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열 므나 비유(누가19:11-27)/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8. 23. 04:54

 

열 므나 비유 (누가19:11-27)

 

신약성경에 보면 특히 예수님의 비유에서 화폐의 단위가 나옵니다. 오늘은 므나가 나왔는데 마태는 달란트비유를 들었습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화폐단위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달란트가 가장 가치가 큽니다. 금 한 달란트니 은 한 달란트니 하는 식으로 표기합니다. 여기 열 므나 비유가 있는데 므나는 어느 정도의 가치일까요?

 

일 므나는 보통 일백 데나리온 또는 일백 드라크마의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데나리온은 우리가 잘 압니다. 노동자 하루 품삯의 은화입니다. 포도원 품꾼들이 하루 일하고 받는 품삯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일 므나는 노동자 백일 품삯이 되겠네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비유가 확 들어오지요?

 

예수께서 여리고에 들어가셨다가 삭개오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지금 삭개오의 집에 가셔서 식사 대접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예전에는 제가 삭개오가 뽕나무위에 올라가서 주님을 만나보고 주님을 집으로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그리고 자기가 토색한 것이 있으면 유대의 관습법에 따라 네배로 갚겠다는 이야기가 마냥 순수하고 아름답게 여겨졌는데 이게 제가 성경의 전후 맥락을 알고 나니까 삭개오의 동기에 대해서도 약간 의구심이 드는게 이 말 때문입니다.

 

11절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우리가 잘 알다시피 여리고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초입입니다. 여리고를 지나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산길이 나옵니다.

 

그리고 지금 사람들은 예수께서 사람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곧바로 헤롯의 나라가 뒤집히고 예수님이 왕이 되어 제2의 다윗왕국이 서고 로마를 물리치고 자기들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 질 걸로 생각했습니다. 이제 여리고에 왔기 때문에 곧 그 일이 이루어 지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본문에 ‘하나님의 나라’란 말은 천국의 개념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인의 메시야가 와서 이 땅에 세운 나라를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 멸시와 미움을 동시에 받고 있던 삭개오가 새로운 나라가 서면 자기의 권세를 빼앗기고 혹시 로마의 앞잡이로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 자기의 구명을 위해서 예수를 미리 만나려고 한 행동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예수님이야 워낙 사랑이 넘치는 분이니까 그걸 알고도 ‘어차피 새사람이 되면 되지 그게 중요할까?’라고 생각하셨을 것 같습니다.

 

여하튼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나니까 사람들의 모든 행동이 다 의심스럽습니다. 예수님에게 잘 보여서 한자리 할려고 하거나 처벌을 면하려고 하는 불순한 의도가 개입된 것 같습니다. 어차피 삭개오뿐만 아닙니다. 제자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새롭게 거듭나지 못했던 제자들은 단지 주님의 정치적인 성공만을 바라보고 그를 따랐던 것입니다.

 

여하튼 주님은 사람들이 자신과 삭개오의 대화를 듣고 있자 이 자리에서 열므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모든 비유도 그렇고 언행도 그렇고 뭔가 사람들의 오해를 더 짙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이 땅에 온 목적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를 들은 제자들과 청중들은 예수님이 드디어 이스라엘을 해방 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로마에 잃어버린 자기의 백성들을 도로 찾아서 해방시킨다는 의미로 알아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의 오해를 바로 잡아 주시려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인데 하필이면 비유가 왕위에 오르는 내용입니다. 듣는 사람들이 오해를 할 만합니다.

지금 주님은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거지만 이건 예수님만 알뿐 제자들도 전혀 모르고 있었고 예루살렘으로 가면 예수님이 왕이 되리라는 생각을 모두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단순한 왕이 아니라 로마의 압제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독립국의 국왕이 되는 것이지요.

 

그동안의 메시야 사역을 보면 예수님의 말 한마디면 왕이 되는건 일도 아닙니다. 군대와 식량도 준비가 되었고 카리스마도 넘칩니다. 지지자들에게 창칼을 쥐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면 되고 먹을 것이 없으면 오병이어를 가지고 축사하시고 떼어주면 됩니다. 그리고 보니까 군량을 배송하는데도 문제가 없겠습니다. 많이 들고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때가 되었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 입성을 목전에 두고 있는데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는 산길36km만 남아 있습니다. 산길이니까 하루 또는 이틀정도. 그래서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합니다. 새로운 민족의 영웅을 보기 위해서 그에게 지지를 보내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소원하는 마음에서 주님을 환영하고 그 앞에 줄을 서는 겁니다.

 

당시 군중들은 메시야가 왕권을 가지고 다윗왕국을 회복시킬 것이라는 믿음을 오랫동안 가져왔고 예수님이 메시야이므로 당연히 자기들의 왕국을 회복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메시야가 통치하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위기를 보고 주님은 메시야의 통치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즉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며 그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 지기까지 제법 세월이 걸리므로 그동안 제자들은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여 충성하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 열 므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누가는 여기서 재물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임할 때까지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하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종파에서는 예수님이 오실건데 직장이 무슨 소용이며 학업이 무슨 소용이며 재산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는데 정작 자기네는 부자로 삽니다. 참 한결같이 위선적인 사람들입니다.

 

모든 이들은 이제 내일 모레면 탄생할 하나님의 나라를 즐거워하며 어떤 높은 자리가 자기에게 돌아올지에 대해서 즐거운 상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예루살렘행은 고난의 행군이 아니라 승리자의 달콤한 개선의식이었습니다.

 

자, 이제 열 므나 비유를 자세히 살펴보십시다.
어떤 귀인이-귀인은 태생이 좋은 사람, 고귀한 사람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예수 자신을 비유합니다. 그리고 ‘먼 나라로 간다’는 말은 ‘하나님께로 간다. 그리고 다시 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때에는 만왕의 왕으로 왕권을 가지고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실제로 헤롯 아켈라오의 사건이 배경입니다. bc37-bc4년까지 헤롯의 통치가 끝난 후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가 로마로 가서 왕위를 요구하지만 유대인들은 그가 왕이 되는 것을 싫어하여 따로 몰래 로마에 탄원을 합니다. ‘이 사람은 너무 포악해서 절대로 우리의 왕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이 청원이 황실에서 허락을 받았고 아켈라오는 유대와 사마리아의 통치권은 인정받았지만 왕권은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동생들이 각각 헤롯의 왕국의 1/4씩을 다스리는 분봉왕제도 생기고 유다총독이 들어서고 결국 헤롯일가는 이스라엘에서 축출되고 멸망하고 맙니다. 나중에 보시면 이 헤롯집안은 패가망신합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는 아켈라오 사건을 연상시키기는 하지만 주님의 성정을 묘사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실화를 빗대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은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매우 인상깊게 들리겠지요.

 

그 종 열을 불러-자기 자신의 종, ‘둘로스’는 자체가 아무런 결정권이 없는 노예를 가리킵니다. 예수의 제자는 오직 주를 위해 살아야 하며 우리 자체가 아무런 결정권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일이 잘되어도 그 영광은 주인이 가지는 것이며 당연히 못되어도 그 책임 역시 주인이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종은 일의 성사여부에 대하여 걱정하지 말고 그냥 최선을 다하여 주어진 여건에서 묵묵히 일만 하면 됩니다.

 

실제로 귀인의 종은 열명이 전부가 아니라 훨씬 많습니다. 그가 왕위를 받기 위하여 갈 만큼의 귀족임을 생각하면 이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억지로 왕위를 간청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왕자의 지위에 있어서 정당하게 왕위를 요구할 수 있는 신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댱연히 이 귀인의 집에는 수천의 종이 있었고 그중에 뽑힌 열명은 주인으로부터 인정받는 엘리트 종인 것입니다.

 

“내가 돌아올 때 까지 장사하라” 여기서 장사는 사업을 말합니다. 사업하라, 사업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귀인이 돌아 올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업체를 꾸미고 투자를 하고 그리고 이익을 얻을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됩니다. 솔직히 한 므나로 사업을 한다는게 좀 말이 안되는 것 같은데 그래서 마태는 달란트 비유를 듭니다. 달란트는 무려 6000데나리온이고 므나의 60배의 가치를 가져서 충분히 사업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므나 비유는 하나님이 택함받은 성도에게 동일한 기회를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모두에게 동일한 기회를 주신 것은 아닙니다. 단 열명에게 만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네 삶은 항상 선택의 연속선상에 있는데요 우리가 선택하기도 하고 선택받기도 합니다. 열명이 비록 많은 숫자이긴 하지만 결코 모두에 비하여 많지는 않습니다. 이집의 종은 수천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참 열은 완전수를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뽑힌 특별히 선택된 사람이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되었을까요?
여기 답이 있쟎습니까? 장사를 잘하는 기준으로, 충분히 사업에 성공할 수 있는 기준으로 뽑힌 겁니다.
14절에 보면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실제 역사에서도 유대인들은 아켈라오가 왕되는 것을 반대하여 대표자 오십명을 로마에 보내 탄원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백성들이 왜 귀인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했는지에 관한 이유는 없습니다. 단지 그들은 지속적으로 반대했습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이 아켈라오가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한 이유는 그가 너무 잔인하기 때문이고 또한 헤롯가는 유대인이 아니라 에돔 사람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를 싫어했지만 이 비유에서는 왜 사람들이 귀인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잘 압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서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들은 사탄의 사주를 받기 때문이지요. 예수께서 새로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되면 사탄이 쫓겨나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막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최후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은 준 종들의-왕은 모든 종들에게 일 므나씩을 준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중에서 열명에게만 은을 주었습니다. 일백개의 은돈을 받은 종들은 과연 무엇을 내어 놓을까요?
아마 왕은 이 돈으로 뭔가 치부할 생각으로 한 것은 아닌 듯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열 므나를 남긴 종에게 열 고을 권세를 주지요.

 

조선말에 군수같은 고을의 원님 자리를 팔았을 때 엽전 오만냥에 해당하는 뇌물을 바쳐야했답니다. 겨우 한 므나와 한고을 권세는 그러므로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귀인은 절대로 치부를 위해서 종들에게 은을 맡기고 사업을 시킨게 아닙니다. 귀인은 자기가 왕위에 올랐을 때 자기의 종들 중에서 누구를 등용하여 중책을 맡길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종들을 뽑아서 역량을 시험 한 것입니다. 게다가 열므나를 받고 열 고을 권세와 바꿔준 것이 아니라 열 므나도 그대로 줍니다.

 

지금 드는 생각인데 이 비유를 듣고 제자들은 주님의 시험을 잘 통과해서 더 큰 권세를 받으려고 다짐하지 않았을까요? 평소에도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서로 싸운 자들이니까 충분히 그랬을 것 같습니다.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왕은 종들이 장사한 방법을 알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는 종들이 이윤을 얼마나 남겼는지를 알고자했던 것입니다.

 

첫 번째 종이 나와서 말합니다.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역시 첫 번째로 기록될 만큼 굉장히 유능한 종입니다. 무려 열배의 이익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시면 열명의 종에게 한 므나씩을 주었는데 여기에 결산할 때는 겨우 열명 중에서 세명의 종의 경우만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열 므나를 남긴 종을 보세요. 종은 ‘당신의 그 므나’라고 말함으로 자신의 므나가 주인의 것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재능 때문에 제가 이렇게 잘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래야만 더 좋은, 더 많은 것으로 맡기실 것입니다.

 

열 므나를 남겼다고 하니까 주님이 뭐라고 합니까?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주님도 우리에게 준 한 므나가 ‘지극히 작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업을 해서 뭔가를 할 만큼 넉넉한 자본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눈에 지극히 적은 것이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은 결코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가지고 사업을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착한” 이란 말은 마음씨가 착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직임에 합당하고 쓰임새에 적당하다는 뜻입니다. 주인은 적은 일에 충성한 종에게 열 고을 권세라는 큰 보상을 하고 있으며 열 므나 역시 그에게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아도 주인은 재산을 더 늘리기 위해서 종들에게 열 므나를 나누어 준 것은 아닙니다. 주인은 열 명의 종을 뽑아 장차 자기가 왕위에 올랐을 때 자기의 권세를 나누어 주고 고을들을 다스리도록 하려고 계획했었습니다.

 

사실 열 므나를 남기는 일은 오히려 적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 보상으로 늘린 열 므나를 받음과 동시에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열고을 권세를 주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잘 감당하게 되면 하나님의 놀라운 상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상은 물질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자녀손의 복과 명예의 복, 건강의 복, 사랑과 화합의 복, 승진과 합격과 성공의 복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복은 세상이 다 알도록 현저하고 뚜렷합니다.

“만들었나이다” 라는 말은 ‘남겼나이다’ 보다 행위적 요소가 더 많습니다. 다섯 므나를 남긴 종은 ‘남겼다’고 하지 않고 다섯 므나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잘보세요. 우리의 신앙상태와 인성 그리고 공적에 따른 차이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말투를 잘 보시면 열 므나를 남긴 종은 아주 겸손합니다. 그는 유능하면서 겸손하기 까지 하고 주인의 은덕을 잊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열고을을 다스릴 자격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겨우 다섯 므나를 남긴 종은 은연중에 자기의 공덕을 자랑합니다. 여기서 ‘만들었다’고 하는 게 바로 자기의 노력이 많이 들어 갔다는 것을 자랑하는 말투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다섯 므나를 남긴 종에게 역시 한 므나에 한 고을씩 다섯 고을의 권세를 맡깁니다.

 

표면적으로는 공평한 것 같지만 주인은 다섯 므나를 남긴 종에게는 “착한 종이여”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열 므나를 남긴 종에게는 열고을 권세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착한 종이여’라고 불러 주시는 영예까지 안게 하신 것에 비해 다섯 므나를 남긴, 약간은 자기의 노고를 자랑하는 종에게는 영예는 없고 다만 다섯 고을 권세만을 주셨습니다.

 

본문에서 누가는 인간의 노력에 담겨져 있는 행위를 드러내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믿음에 의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구원 외에도 행위에 따라 주어지는 상급이 있을 것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을 믿을 때 자연적으로 받는 것이라면 우리의 선한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선한 상급이 반드시 따로 있을 것입니다.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성도에게 그 선한 노력의 보상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으십니다. 만일 그 보상이 더디 온다면 그 보상은 더 큰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상이 즉각 오는 것이 아니라 더디게 온다면 더 기뻐하십시오.

 

자, 세 번째 종이 주인과 회계할 차례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종은 뭐라고 합니까?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이 종은 한 므나를 받고서 그것을 가지고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그 받은 므나를 수건으로 잘 싸두었답니다.

 

“내가...싸 두었었나이다” 이 종은 므나를 받은 때부터 주인이 올 때까지 받은  므나를 한번도 사용해 보지 않았습니다. 수건으로 싸는 것은 당시 돈을 보관하는 방법이었답니다. 그러니까 받자 마자 다른 것을 할 생각은 아예 하지 않고 주인의 돈을 수건으로 싸서 보관만 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몰랐겠지만 돈이 생겼는데 그 돈을 가지고 주의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그에게 귀한 상급을 주실려고 한 시험에서 탈락한게 됩니다. 물론 그는 주인과 회계할 때까지 결코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종은 돈을 늘리지 못한 책임을 주인에게 돌립니다.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마태의 달란트 비유와 누가의 므나 비유가 비슷하지요? 그러나 약간은 차이가 있습니다. 뭐 오늘은 두 비유를 비교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니까 그냥 지나갑시다.

 

‘엄한’ 이란 말은 ‘가혹한’ 이란 말입니다.
그 종은 이상하게도 한 므나를 받았을 때부터 계속해서 주인의 돈을 잃어버릴까봐 무서워 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주인이 무서운 사람이라는 객관적 사실은 어디에도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이 종만 주인을 가혹한 사람으로 오해하고 무서워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요, 우리 하나님이 바르게 살기를 원하시고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율법을 집행하시는 분이시기는 하지만 그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혹하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조건은 더없이 관대하고 그의 오래참음은 오늘 우리를 지상에 살게하는 근본 원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엄격하고 엄했다면 그의 율법이 가혹했다면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기준에 미달되어서 이 세상에서 목숨을 부지하는게 어려웠을 것입니다.

 

게다가 종은 자기의 행위를 변명하는데 급급해서 주인을 부정직한 사람으로 매도하는 것도 서슴지 않습니다. 주인을 엄하거나 가혹하다고 하는 것 하고 그를 부도덕하고 부정직한 사람으로 매도하는 것 하고는 다른 문제입니다. 종은 자기의 행위를 변명하기위해 주인을 매도하고 있습니다. 그 끝은 안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이 종의 말 대로면 그는 정말 몹쓸 사람이고 마치 조폭이나 고리 사채없자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건 그 종의 착각일 뿐 주인의 기본 성품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여기서 “취한다”는 말은 끌어올려진 것을 가져가 버린다는 뜻입니다. 즉 주인이 자신의 노력 없이 자신의 몫도 아닌 남의 것을 취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기꾼이나 착취자? 이런 표현은 고리대금업자를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거둔다”는 말은 지주들이 부당하게 소작인들을 수탈하며 소작인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까지 착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종은 주인의 명령대로 장사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수고의 몫은 주인에게 빼앗기고 만약 장사를 하다가 원금을 잃어버리면 그 손실까지 벌충해야 될 걸로 생각했기 때문에 수건에 므나를 싸 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글을 보면서 느끼는 점은 수건에 싸두었던 종은 주인을 오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당당하게 주인에게 자신의 처지를 변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행동이 객관적으로 상당히 불손하고 뻔뻔함에도 불구하고 그 스스로는 전혀 변명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설명한다고 생각하는 듯이 보입니다. 한번도 그는 잘못했다거나 죄송하다거나 하는 사죄나 용서를 구하는 등의 언행을 하지 않습니다. 과연 종이 주인에게 이렇게 뻔뻔하게, 또는 뻣뻣하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없습니다. 종의 태도는 매우 이상합니다. 종이, 노예가 주인을 대하는 상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없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이 비유에서 우리가 놓친 부분은 없습니까?

 

먼저 열명의 므나를 받은 종들 중에서 겨우 세사람의 예만 설명이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럼 나머지 일곱의 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얼마를 남겼으며 어떻게 장사했을까요?

 

성경에 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언급된 두가지 예로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먼저 열 므나를 남긴 종이 가장 먼저 기록된 것은 열배 이상을 남긴 종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음으로는 다섯 므나를 남긴 종입니다. 이것 역시 굉장한 것으로 므나를 맡은 종 중에서 두 번째 우수한 성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면 주님이 칭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바로 세 번째 종이 나오는데 그는 은 한므나를 그대로 들고 옵니다. 당시 많은 이들이 은을 보관할 때 수건에 싸서 묻어두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당시의 관례를 따랐을 뿐이라고 보여집니다. 솔직히 한 므나로 장사하기는 자본금이 너무 적습니다. 자본주의 상황에서 돈이 돈을 번다고 한 달란트도 아니고 한 므나로 할 수 있는 장사는 한정적입니다.

 

그래서 한 므나로 장사해서 열 므나 다섯 므나를 남긴 종이 비정상적으로 유능하거나 행운아일 수 있습니다. 보통의 경우에는 아마 가게도 얻지 못하고 시장의 모퉁이에서 장사했거나 아니면 극히 영세한 장사를 했을 것입니다. 겨우 노동자 백일 품삯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몇가지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대부분의 종들이 원금을 늘리기는 고사하고 원금을 까먹지 않으면 다행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종은 이러한 점을 미리 파악하고 어차피 이렇게 적은 자본으로는 제대로 된 장사를 하기도 어렵고 자칫 원금을 날리느니 원금이라도 제대로 보관하고자 했을 것이고 열 므나를 나누어 받은 종들 중에 원금을 날린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의 상황에 대해서 제법 당당하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열명의 종들 중에서 가장 성적이 좋지 못했다면 그는 결코 그렇게 당당하게 자기를 변호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시 종들의 처지와 주인의 권세를 생각한다면 종이 제정신이라면 주인에게 어떠한 공로도 없이 그렇게 뻔뻔하게 설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본문을 잘 보세요. 첫 번째 종, 두 번째 종이라고 설명을 해놓고 세 번째 종에게서는 세 번째라고 하지 않고 ‘그 중의 하나가’ 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정도의 종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설명했다시피 한 므나를 그대로 보존한 종도 드물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종이 이렇게 뻔뻔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종들이 당신이 준 돈을 날렸지만 나는 그래도 당신이 준 돈을 날리지는 않았습니다 란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명같은 설명을 덧붙인 것입니다.

 

이러한 종의 변명을 듣고 주인은 “그래 너 같은 종도 있어야지”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틀림없이 주인이 준 돈을 축내고 원금까지 다 날린 종들이 제법 있었을 터인데도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는 전혀 말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인이 준 재능을 가지고 무슨 시도라도 한번 해봐라는 뜻일까요? 아무것도 안하는 것 보다는 뭐라도 해보고 실패하는게 더 낫다는 뜻일까요?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알았느냐” 주인은 종의 변명을 듣고서 종이 악한 종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이 종은 그래도 수천명 가운데서 뽑힌 종입니다. 그래서 열명의 종 중에 들어가서 한 므나의 돈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종의 전말을 듣고 주인은 ‘이 종은 전혀 무익할 뿐만 아니라 악하기까지 하구나!’ 라는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의 말인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가 문두에 나옵니다.
즉 ‘네가 악한 종이라는 근거가 네 말이다’는 뜻입니다. 네가 돈을 남기지 못해서 네가 악한 종이 아니라 주인을 오해하고 주인의 의도를 알지 못하고 주인탓을 하고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사과하고 처분을 기다리는 겸손함이 없고 남탓을 하며 뻔뻔한 너의 대답이 너를 악한 종이라고 판단하는 근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네가 나를 그렇게 파악했다면 왜 내돈을 은행에 넣어서 적어도 정당한 이자라도 받게하지 않았느냐고 묻습니다. 결국 종은 자기의 말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건 다 핑계라는 거지요. 그 종은 단지 악하고 게을렀을 뿐입니다.

 

주인이 무섭고 주인을 오해하고 그래서 그 돈에 손도 대지 않으려고 했을 뿐입니다. 사실 당시의 은행이라는 것도 결국은 오늘날의 은행과 달리 파산도 잦고 야반도주도 있고 해서 완전히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마 그 종이 그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은행이라고 그럴듯하게 말했지만 원문상으로는 그냥 ‘환전상들의 탁자’에 두지 않았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확실히 은행에 비해 신뢰도나 안전도가 확 떨어지지요? 그러므로 이러한 거래는 투자라기 보다는 일종의 투기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종이 자기의 므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환전상의 탁자가 아니라 수건으로 싸서 땅에 넣어둔 것이 충분히 현명한 일이었습니다.

 

‘봐라, 나는 그래도 원금은 그대로 가져 오지 않았느냐!’
지금 종은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이용해서 치부를 하거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헌금을 빙자해서 사람들의 재물을 착취하고 등치려고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은 단지 주의 재림이 있고 난 후에 우리에게 고을을 같이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주려고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에 상을 주시려고 우리를 달아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헌금은 ‘너희가 내가 준 물질을 얼마나 이웃과 형제를 위해서 사용하였느냐?’ ‘네가 그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얼마나 기여했느냐?’를 보시는 겁니다. 그래서 사용을 잘했으면 더 많은 것으로 맡기려고 한 테스터인 것입니다.

 

그 테스터는 우리를 떨어트리고 괴롭히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인과 왕의 권세를 함께 가지고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한 요식행위인 것입니다. 한  므나씩을 받을 열명의 종으로 선발 된 것 자체가 이미 고을 권세를 주기에 적합한 후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의 재주가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보려고 하신 것입니다. 더 재주가 많으면 더 귀하고 중하게 쓰고 재주가 적으면 약한 곳에 쓰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불손하고 뻔뻔하며 제멋대로이며 남 탓만 하는 종을 만나니 벌을 주게 된 것입니다. 주인은 그에게 호의를 가지고 그를 선발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주인을 미워하고 싫어했으며 오해했던 것입니다.

 

일국의 왕이 되려는 자가 한 달란트도 아니고 겨우 한 므나를 주고 장사하라고 할 때부터 이상하지 않습니까?
주인은 많은 종 중에서 열명을 선발하여 그들에게 고을을 다스릴 권세를 주기위해 일종의 기회를 주는 시험을 부과한 것인데 그만 그 악한 종은 기회를 날려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 때문에 주인으로부터 벌을 받게 되는 처지로 전락합니다.

 

주인의 명령은 보통 인간들의 생각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천국만큼 상벌이 확실한 곳이 없다는 의미로 받아 들여도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일러 우리는 흔히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를 보호하시는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세밀하게 우리를 보호하시려면 평소에 우리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될 것이고 그렇다면 죄에 대해서 엄격하신 우리 아버지께서 그 사람의 잘한 일과 못한 일에 대해서, 그 사람의 공과를 일일이 기억하실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우리가 소자에게 물 한 그릇을 대접한 것도 상을 주겠다고 하셨으니까요.

 

그런데 신하들은 주인의 명령에  불만인 것 같습니다. 굳이 열 므나나 가진 이에게 또 한 므나를 더 주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 많은 것이지요. 그래서 “저에게 이미 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주인의 명령에 주위에 있던 신하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이 내용은 많은 소문자 사본들과 베자사본, 워싱턴사본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시내사본, 알렉산드리아 사본, 바티칸 사본같은 대형 사본등에는 기록되어 있는데 열 므나를 이미 가지고 있는 자에게 빼앗은 한 므나까지 줄 필요가 있겠느냐고 하는 신하들의 이의 제기는 일면 타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항상 부익부 빈익빈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한번 생각을 해 봅시다. 신하들의 돈으로 열 므나 남긴 종에게 주라고 한게 아니고 악한 종의 한 므나를 뺏어서 열 므나 남긴 종에게 주라고 한 것인데도 신하들이 반대한 것을 보면서 저는 약간 다른 생각을 해봅니다. 그것은 혹시라도 신하들이 공평함, 형평성 이런 문제 때문에 반대 한 것이 아니라 질투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

 

그리고 악한 종에게 주인이 내린 처벌은 그냥 그에게 주었던 한 므나를 빼앗은 것 뿐 입니다. 그가 한 므나를 받고도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기에 주인은 그 은 한 므나를 잘 활용하는 사람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은 한 므나를 빼앗긴게 아니라 그는 한 고을권세를 빼앗긴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조선시대에 과거에 장원급제를 하면 종6품의 고을 현감자리를 주었다고 합니다. 이 악한 종이 은 한 므나를 빼앗긴 것은 장원급제의 기회를 날려버린 것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구원에서의 탈락은 없지만 대신에 상급을 받을 기회를 날려버린 겁니다.

 

주인은 새롭게 왕위에 올라서 함께 나라를 다스릴 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런 벼슬아치를 뽑으려고 애초에 열 명의 종을 선발한 것이고 이제 열  므나를 남긴 종은 그 중에서 무려 열 고을을 다스릴 권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신하들의 질투를 살만합니다. 너무 성장했기에 벼슬이 너무 높기에 오히려 자기들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으니까요.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다가 남이 자기를 알아 주지 않고 오히려 비아냥거리고 비협조적으로 나오고 무시한다면 기뻐하십시오. 질투의 대상이 될 만큼 내가 성장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여하튼 종들 사이의 결산은 이렇게 끝이 났지만 정작 이 비유에서 결말은 상당히 색다릅니다. 그것은 게으른 종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원수된 백성들을 죽이라고 하는 명령으로 끝이 나기 때문입니다. “이 악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끌어내어라” 같은 말은 보이지 않습니다.

 

‘원수된 자들’은 귀인이 왕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자들이지만 예수의 주되심을 인정치 않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들에 대한 최후심판의 경고로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41-44에서 예수는 예루살렘 멸망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아켈라오는 왕 대신에 아버지 영토의 1/4을 다스리는 분봉왕이 되고서는 유대인8000여명을 학살하였습니다. 여기서 ‘죽이라’는 ‘멸절시켜라’는 뜻으로 잔인한 학살을 의미합니다. 그 집안의 종자까지 없에라?

그럼 왜 결말은 원수 된 백성들을 죽이라는 것으로 처음의 열 므나 비유와는 좀 다르게 난 것일까요?

 

그것은 열 므나를 주고 장사하라고 한 이 시험은 뽑힌 종들에게 상급을 주기위한 시험이지 사람을 탈락시키고 괴롭히려는 의도의 시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 므나의 원금을 까먹은 종들 역시 상급은 없지만 벌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하다 보면 어떻게 계속해서 이만 남기겠습니까? 그가 신이 아닌 다음에야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게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벌을 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상도 없었겠지만 어쩌면 그래도 수고했다는 칭찬과 위로의 한마디는 받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은 지금 제자와 원수들을 명확히 구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시험을 부과하시지만 원수들에게는 기회자체를 아예 주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원수들에게는 주인이 왕위를 받아 오는 그 날이 바로 멸망의 날이 되는 것이지요. 심판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기가 다시 올 때는 나를 핍박한 너희들은 어떠한 벌이 있을 것을 알고 나의 왕위를 결코 방해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예수께서 사람들이 자기가 내일 모레 왕위에 오를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날뛰는 것을 굳이 막지 않으셨습니다. 굳이 그들의 오해를 지적하고 그걸 바로잡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열 므나 비유하고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너희들은 이미 나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릴 자로 선택받았다. 그러므로 그 왕국이 내일 모레는 아니고 비록 오랜 후에 오겠지만 결코 너희가 틀린게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누가 더 잘하는지 누가 더 많은 상급을 받을지 그동안 견디며 잘 해보아라 하신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영광스런 주의 종들입니다. 그런데 종은 일반인의 밑에 있으면 여전히 종이지만 그 주인이 왕이 되면 왕의 신하가 되는 것이고 벼슬자리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의미의 종은 아닙니다. 예전에 목동에서 어떤 분이 저보고 ‘주의 종님’이라고 하던데 굳이 종에다가 ‘님짜’까지 붙이니까 어색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습니다.

 

한 므나의 선택을 받고 장차 주인이 왕위에 올라서 돌아오면 고을을 다스릴 권세를 얻을 신분입니다. 한 므나를 무조건 더 남겨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장사해서 이익을 보는게 손해를 보는 것 보다야 당연히 더 좋겠지만 굳이 그렇게 생각하고 노심초사하지 말고 우리는 이미 아버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라고 생각하고 그냥 우리에게 주어진 여건하에서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최선도 너무 어렵습니까? 그러면 최선은 관두고 그냥 성실하게만 일하면 됩니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다보면 언젠가 주인이 다시 돌아오셔서 우리와 함께 새로운 나라를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그 아름답고 영화로운 천국잔치에 참예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오늘 하루 하루를 의미있고 보람있게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다만 하나님의 정하신 테두리 안에서 기뻐하고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무더위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더위에 건강에 유의하시고 하나님이 주신 삶을 기쁘게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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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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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하나님의 시험에서 어떤 이는 무려 열 므나를 남기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한 므나도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힘들어 했기도 하네요. 먹고 산다는 게 이와 비슷하지 않나 라는 생각입니다. 자본주의가 적성에 잘 맞아서, 또 경쟁사회에서 열심을 내어 승리해서, 세상에서 인정받고, 멋진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이들이 겸손하기 까지 한다면, 마땅히 칭찬 받을 인생이겠지요.

 

하지만, 모든 이에게 그렇지 않고, 사는게 아직은 힘이 드는 것 같고, 다가올 알 수 없는 일들로 힘들어 할 때도 물론 있습니다. 그럴 때,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다시 힘을 내고, 열심히, 성실히 삶을 살아내는게 참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목사님 설교말씀처럼, 두려움, 걱정 보다는, 보람 있는 하루가 되도록 삶을 즐겨보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받은 재능을, 받은 자리를, 기꺼이 즐거워하며, 감사해 하며, 열심히 누리며 살아갈 때, 잘했노라고 주님께서 복을 주시고, 그 달려갈 길을 인도해주심을 믿습니다. 우리 열심히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 2016. 08.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