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사도행전2:36-42)/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7. 14. 01:26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사도행전2:36-42)

 

교회에서 지키는 절기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성탄절, 추수 감사절, 부활절, 그리고 맥추감사절. 보통 이 네가지의 절기를 지킵니다. 그런데 다른 절기와 달리 맥추절은 점점 의미가 쇠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절기를 생략하는 교인들이 많아집니다. 이제 90%이상의 사람이 도시에 살면서 맥추절의 의미가 점점 잊혀 지고 있습니다.

 

농사를 짓지 않는 시대에 당연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못한 많은 신실한 주의 종들은 교회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이 절기를 기쁨으로 지킵니다. 그리고 이 맥추감사절에는 현대적으로도 매우 큰 의미를 가집니다.

 

뭐냐? 맥추절은 사실 오순절이라고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유월절이 지나고 오십일이 되면 바로 오순절이 되는 것이지요. 이 오순절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령이 강림하셨지요. 우리는 성령 하나님께서 이 땅에 강림하신 이 날을 기념하면 됩니다.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이 땅에 교회가 본격적으로 태동하게 된 것입니다. 당연히 교회는 주께서 창립하신 것이지만 교회란게 근본적으로 영적인 단체라고 할 때의 그 ‘영’이 바로 성령님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이 성령강림절이야 말로 교회를 만든 날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항상 성령님이 내주하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자, 그러므로 우리가 이 날을 기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맥추감사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자 제자들이 각 나라의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방언 말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방언은 지금 우리가 말하는 방언은 아닙니다. 천국 언어(?)를 말하는게 아니라 인간의 여러 나라 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동시에 그 방언을 알아 듣게 되자 깜짝 놀라서 소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인데 만일 그 말을 영어로 스페인어로 독일어로 일어로 중국어로 알아듣게 된다면 이건 정말 굉장히 놀라운 일이 될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이 사건을 일러 바벨탑에서 나뉘어진 세계 언어가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다시 하나가 된 사건이랍니다. 참고로 성경은 천국 언어인 방언의 존재도 당연히 긍정합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그렇게나 사람을 놀라게 하고 또 기쁘게 하고 든든하게 하고 천하가 마치 발밑에 있는 듯이 그를 특별하게 하며 세상에 초연하게 합니다.

 

동시에 당연하게도 그를 겸손하게 하고 바르게 하고 착하게 하기도 하며 세상을 사랑으로 관조하며 그들을 아끼며 그런 동시에 그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 만큼 그들의 악을 향해서는 거침없이 경고하게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과학이라는 인간이성 안에서만 사고하고 행동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자꾸 제한하려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도저히 가늠할 수 없고 그 한계를 설정할 수 없을 만큼 굉장합니다. 그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런 전능의 하나님에게 간절히 매달리세요. 그러면 그 기도가 응답되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저는 그런 경험을 수십번이나 했기에 이건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성령의 역사를 그렇게나 갈구하는 것입니다. 제가 원하기는 성도 여러분들도 성령을 체험하는 놀라운 은혜의 자리에 동참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건 정말 직접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는 놀랍고도 오묘한 것입니다.

 

성령 받은이가 손을 얹어 기도한즉 병마가 떠나가며 낙심되었던 자가 새롭게 힘을 얻고 몰랐던 것을 알게 되며 막혔던 것들이 풀려지게 됩니다. 그래요, 성령은 우리 기독교인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특권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성전에 모인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걸 보면 그들이 성령을 받을 때 즉 성령께서 강림하실 때에 제자들은 마가요한의 다락방이 아니라 성전의 한 방에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성전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그들을 보고 술 취해서 횡설수설한다고 조롱하는 것이지요.

 

그동안 제자들은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유했고 아마 성전의 한방에 모여서 기도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또 그들은 주님의 모범을 따라서 감람산으로 가서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산으로 들로 다니면서 또 모여서 기도하고 말씀을 들으면서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대하던 성령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죄를 회개하고 그리고는 계속 성령을 사모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때로 산으로 때로 들로 때로 집회소에서 기도하는 것이지요, 말씀을 듣기도 하며 기도하기도 하며 말씀을 묵상하기도 하며 그렇게 있다 보면 어 느순간 성령께서 임하시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일단 성령이 임하시면 그 기쁨과 떨림은 세상을 능히 오시할 정도가 될 것입니다. 예수믿는 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고 답답하지요?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는게 바로 성령의 임재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고  제자들은 성령에 취해서 방언을 했고 이 소리를 들은 무리가 모여서 어쩐 일인지를 묻게된 것입니다. 그들은 방언의 신비한 광경을 보고는 놀라고 신기해 하고 또 이를 부정하고 조롱하는 것까지 실로 다양한 반응을 보입니다.

 

왜 이 광경에 이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시시비비를 가리고자 하느냐하면 이들은 성전에서 축제의 기간에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를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보통 세계 각처와 전국 방방곡곡에서  유월절에 와서 오십일간을 지내면서 오맥추절까지 지키고 갈려고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드디어 그렇게나 고대하던 놀라운 하나님이 이적을 보고서 달려와서 한마디씩 하는 겁니다.

 

방언말하는 것, 그러니까 한사람이 말하는  말이 각 나라말로 들리는 이상하고 신비한 광경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고 당황하여 서로 ‘이 어찌된 일이냐’ 하며 물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오해를 바로 잡아야 할 필요가 있어서 사도들이 군중들 앞에 나서서 말하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어쩔 수 없는 환경에서 증거하게 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이런 행동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은 목숨을 도외시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사람들 앞에서 담대히 증거합니다. 사람들이 술 취했다고 수군거려도 모른척하고 숙소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무고와 그리스도의 사명에 대해서 설교하게 된 것입니다.

 

먼저 베드로는 술 취해서 제자들이 횡설수설한다는 말에 대해 때가 오전 9시이므로 우리가 술에 취하여서 횡설수설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예수의 무죄와 그가 부활하심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그가 성경에서 말한 메시야라는 것을 증거합니다.

 

여기 베드로의 말 중에서 성경구절이 많이 등장합니다. 베드로는 요엘서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어때요? 말하는 이나 듣는이가 다 같이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성경본문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상 그런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말한 구절들을 예수님에게 대입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자, 봐라, 여기 메시야는 이러이러하다고 말했지, 주께서 이러이러한 것을 알지?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야’

당연히 이번 기회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려는 목적도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에게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너무 잘 알아서 그를 유대의 암적 존재로 판단하고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준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는 폭도나 사기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가 진정한 메시야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이 듣고 있는 방언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우리에게 부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술취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아서 방언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증거하려는 설교입니다.

 

사람들은 오순절을 지키기위해 성전에 모여 있었습니다. 아마 그 중에 상당수는 유월절부터 예루살렘에 와서 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지금 너희들이 십자가에 예수를 못 박았는데 그게 큰 실수요 죄라고 말하는 겁니다. 왜냐면 불과 50일전에 바로 이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라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바로 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못박으라고 외친 일이 아주 잘못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성령받은 표입니다. 진리 앞에서 담대합니다. 결코 생명의 위협 때문에 진리를 왜곡하거나 진리 앞에서 물러서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는 지금 군중들의 기분을 맞춰주려고 아부도 떨지 않습니다. 그냥 담담하게 사실만을 증거합니다.

 

그렇게나 한자리를 원하고 예수와 더불어 다윗왕국에서 떵떵거리며 살려고 한 베드로가 삽시간에 확 바뀌었습니다. 그게 성령받은 표입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이 땅의 부귀영화가 아주 가소롭게 보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큰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게 됩니다.

 

몰려 있는 사람들이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본문의 말미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했다는 말을 보면 적어도 그 무리는 삼천을 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하지 않는데 그는 그보다 훨씬 더 큰 것들을 이미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담대하게 말했는데 신기하게도 베드로의 말이 먹혀 들어 갑니다. 이게 성령받은 표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한마디를 해도 사람들이 그 앞에서 순종하게 됩니다. 사람의 심령에 충격을 주며 그들로 하여금 새사람이 되게하고 통회자복하게 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의 말이 그냥 땅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기만 울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심령골수를 찔러 쪼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을 들은 이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여러분, 이들은 솔직히 베드로와 사도들의 형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못박고 나사렛당의 잔여무리를 잡아서 핍박하려는 대적입니다. 그런 이들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도들을 향하여 ‘형제들아’ 라고 다정하게 부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어 버립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하시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얼마나 쉽겠습니까?

자, 여기에 대해서 베드로가 말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베드로가 군중들에게 요구한 것은
첫째로 회개하라
회개는 원문으로는 ‘바꾸어 생각하다’ 또는 ‘마음을 바꾸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요,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집과 불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마음을 바꾸고 새롭게 되는 것을 일반적으로 바라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새사람이 되기위해서 해야 할 제일 첫 번째가 바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은 우리에게, 오늘의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한국 교회는 회개에의 촉구는 없고 오직 축복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회개 없는 축복은 거짓입니다. 죄가 없어서 정말 회개할 것이 없어요? 그렇게 말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죄를 먼저 회개하고 나서야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더러운 몸에 임하실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거하시지 않는데 무슨 축복입니까?
예? 성령하고 상관없이 축복을 받는 것이 가능하지 않느냐고요? 결코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복을 받은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그것은 더 큰 나락으로 떨어지는 첩경이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신학적 용어로 하나님에 의해서 유기된 표시 일 수 있습니다. 저주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로 회개를 위한 유예기간을 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두 번째로 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말이 세례에 대한 요구지 이것은 세례가 상징하는 것을 하라는 말입니다. 즉 세례는 죄사함의 상징적인 표시입니다. 물로 우리의 몸을 씻듯이 죄를 씻는다는 상징적인 행동입니다. 그리고 세례는 죄를 씻음으로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에 들어갈 자격이 생겼음을 말합니다. 즉 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표시입니다.

 

그리고 이 군중들에게는 상당히 뼈아픈 말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 다른 이의 이름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의 이름이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의 이름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예수 그리스도는 이들의 손에 의해서 오십일 전에 ‘하나님의 저주 받을자’로 여겨져 나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빌라도가, 로마인 빌라도가 예수를 풀어 주려고 할 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광적으로 외친 이들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너희가 못 박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것을 요구한 것은 그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는 것이고 그 사람들에게 전면적인 항복을 요구하는 것이고 그 사람들의 인격과 체면을 깡그리 짓밟는 행위입니다. 그러함에도 그들은 그 요구를 그대로 행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세 번째는 죄사함을 얻는 것입니다. 사실 죄사함을 받는 것을 세 번째로 적기는 했지만 앞의 첫 번째와 두 번째를 제대로 시행한다면 죄사함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즉 제대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면 죄사함의 효과가 당연히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게 조건이냐면 죄가 없어야만 뒤이어 나오는 성령을 선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있는 몸에는 거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죄가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자, 이 세가지를 하고 나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것은 이 세가지가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란 말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하면...
그런데 원문으로는 이 말이 조건을 나타내는 ‘그러면’이 아니라 ‘그리고’로 해석됩니다.

 

그러니까 앞의 세가지,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고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사실 이렇게 말하면 우리나라 어법상으로는 매우 어색한 문장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성경에는 ‘그러면’이라고 적은 겁니다.

 

실제로는 회개하고 세례는 받았지만 성령을 받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사도행전8장에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세례는 받았지만 베드로가 안수할 때까지 성령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게다가 고넬료의 가족들은 세례를 받기 전에 베드로의 설교를 들으면서 이미 성령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는 것은 성령을 선물로 받기위한 조건이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이 되기위한 조건입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까? 당연하지요. 성령이 거하시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단지 교인입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헌금도 하고 직분도 갖고 있는 교회의 회원이지 그리스도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사실 이 성령을 받아야만 비로소 우리 성도는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습니다. 세상과 싸워서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이 감히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이 패역한 세대는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대처럼 참람하고 타락된 그런 세대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가 말한 패역한 세대는 예수를 반역자로 몰아 죽인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무리를 말합니다. 그러한 무리들로부터 빠져 나와서 구원을 얻으라는 말입니다.

 

‘패역한’ 이란 말을 원문으로 살펴보면 ‘도덕적으로 타락한’ 이란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원래 ‘목수가 도저히 사용할 수가 없을 만큼 비뚤어지고 모가 나 집어던져 버려야 할 정도로 쓸모없는 나무’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말에는 저들 예수를 반대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매다는 일에 앞장선 이들은 도저히 재활용이 안되는 그래서 아궁이의 땔감으로밖에 사용할 수 없는 구제불능의 쓰레기라는 뜻입니다.

 

그런 이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므로 도저히 어떻게라도 구제받을 수 없으므로 너희들은 그들과 함께 멸망하지 말고 그 무리에서 뛰쳐나와서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그날 세례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이 무려 삼천이나 되었답니다.

 

우리는 교회가 부흥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 부흥이 가장 쉽게 되려고 하면 우리가 먼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으려고 하면 먼저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죄사함을 받으려고 한다면 당연히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한번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끝난게 아니라 항상 바르게 살아야하며 죄를 지었다면 당연히 회개해야 합니다. 우스개 소리로 예전에는 일단 세례를 받고 난 다음에는 죄를 지으면 사함을 못받는다고 생각해서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는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았답니다.

 

부흥을 원한다고 해서 아무나 와도 좋다고 하면서 이사람 저 사람을 초대합니다. 당연히 아무나 와도 좋습니다. 그런데 아무나 와도 좋지만 그 사람들이 해야 될 것이 자기들의 죄에 대한 회개입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어떤 일을 해도 하나님은 괜찮다고 하시고 용서해 주시고 복을 내려 주신다는 생각은 교회를 타락시키는 가장 큰 원흉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직접적으로 요청합니다. 죄사함을 받으라고 요구합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읽을 때에는 베드로의 설교로 한번에 삼천이나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만을 주목합니다. 그러나 먼저 베드로는 성령의 충만을 받았고 뒤이어 베드로는 예수를 못박은 군중들 앞에서 너희의 죄를 회개하라고 그리고 너희가 죽인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당당히 요구하는 대목은 까맣게 잊어 버립니다.

 

베드로가 한 것은 아무나 와도 좋소, 죄있는 채로 와도 좋소, 우리 주님은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시는 분이기에 우리끼리 그냥 행복하게 살자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날개 아래 들어오면 만사가 잘되고 형통한다고 꼬신게 아닙니다. 베드로는 제일 먼저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너희가 잘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단지 오십일 전의 폭도들만은 아닙니다. 이들은 여전히 나사렛당의 여당을 찾으려고 그래서 그들을 죽이려고 눈이 벌개서 설치는 자들과 한패거리입니다. 이들은 종교적인 열심이 지나쳐서 오히려 더 위험한 자들입니다. 예수의 존재가 유대인의 멸망을 초래한다고 생각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청한 이들입니다. 베드로도 사도들도 제자들도 이들이 오십일 전에 보여주었던 집단 광기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수천명의 사람들이 방언 말함을 듣고 몰려와서 떠듭니다.

 

그런데도 성령충만을 입은 베드로와 사도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회개를 요구합니다. 그게 성령받는 표시이며 그게 교회가 부흥하게 된 원동력입니다. 패역한 세대로부터 빠져나와서 거룩한 교회에 들어가기 위해서 거룩해 져야 겠지요. 그래서 죄사함을 받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무분별하게 축복만을 강조하고 죄에 대한 지적과 회개에의 촉구가 없다면 그 교회는 더 이상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죄사함을 받지 않고 수만 수십만을 모은다고 해서 결코 그게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항상 말씀드리지만 성령이 내주하시지 않는 교회는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름만 교회라고 했지 교회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느끼지 못하는 사교클럽이 될 뿐입니다.

 

오순절날 성령께서 임하셔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 교회는 죄인이었지만 더 이상 죄인이 아닌 성도들의 모임이어야 합니다. 과거에 죄인이었고 여전히 죄인인 자들이 모이는 곳은 아닙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면 많이 혼탁해 졌습니다. 한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목적이 되었기 때문에 교회의 순결을 회복하는 것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습니다. 순결하지 않는 교회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신부가 아니며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보내신 성령과도 상관이 없어집니다.

 

성령 받지 못한 교회, 말이 이상합니까? 더 이상 성령이 내재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의 영성이 땅에 떨어진 곳이고 그래서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에도 대응하지 못합니다. 왜냐고요? 영적인 실력은 커니와 도덕적인 정당성마저 없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 큰 짐을 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큰 짐을 즐겁고 기쁘게 그리고 가볍게 질 수 있는 무기를 또한 주셨습니다. 바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성령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을 마음대로 받고 사용하고 한다는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내주하는 몸이 되려면 죄가 없이 깨끗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정말 어떤 죄도 저지르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해 보면 우리가 왜 회개해야 하는지 왜 우리가 죄사함을 받아야 하는지는 명확합니다.

생각해 보면 이 답답하고 복잡하며 냉혹한 세상에서 성령의 충만을 입지 않고는 제대로 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혹시 쿵푸팬더를 보셨나요?
저는 쿵푸팬더를 볼 때 팬더곰은 싫고 갇혀 있었던 그리고 감옥에서 풀려난 그 용맹하고 무시무시한 호랑이가 수컷호랑이가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건 순전히 제 생각인데 전 그 호랑이가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암컷 호랑이는 아마 북한이지 않을까? 중국의 우방인. 작품 속에서도 암 호랑이는 팬더곰을 도와서 수컷 호랑이를 대적합니다.

 

자, 제가 영화이야기를 하려고 이 얘기를 꺼낸게 아닙니다. 제가 주목한 것은 호랑이니 곰이니 코뿔소니 하는 짐승이 아니라 일반 민초로 표현된 토끼와 거위들을 보면서 마치 힘없는 우리들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아무런 방어력도 갖지 못하고 겨우 모여서 떠드는 정도만 할 수 있는 , 맹수들의 싸움이 벌어지면 삽시간에 숨어서 벌벌 떨 수 밖에 없는 그런 초식동물, 그게 우리 서민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그 힘없고, 두려움에 벌벌 떠는 우리가 성령을 받게 된다면 세상이 감히 감당할 수 없는 강자가 되고 세상의 법칙을 벗어난 초인이 됩니다.
어때요?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꿈을 꿈으로 세상의 되어질 일에 대해서 예지해 본적이 있습니까?
손을 얹어 기도함으로 병마를 물리쳐 본 적이 있습니까?
돈이 없어 기도함으로 돈이 생겨본 적이 있습니까?
인간과의 관계 때문에 고민하며 기도했는데 인간관계가 풀리고 상대방이 나의 원하는바를 흔쾌히 들어준 일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기도함으로 미래를 맞추어 본 적이 있습니까?
세상은 간곳 없고 주와 나만이 합일하여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때로 세상이 너무 맑고 깨끗해 보이고 너무 빛이나고 아름다워서 정신을 놓고 우더커니 서서 세상을 바라본 일이 있습니까?

 

주님을 생각만해도 가슴이 아련해 지고 눈물이 나면서 마음이 뜨거워지고 충족된 느낌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위기의 순간에 기도함으로 그 위기가 물러가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까?
성령님의 능력은 그렇게나 굉장한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이 세상 법칙의 지배를 받고 먹지 않으면 배고프고 아프면 약과 병원이 필요하며 추우면 입어야 되고 더우면 시원한 것이 필요하고 또 먹으면 여지없이 배설해야 하는 정말로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맨눈으로는 제대로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가시가 박혀도 아파서 쩔쩔매는 연약한 존재이며 분명히 피부라는 가죽을 가지고 있음에도 짐승들의 가죽처럼 질기지도 않고 튼튼하지도 않고 모든 자극과 충격에 연약한 그래서 몇 번 과하게 비벼대면 찢어지는 깃털처럼 가벼운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흙덩이로 만들어진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이 들어오시자 살아 움직이는 생령이 되었고 거대한 마천루에서 심해를 탐험하는 잠수함까지 우주를 넘어서는 우주선에 복제양 돌리까지 이르는 기적을 연출하는 인간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합체시킨 흙과 영혼이 분리된다는 것이고 그 영혼이 빠져나가면 우리의 몸은 썩어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이 연약한 몸에 별 볼일 없는 존재가 성령의 힘을 덧입게 되는 순간 천하무적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악한 것들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자연법칙이 구속할 수 없는 초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임재를 기념하는 날이 오순절입니다. 이제 성령강림절이라고 해야 합니까? 옛날로부터 지키는 맥추절인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일을 경험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지금 보이지 않는 성령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 가운데 있습니다. 나를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키시는 하나님은 내가 그분의 눈에 항상 성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만 내가 그분을 모시고 함께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습니까? 간단합니다. 성령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불가능한 일을 하고 싶습니까? 간단합니다. 성령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연약한 질병에서 놓임을 받고 싶습니까? 간단합니다. 성령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뭡니까? 성령이 만능입니까? 당연하지요. 감히 단언컨대 성령은 만능입니다.
그 위대하신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러기위해 성령의 전될 우리 몸의 죄악을 회개하고 사함을 입어 깨끗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오, 성령님 우리에게 지금 임하셔서 아버지의 놀라우신 능력을 나타내소서. 기도합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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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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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베드로의 대담함이 인상적인 설교 말씀이었습니다. 성령을 받음으로서, 새 사람이 된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성결하게 살고, 노력하면서 살 때, 주님께서도 일하시며, 지키시며, 도우실 것입니다. 우리가 더 가지려는 인간적인 욕심 대신에, 더욱 이웃을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을 소중히 간직할 수 있기를.

 

 작은 부분부터 세상과 타협하기 보다는, 오히려 성령을 힘입어서 작은 부분부터 경계할 줄 아는 마음이 있기를. 그렇게 하나님의 고결한 성도로서 살아간다면 참 근사하겠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기도해야 하며, 마음을 바꾸어야 하며, 성령님의 임재를 구해야 하겠지요. 그렇게 작은 믿음, 하나님의 흔적으로 살아가면서, 주님의 일하심을 경험하고, 그 믿음이 커갈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소리 내어, 화이팅! / 시북 2016. 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