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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의 원리(고린도후서9:6-1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7. 15. 04:20

 

구제의 원리 (고린도후서9:6-11)

 

저는 오늘 구제의 원리에 대해서 말씀드릴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구제는 개인이 하는 구제도 있지만 주로 교회가 하는 구제입니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연보에 관해서 언급하게 됩니다. 제가 아니 저뿐만 아니라 목사들이 돈얘기는 정말 하기 싫어 합니다. 이게 정말 챙피한 일이기 때문이지요. 하는 사람은 부끄럽고 듣는 사람도 기분이 별로 안좋고 그런데 굳이 이런 설교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해야 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교회가  구제단체나 사회사업단체는 분명 아닙니다. 그러나 구제는 하나님의 명령중의 하나입니다. 주님이 주신 새 계명은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준엄한 명령입니다. 주님의 사랑하시는 제자인 사도 요한은 말년에 설교를 청하면 항상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노 사도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소자야,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노 사도는 설교시간 내내 서로 사랑하라는 말만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도 역시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첫걸음으로 구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참조구절(잠언11:24,25)
“구제하고 흩어도 부유하게 되고 과도하게 아껴도 가난하게 된다”
여기서 ‘과도하게’는 원어로는 ‘불법적인 또는 정당함을 상실한’ 이란 뜻입니다.
이는 불법적으로 과하게 재물을 아끼는 것이 정당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끼지 말고 낭비하란 말입니까?

 

당연히 성경의 말씀은 과소비를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껴야 잘살죠’란 말은 어디에나 통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낀다는 것이 남에게 주어야 할 임금을 주지 않고, 정당하게 주어야 할 돈을 지급하지 않고 떼먹고 이런 식으로 돈을 아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건 요즘 우리나라를 보면 잘 나옵니다. 사람들이, 대다수의 서민들이 쓸 돈이 없다고 아우성입니다. 쥐꼬리만큼 월급을 주고 최저임금은 겨우 6000원에 불과합니다. 실업자가 넘쳐 납니다. 그러니 먹고 쓰고 배우고 하는 모든 것에 지갑을 닫기 시작했고 당연하게 물건이 팔리지 않으면서 공장은 문을 닫고 상점은 파리를 날리고 그러니 다시 실업자가 늘어나고 그렇게 그렇게 악순환이 일어나면서 조금씩 조금씩 나라의 경제규모가 줄어가는 것입니다.

 

소수의 부자들이 더 부유해짐과 동시에 다수의 많은 이들은 조금씩 조금씩 더 가난해 져 갑니다. 많은 젊은이들의 입에서 ‘헬조선’이란 말이 정말 대수롭지 않게 무슨 고유명사나 되듯이 마구 마구 언급됩니다. 이건 분명 위험신호입니다.

또 있습니다.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만드는 식품업체가 제대로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보다 싼 걸 넣고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상태에서 사람이 먹으면 해를 가져오는 재료를 넣고 비용을 아끼는 그런 상태.

 

그것뿐이겠습니까? 정수기에 싼 크롬도금을 해가지고 원가를 절약했다가 그게 들통나서 아예 회사가 문닫을 위기에 처하게 된게 바로 그런 예입니다. 과하게 불법적으로 아끼면 크게 당합니다. 게다가 지금 발암 쓰레기를 사용한 시멘트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산업폐기물 처리에 골머리를 앓다가 비용을 절약하자는 단순한 생각으로 산업폐기물을 시멘트를 만드는데 첨가한 것 같은데 이게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따지면 이 세상에 문제가 너무나 많습니다.

 

성경은 항상 정당하게 행하고 정당한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제가 원자력 발전소 바로 옆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엊그제 지진이 일어났지요? 그때 제가 한 생각이 원자로가 터졌다면? 그 후로는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제발 원자로를 만드는 것에는 정당하게 제대로 자재를 써서 공사를 했기를 바랍니다.

 

기본적으로 성경은 정당한 이윤활동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막스 베버라는 사람은 개신교가 서양 자본주의의 이론적 정당성을 제시했다고까지 말합니다. 성경이 부인하는 것은 이렇게 정당하게 부를 증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불법적이며 도를 넘어선 절약을 말합니다. 보통 이런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서는 아낌없이 사용합니다.

 

그렇게 악랄하게 모은 돈으로 해외에 나가서 사치품을 사면서 돈을 펑펑 씁니다. 술집에 가서 자기의 쾌락을 위해서는 돈을 마구 뿌립니다. 가난한 자들의 임금을 착복하고 해로운 재료를 사용하고 형편없이 빈약한 재료로 만든 공산품들로 건축자재를 절약해서 부실시공을 하고 이런 식으로 아껴서 부자가 된다면 이것은 불법적인 것이며 정당함을 상실한 것으로 성경의 말씀은 그런 식으로 해도 결국은 가난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이 너무 잘 아는 삼풍백화점의 붕괴, 이건 그런 ‘과도한 아낌’의 결정판입니다. 그때 대표였던 분이 감옥에 갔다 와서 지금은 몽고의 자비량 선교사가 되어 있습니다. 목사가 된건 아니고 그냥 침술로 선교하는 사람이 되었답니다. 그는 말하기를 예수를 믿어도 부귀영화가 중심이었고 한 달에 두 번 교회에 가면 잘 가는 거 였답니다. 그러다가 사고 후에 빈손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선교사로 가기로 생각하게 되었답니다.

 

그렇게 남에게 나갈 돈을 불법적으로 아껴서 자기를 위하여 금산 은산을 쌓아놓는다고 해도 결국 그런 사람은 가난해 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정당한 부의 조성을 오히려 환영합니다. 그러나 불법적이거나 정당하지 않게 재물을 모으는 행위를 증오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정의가 아니고 오히려 사탄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자기를 위하여 남을 배려하지 않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을 모을 것을 종용합니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가장 추악한 탐욕을 극대화시킵니다. 그래서 과하게 아끼는 것은 사탄의 계략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인간들이 모두 다 서로 사랑하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가지고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도를 넘는 욕심과 불법을 자행함으로 만들어낸 부를 경멸하십니다.

그런 한편 우리가 구제하고 재물을 나누어 주어도 결코 가난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 부해지는 원리를 여기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과도하게 아끼면 가난해 지지만 구제하고 재물을 흩었을 때는 오히려 더 부유해 진다고 하는 성경의 역설적 원리는 오늘을 사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떠한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할지에 대하여 냉정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남에게 내 재산을 나누어 주고 그들을 구제하는 것은 재물이 흩어지는 것이요 내가 점점 가난해 지는 지름길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남에게 주지 않고 나를 위해서만 사용해도 너무 필요한게 많아서 생활비에 충당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무슨 재물이 남아서 그걸 남에게 나누어 준단 말입니까? 그리고 한번 없어진 재물은 그뿐이지 부유해 진다는 말은 또 뭡니까?

 

그러나 우리가 가끔 가다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다면 지금 본문의 말씀이 결코 틀림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자는 많이 거둔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얼핏 보면 연보를 많이 하면 많은 보상을 받는다는 말처럼 보입니다. 결국은 헌금을 많이 하란 이야기 같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연보의 액수에 비례하여 보상을 많이 받는다는 말하고 다릅니다. 여기서 ‘심는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예루살렘 성전궤에 두 렙돈을 넣은 여인을 보고 가장 많이 넣었다고 칭찬하셨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그 여인은 자기의 모든 것을 넣었거든요. 두 렙돈이면 지금의 백원쯤됩니까? 아니면 십원. 여하튼 당시 그리스와 로마의 통용화폐로 가장 작은 단위가 바로 렙돈입니다. 그리스 돈 두 렙돈이 모이면 로마 돈 한 고드란트가 된다고 합니다.
즉 로마돈으로 동전 한개를 넣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그 여인이 가장 많이 넣었다고 칭찬받았나요? 그 여인은 동전 한닢이 자기의 전 재산이거든요. 그걸 넣었기에 부자의 금화보다 더 큰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걸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재산의 천분의 일을 낸 사람하고 전 재산을 낸 사람하고 누가 많이 심었는지를 보는 것은 절대적인 헌금의 액수가 아니라 헌금의 비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면 마음상태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본문의 이 말은 헌금을 할 때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아깝지만 남들의 눈도 있고 사회적 체면도 있기 때문에 많은 액수의 헌금을 한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 억지가 아닙니까? 이 본문에는 어디에도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말로 해석될 여지가 없는데요?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헬라어로 ‘적게’라는 단어를 ‘페이도메노스’라고 적었는데 이 단어는 양이 적다라기 보다는 ‘아껴서, 인색하게’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즉 ‘돈을 적게 내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색한 마음으로 헌금했다’는 말입니다. 즉 인색한 마음으로 헌금하면 인색하게 받을 것이란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에게 인색하므로 하나님 역시 나에게 인색하게 주신다는 말이지요.

한편 ‘많이’로 번역된 '율로기아이스'는 ‘찬송, 축복’으로 번역됩니다.

 

즉 관대한 마음으로 연보를 하면 이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과 같고 그래서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헌금할 때 하나님을 찬송하는 마음으로 하고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더 영화롭게 하려는 마음으로 헌금한다면 그게 본문에서 많이 심은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헌금한다면 하나님 역시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 관대하게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절대로 헌금의 많고 적음에 관계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금하는지 아니면 교회내의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억지로 또는 인색하게 헌금하는지에 대한 마음가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서는 ‘많이 심고 적게 심고’로 적지 않고 ‘인색하게와 관대하게’ 로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심지어 어린아이에게 물 한그릇을 대접해도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의 원문을 정확하게 번역한다면

 

연보하는 자가 ‘처음품었던 대로 , 남이 뭐라고 해도, 남이 얼마나 내든지 상관하지 말고, 아니면 중간에 바꾸지 말고’와 같은 의미입니다.

 

내가 한 천원할려고 생각하고 왔는데 사람들이 만원짜리를 냅니다. ‘음 사회적 체면이 있지 나도 만원을 해야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역시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십만원을 하려고 생각했는데 다른 이들이 모두 만원을 낸다. 그러니 ‘나도 한 만원이면 되겠네’ 이렇게 생각하고 적게 내는 것 역시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이 얼마를 내든, 남이 뭐라고 하든 우리는 다른 이들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하고 헌금해야 합니다.

 

인색함으로...근심으로 , 돈을 낸다는 마음에 슬퍼서라는 의미입니다. ‘돈을 내어야 된다 그래서 너무 슬프다’ 이런 사람들은 헌금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가 그런 마음을 품은 순간 이미 하나님은 그의 헌금을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소용이 없다는 말이지요.

 

억지로...이 말은 송곳니를 빼는것 같이 언짢은 마음으로라는 말입니다. 정말 황당합니다. 송곳니를 억지로 뺀다면 얼마나 거리끼겠습니까? 그런데 억지로 헌금을 하는 것이 마치 그 송곳니, 멀쩡한 송곳니를 빼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헌금을 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이와 같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의 뜻은 명백합니다.
내가 이렇게 잘사는 것은 나 혼자서 이 돈을 가지고 잘 먹고 잘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이 돈을 가지고 더 착한 일을 많이 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유행가 가사처럼 있을 때 잘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나만을 위해서 사용하거나 잘못된 일을 위해 사용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일이 됩니다. 결국 그 재물을 소유할 자격을 상실하게 되고 가난해 지게 될 것입니다. 그 재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더 잘 사용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재물을 옮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금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고린도 교회와 마게도냐 교회를 비유한 것입니다. 고린도는 굉장히 부유한 도시입니다. 이 도시의 문화양식은 세계사 교과서에도 나옵니다. 코린트양식이라고, 혹시 들어 보셨습니까? 로코코니 바로크니 하는 문화의 양식이 있는데 고린도의 화려함이 하나의 문화양식으로 세계사에 나올 정도니 얼마나 부유하고 화려하겠습니까?
 
그런데 바울 당시에 고린도 교회에서는 항상 말썽이 끊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죄도 많지만 특히 인색한 걸로 유명했습니다. 그런데 이전에 바울이 담임했던 교회인 마게도냐의 교회는 지독하게도 가난했는데도 큰 기근으로 더 환난에 처한 예루살렘교회의 형제들을 위해 바울에게 헌금을 전달해 주도록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렇게 가난한 교회도 더 가난한 형제들을 위해서 헌금하는데 너희는 그렇게나 부유하게 살면서 가난한 형제를 위한 구제에 눈감으면 안된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은 고린도 교회에게 기근을 당해서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교회의 형제들에게 너희도 헌금을 해라는 말을 하기위해서 적은 것입니다.

 

솔직히 부유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의 사정을 잘 모릅니다. 프랑스 대혁명때 베르사이유 궁으로 몰려와서 ‘우리에게 빵을 달라’고 외치는 농민들에게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지’ 라고 이야기해서 농민들을 더 화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참고로 그 여인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오스트리아제국의 공주로 자라나서 프랑스왕의 왕비로 왔다가 그 아름다운 궁전과 막대한 재산을 쌓아놓고도 덧없이 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환경을 넘어 역사하십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비록 고린도 교회에 비하여 말도 못하게 가난했지만 그 마음만은 넉넉한 부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당시 고린도교회에서 사역할 때 사례비가 없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았거든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그에게는 교인들과 함께하는 직업이 있었습니다. 바로 건축업이지요. 천막 만드는 일입니다. 이걸 함으로 생활비를 충당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바울은 선교팀 전체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천막업가지고 그 모든 선교 경비를 충당하고 자기들의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그때 마게도냐 교인들이 헌금을 정기적으로 해서 고린도 교회에서 무임으로 봉사하는 바울의 생계를 도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부유한 고린도 교인들이 가난한 가운데 힘써 헌금한 마게도냐 교인들을 본받기를 원했고 하나님이 왜 그들에게 물질의 복을 주셨는지를 알게 하고자 했습니다.

 

뭐 잘 아시겠지만 고린도 교회가 자기에게 사례비를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고린도 교회가 조금 더 사랑이 많아지고 성숙해 져서 그들의 부요함을 가지고 더 많은 구제사업을 감당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부자교회에서 구제사업을 해서 다른 가난한 도시들에 연보를 전달하는 것. 저도 옛날 서초동에서 돈을 얻어서 부산이나 다른 곳에 전달한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의 연보가 이렇게 쓰인다면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8절에 말하는 넉넉...도움이나 원조가 필요 없는 완전한 상태, ‘자족하는 마음’으로 번역.
하나님의 부요가 그리스도인이 선한 사업을 하는 원동력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무한한 것들을 가지셨기에 나에게 얼마든지 베풀어 주실 수 있습니다.

 

다만 내가 아버지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제한이 있습니다만. 그런데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면 나에게 그 무한한 재물을 베풀어 줄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은 것입니다. 내가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푼다면 나에게도 주께서 넉넉하게 베푸실 것이요 나의 모든 소유가 다 넉넉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 명예와 권위와 건강과 행복과 사랑마저 넉넉하게 넘쳐 흐르게 될 것입니다.

 

9절에 ‘기록된바’ 라고 말씀을 인용했는데 시편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시112:9의...동료인간들을 향해 베푸는 친절, 올바른 행동, 구제

 

그러므로 의는 구제와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면 구약성경에서 의인에 대한 구분은 구제에 대한 태도와 관련이 됩니다. 엄청난 부를 가지고도 혼자서 인색하게 움켜쥐고 있었던 이를 성경은 결코 의롭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칭찬하는 부자들은 전부 물질에 관대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의인에게 자선과 구제는 필수사항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선과 구제를 하는 기독교 의인 부자들에게는 ‘그 의가 영원히 있느니라’

 

다시 말해서 영원히 의로운 일을 할 수 있도록 물질적인 번영이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게다가 명예까지 함께 있어서 그 명예가 후세에까지 전해질 것이며 널리 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청지기 비유를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대신해서 자기의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약한 이들에게 분배해줄 신실한 선한 청지기를 찾고 계십니다. 그러니 자기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는 종에게 더 주시고 영원히 주실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왜냐면 사실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제대로 기능하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생각에는 ‘우리에게 돈만 줘봐라, 내가 제대로 사람들에게 베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람이 정말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고 일단 부자가 되고 나면 이상하게도 없는 사람 생각 못하고 자기가 원래부터 부자였던 냥하며 그들을 깔보고 짓밟으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갑질을 하려고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니 한결 같이 주의 앞에서 임무에 충실한 청지기를 하나님이 싫어하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부자로 계속해서 살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의가 영원히 기억될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도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실컷 누리고 남에게도 마음껏 베풀고 그리고 명예가 오래오래 보존되고 죽어서는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고 얼마나 좋습니까? 이 좋은 일을 그래 별것도 아닌 자동차와 가방과 시계와 집의 조금 더 넓은 평수와 바꾼단 말입니까?

 

사실 옛날 얘기하면 사람들이 요즘이 그때하고 같냐고 말씀하시겠지만 생각해 보면 아무리 작아도 발 뻣고 잠 잘만 하고 공부할 책상에 옷 넣을 옷장정도 들어가면 좋은 방입니다. 그 방이 각자 앞에 하나씩 배당되고 손님 맞을 거실도 있고, 깨끗하고 물새지 않고 그러면 되는 거지 뭔 집을 고대광실로 꾸며가지고 혼자서 쳐다보면서 스스로 자족해봐야 아무짝에도 필요 없습니다.

 

몸이 아프면 그거 뭐할 겁니까? 냉난방비가 많이 들고 청소하기 어렵고. 정원을 아무리 잘 꾸며도 바깥에 대자연하고 비할 수 있습니까? 정 푸른 나무와 숲이 그리우면 조금만 걸어나가 보세요. 엄청난 자연의 푸르름과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산에서 기도하다보면 저녁이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다 내려가고 그 넓은 곳에 혼자 남아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과 나만 존재하는 단독공간입니다. 그런 대자연을 놔두고 비좁은 담장 안에 뭔가 만들어가지고 혼자서만, 내 가족만 즐기겠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부를 추구하게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서로 사랑하는 형제자매라고 만드셨는데 이 형제자매들은 서로 못잡아 먹어서 엉글거립니다. 잘나면 질투하고 못나면 차별하고 없는 흠도 만들어서 흉보고.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요즘 신문에 많이 나옵니다. 경찰에 잡혀가고 검찰수사를 받고 법정구속이 되고 소위 슈퍼리치라고 하는 사람들의 운명은 그렇습니다. 신문과 방송에서 부끄러운 이름이 나오고 사람들은 욕하고. 굳이 그렇게 살 필요가 있습니까?

 

10절에 보면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구제와 연보로 물질을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심을 것을 주시고 또 풍성하게 하시고 의의 열매까지 더해 주신답니다.

 

여기서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더하게 하시리니’는 모두 미래 직설법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의지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채워 주실 수도 있고 씨를 주실 수도 있고 열매를 더해 주실 수도 있고 이런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안주실 수도 있다는 말이 되는데 전혀 그런 뜻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그 상을 잊지 않고 주실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선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보면 여기에 나오는 모든 용어가 파종과 결실 같은 심고 거두는 일에 관련된 용어입니다. 즉 파종으로 설명합니다. 이 말은 바로 결실, 그것도 큰 폭으로 증대된 결실을 비유합니다. 즉 남에게 구제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연보하는 이에게 하나님은 더 큰 재물로 더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그가 다음에 더 많이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게다가 명예도 더하시고 또 다른 모든 복이 넘치도록 하셔야 다른 이들도 이를 보고 자기네도 이웃을 구제하는 일에 동참하고 멀리 있는 가난한 이를 위하여 연보할 테니까요.

 

연보얘기가 나와서 말씀드리는데 어떤 큰 교회에서 주보에 이렇게 적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인들이 출장을 가거나 멀리 떠나 있어도 십일조는 반드시 본교회에 냅시다” 이런 말. 여기에 무슨 신학적, 교회론적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제 생각에는 그냥 다른 교회에 내지 말고 우리교회에 내라는 이기심의 발로로 여겨집니다.

 

그 부자교회에서 다른 곳으로 장기로 출타한 성도들의 십일조 정도는 출석한 교회에 내도록 해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인데 ...여하튼 그 교회는 그렇게 해가지고 지금 어마어마한 교회당을 지었고 세상으로부터는 욕을 어마어마하게 듣고 있고 내부 분열로 시끄럽지요. 굳이 그렇게 혼자서 다 먹을려고 꼭 그런 광고를 해야 합니까?

 

원래 십일조의 삼분의 일은 이웃과 인근 레위인에게 구제하도록 한 성경의 말씀하고도 전혀 맞지 않고 무조건 우리교회에 내라. 구제도 예산도 내가 알아서 세우고 할 테니까 너는 입 다물고 돈이나 내라고 하는 그런 생각인 것 같아서 너무 씁쓸해 집니다.

 

11절에서 성도의 너그러운 연보가 그들이 하나님을 감사하게 하는 조건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잘 보시면 ‘부요함’이 ‘너그럽게 연보함’에 선행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 연보하게 부요를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부가 하나님께 연보하고 이웃을 구제하는 일에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몇 번 지켜보시다가 그에게 주신 것을 거두어서 다른 이에게 맡기실 것입니다.

 

우리는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예수 믿는다고 절대로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부요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뭔가 얻어서 잘 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한가지 방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이 물질을 많이 사용하십시오. 하나님의 일은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 것도 들어 갑니다. 그러니 가난한 이웃에게 여러분의 물질을 나누어 주십시오. 뭔가 좋은 일에 쓰라고 몫돈도 척척 내어놓아 보세요.

 

제가 예전에 서초동에서 사역할 때 그 교회의 어떤 집사님 부부가 생각납니다. 그 분은 대학가요제에서 동상을 받은 아주 쾌활한 분입니다. 그리고 신앙도 좋은 분입니다. 그 부인은 어떤 교회 목사님의 따님입니다. 그런데 이 분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저에게 자기들이 교회 안에 가난한 형제를 돕기를 원하니 한 분을 추천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마침 알고 있던 한 분을 소개했습니다. 그 분은 남편이 일찍 돌아가시고 자식을 데리고 신앙생활을 하는 분으로 참 모범적이고 신실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분을 소개해드렸는데 정말 제 예상보다 더 넘치도록 도움을 주셔서 제가 참으로 감사했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제가 그 교회를 떠나왔지만 그 아름다운 선행은 계속되리라 믿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서초동에 믿음 좋은 여종들이 포진된 기도팀이 있었는데 그들도 저에게 요구합니다. 혹시 부산에 가난한 도와줄 사람이 있는가. 그래서 제가 두 명을 추천했습니다. 그분들이 정말 열심히 그들을 도왔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시절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외에도 이런 실례를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분들의 선행을 보시고 아직도 이 나라의 교회를 용서하시고 참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내 물질을 내 재산을 어떻게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의 청지기로서 충실히 근무하는 이에게 주님은 더할 수 없이 관대하시고 상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재산을 보전하고 더 불리고 싶으며 더 인색하게 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에 더 관대하게 보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웃에 구제하고 먼 곳에 연보하십시오.

 

사실 그리스도인의 연보는 이미 부요하여진 마음의 외적 표현입니다. 물론 ‘부요’가 단순히 물질적 부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지만 나에게 무한정으로 공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한 자신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지는 관대함이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됩니다. “먼 곳에 있는 우리의 형제가 우리가 어렵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연보를 보내왔다”고 한다면 그것 때문에 그들이 감사하겠지만 그들이 그 연보를 가지고 자기들이 절약해서 사용하고 남는 것을 가지고 그곳에서 역시 이웃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기에 더 감사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말이 복잡하지요?

 

이렇게 보십시다. 옛날에 우리나라가 한참 전쟁 중일 때 미국의 교회에서 한국의 교회로 구호물자를 많이 보내 주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그것을 나누어 가져서 교인들이 일차로 감사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구호 물자를 교인들에게 나누고 남게 되자 이제 그 물자를 받은 교회가 주변 이웃들에게 구호품을 전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구제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 이웃들이 구제받고 기뻐하며 감사하는 그 모습에 또 한번 성도들이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의 구제연보를 받은 이들이 우리를 생각하며 얼마나 열심히 하나님께 간구하겠습니까? 우리는 그 구제연보로 말미암아 든든한 기도의 동역자를 얻게 되는 셈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잘 안들어 주셔도 남이 잘되기를 원하는 기도는 정말 잘 들어 주십니다. 특히나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는데 가난하다고 다 의인은 아니지만 그들이 절실한 만큼 기도도 절실할 것임은 당연하지요.

 

우리의 넉넉한 연보로 말미암아 그런 감사가 넘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냥 계시지 않고 당연히 우리에게 몇배로 갚아 주시고 포상까지 더하실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게 한 공로로 상을 받는 겁니다.

 

이렇게 연보를 하면 받는 사람도 풍부해 지고 하는 이도 역시 풍부에 처하게 됩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히 된다면 자연적으로 주변에 교회에 대한 우호적이며 친숙한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고 전도의 문도 더 열리게 될 것입니다.

 

뭐 전도까지는 생각하지 말고 그냥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하십시다. 하나님은 결코 나를 그냥 두지 않고 갚아 주십니다. 삼십배 육십배 백배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심는 것에 주시는 결실이 그와 같이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치고 가재잡고’ 하는 일인데 반드시 우리 성도들이 해야 할 것입니다. 안 그래도 주님의 명령인데 그 보상과 혜택이 어마어마합니다.

이 땅이 우리 교회로 말미암아 조금이라도 더 밝아지고 사람들이 더 행복해지고 불행한 자들이 줄어 들고 위로를 받고 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이 이 땅에 주의 교회를 세우게 하신 아주 큰 목적중의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쳐야 겠습니다. 내 아버지의 부요함을 믿고 그분의 풍성히 베푸시는 사랑을 믿는다면, 내가 아버지를 천지의 주인으로 인정한다면 그분을 믿고 한번 베풀어 보십시오. 이걸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빚보증을 하나님아버지로 세우고 가난한 이들 약한 이들에게 돈을 빌려 줘보세요. 빌려준 걸 못받을 곳에 더 빌려주세요. 그러면 그들이 못 갚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의 고리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자애롭고 풍성하며 관대한 내 아버지께서 대신 갚아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이렇게 교회의 이름이 좋은 평가를 받게 만든다면 ,내 아버지의 이름을 더 존귀하게 만든다면 단순히 갚아 주실 뿐만 아니라 포상까지도 더하실 것입니다.

오늘 너무 돈돈돈 거린 것 같은데 쌓아 놓지 말고 푸세요.

 

개인도 교회도 쌓아 놓지만 말고 베푸세요. 제가 대형교회에 말하는게 있습니다. 교회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그리고 나서 주님을 좇으라고. 끊임없이 쌓고 쌓아서 바벨탑을 만든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냥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믿고 나가세요.
우리 아버지께서 책임지십니다. 그런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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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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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교회에 대해서 쓴 이야기 중에, 손봉호 교수님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비록 가난하지만은,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 비록 권력이 그렇게 높지 않지만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는, 그런 사람이 교회에서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라는 대목입니다. 비록 가난해도 우리가 도울 수 있다는 그 자신감이 너무나 좋습니다. 비록 권력 같은 게 없더라도 다른 사람을 얼마든지 격려하고, 지지할 수 있다는 그 공동체의식이 참 소중합니다. 교회가 무엇인가 다른 곳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이름이 높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만이 독점적으로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을 압니다. 또한 그것을 부추기는 것이 자본주의 마케팅 시스템인 것 같습니다. 거기에 속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남과 함께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조금은 더 고생스럽고, 조금은 더 어리숙해 보여도, 기꺼이 바보스럽게 남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그렇게 평범한 날들을 아름답게 물들여 나가면, 그 결실도 맞은 편에서 우리에게 멋지게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2016. 07.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