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과의 아침식사 (누가11:37-44)
오늘 저는 이 본문을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각도가 아니라 전혀 다른 각도에서 한번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사실 기존의 전통적인 복음해석적 설교문을 준비했다가 갑자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또 하나의 새로운 설교문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예수님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 믿는이가 얻어야 할 영적인 유익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1. 복음을 위해서 포용하라
먼저 복음을 위해서는 포용하라. 내가 저 사람이 평소에 너무 싫지만 그래도 복음을 위해서는 저 사람과 친해지고 저 사람을 배격하지 말라는 겁니다. 나와 저 사람의 싸움 때문에 복음의 문이 막힌다면 곤란합니다. 그래서 포용하라.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계실 때 한 바리새인이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여기서 ‘점심’은 사실은 원문상으로는 아침의 회당기도를 마치고 나서 먹는 간단한 아침식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점심이 아니고 아침입니다.
뭐 아침이 되었든 점심이 되었든 주님은 지금 바리새인의 초대에 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의 기도시간이 끝나고 아침을 드시기 전에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계실 때 한 바리새인이 주님을 자기집으로 청합니다. 그래서 같이 아침을 먹자고 합니다. 그것도 거듭하여 집요하게 강청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혹독한 저주를 퍼붓기를 즐겨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한 바리새인이 주님을 식사자리에 초대했을까요?
본문 상으로 보면 두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뭔고 하니 하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그 말씀에 매료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실 때에 바리새인이 식사초대를 한 것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아니라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탄하자 순간적으로 대중들 앞에서 자기 자신이 예수님과 식사를 함께하는 신분이라고 자랑하려는 마음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자기와 함께’라는 부분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에서 식사를 함께한다는 것은 동류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내가 너희들이 존경하는 예수님과 식사를 함께하는 신분이라는 의미로 식사초대를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느 설을 따른다 해도 바리새인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을 자기집에 모심으로서 크게 이익입니다. 즉 자기의 명성이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나 바리새인을 비난하시는 분이 자기만은 예외로 하고 식사를 허락하셨다는 것은 이 바리새인의 명성을 드높이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식사는 만찬이 아니라 간단한 아침식사입니다. 그런고로 물질적인 손해도 별로 크지 않습니다. 나쁘게 말한다면 식사초대는 이 바리새인의 입장에서는 무지 이익이 되는 투자인 셈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바리새인과의 식사가 유익된 것일까요?
글쎄요. 아마 식사에 초대한 바리새인과는 정 반대의 입장이었을 같습니다. 예수님의 인기는 주로 당시의 종교지도자나 기득권층을 비난하는데서 기인합니다.
예수님이 부자와 지도자를 비난하였기 때문에 가난하고 소망이 없었던 민중들은 오히려 그러한 것에서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이며, 그러므로 예수님을 더 따랐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지금 주님은 자기의 명성에 누가 될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이 강청하자 순순히 그의 초대에 응하셨습니다.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우리는 과연 그럴 수 있습니까?
내가 저 사람과 친하려고 합니다. 아니 친합니다. 그런데 저 사람은 이 사람과는 원수지간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나에게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좀 곤란합니다. 저 사람하고 이 사람 둘 중에서 누구 한쪽을 선택해야 되는 상황이 온다면 우리는 당연히 우리에게 더 유익한 사람과 사귀기 위하여 덜 유익한 사람과는 만나기를 꺼려합니다.
그래야만이 내가 나에게 더 많은 이익을 줄 사람에게 오해를 받지 않을 테니까
사실 주님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그토록 비난하던 바리새인과 함께 식사한다는 것이 꺼려지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그가 자기의 말씀을 듣고 강청하며 초대를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전에는 정치꾼들은 여야로 나뉘어 같이 자리하는 것도 피했습니다. 만일 사사로이 만나다가 사람들에게 발각이 되면 변절자니 이중첩자니 하는 비난을 당하게 되겠기 때문입니다.
이는 정치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편을 가르고 당을 지으며 줄을 서는 지도 모릅니다. 보다 유리한 쪽을 선택하기 위해서……
그러나 주님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본문에서처럼 바리새인의 위선과 외식에 대해서는 무섭게 책망하셨지만 사람 그 자체는 사랑하셨습니다.
왜입니까?
아버지가 사랑하라 하셨으므로.
단지 그겁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에게 사랑하라 하셨으므로 나는 이해를 초월하여 사랑할 뿐입니다. 그것을 우리 주님은 오늘 바리새인의 초대에 응하신 행동으로 우리에게 묵묵히 가르치시고 계신 것입니다.
2.상황에 따라 진리는 변하는가?
두 번째는 상황에 따라 진리가 변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진리를 변화시키는 것을 상황논리하고 합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는 학생들이 상황논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그것은 상황논리다’ 이런 식으로.
진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진리여야지 이런 때는 진리다가 저런 때는 진리가 아니고 이렇게 되면 안 된다는 거지요.
다시 말하면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 되는 그런 식은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38절에 보면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보고 이 바리새인이 이상히 여겼다”고 합니다.
밥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는다?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위생상 손을 씻고 먹는게 훨씬 좋을 것입니다. 우리도 식당에 가면 소독된 물수건으로 손을 정성스럽게 닦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손을 안 씻으셨다는 말입니다.
참고로 유대인들의 식사는 우리처럼 숟가락, 젓가락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손을 씻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것입니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유대사회에서는 하나의 예의요 관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다고 하는데 충분히 공감이 가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원문의 의미를 자세히 살펴보면 좀 이상한 점이 보입니다.
여기서 ‘이상히 여기다’로 번역된 이 단어는 사실은 ‘깜짝놀랐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주로 예수님의 기적을 사람들이 바라보고 깜짝 놀랐을 때 바로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손을 씻지 않는 것을 보고 마치 기적이라도 본 양 깜짝 놀랐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손을 씻는 것에 두는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유대사회에서 식사 전 손을 씻는 것은 단순한 위생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죄 많은 세상과 접촉함으로 인해서 생기는 불결을 제거하기 위한 결례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례는 바리새인뿐만 아니라 일반 유대인들도 철저하게 지켜오던 규범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규범이 결코 성경상의 규범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만든 인위적 규범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의식적 차원의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손을 씻는 것이 무슨 거룩한 계명인 것처럼 우월감을 가지고 매우 엄격하게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실 이러한 유대인의 관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이전에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주님에게 찾아와서 시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손 씻는 것이 유대인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비본질적인 것이었으므로 교훈을 내리시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손을 씻지 않으셨습니다.
비난을 각오하고서.
사실상 우리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비본질적인 것을 트집잡아 상대를 비난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게 중요한 논점이 아님에도 엉뚱한 트집을 잡습니다. 특히 ‘대외명분’을 중시하는 사람들일수록 이런 경향이 심합니다. ‘대의명분’이 아니라 대외적 명분입니다. 자기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그런척하는 것입니다.
일단 주님의 일을 보면 주님은 바리새인에게 손씻는 것보다 더 중요한 본질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의도적으로 손을 씻지 않았습니다.
목적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상대가 싫어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글쎄요.
단순히 제대로 된 가르침을 주려는 목적으로 다수를 상대로 그들의 심기를 거스리는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글쎄요
좋습니다. 조금 더 직접적으로 나에게 유익되지 않는 일을 위하여 내가 다수와 싸울 수가 있습니까?
천만에요. 나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는데 왜 내가 쓸데없이 그런 일을 합니까?
교훈은 나 아닌 누가 내려도 내릴 것인데 굳이 내가 내릴 필요가 없고 그냥 둥글둥글하게 살아가면 좋을 것인데 뭐하려고 화를 자초합니까?
그래요. 맞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셨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보면 남의 일에 나서는 것 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괜히 의로운 일에 나섰다가 오히려 가해자로 몰려 된통 당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이상 남의 일에 이익이 없는 일에 나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길가에서 자기의 목전에서 불의한 일이 번연히 일어나고 있음에도 못본적 눈을 감고 있습니다. 저도 그런 적이 있는데 이제는 절대로 남의 일에 나서지 않으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아이들에게도 절대로 남의 일에 나서지 마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에 대한 우리나라 속담까지 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었더니 내보따리 내놔라 하더라’ 어떻습니까? 요즘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온 세상의 일에 다 간섭하려고 작정하셨는지 시시콜콜 간섭을 합니다. 우리처럼 악이나 귀찮은 일을 회피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맞서서 꾸짖고 변화시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고 그래서 우리입니까?
3.물질 앞에 당당한가?
바리새인이 깜짝 놀라서 주님을 마치 이상한 사람 보듯이 보자 주님은 이렇게 답변 하셨습니다.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탐욕이란 말에는 강탈, 착취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악독이란 말에는 시기심과 욕심이란 뜻이 있습니다. 실제로 바리새인들은 가난한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죄인들과 세리들이 회개하는 것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오로지 시기심으로 탕자의 비유에서처럼 그들이 기쁨의 잔치자리로 나아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누가는 바리새인을 일러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는 원색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식사 전에 손은 철저하게 씻는 그들이 그 속마음은 씻지 않아 오히려 악독과 탐욕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가증스러운 것은 그들이 그러한 자신을 철저하게 은폐하고 거룩한 척 예수님을 바라보고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이 바리새인의 집은 좀 잘살았던 모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아침식사에 초대하고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보고 너희 속에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고 하셨지요. 보통 간단한 아침식사이기는 하지만 공적인 장소에서 주님을 초대했으므로 아마 바리새인과 예수님 단 둘이서 식사를 한게 아니라 여러 바리새인들과 그 바리새인집의 남자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 이렇게 엄청나게 많은이들이 식사자리에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만찬은 아니지만 수십명의 아침식사를 대접하려면 가난한 사람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초대한 그 바리새인의 집은 부자였던 모양입니다.
사실 남의 집에 초대되어 가서 식사대접을 받으면서 그 주인을 정면으로 책망한다는 것은 보통 상식으로는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좀 극단적으로 표현해볼까요
‘네가 나를 대접하는 재물은 사실 가난한 자와 과부의 가산을 턴 것이 아니냐
하나님은 그러한 불의한 재물로 나를 대접하는 것보다 오히려 가난한 자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는 것을 더 원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신 거나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나에게 대접하는 음식들로 가난한 이에게 주어’라 이런 뜻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 안에 있는 것’이란 말은 원문상으론 ‘너희 안에 있는 것들’이란 표현입니다. 그럼 과연 ‘너희 안에 있는 것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너희 안에 있는 것들은 ‘마음과 재물’을 의미합니다. 마음으로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라는 말입니다.
나아가서 재물을 나누어 주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은 너무나 실제적입니다.
너희가 마음으로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길 뿐만 아니라 실제로 재물을 나누어 주라는 데까지 나가고 있습니다.
주님이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난한 형제를 보고 형제여 왜 배를 곯고 있느냐 빨리 식당에 가서 밥을 사서 먹어 굶주림을 면하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씀. 배를 곯는 가난한 형제가 밥을 사 먹을 줄 몰라서 지금 배를 곯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먹을 돈이 없어서 굶고 있는 것이지. 그러면 사주면 됩니다. 그런데 온갖 생색은 말로만 내고 정작 십원한푼 주지 않는다면 얼마나 가증스럽습니까?
이런 사람들 있지요. 자기가 부자다, 요즘 잘나간다 이렇게 자랑은 다해놓고 정작 밥값은 자기가 안냅니다. 친구보고 내라고 하거나 아니면 더치페이. 뭐 그럴 수는 있는데 그럴려면 아예 자랑을 하지 말던가 뭡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 제발 이런 짓은 하지 맙시다. 세상 사람들이 조롱하고 하나님께서 웃으십니다.
주님은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고 하시고는 이어서
“그러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깨끗하다’는 말은 우리 자신이 깨끗해 진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과 관계된 모든 것이 깨끗해 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끗해 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야만이 비로소 궁극적인 마음의 평화와 양심의 자유를 얻게 된다고 말하고 계십니다.
솔직히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 지키기가 어려운 것이 뭔 말만 하면 결론이 구제하라입니다. 아마 당시에 가난한 자들이 엄청 많았던 모양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또 말은 번드르르하게 해도 실제로 구제하는 데에는 정말 인색합니다.
예수님이 자주 사용하시는 결론이 두가지가 인상적입니다. 하나는 기도하라 또 하나는 구제하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제하라’는 ‘사랑하라’의 실천사항입니다.
4.진리는 굽힐 수 없다
이어서 42절에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 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본래 구약에서 곡식, 포도주, 기름과 같은 주요 농산물과 가축에 대한 십일조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율법에서 규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하여 아주 사소한데까지 신경을 썼지만 오히려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라는 더 큰 것은 버린다고 책망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도 이런 분이 있을 것입니다. 장사하는 분 중에서 번 돈에서 정확하게 그때 그때 십일조를 떼어서 십일조 그릇에 넣어 두었다가 주일날 모아서 십일조를 내는 정확한 분들, 얼마 전까지는 있었는데 요즘은 안보이기는 합니다만 아직도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철저하게 십일조 생활을 하려고 작정한 분들이지요.
제가 잘못되었다고 말씀드리려고 하는게 아니라 정말 철두철미한 신앙을 가진 좋은 분들입니다. 바리새인들도 이렇게 하기는 했지만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십일조를 드린게 아니라 이게 율법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보기 때문에 자기의 공의를 내세우려고 한겁니다.
예수님 당시의 종파와 정파들을 보면 몇가지가 나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리고 열심당과 헤롯당. 성향이 다 다른 사람들인데 이 중에서 사람들의 지지를 가장 광범위하게 받고 있는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이 중에서 바리새인하면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는 걸로 유명합니다. 주님도 이들의 계율 잘 지키는 것은 인정하셨습니다.
‘공의’는 사회 정의와 관련된 용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말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공의’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은 동위접속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중요도가 똑 같다는 말입니다. 동등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을 행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바로 사회 정의이기도 하다는 등식이 성립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소한 것에도 목숨 걸며 지키려 하는 바리새인들이 정작 하나님이 바라시는 정의에 대해서는 조금의 관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버리는 도다’란 말이 잘 보여줍니다. 그 말은 바로 ‘지나치다, 비켜가다’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금 외형적인 형식에만 치중하고 하나님의 귀중한 요구는 비켜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를 마치 관행처럼 아무 생각 없이 계속하고 있었다는게 더 큰 문제입니다. 주님은 어쩌면 좀 피곤한 스타일입니다. 그 말을 하시려고 그 교훈을 주시려고 손을 일부러 씻지 않고 상대방의 반응을 이끌어 내고 그렇게 돌아 돌아 가십니다.
그리고 끝에가서는 사정없이 그러한 사람들을 책망하십니다.
그것도 가장 책망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전혀 개의치 않고 책망하고 계십니다.
진리는 재물 앞에서도 당당해야 하고
진리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서 바뀔 수 있는 것일 수 없고
웃는 얼굴에 침뱉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주님은 참으로 무서운 분입니다. 비진리와 비양심에는 확실하게 추상같은 호령을 내리십니다. 책망하십니다. 내가 지금 주님을 대접하고 있다 이런거 전혀 고려를 하지 않습니다. 내가 얼마나 주를 오래 열심히 따랐는지도 전혀 배려하지 않습니다. 진리냐 아니냐만 따집니다. 그래서 주님입니다.
자기를 향해 웃으면 접대하고 있는 그에게 주님은 참으로 무정하게 사정없이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라 라고 질책하십니다.
제가 이 설교를 고치면서 그때는 제가 어떤 마음으로 이 설교를 했을까 궁금해 집니다. 확실히 젊음이 좋기는 좋구나하는 생각도 듭니다. 젊음 앞에 두려운게 없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요즘은 나이를 좀 먹어서 그런지 많이 먹은건 아니지만 아주 약간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말을 가려하게 됩니다. 생각하고 배려하고 고려해야할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 설교를 하려니 김집사가 걸리고 저 설교를 하려니 이집사가 걸리고 이건 어때하고 생각하니 박집사가 걸립니다. 이렇게 되고 나니 아무런 설교도 못하겠습니다. 무조건 복준다는 설교만 해야 됩니다. 무조건 괜찮다는 설교만 해야 됩니다. 그러고 보니 반쪽짜리 설교가 되고 반쪽 복음이 되고 결국은 그게 복음을 사람 때문에 굽히는 일이 됩니다. 진리를 상황에 따라 굽히는 일이 됩니다. 그렇게나 해서는 안된다는 ‘상황논리’를 신학교를 떠난지 십여년만에 넝큼스럽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1.포용합시다. 사람을 가려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결코 주님이 바라시는 바가 아닙니다.
2.상황에 따라 진리를 굽게 하지 맙시다. 진리는 언제 어디서나 어떠한 상황아래서도 당당해야 합니다.
3.무엇보다 물질 앞에 당당합시다. 물질보다 소리보다 하나님의 대의를 따릅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입니다
우리 다같이 그렇게 사십시다. 저도 힘써 그렇게 살겠습니다. 우리끼리 서로 사랑하며 주님안에서 기뻐하고 즐겁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위의 세가지를 지키며 살기를 더 원합니다. 그렇게 살기를 다짐하는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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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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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이거 해도 해도 예수님이 너무 하시네! 기껏 식사까지 마련했는데, 잔소리라니! 쓴소리라니! 그런 유쾌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래 전에 예수님과의 ㅇㅇ식사 같은 책 제목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정말로 함께 식사하다가 호되게 욕먹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성도가 성도답게 바르게 살기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래도 진리를 따라서, 행동하면서 산다면 그것으로 또 간단히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바리새인들이 그토록 비난 받은 것도, 이웃이 굶어죽어가도, 내 신앙만 지키면 그만이지 같은 오만한 생각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쓸 수도 있지 않을까요. 우리 함께 예수 믿고, 즐겁고 행복한 하루를 만들어 보자, 내가 가진 것들로 함께 식사도 하고 그러자, 언제? 지금 당장! 그렇게 예수님 보시기에 즐거운 성도가 될 수 있으면 다만 좋겠습니다. / 2016. 08.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