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성전을 정화하시다(마가복음11:15-19)/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7. 4. 04:24

 

성전을 정화하시다 (마가복음11:15-19)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한 사건은 매우 유명합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집이라 ...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이 기사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모두 실려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사를 읽을 때 어떤 느낌을 가집니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가 다 ‘아멘’으로 받아 들인다고 주장하고는 있지만 실제로 우리는 주의 모든 말씀에 ‘아멘’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과 나의 호불호에 따라 ‘아멘’이 엇갈립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싫으면 , 나에게 불리하면 주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나는 받아 들일 수 없습니다. 나에게는 ‘아멘’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말씀 앞에서 겸손해야 하며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배웠고 말해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씀대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또 그 말씀대로 살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속으로는 아멘이 아닙니다. 주께서 진노하시는 일도 버젓이 저지릅니다.

 

자, 오는 성경본문에 나온 기사는 주께서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정화한 사건입니다. 주께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성전에 가셨는데 전혀 ‘개전의 정’이 없습니다. 2년전에 주님은 이미 한차례 성전을 정화하신 일이있습니다. 성전안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혼내고 짐승들을 내어 쫓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2년만에 온 성전은 여전히 골치 아픕니다. 성전 안에 있는 ‘이방인의 뜰’에서 짐승들의 울음소리와 악취가 납니다. 똥과 오줌으로 성전뜰이 범벅이 되어 있습니다. 비둘기가 울고 세계 각국에서 온 유대인들이 자기네의 돈을 성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돈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졸지에 성전 안에서 장사가 벌어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성전의 제일 바깥뜰인 이방인의 뜰을 통하여 물건을 나르고 있습니다. 마치 지름길처럼 운용되고 있습니다. 성전의 정숙하고 거룩한 분위기는 느낄 수 없고 마치 시장의 거리 같습니다.

 

우리는 이 성전정화 기사를 보면서도, 이것이 주께서 진노하신 행위라는 것을 알면서도 버젓이 성전 안에서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성전을 교회라는 말로 바꾸어 봅시다. 우리도 교회당 안에서 장사하는 곳을 몇 군데나 알고 있습니다.
그것도 주로 대형교회에서 이런 일을 저지르는데 이건 자본주의 하에서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따른 겁니다. 중소형교회에서는 수지가 안맞기 때문에 장사를 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서초동에서 사역할 때 한 유명한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서점에서 어떤 책을 사야된다고 해서 제가 따라갔는데 이 분이 서점으로 가지 않고 예배당으로 갑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예배당 안에는 서점도 있고 켜피숍도 있고 식당도 있습니다.

 

당연히 많은 교회에도 식당은 있지만 그 교회의 식당은 메뉴가 있고 그걸 돈을 내고 사먹는 그런 곳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일괄적으로 공짜로 식사를 대접하는 그런 식당이 아니라 개인이 입맛대로 골라서 돈을 내고 사먹는 그런 식당이 있습니다. 정말 놀랐습니다.

 

그런데 같이 간 분들은 아무도 놀라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는 반응입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 이런게 있어서 더 좋다는 반응입니다. 편리하다, 게다가 아무래도 바깥보다는 싸다. 그리고 여기에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상점 주인인 교인도 먹고 살고 또 장학금에도 보태고 구제도 하고 이건 뭐 꿩먹고 알먹고의 멋진 아이디어랍니다. 심지어 한술 더 떠서 우리도 빨리 이런 좋은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제가 목동에서 사역할 때의 일입니다. 주일 낮에 쉬는 시간이 있어서 교역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한 목사님이 잠깐 자기하고 같이 가자고 합니다. 보여 줄게 있답니다. 그래서 따라가 보니 외관이 엄청나게 멋진 교회당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당의 일층에 커피숍이 있습니다. 대학부 청년들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커피 한잔에 천원에서 천오백원 정도. 게다가 서점도 있고 책과 교회용품도 팝니다. 참 편리하고 좋아 보입니다. 정말 그럴듯해 보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눈에 좋아 보이고 그럴듯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어떨까요? 주님은 이걸 보시고 뭐라고 하실까요? 참고로 그 교회 담임목사였던 분은 돈 문제로 나중에 감옥에 갔다 왔습니다. 물론 그것 때문은 아니겠지요?

 

오늘 본문에 보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행위를 매우 싫어하셨습니다. 좀처럼 노하지 않는 우리 주님께서 불같이 노해서는 허리끈을 풀어서 채찍으로 삼아 짐승들을 후려 갈겨서 내어 쫓고 환전상의 상을 뒤엎고 의자를 넘어뜨렸습니다.

 

상인들뿐만 아니라 그 상인들에게서 제물을 사는 이들까지 혼을 내셨습니다. 물건 사는 사람들까지 혼을 내신건 너무 하지 않나요? 절대로 너무 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사지 않는다면 장삿꾼들이 그곳에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인들뿐만 아니라 물건을 사는 사람도 공범인 셈입니다. 주님은 허리끈을 휘두르며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다고 혼을 내셨지요.

 

자, 주님은 과연 무엇 때문에 화를 내셨을까요?
장사행위일까요? 아니면 장사를 할 때의 폭리 때문일까요?
사실 당시에 비둘기는 시중가의 무려 80배를 받았답니다.

 

원래 비둘기는 가난한 자들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가난한 자들에게 특화된 제물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비싸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시중가의 무려 80배에 달하는 가격을 지불하게 되면 가난한 자들에게는 비둘기도 엄청난 부담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가난한 자들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낼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요즘 가난한 자들에게 ‘교회 오세요’ 하면 교회에 올 수 없답니다. 왜냐면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랍니다. 이거하고 비슷하지요?

 

이런 일이 자꾸 일어나면 결국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과 멀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가난한 자들이 돈이 없어서 하나님과 멀어 진다면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그런데 지금 비둘기를 파는 상인들은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비둘기를 파는 상인들이라고 해서 시중가의 80배를 받아서 가난한 자들에게서 비난을 듣고 싶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양심이란 게 존재한다면 폭리를 취해봐야 두세배지 어떻게 80배가 됩니까?

 

그런데 이건 상인들만의 잘못이 아닙니다. 상인들은 처음 성전안의 이방인의 뜰에서 장사할 수 있는 권리를 사기위해 제사장들에게 뇌물을 주게 됩니다. 그리고는 따로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것에 대해서도 세금을 냅니다. 뇌물이 비공식적이었다면 이건 공식적입니다.

 

당시 성전은 그 규모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컸습니다. 이스라엘은 역사상 모두 세 번의 성전을 가졌는데 화려하기로는 솔모론 성전이 제일이었지만 규모로는 헤롯성전이 제일 큽니다. 그런데 너무 크게 짓는 바람에 공사가 그때까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계속해서 확장 공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당연히 돈이 들어갑니다.

 

헤롯이 자기의 돈을 가지고 성전을 지어준게 아닙니다. 국가의 예산으로 성전을 지었지 자기 사비로 지은게 아닙니다. 당연히 성전 자체적으로 돈을 충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비싼 상품가에 성전 건축헌금도, 제사장에대한 뇌물도. 헤롯정부에 대한 세금도 들어가 있는 겁니다.

 

당시에는 뇌물의 비율이 압도적이라서 비둘기 가격의 거의 대부분이 제사장에게 뇌물로 들어갔답니다. 제사장이 제물로는 살기가 어려워서 뇌물이 필요했을까요?
안타깝게도 제사장들도 그 돈을 다 자기가 차지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도 역시 뇌물을 바쳐야 하는 곳이 있습니다. 어디겠습니까?

 

대제사장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대제사장이 예수님에게 와서 항의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자기의 이권을 위협하니까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사실 대제사장이야 말로 이스라엘의 유일한 합법적인 권위입니다. 로마의 식민치하에서 헤롯은 로마의 꼭두각시 왕이고 에돔 사람 이었으므로 유대인들은 그를 진정한 왕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헤롯이 무리해서 그렇게 큰 규모의 성전을 지은 겁니다.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그러므로 모든 이들이 유일하고 합법적인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돈을 바리 바리 싸들고 로마에 가서 아부를 하는 겁니다. 대제사장직을 차지하기 위해서. 그래서 종신직인 대제사장이 동시대에 몇 명이나 존재하는 웃기는 현실이 생겨버렸습니다. 장인과 사위가 모두 동시에 대제사장 행세를 합니다. 이들은 오래오래 대제사장직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로마에 뇌물을 바쳐야 합니다. 그래서 각종 이권을 가지고 제사장들과 상인들에게 돈을 받아낸 겁니다.

 

또 어떤 일이 있는고 하니 사람들이 성전에서 파는 제물이 별로 좋지 못하기 때문에 성전 밖에서, 아니면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제물로 쓸 가축을 가지고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상인들은 이곳저곳에 뇌물로 뜯기고 자기들도 남겨야 하므로 아주 질이 떨어지는 짐승들, 다리를 절거나 눈이 상했거나 살이 없고 늙고 병들고 이런저런 하자가 있는 것들로 제물을 준비합니다. 어차피 죽여서 태울거 좋아야 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사를 드리는 신도들의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흠없고 순전한 짐승으로 제사를 드려야 하나님이 받으시고 복을 주신다고 생각해서 하나님께 흠없고 좋은 짐승을 제물로 드리고자 멀리 다른 도시로부터 아주 질이 좋은 짐승을 가지고 옵니다. 이스라엘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예루살렘성은 높은 산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여리고같은 평지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하면 계속해서 위태위태한 길을 올라야 합니다. 그러니 짐승까지 끌고 그 높은 곳을 오르는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그렇게 고생하며 정성스럽게 가져온 이 제물은 제사장에 의해서 불량품으로 거부되어 졌습니다. 제사장이 상인과 짜고 성전 내에서 사지 않은 제물에 대해서는 무조건 트집을 잡아서 퇴짜를 놓는 겁니다. 그러면 울며 겨자먹기로 신도들은 자기들이 고생고생하며 가져온 질좋은 짐승들은 상인들에게 헐값으로 넘기고 더럽고 추한 것, 하자 있는 제물을 아주 비싼 값에 사는 겁니다.

 

당연하게도 이 제물은 아주 질이 좋은 것으로 둔갑해서 아무런 문제없이 제사장의 검사를 통과합니다. 그리고 신도들이 가져온 질좋은 가축들은 제사장들이 개인적으로 착복합니다. 다, 상인들과 짜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오히려 하나님은 더럽고 추한 것으로 받으시고 제사장들은 실하고 좋은 것으로 차지하게 되는 황당한 신성모독이 벌어지는 겁니다.

 

돈을 한번 볼까요?
당시에 성전의 제사장들은 로마나 헬라의 돈은 참람한 문구가 돈의 표면에 새겨져 있어서 성전에 연보로 드리는 것은 불가하다고 해서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만 통용되는 돈이 따로 있습니다. 아마 옛날부터 있어온 이스라엘 고유의 돈이겠지요. 그런데 세계각지에서 온 유대인들은 미처 유대의 옛날 돈으로 헌금이나 성전세를 준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들이 가지고 온 외국돈과 유대의 돈을 교환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교환비율이 또 어마어마하게 폭리입니다. 수수료도 폭리인데다가 교환 비율, 즉 환율도 성전 밖하고는 말도 안되게 차이가 납니다. 이건 칼만 안들었지 강도입니다. 합법적인 강도. 게다가 이런 불법적인 상행위를 단속해야 할 레위인이나 제사장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묵인합니다.

 

왜냐면 이들도 상인들이 얻는 이익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대제사장부터 제사장, 레위인, 상인들까지 거대한 먹이 사슬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를 근절할 책임이 있는 대제사장이 오히려 이를 묵인하고 비호하는 실정이니 어찌 이게 근절되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이들을 내어 쫓고 환정상을 뒤엎는 초강수를 두신겁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지요. 내 아버지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

 

우리가 사정을 자세히 알아 보니까 단순히 장사하는 것 때문에 주께서 화를 내신게 아니라 장사를 해도 너무 폭리가 심해서 강도의 굴혈처럼 폭리를 취하니까 화를 내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요? 그래서 교회 안에 상점을 열고 식당을 열고 커피숍을 열고 서점을 열고 그래도 양심껏 싸게 하면, 저렴하게 하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사실 교회에서 장사해가지고 떼부자 되려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교인들의 편리도 도모하고 이익금으로 장학금이나 구제금도 하고 더불어 자기도 호구거리를 삼고 요즘 실업자가 넘쳐 흐르는데 교회가 교인들의 직장도 알아봐야 되는거 아닙니까?

 

다 좋은데 주님이 걸립니다. 교회도 좋고 교인도 좋고 상점 주인도 좋고 사는 사람도 좋고 다 좋은데 주님만 싫어하실 것 같습니다. 주님은 현실감각이 없어도 너무 없어!


그렇습니까? 좋은게 좋다고 적당히 해야지 그렇게 죽기 살기로 채찍을 휘두르고 그렇게 해야 합니까? 여러 사람의 밥줄도 끊어놓고 대제사장과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정면으로 적으로 돌려야 합니까? 배타고 오는 유대인들의 경우에 제물을 사서 성전까지 가지고 오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이들의 편의를 위해서 상인들도 나름 기여하지 않나요?

 

아니 상인들이 폭리를 취하면 그걸 개선하면 되지 제도자체를 막아 버리고 폐지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솔직히 요즘 교회에서 주는 밥, 점점 질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밥먹으러 가는 이들도 많습니다. 요즘 교인들의 수준이 높아져서 교회의 공동식사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 어떻게 일일이 다 공짜로 밥을 해 줍니까?

 

교인중의 한명에게 식당을 맡기고 교인들 중에서 가정 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몇 명 뽑아 가지고 식당 아줌마로 삼고 취직도 시켜주고 또 교회니까 너무 비싸게 받지 말고 원가에다가 적정 이윤만 붙여서 팔고 남는 거는 장학금에 구제금에 선교비로 쓰면 너무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면 안됩니까?

 

우리나라 사람들 책 정말 안 읽습니다. 기독교 서적만 안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이라는 종류는 다 안 읽습니다. 한때 만화책이 히트한 적도 있지만 이제는 만화책도 안 읽습니다. 대부분이 컴퓨터나 휴대폰으로 책을 대신합니다. 그런데 서점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좋은 책을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한다면, 목사가 강단에서 이런 책 한 벌 읽어보세요 책은 저기 서점에 갖다 두었습니다. 이러면 책도 팔리고 좋은 책도 읽히고 서로 좋은데요,

 

기독교 출판문화도 발전하고 작가들도 살고 고객들은 책을 싸게 사고 주인은 호구거리도 되고 또 점원을 교인들 중에서 고용하면 실업률도 내려가고 그러면 그 돈으로 십일조도 내고 선교 헌금도 내고 너무 너무 좋은데 도대체 뭐가 문젭니까?

 

다 좋은데 주님이 문젭니다. 주님은 막무가내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도 성전을 정화한 기사가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유사하지만 주님은 여기서는 상인들을 내쫓으시면서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다고 하지 않고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었다고 하십니다. 그래요, 강도의 굴혈보다는 오히려 상태가 나아보입니다. 단지 장사하는 집이므로.
그런데 이렇게 정리하고 넘어 가려고 했는데 도저히 합리화할 수 없는 구절이 있습니다.

 

21:12“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장사하는 상인들을 내어 쫓았다가 아니라 매매하는 모든 자, 즉 물건을 파는 자뿐만 아니라 사는 자도 내어 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폭리가 문제가 아니라 장사하는 행위가 문제인 것입니다. 물론 폭리는 예수님에게 혼나는 덤입니다. ‘장사하는 것만 해도 괘씸한데 이것들이 폭리까지 취하고 있어’ 그들은 주님이 보고 계시는 와중에서도 여전히 사고 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분노를 산 것입니다.

 

주님은 왕의 자격으로 수많은 군중을 이끌고 예수살렘성에 들어오셨고 그 중에서 성전을 찾으셨습니다. 첫날은 그 많은 군중들과 함께 단지 성전을 한번 슥 둘러보신 것 뿐입니다.
이게 결코 중요하지 않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고난주간, 최후의 때를 보내면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바로 성전을 정화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병자들이 주님께로 몰려 옵니다. 또 아이들은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찬양하며 뛰어다닙니다. 그것 때문에 주님은 대제사장과 얼굴을 붉히셨습니다.

 

아마 이때 대제사장과 얼굴을 붉힌게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야겠다고 생각하게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나 큰 일입니다. 왕같은 행렬을 이루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셔서 주님은 헤롯궁으로 가신게 아닙니다. 주님은 로마군의 병영, 안토니 요새로 간게 아닙니다. 우리 주께서 가신 곳은 성전입니다.

 

그냥 성전을 한번 둘러 보셨고 그 다음날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사실 주님은 이년 전에 한번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을 보시고 기도하는 집을 장사하는 곳을 만들었다고 탄식하시고 분노하셔서 채찍으로 징계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년 후에 여전히 성전 안에서 장사가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고 팔고 정신이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어떤 제도는 사람을 괴롭힐 목적으로만 시행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건 사람들과 원수가 되어서 싸우려고 하는거지 정상적인 조직이나 단체에서는 결코 그렇게 시작되지 않습니다.

 

무언가 좋은 목적으로 시작되지만 그게 가면서 처음 목적이 흐려지고 결국 인간의 욕망과 비틀린 본성이 개입되면서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겁니다. 성전에서 장사를 시작할 때는 신도들의 편의를 위한다는 측면이 강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장사꾼들에게는 호구거리를 제공할 수 있고 성전건축이 완료되지 않은 상황에서 성전건축헌금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레위인들이나 제사장들에게 수고한다고 약간의 사례금도 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배분할 수 있기 때문에 대제사장의 권위도 더 높아 집니다.

 

멀리서 오는 신도들이 그 평야지대에서 고지대까지 짐승을 몰고 온다는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게다가 외국돈을 아무 곳에서나 바꿔 주지 않습니다. 돈이 많은 것을 보면 혹시라도 강도가 따라붙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바가지를 쓰거나 속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공신력있는 기관에서 돈을 바꿔주는게 여행객들에게, 멀리서 온 유대인 형제들에게 더 좋을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목적으로 시작된 겁니다. 그러나 여기에 각종 이권과 욕심과 경쟁이 개입되자 장점은 사라지고 단점만 남게 된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채찍을 드시게 된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절대로 그럴 일이 없다. 그래요? 인간은 날 때부터 악하고 교회는 원래 죄인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성도라고, 거룩한 무리라고 부르지만 거룩해서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거룩해 지라고 성도라고 부르는 겁니다.

 

안산에 어떤 큰 교회가 식당을 운영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으니까 밥을 공짜로 주기가 뭐한 모양입니다. 처음에는 교인들에게만 팔았겠지요. 저렴하게. 당연히 교회니까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보니 주변보다 더 싸게 팔았습니다. 이게 소문이 나서 점심시간에는 인근의 사람들이 여기로 와서 점심을 먹습니다. 교회가 지역에 봉사하는 참 훈훈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인근 상인들이 교회식당 때문에 장사가 안된다고 몰려와서 데모를 하는 겁니다. 신문과 방송에 크게 나왔습니다. 그래서 저도 알게 된 겁니다.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회와 식당 이용객들과 지역 상인들 사이에 뭔가 만족할 만한 협상이 있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잘해 볼려고 한 식당운명이 뜻하지 않게 일부 사람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기껏 몇몇 상인 때문에 다수의 이용객들을 외면할 수 없다?’ 좋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자기 밥그릇을 빼앗긴 원한은 매우 극렬하고 오래갑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교회가 장사를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은 케케묵은 낡은 생각 같습니다. 교회가 식당이나 상점들을 운영하면 좋은 점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혜택을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천주교회가 동성애자를 포용한다? 글쎄 그 사람들 나름대로 뭔가 자기들에게 좋으니까 그런 말을 했겠지만 성경은 둘 다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인간의 이성을 합리적이라고 보고 자기의 이성에 어긋나는 것은 배척하려 합니다. 번연히 명문으로 장사하지 말라, 동성애를 하지 말라고 쓰여져 있음에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기 말만 하고 자기 생각대로만 행동합니다.

 

로마 법왕, 실제로는 로마 총대주교인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이 기사를 보고 정말 깜짝 놀랐는데 이 사람이 “카톨릭 교회는 동성애자들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 아마 동성애자를 배척한 것에 대해서 사과해야 된다는 말인 모양입니다. 아니 그럼 동성애자를 포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 사람이 정녕 성경을 제대로 믿는 사람입니까? 동성애자를 돌로 쳐 죽이라는 그 율법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는 그 성경본문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까?

 

로마서 1장에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그 본문은 그에게 정신 나간 자의 넋두리에 불과하단 말입니까?
설마 신부와 수녀들이, 주교들이 동성애를 많이 해서 동성애를 옹호하는건 아니겠지요?

 

이 사람들 정말 심합니다. 얼마 전에는 마리아가 흠이 없고 죄가 없다고 하더니 그 다음에는 마리아가 살아서 승천했다고 말하고 ‘그래도 우리의 형제다’ 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들 정말 안하무인입니다. 제대로 성경을 안 믿고 자기가 마치 성경의 최종 완결자나 된 것처럼 말하는 그가 진정 주님의 제자란 말입니까?

 

이제까지는 제가 구교도도 역시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라고 어느 정도는 존중했는데 앞으로는 이 사람들은 완전한 이단으로 취급해야겠습니다. 성경에 그대로 나와 있는 말을 자기마음대로 바꾸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오래전 사람들은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성경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기위해 성경을 근거로 드는 사람은 점점 줄어 들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계속 줄고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 말씀드렸지요?

 

교회는 봉사단체가 아니라
자선단체가 아니라
종교단체, 영적인 단체라고.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행동하면서 세상 사람들의 칭찬만을 바라서는 안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따를 때에야 만이 우리 교회가 그 존재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현대의 우리가 교회에 대해 우려하는 것이 세속화입니다. 이 세속화는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마침내는 교회를 세상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들어 버릴 겁니다. 그리고 세속화의 틈을 만들기 가장 쉬운 것이 바로 돈이 걸려 있는 것들, 이권들입니다. 그 다음이 인간적으로 옳을 것이라고 하는 인간 이성을 성경말씀위에 두는 사고방식입니다. 인본주의라고 합니까?

 

그 틈사이로 세상적인 사고방식과 세상의 문화가 들어 올 것이고 마침내는 성경의 진리는 왜곡되고 외면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이율배반적인 황당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된다면 성령님, 성령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거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에 성령이 계시지 않는다면 교회는 더 이상 영적인 단체가 아니라 사교클럽이 되고 말 것이고 사교 클럽에는 어떠한 역사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인간적인 미담이나 훈훈함은 있을 수 있지만 원래 교회가 가져야 하는 영성과 영적인 권위는 더 이상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위기의 순간마다 이권이 걸려 있는 순간마다 세상과 타협하기 시작하면 그렇게 되는 순간 세상은 교회를 무시하고 조롱하며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려 할 것입니다. 뒤늦게 교회가 세상의 조롱과 조종에 반발하면 핍박하고 짓밟고 제거하려고 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이 세상에서 두 발을 디디고 있지만 머리로는 저 하늘을 지향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서는 일개 생활인에 불과하지만 하늘나라로서는 하늘나라를 대표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세상모두가 말합니다. 성경에 비합리적인 것들을 고치라고 그래서 현시대에 발맞추라고.

 

여러분, 우리가 그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들을 현대인의 시각으로 조작하는 순간부터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적이 되는 겁니다. 그걸 우리는 신성모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건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행동입니다. 당연히 우리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들어 서시지도 않고 그런 우리와 함께 하시지도 않고 그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런 저런 모든 인간적인 고려와 우리의 머리로 생각하는 좋은 것들을 모두 멈추고 성경으로 돌아갑시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시면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내가 싫어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따라야 합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조종하려고 하는 사탄의 종자들이 됩니다. 어떻습니까?

 

세상의 많은 교회들이 점점 세속화되고 순결을 잃어가고 있고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별별 짓을 하더라도
우리만은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묵묵히 준행하는 그런 성도들이 되십시다.
그리고 난 연후에 하나님의 역사가 과연 일어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봅시다.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따르겠노라는 그 고집, 나는 세상없어도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면 도저히 아멘할 수가 없다고 하는 말씀에의 고집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후퇴시키지 않는 복음의 종이 됩시다.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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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인간의 편리 보다는,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아픈 교훈이 되는 이야기 입니다. 우리는 하지 말라는 것, 금기시 되어 있는 것을 해보고 싶어합니다. 그래놓고 변명을 붙인다거나, 합리화 하는데 능숙합니다. 교회가 복합센터가 되면 정말 좋을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장사하지 말라고만 합니다.

 

어릴 적 일화들이 생각납니다. 제가 어릴 적만 해도, 주일날 돈을 쓰는 문제 가지고도 보수적인 시각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주일날은 가급적 돈을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런 지적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주일날 맛있는 과자와 커피와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 훨씬 편리하고, 좋은 일임을 누구나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편하고, 회복되기 위한 주일이라는 시각도 한몫한 것 같습니다. 저도 주일에 아침으로 빵과 우유 참 자주 사먹습니다.

 

그러나, 주일은 결국 주님의 날입니다. 그래서 행동을 조심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말라는 것에는 멀리 하는 "현숙함"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 고결함에 하나님께서 언젠가 갚아주시고, 복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제게는 있습니다. 하나님을 내 이성기준에 끼워맞추지 말고, 성경에 써 있는 것을 중시하는 태도가 결국 중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전에 유행하던 표현대로라면, 하나님 중심, 성경말씀 중심, 교회 중심으로 살아가는 기독교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세상과는 다른 기준으로 살아가더라도 괜찮아. 그런 위로도 함께 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