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마지막 향유옥합 그리고 유다(마태26:6-)/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8. 23. 03:50

 

마지막 향유옥합 그리고 유다 (마태26:6-)


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기사가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기사를 보면서 무엇을 제일 먼저 떠올립니까?

그 향유가 삼백데나리온 짜린데 그렇게 비싼걸 겨우 주님의 머리에 한번 붓고 말다니 낭비가 너무 심하다?

마리아가 도데체 주님으로부터 무슨 사랑을 받았길레 그렇게 비싼걸 쏟아 부었을까?

가룟 유다의 ‘그걸 팔아서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주었으면 좋았겠다’는 말이 틀린건 없는 것 같은데?


예수님의 생애에 총 세 번의 향유가 등장합니다. 첫 번째 향유는 예수님이 처음 탄생하셨을 때 동방박사들이 가지고 옵니다. 향유라고 하지 않고 유향이라고 했지만 똑 같은 말이지요. ‘향유’를 거꾸로 하면 ‘유향’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실 때에 나옵니다. 제가 이미 한번 설교를 했습니다. “옥합이 깨어질 때”라고. 그리고 오늘 우리 주님의 공생애 마지막을 위한 세 번째이자 마지막 향유가 등장합니다.


이 향유는 어디에서 등장하느냐 하면 베다니에 있는 나환자 시몬의 집에 예수께서 계실 때에 등장합니다. 이 사람의 별명이 나환자이기는 하지만 이 사람은 예수님을 초대했을 당시에는 나병이 나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워낙 오랫동안 나환자 시몬이라고 불렸기 때문에 본문에도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는 도대체 나병이 어떻게 낫게 되었을까요? 혹시 주님이?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럼 왜 그런 일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지요? 혹시 이름 없는, 주님으로부터 치유함을 받은 많은 나환자들 중에 시몬이 있었을까요?

 

여하튼 그는 예수님과 함께 식사할 당시에는 이미 나병이 나은 상태였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동네에 머무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때는 고난주간 전 토요일입니다. 주께서 승리의 행진을 시작하시기 전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누군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2:1에서 예수님이 머문 곳을 ‘나사로의 있는 곳’으로 말하고 있어서 나사로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시몬을 나사로의 아버지, 마르다 혹은 마리아의 남편 또는 나사로의 친구 등으로 추측하지만 증거는 없습니다. 명확한 명문상의 기록은 없는데 아마 마리아가 나드 향유를 주께 부은 이유와도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시몬이 나환자였었다는 사실과 마리아가 식사 도중에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는 사실과 그러니까 마리아가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시는 예수님께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는 사실, 보통은 집주인이 손님을 청해서는 그에게 기름을 붓는 관례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마리아가 주님의 은혜에 너무 감사해서 그 비싼 나드 향유를 부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집이 시몬의 집이기도 하지만 다른 기사에서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고 묘사된 사실을 종합하면 뭔가 마리아가 주님에게 감사하는 이유가 나올 것 같습니다.

 

제 머릿속으로는 그려지지만 성경본문에 명문으로 나와 있지 않은 말이기에 과도한 상상을 설교로 하기는 곤란해서 삼가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 사건의 시간에 대해서 약간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앞 장에서는 예수께서 이미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고난주간의 화요일날 되어진 일들이 나왔는데 갑자기 다시 시간이 돌아가서 승리의 행진 이전인 마지막 안식일 전인 토요일날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항상 사건을 시간 순으로 배열하지 않고 주제별로 배치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이것도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시몬의 집에서 예수께서 식사를 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식사 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었답니다. 유대인들의 식사는 거의 누워서 하는 겁니다. 배개를 한쪽 허리에 받치고 눕다시피 기대어서 하는 식사니까 당연히 머리에 기름을 붓기도 쉬웠을 것입니다. 마태는 ‘한 여자’라고 했지만 우리도 잘 아는 이 여자는 마리아입니다. 마르다의 동생.

 

이 향유는 마가복음에는 나드 향유라고 했고 나드 향유는 인도의 히말라야 지역에서 나는 나무의 뿌리에서 얻는 매우 귀한 향유입니다. 이 향유는 휘발성이 강하기 때문에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부드러운 대리석의 주둥이가 매우 긴 병에다 넣어서 봉인을 해두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옥합이라고 묘사했습니다. 그래서 이 향유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옥합의 주둥이를 깨어서 사용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당연하게도 주둥이를 깬 옥합에 든 향유는 한번에 사용하지 않고 남겨 두고 다음에 또 사용할 수 없습니다. 향기가 날아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옥합 역시 다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향유는 가난한 사람에게는 엄청나게 사치한 물건입니다.

 

이 향유 한 옥합의 가치는 무려 삼백 데나리온이라고 합니다. 노동자 일년치 품삯입니다. 엄청난 돈입니다. 그걸 이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아마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기 때문에 머리에 부은 향유가 발까지 타고 내려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몸에 부은 것과 같은 효과를 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성경은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마리아에게 ‘허비’했다고 분노하여 꾸짖은 것 같습니다. 허비는 쓸데 없이 낭비한 것을 말합니다. 가만 보면 주님의 제자들은 참 독특한 캐릭터입니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쓸데없이 허비를 했다고 말하는 그 배짱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제 생각인데 제자들은 아마 사회생활에 애로가 많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아부와 아첨, 그리고 뒤통수라는 사회생활의 기본이 안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정면에서 주님을 무안 주는 일인데도 전혀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병행기사인 요한복음12:4에 의하면 제자들 전부가 아니라 제자들 중에서 몇 명이 그런 행위를 했지만 가룟 유다가 주동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몇몇이 여기에 동조했을 것입니다.

 

보통 귀인들이 잔치자리에 참여하면 이러한 귀한 향유를 머리에 부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향유를 스승의 머리에 부었다고 화를 내고 허비했다고 말하는 제자들을 보면 아마 이들은 주님을 별로 존귀하다고 여기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런 식으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제가 누구 교인집에 심방을 갔다 칩시다. 그런데 그분이 정말 귀한 도자기 잔에 귀한 녹차를 우려서 가지고 옵니다. 아니면 산삼물이나 영지물같은걸 가지고 왔다고 칩시다. 이거 가정입니다. 실제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마셨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다른 부교역자가 “이런건 놔뒀다가 귀한 분이 오면 대접하시지, 우리 목사님은 이런거 맛볼 줄도 몰라요” 라던지 아니면 “우리 목사님은 안그래도 몸이 튼튼한데 뭐할려고 이런 걸 내옵니까? 정말 꼭 쓸데 쓰시지” 아니면 “이게 돈이 얼마짜린데 차라리 이걸 팔아서 교회 헌금을 하시지”이랬다면 듣는 제가 기분이 좋을까요?

 

이건 전부 가정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듣는 당사자는 기분이 나쁠 것 같습니다. 주님으로서는 황당합니다. 마리아는 정말 지극정성으로 주님을 섬긴다고 그 귀한 나드 향유 옥합을 깨어서 기름을 부었는데 제자들이 마구 비난합니다. 예수님도 마리아를 야단쳐야 될 분위기입니다. “그래, 마리아야 어쩌자고 이 비싼걸 나에게 부었느냐 그걸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구제했다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혜택을 보았겠니”이래야 될 분위기입니다. 명분도 그럴듯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한다는 명분을 내세웁니다.


9절에 보면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원문에 더 충실하게 번역하면 ‘그것이 팔려지고 주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 향유를 누군가에게 맡겼다면 그가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역시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제자단의 돈궤를 맡은 회계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에게 왜 안 맡겼냐는 말입니다.


그는 내심을 감추고 있지만 자기에게 그 향유 옥합을 왜 맡기지 않고 예수의 머리에 부어서 아깝게 허비했느냐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맡겼으면 삼백 데나리온에 그걸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한다는 말이지만 실제로 그는 헌금궤에서 돈을 훔치는 도적입니다. 공금에 손을 대는데 아무래도 돈이 딸랑딸랑하는 것 보다는 예산이 풍족한게 헌금이나 공금을 횡령해도 들통 날 위험이 적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소리를 한 겁니다.

 

남들이 들으면 대단히 정의롭고 멋진 말 같은데 사실은 자기의 스승을 하찮게 여기고 자기만 의로운 척을 하면서 공금을 착복하려고 하는 말입니다. 이제 그 착복 시도가 틀려지자 화를 낸 겁니다.


10절에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좋은 일하고서도 욕을 듣는 마리아를 위해서 주님은 두둔하십니다. 예수님은 여자가 자기에게 좋은 일을 했다고 하시면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뭡니까?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솔직히 예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마리아가 나드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은 것은 죽음을 앞두고 있는,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있는 주님에게 베풀어진 가장 감동적인 대접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왕이 되지 않을 것을 안 다음부터는 아예 그에게 식사도 대접하지 않고 그를 집으로 초청하지도 않아서 노숙을 하게 했습니다. 말로는 ‘낮에는 예루살렘성전에서 가르치고 밤에는 감람산에서 기도했다’고 나와 있지만 실제로 주님은 초대받은 곳이 없어서 굶주리면서 노숙한 것입니다.

 

무화과 나무의 비유에서도 나오지만 노숙하고 새벽에 배가 고파서 무화과 열매를 찾은 주님과 제자들의 정황이 나오지요. 물론 아직은 닥쳐오지 않은 몇일 후의 일이기는 하지만 주님은 그런 사정을 다 알고 계시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마리아의 도에 넘치는 은혜갚음이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제자들 중에 몇몇이 가난한 자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향유를 부은 행위를 비난하자 주님은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않다고 하시지요. 주님은 자기가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을 몇차례나 말씀하셨지만 제자들 중에서 이를 제대로 명심하고 주님의 마음과 행동을 헤아린 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선생님이 자기들과 함께 오래 오래 있을 줄 알고 있습니다.

 

주님은 왕이 되고 자기들을 출세시켜줄, 부자로 만들어줄 화수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능력이 너무 많아서 전혀 불쌍하지 않은 주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제 정확하게 일주일도 있지 못해서 십자가를 지시게 됩니다. 6일 남았네요. 주님도 십자가를 지시는게 너무 두렵고 떨려서 ‘아버지여 하실 수만 있다면 그 잔을 내게서 옮기 시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았나요.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이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는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전혀 죽음과는 관계없는 분이 뜬금없이 장사를 말하니까 웃깁니다. 어쩌면 이 말이 가룟 유다에게 암시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자, 우리가 우선순위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해 봅시다. 우리 주님은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지만 이 말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나의 형제요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가 나의 형제요 자매입니까?

 

그는 나와 같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지음 받았고 그의 몸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형제요 자매인 것입니다. 우리가 한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면 당연히 아버지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그 형상도 닮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지어진바 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의 몸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 것이지 여기에서 하나님이 빠진다면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세상은 기독교회를 단지 사랑을 실천할 때만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저들은 우리의 하나님을 전혀 존중하지도 않고 교회를 존경하지도 않고 목사와 신도를 배려하지 않으면서 단지 구제나 기부를 할 때만 칭찬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것도 교회가 해야 할 당연한 일로 치부하고 그냥 입을 쓱 닦고 있다가 반대로 교회가 인색하게 나온다 싶으면 욕은 열심히 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제가 설교에서 항상 열심히 이웃사랑을 강조했다고 해서 우리 교회가 사회사업기관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제일가는 목적도 아닙니다. 우리는 저들이 말하는 종교기관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여기에서 안식하고 새롭게 충전하고 서로 뭉쳐 힘을 얻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을 만나는 천국의 모형된 해방구입니다. 사탄의 세력에서 해방된 곳에서 우리는 천국을 꿈꿉니다. 사탄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이 다스리는 지역,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니 구제니 하는 것은 교회가 해야 되는 많은 일들 중에 하나에 불과한 것이지 그것이 전부가 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그런데 잘못된 욕심으로 가난한 자를 팔아서 치부를 하려고 하는 것은

가난한 자를 핑계로 예수의 사역을 방해하려는 것은

가난한 자와 예수의 장사를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가난한 자는 주님의 말씀처럼 항상 인류사에 있어 왔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고난을 6일 앞둔 주님의 장사준비와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는 우선순위와 중요도에 있어 결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당연히 주님이 우선이 되어야 하고 믿음이 우선이 되어야 하며 주님의 일이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구제를 하되 믿는 형제에게 먼저 하라고 합니다. 믿음의 형제 중에서는 가족이나 친척을 먼저 도우라고 합니다.

 

당연한 것이지요. 자기의 형제와 자매를 두고 남에게 먼저 하는 것은 실로 위선입니다. 자기의 이름을 널리 내려고 하는 위선입니다. 결코 순수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랑도 자선도 그리스도의 자비도 아닙니다. 부모형제를 먼저 사랑하지 못하고 남을 사랑한다고 어느 재단에 기부금을 냈다고 사진을 찍고 이름을 내는 이는 정치꾼이거나 사기꾼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께서 자기의 횡령에 대한 것을 모를 줄 알고 가장 공의로운 척, 가난한 자의 편인 척 ‘향유 옥합을 자기에게 팔도록 맡겼다면 그걸 비싸게 팔아서 많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을텐데’라고 하며 가증한 연기를 펼치고 있습니다. 주께서 그의 속을 보시고 여인을 위로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아마 가룟 유다는 자기의 장사를 위해서 향유를 부었다는 말을 듣고는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왕이 되려고 가시는 분이 무슨 장사입니까? 죽음하고 지금의 주님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정말 알 수 없는 말씀만을 하십니다.


그런데 사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니고데모가 예수의 시체를 수습해서 향품을 넣고 세마포로 쌌다는 기록이 요한복음 19:40에 나옵니다. 신기하게도 여기에는 향유를 발랐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아마 장사를 지낼 때 시체에다 기름도 바르는 모양입니다. 니고데모가 가난한 자도 아니고 왜 향유를 바르지 않았지요? 신기하게도 주님의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 진 겁니다. 기름은 6일전에 마리아가 발랐습니다.


주님은 이어서 말합니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이런 식으로 이 여자에게 칭찬을 과도하게 하게 되자 가룟 유다는 공중 앞에서 크게 창피를 당한 겁니다. 이때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제자인 자기보다 외인인 마리아를 더 사랑하는 듯이 보였기에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를 참으로 나쁜 사람으로 여기지만 그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해서 받았던 돈 몇푼 되지도 않습니다. 겨우 은 삼십개를 대제사장에게 도로 돌려주고 자기는 자살을 합니다. 그런 것 보면 그가 뼈속까지 철저하게 나쁜 인간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가룟 유다가 받은 은의 단위는 세겔입니다. 한 세겔이 두 데나리온이므로 가룟 유다가 스승을 팔고 받은 돈은 육십 데나리온입니다. 나드 향유 한 옥합의 1/5에 불과합니다. 그는 이 적은 돈 때문에 스승을 배신하고 그를 죽음에 넘겨 줍니다. 만일 향유를 붓지 않고 그에게 팔아서 적당히 횡령하게 하고 구제도 조금 하게 했다면 스승을 팔지 않았을 까요?


어쩌면 가룟 유다는 스승에게 실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평소에는 그렇게나 가난한 이를 입에 걸고 다니더니만 정작 자기에게 쓰는 향유는 그렇게나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잘했다고 말하는 위선자로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제자단의 공금을 관리하는 회계입니다. 아무에게나 돈을 맡길리는 없으므로 가룟 유다는 제자들 중에는 그래도 제법 똑똑하고 믿음직하며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선교단체의 재무책임자, cfo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를 위해서 그런 제자를 중인 환시리에 무안을 주었으므로 분했을 수 있습니다. 한갓 여자 때문에 외부인들 앞에서 제자를 창피주다니! 이렇게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여하튼 가룟 유다는 예수를 대제사장에게 넘겨 주어도 그는 죄가 없으므로 채찍만 몇 대 맞고 풀려나리라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사형권은 로마총독만 가지고 있으므로 가룟 유다의 생각은 상당히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그는 복잡한 정치꾼들의 정치역학은 알지 못했고 결국 선생의 죽음에 양심이 찔려서 자살한 것입니다. 지금도 가룟 유다의 오명은 대대로 복음이 전해진 모든 곳마다 퍼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마리아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질 것이라고 했는데 정말 마리아의 이야기에 약방의 감초처럼 가룟 유다의 이름이 등장하고 그리고 그의 검은 속셈이 비웃음을 당하고 조롱거리가 되며 천추에 악명을 널리 알리게 되었습니다.

 

만일 가룟 유다가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그가 끝까지 충성하고 주님을 위해 다른 제자들처럼 순교했다면 아마 가룟 유다의 이 말이 상당히 멋진 말로 남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쩌면 그 선생에 그 제자라고 유다를 칭송했을지도 모릅니다.


가룟 유다는 보면 머리도 잘 돌아가고 수단도 좋고 스승도 출세와 치부를 위해서는 팔아 넘길 만큼 마음도 독하고 전형적인 출세지향의 인물입니다. 그러나 헛똑똑입니다. 그가 예수를 팔아 넘긴 돈은 겨우 은 삼십세겔입니다. 육십 데나리온. 노예의 가격이지요.

 

아니 이왕 선생을 팔려면 액수가 그게 뭡니까? 나드 향유 한 옥합만큼도 안됩니다. 그래도 나중에 양심의 가책 때문에 목숨을 끊을 만큼 심하게 악에 물든 이도 아닙니다. 얼마든지 개전의 정이 있었던 자입니다. 물론 그는 자살함으로 어떤 개전의 정도 보여 주지 못하고 자손만대 오명의 주인공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자들 중에서 교회를 출세를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고 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간증이라는 명목으로 교회에 온 정치꾼들을 본 것 만해도 다섯명입니다. 그 중에서 대통령이 된 사람이 둘이고 국회의원이 둘이고 한명은 국회의원선거에서 떨어졌네요.

 

목사 입장에서야 오는 사람을 못오게 막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결코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그런 이들의 간증이 사람들에게 은혜롭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신 바 된 주의 교회를 자기의 출세를 위해서 이용하려고 하는 것은 참. 여하튼 하나님을 이용해서 출세한 분들에게 당부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멋진 정치를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만일 마리아의 집이 큰 부자가 아니라면 나드 향유 옥합은 그 집에 엄청 큰 부담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향유를 부었다는 것은 마리아가 주님에게 드리는 특별한 정성입니다. 아마 받은 은혜에 감격해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리아의 기름부음을 비난했지만 주님은 홀로 이를 칭찬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 처녀들은 신혼첫날밤 신랑을 위해서 나드 향유 옥합을 가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살림에 그건 일생에 한번 사용하는 사치인 것입니다.


어쩌면 제자들의 말처럼 참으로 허망합니다. 한번 냄새를 풍기는데 일년치 품삯을 날려버린다면 이성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저 조차도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사람이 항상 계산적으로 이성적으로만 살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만 산다면 삶이 너무 무미건조해 집니다. 세상이 삭막해 집니다. 사람은 때로 감성적인 면이 있어야 되고 그것에 휘둘려서 행동할 때도 있어야 합니다. 그건 아마 삶의 조미료처럼 삶을 더 풍부하고 깊이 있게 만들지 않을까요?


마리아의 기름부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의 장사를 준비하는 행위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마 마리아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시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때 자기에게 모진 소리를 한 가룟 유다가 오히려 주님을 팔았기에 그의 비난에 더 이상 속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말이야 맞지 제자들의 말처럼 은 삼백 데나리온이라면 가난한 예수의 제자들에게는 큰돈입니다. 집한채 가지지 못한 주님의 형편에 은 삼백 데나리온이라면 정말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집을 사도 되고 사람들에게 나누어도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 향유를 부은 여인을 책망하지 않고 잘했다고 복음이 퍼지는 곳곳마다 너의 이야기가 퍼질 것이라고 칭찬합니다. 이게 오히려 물질에 초연한 것입니다. 물질보다 마음? 재물보다 사람?

마리아는 주님의 무덤에 찾아간 여인중에 한명입니다. 영원히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주를 따랐습니다.


참된 신자의 참된 예물은 하나님을 감동시킵니다.

특별히 가난한 사람을 핑계하고 치부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몇몇 재단이나 기금같은 곳을 보면 구제나 사회봉사에는 돈을 쥐꼬리만큼만 쓰고 오히려 자기네의 건물 유지, 월급, 판공비와 단체의 유지를 위해서 대부분을 사용하는 곳이 많습니다.

 

작년에 아이티에 지진피해가 났을 때 우리는 한푼 두푼 성금을 내면서 지진으로 고통받는 그들에게 다 가겠거니 했지만 실제로 아이티 지진피해 복구를 위해 국민들이 모금한 97억원 중에서 대한적십자사는 겨우 아이티 지진피해성금으로 6억7천만원만 전달하고 나머지 돈 중에서 66억짜리 정기예금을 들었답니다.

 

그리고 그 6억 7천만원을 전달하려고 했는지 백여명이 가면서 항공비 체제비 기타 등등으로 5억을 썼답니다. 황당하지요? 심지어 그들은 아이티의 옆나라인 도미니카 공화국의 특급호텔에서 룸서비스를 이용하기도 했답니다. 성금으로. 굉장하지요? 가룟 유다같은 행동이 아닐까요? 그래도 다 떼먹지 않고 6억7천만원이라도 전달한게 기특하다고 해야 합니까?

 

그런데요 우리나라의 사회사업단체들 가운데 이런 곳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기독교단체들 가운데에 이런 곳이 더 많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교회에서 어떤 성도가 개인적으로 어떤 선교사에게 삼천만원을 전달해달라고 교회에 헌금을 했습니다. 목적성으로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 어떻게 했는고하니 그 선교사에게는 정작 오백만원밖에 전달하지 않고 다른 곳에 쓰겠다고 그 돈을 남겨두었답니다. 그런데 그 성도가 그 선교사에게 전화를 해서 돈이 잘 전달되었는지를 물어보았답니다. 그 선교사는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자기는 겨우 오백만원만 받았는데 상대방은 자기에게 전해 달라고 삼천만원을 헌금했다니...


교회건축에서 10%의 리베이트를 받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심하면 15%까지 올라간답니다. 그러면 그 교회당이 제대로 건축될까요? 리베이트를 믿고 더 부실공사를 하게 되고 자재를 빼돌려 더 많은 이익을 남기려 들게 뻔합니다. 교회에서 발주하는 소소한 공사를 수의계약하면서 뒷돈을 받는 행위는 하나님의 헌금을 횡령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은 하도 이런 사람들이 많아서 참 이런말 하기가 다른 곳에서는 꺼려지는데 하나님을 팔아서 돈벌이하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예수의 이름을 치부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일단 그렇게 했다면 예수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을 팔았거나 그 덕을 보았다면 예수의 이름이 욕되지 않게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지지 않게 최선을 다해서 양심적으로 사업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너무 계산적으로 살지 마십시오. 그런 분들은 너무 계산이 밝아서 돈에 대한 욕심도 많아 집니다.

나랏돈은 먼저 본 사람이 임자고 교회돈도 세사람만 들면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답니다. 한명이 안건을 내고 또 한사람이 동의를 하고 다른 한 사람이 재청을 하면, 이렇게 묻지요? “여기에 대해서 이의 있습니까? 반대하시는 분 있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들, 안건을 내고 동의하고 재청한 사람들의 안면을 봐서 차마 반대한다는 말을 못하니까 그게 통과가 되고 그러면 교회돈을 사용하는 겁니다. 너무 쉽지요?


예수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신앙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성도.

그런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내가 결코 그럴 리가 없어’하지만 나중 일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의 이 마음이 영원히 변치말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마리아와 유다를 보면서 무엇이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길인지 무엇이 참 성도의 길인지를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졌던 깨끗하고 순수한 열정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결코 변치 않기를 바랍니다. 당연히 구제도 중요합니다. 사랑은 우리 주님의 새계명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

일생을 통하여 그렇게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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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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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구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삶의 최우선순위로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구제로 생색내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이번 주 설교를 하시면서 매우 놀라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름 없는 곳으로부터 헌금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남모르게 돕는 손길들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렇게 우리의 작은 개척교회가 힘을 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기쁘고 그랬습니다.

 

돈이라는 것, 물질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없을 때는, 이것 때문에 심한 다툼이 나기도 하고, 또한 종종 욕심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서 물질에 대해서 조금은 더 둔감해 지고, 남는 돈으로 온전히 이웃을 도와가면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겨주시고, 달란트 맡은 충실한 청지기로서, 잘했노라 이야기 해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말씀처럼, 깨끗하고 순수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기를! / 2016. 08.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