처녀 비유에 나오는 결혼식 신랑이 한밤중에 도착하는 것을 보세요. 보통의 여행자들은 태양을 피해 오후 늦게 여행을 시작하고 밤늦게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그러므로 이 설정은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친구의 변명에서 떡을 주는 것 자체가 괴로운 것이 아니라 그는 하루의 곤한 노동으로 피곤해서 잠이 들었는데 친구의 외침으로 잠이 깼을 것이며 또 캄캄한 밤중에 일어나 닫힌 문을 여는 일이 귀찮고 또한 다른 식구들 역시 자기와 같이 잠이 들었는데 깨우기도 그렇다고 안 깨우기도 곤란한 상황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친구는 문을 열어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보세요. 그는 ‘문이 이미 닫혔고’라고 말합니다. 안 열어 주려고 한 겁니다.

아이들이 나와 함께 잠자리에 누웠다는 표현에서 이 가정은 온 식구가 한 이불을 덮고 자는 아주 가난한 전형적인 시골 농부의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겉옷을 잡힌 자에게 밤이 되기 전에 돌려주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까? 그것은 바로 그 겉옷이 그들의 이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대부분의 이들에게 여분의 이불은 굉장히 사치스러운 것입니다. 더구나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 전에 발을 씻고 잡니다. 그들은 보통 맨발이거나 신발이 있다고 해도 샌들류인데 이것은 걸치는 것이 아니라 신발끈을 정성들어 매야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캄캄한 한밤중에 신발끈을 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농가의 바닥은 흙입니다.

 

즉 그가 침대에서 내려왔다가 다시 자리에 들기 위해서 그는 자기의 흙발을 다시 씻어야만 하므로 이는 엄청나게 어려운 일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물은 엄청나게 귀한 것이고 집집마다 수도가 있거나 우물이 가까이에 있는 경우도 드뭅니다. 만일 그 집에 여분의 물이 없다면 그는 한밤중에 발을 씻기위해 물을 길러 가거나 아니면 흙발로 침상에 올라야 하는 황당한 경우를 겪어야 합니다.

 

물론 같은 이불을 덥고 자는 이들의 고충도 말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식구들이 일어나야 됩니다. 왜냐면 한 이불이므로. 혹시 유대인들은 속옷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오늘날의 긴 티셔츠같은 옷위에 겉옷을 입고 외출을 했습니다.

 

바지나 팬티같은게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친구를 맞이하기위해서 그는 일어나서 겉옷을 입어야 했을 것이고 다른 식구들, 적어도 자기의 아내 역시 겉옷을 입어야 했을 것입니다. 만일 그 들의 요가 아내의 겉옷이고 이불이 남편의 겉옷이라면....이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 지만 당시 유대에서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누웠으니-너무 곤하게 잠들어 있다. 단순히 자려고 누웠다는 말이 아닙니다. 원문의 뜻은 이미 곤하게 잠들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벗은 깨었지만 다른 이들은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데 그들을 몽땅 다 깨워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얼마나 귀찮고 힘들고 식구들의 원망을 사겠습니까?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그는 떡이 문제가 아니라 일어나서 식구들을 깨우고 문을 열고 하는 일련의 행위가 더 문제라고 말합니다.

 

할 수가 없노라-하고자 하지 않다. 원하지 않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이 아니라 하기가 싫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떡 세덩이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과정이 너무 힘들고 귀찮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깥의 벗이 떡 세덩이를 빌리기 위해서는 그 귀찮음보다 떡을 주지 않아서 더 크게 귀찮다고 느끼게 만드는 경우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쿵쿵거리면서 이름을 크게 부르고 떡을 달라고 강청하는 것입니다.
그는 결국 친구의 간청 때문에 떡을 줍니다. 그러므로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단순히 일어나기 싫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간청함-부끄러움이 없음, 뻔뻔스러움. 때나 장소 사람을 가리지 않고 성가시게 구는 것을 말합니다.
문밖의 벗은 떡을 먹어도 그만 아니라도 그만의 태도를 취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떡을 얻기위해 계속해서 두드리고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문밖의 벗은 자기를 위해서 떡을 간청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한밤중에 찾아온 벗, 즉 남을 위해서 떡이 필요하기 때문에 두드리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가 배가 고프면 이렇게 친구의 거절과 무시에도 불구하고 배고픔 때문에 간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의 배고픔 때문에 단순히 그 친구의 배고픔을 덜어 주기 위해서 자기가 이렇게 수고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게다가 있다고 해도 자기의 배고픔을 해결하려고 할 때보다 아무래도 열의가 덜하고 강도가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의 벗은 자기를 한밤중에 찾아온 벗의 주림을 해결하기 위하여 싫어하는 또 다른 벗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말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 말씀은 딱 이 본문을 예로 든 것입니다.

자 이렇게 보니 하나님에게 기도함으로 뭔가 억지로 일을 해결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처음 자기가 예정하신 것을 바꾼다는 말입니까? 결국 우리 기독교도 다른 미신과 마찬가지로 좀 어렵기는 하지만 신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말일까요?

 

여기가 과연 ‘안되면 되게하라’라는 말이 이루어지는 그런 경우일까요?

주님은 분명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요, 이렇게 보면 억지로 주님에게 기도하면 주께서 자기의 생각을 바꿔서 해주실 것 같습니다. 원래는 안되는 건데 되게 해 주실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예정론은 인간의 모든 생활을 다 정해 놓았다는 의미의 예정이 아니라 구원에 관한 부분만을 건드립니다. 그러니까 그 나머지를 놓고 무조건 주의 뜻이 정해졌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전적주권이지요. 다른 말로 해서 하나님이 마음대로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친구가 떡을 안주려고 하다가 너무 귀찮게 굴어서 마음을 바꾸어 어쩔 수 없이 일어나 떡을 주었다고 생각한다면 조금 곤란합니다. 한 밤중에 자고 있는 친구의 집 문을 두드릴 수 있다는 것은 그가 그 친구와는 엄청나게 친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친구는 아무리 투덜거리고 꾸물거려도 결국에는 자기에게 떡 세덩이를 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 대문을 두드렸을 때 안에서 내가 이미 자리에 누웠으니 떡을 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친구는 내가 비록 이렇게 말해도 어쩔 수 없이 줄 수 밖에 없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문을 두드린 사람과 두르려짐을 당한 집주인의 사이가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불평이나 투덜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욕을 하고 싸움이 나고 심하면 경찰에 신고하고 그렇지 않을까요? 보통은 그렇게 끈질기게 두드리지도 않겠지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받으려면 하나님과 평소에 친해야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평소에는 기도도 하지 않다가 평소에는 기도의 능력을 믿지 않다가 평소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다가 평소에는 하나님을 핍박하다가 막상 일이 닥쳐서 하나님에게 기도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웃으시고 경멸하시는 일이 될 겁니다.

 

자, 그런데 이 비유 다음에는 정말 좋고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본문의 비유와 합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너무 중요하고 심오하므로 이건 다음에 따로 살펴보고 우리는 이 비유에만 집중합시다.

먼저 잘 살펴보시면 이 비유에서는 정작 떡을 먹어야 될 사람이 아니라 떡을 대접해야 할 사람이 떡을 구하러 친구집에 가서 문을 두드립니다.

 

자기가 먹을 떡이 아니라 벗에게 줄 떡을 위해서 또 다른 벗의 집 대문을 두드린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경에 손 대접하기를 즐겨하라는 말을 기억하시나요. 이것은 성경에서 선한 행위로 권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서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벗에게 먹이려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의 유익을 위해서 이렇게 진실되게 간절히 요청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이것은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정신과도 통하지 않나요?

 

두 번째로는 벗의 요구가 겨우 떡 세덩이라는 것입니다. 벗은 한밤중에 문을 두드려서 금은이나 비단을 요구한게 아닙니다. 무슨 권리를 요구한게 아닙니다. 단지 그가 요구한 것은 떡 세덩이에 불과합니다. 떡 세덩이도 없는 사람도 많겠지만 결코 과하지 않은 것을 요구합니다. 떡 세덩이는 성인의 한끼 식사량입니다. 주께서 가르치신 주기도문에 너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세 번째는 언제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필요할 때면 항상 부탁할 친한 벗의 집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입니다. 이 비유에서처럼 언제 어떻게 될 수 없는 불확실한 사회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보호하기가 힘이 듭니다.

 

우리 혼자서 세상의 모든 파도를 다 이겨낸다는 것은 더 힘듭니다. 갑자기 먼 곳에서 친구가 방문했습니다. 식사라도 준비해야 하는데 지금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네 살림살이가 뻔하니까 여분의 식사와 음식들이 남아 있기가 어렵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넘어 갑니다. 그래서 다른 벗의 집에 가서 문들 두드릴 수 있는 겁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세요.

 

그러므로 기도할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는데 첫째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구치 말라는 것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그 나머지를 더하시리라는 말씀처럼 남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간구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욕망에 차서 정욕대로 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에게 십조원만 주세요” “그래, 그것 가지고 뭐 할려고?” “그거는 나중에 생각해 볼게요. 일단 돈이 많으면 좋쟎아요” 이렇게 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구하면 충분합니다. 그 나머지는 주께서 우리에게 알아서 더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우리의 간구할 때 유의사항은 이쯤하고 다음으로 우리가 이 비유에서 얻을 수 있는 기도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매우 간절하게 해야 합니다 주면 주고 말면 말고의 자세가 아니라 굉장히 간절하게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거 안 되는데 귀찮은데 하고 생각하는 것보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일어나서 떡 세덩이를 주지 않으면 도저히 잠을 잘 수 없겠다고 생각될 만큼 집요하고 간절하게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간구의 내용이 합당해야 합니다. 항상 남을 위해서만 빌 수는 없습니다. 자기에게도 필요한 것이 너무 너무 많은데 어떻게 남 기도만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간구하는 내용은 합당해야 합니다. 정욕대로 구해서도 안되고 불법적인 것을 구해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친구하고는 꾸준히 친해둬야 나중에 부탁할 일이 있을 때 멋쩍어지지 않습니다. 서로의 것을 따지지 않고 지낼 수 있도록 되어야 한밤중에라도 달려가서 떡 세덩이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떡 세정이는 내 친구의 일용할 양식이네요.

 

주님은 우리가 원하고 구하는 모든 것을 주시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해야 하는 것에는 당연히 제한이 있습니다. 게다가 주께서 뜻을 중간에 바꾼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원래부터 벗이 떡을 주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조금 불평했을뿐. 그 불평에도 꿋꿋이 달라고 문을 두드릴정도 돼야 떡을 가질 수 있다고 마음먹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반드시 이 일이 나의 바람대로 이루어 진다 아니다하는 생각보다는 기도는 무조건 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나의 바람대로 이루어진다고 해서 그게 꼭 좋은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께서 나에게 더 좋은 것으로 주시려고 현재의 것을 안 들어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응답이란 게 ‘이렇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했는데 안 들어 주었다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 황당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자녀를 사랑하셔서 당연히 좋은 것으로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면 더 좋게 되면 되었지 결코 나쁘게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일입니다.

 

기도하다가 일이 더 안좋게 된다면 기뻐하십시오. 뭔가 우리의 기도가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현상의 변동이 없다면 그게 더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 우리는 오늘 이 비유를 보면서 과연 기도로 하나님이 정하신 일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뭐 아직 본문을 다 보지 못했기 때문에 결론을 명확히 제시할 수는 없지만 중간과정은 생략하고 최종 결론은 기도함으로 성령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하고는 많이 다르지요? 그래요, 결론은 성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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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우리의 기도로 하나님의 뜻이 바뀌는지 아닌지에 관해서 확실히 말씀드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 벗이 투덜대면서도 원래부터 떡을 주려고 했는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아서 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떡을 주지 않고 돌려 보낸다면 사실 그는 벗으로 불릴 자격이 없는 자이지요. 그래서 이 비유에서 나오는 친구는 결국은 떡을 주게 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그냥 기도할 때 간청함으로 기도하라는 비유에 그칠 수도 있습니다. 다음 본문에 나와 있지만 점점 더 강하게 기도하라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행동이 점점 구체화 되며 노력이 더 필요한 순서대로 적혀 있습니다.

 

제가 이 비유를 조금 더 확장시켜 볼까요?
먼저 세사람이 나옵니다. 저는 그 중에서 먼 곳에서 여행을 마치고 밤중에 친구의 집에 찾아간 벗을 우리 성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친구를 위하여 다른 벗에게 찾아가서 떡을 구하려는 친구를 예수님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밤에 문을 열고 떡을 준 벗을 하나님이라고 가정합니다. 어때요? 세세하게 따지면 저의 생각이 맞지 않지만 비유라고 생각하면 대강 맞아 떨어지지 않나요? 우리가 항상 기도할 때 ‘예수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이 생각나서 한번 비교해 보았습니다.

 

결론은 기도합시다. 황당합니까? 약간은 그렇지요?
그러나 영적인 비밀의 한자락을 알았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우리의 사리에 맞는 기도에는 결코 외면치 않으십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기도하고 , 정욕대로 구하지 않고 ,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나보다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고 드리는 기도에 응답하실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언제든지 문을 두드려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벗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그런 관계가 될 수 있도록 평소에 만들어 두어야 합니다.
그러려고 하면 평소에 하나님에게 많이 기도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기도를 문안 인사라고 생각해 보세요, 어떤 날은 하고 어떤 날은 하지 않고가 아니라 매일같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인사 가운에서 필요한 것도 말씀드릴 수 있고... 어떻습니까?

 

기도해야합니다.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평소에는 하나님 없이도 충분히 나 자신의 실력으로 살 수 있다고 하나님을 찾지 않다가 막상 일이 일어나서 찾으려면 정말 챙피합니다. 평소에 잘합시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읍시다.

 

하나님과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회복 하십시오. 먼저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은 후에 항상 기도하십시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결코 나에 대해서 무심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항상 함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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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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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이번 설교는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자,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며, 나아가 선한 것을 추구하자로 들렸습니다.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려면 어떻게 하느냐, 기도하고, 물어보고, 뜻을 기다리면 될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문제는 우리가 욕심을 좀 내어놓고, 다만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살려고 노력한다면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선한 것을 추구한다고 함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된 일을 생각할 줄 아는 여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역시 기도가 중요하겠지요.

 

유명한 말씀, 항상 기뻐하라, 쉬지 않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중에서, 저는 기쁘게 산다는 첫 대목을 좋아했습니다. 사는게 재밌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와는 다른 의미로 늘 기도하는 삶을, 살지 않았음을 반성하게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원하시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 그리고 연결되어 있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친밀한 사이일 때, 우리가 선한 의도로 구하는 것은 다 들어주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쩌면 오늘날은 너무 풍족하게 살고 있어서, 하나님 없어도 괜찮아 라는 불신앙의 태도가 있는건 아닐까요. 저는 우리의 삶이 넉넉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넉넉함에 감사하며, 넉넉함에 기뻐하면서, 늘 기도하는 참된 성도의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은 어려운 것 같지만, 그런 성도로 변화되어 간다면 좋겠습니다. / 2016. 07.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