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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세워 재판하게 하다(출애굽기18:13-)/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8. 31. 02:46

 

사람을 세워 재판하게 하다 (출애굽기18:13-)

 

성경은 교훈집도 아니고 처세술에 관한 책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성경을 읽다보면 우리는 인생의 교훈도 세상의 처세술도 배우게 됩니다. 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 때로 성경은 행정에 관한 원리를 기술하기도 합니다. 또한 용인술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오늘본문에는 모세와 이드로가 시내산에서 만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드로는 모세의 장인입니다. 그런데 그가 오면서 그냥 온게 아니라 그동안 떨어져 살았던 모세의 아내와 두 아이들을 데리고 옵니다.

 

어떻습니까? 모세입장에서는 처자를 만난게 훨씬 더 크고 설레는 일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겠습니까? 그동안 모세가 독립운동을 하느라 처자를 떠나있었는데 마침내 이스라엘이 독립을 하고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고 하는 마당에 그렇게나 보고싶던 처자를 만난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잘보시면 이드로하고 대화한 내용은 장황하게 길게 나와 있는데 아내와 자식과 대화한 내용이나 그들을 만나서 기뻐한 내용은 전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냥 이드로가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왔다는 내용만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정말 독특합니다. 보통 인간들의 관점과는 다른 시각으로 서술합니다. 인간들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으로 기록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읽으면 우리는 의도하지 않은 여러 가지 인생의 진리, 삶에 관한 노하우를 터득하게 됩니다. 그게 주 목적은 아니였는데도 불구하고 진리의 하나님께서 전해주는 인간들에 관한 유용한 지식들을 얻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볼 본문에서는 지금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통치의 원리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보는 부분은 행정과 통치에 있어 ‘위임의 원리’입니다. 사람을 세워서 지도자의 권리를 위임하는 것이지요. 사실 수백명정도의 마을지도자와 수백만 단위의 국가지도자는 해야 할 일이 다릅니다. 생각할 것도 더 많고 업무의 내용도 다릅니다.

 

그런데도 국가지도자가 모든 권리를 한 손에 틀어쥐고 미주알 고주알 따지고 시시콜콜 간섭하면 그 나라는 제대로 굴러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 혼자서 모든 것을 다하는 독재자의 결제가 아직 떨어지지 않은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 모든걸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지도자를 우리는 독재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도자의 권리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서 보다 원활하고 상황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임의 원리. 따지고 보면 당연한 것이지만 처음부터 이러한 원리를 알고 실천한게 아닙니다. 이들도 나름 오랜 고민과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 비로소 만들어낸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대학교에 다닐 때 지방자치제가 실시되고 처음으로 구의원을 뽑게 되었습니다. 그랬는데 저희 골목의 하수구가 비만 오면 막혀서 참 힘들었습니다. 비가 오는데 물이 한꺼번에 하수구로 들어가니까 이게 막혀서 역류하고 그래서 물바다가 되고 ... 그랬는데 아무리 구청에 민원을 제기해도 나몰라라 하고 있습니다. 예산이 없다, 우리 권한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정말 우연히 선거운동을 하는 구의원을 만나서 그에게 우리 골목의 사정을 전달했습니다. 야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얼마 있지 않아서 골목에 하수구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수구를 크고 반듯하게 뚫었고 도로도 아스팔트 도로로 포장이 되고 그 다음부터 물난리를 겪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비로소 지방자치가 주는 혜택을 눈으로 보게 된 겁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그런 일에 신경을 쓰겠습니까? 시장이 그런 일에 신경 쓰겠습니까? 누군가 큰 일을 살핀다면 누군가는 보다 작은 일을 보다 자세하게 살펴야 합니다. 혼자서 다 못하니까 동역자들이 함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장관이 필요하고 국회의원이 필요하고 공무원들이 있는 것입니다. 혼자서 다 못하니까. 그런데 누구를 뽑아서 일을 나눌겁니까? 누구를 뽑아야 뇌물을 받고 치부하거나 몇몇 패거리의 이익을 공익보다 우선하지 않고 공평무사하게 공익을 위해서 진실되게 일하겠습니까?

 

하나님도 아니고 사람의 속을 제대로 들여다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용인술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제대로 쓰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어떻게 선발할지에 관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그 기준이 나와 있습니다. 몇천년 전의 일이고 나라와 사람도 다르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적용할만한 내용입니다.

 

이백만이라는 당시로는 거대한 민족을 이끌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광야로 나온 모세는 오늘 장인 이드로에게서 아주 효율적인 통치술을 하나 배웁니다. 바로 위임의 원리입니다. 사람을 세워 자기의 권리를 위임하고 그들이 간단한 것은 스스로 재판하고 다스리도록 하는 제도를 배운 겁니다.

 

라암셋을 출발한 이스라엘 민족은 신광야를 거쳐 르비딤이란 곳에 장막을 칩니다. 여기서 쳐들어 오는 아말렉을 격파하고 본격적으로 사막에 이스라엘의 이름이 퍼져나갑니다. 이 소문을 듣고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세를 찾아 왔습니다.

 

모세의 장인은 미디안의 족장입니다. 당시 모세는 호렙산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르비딤하고 호렙산하고 매우 가깝습니다. 어쩌면 르비딤에서 호렙산까지 이스라엘 민족이 퍼져 있었던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호렙산은 시내산이라고도 하는데 모세가 양을 치던 때에 자주 왔던 곳이고 이 산위에서 그가 하나님을 만났고 소명을 받았던 바로 그 곳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산 호렙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여기에 진을 친 모세는 아마 하나님을 만났던 생각, 장인의 양을 치던 생각, 아내를 만났던 생각,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이 들었겠지요. 엘리야도 여기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아마 호렙산은 신령한 산으로 여겨진 모양입니다. 설마 하나님이 호렙산에만 계시겠습니까? 여하튼 하나님의 산 호렙, 여기로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온 겁니다.

 

여기 본문에 이드로가 제사장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정치지도자가 종교지도자를 겸하는 관례에 따라 그를 제사장이라고 말한 겁니다. 그런데 본문의 ‘제사장’이란 말은 제사장의 뜻뿐만 아니라 ‘임금’이란 뜻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드로는 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족장이기도 합니다.

 

이 본문만 가지고는 이드로가 미디안 족 전체의 족장이었는지 아니면 미디안 계열의 한 족장이었는지는 모릅니다. 더구나 ‘장인’이란 말은 원문상으로는 ‘혈족, 혈연에 의해 형성된 관계“로 장인뿐만 아니라 처남이란 뜻도 들어 있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드로가 장인인지 처남인지는 명확하지 않은데 여러 정황상 우리 성경은 장인으로 생각합니다.

 

모세의 장인은 사막에 퍼져나가는 이스라엘 민족의 강성함과 여호와의 보호하심에 대해서 들었고 이제는 모세에게 처자를 보내도 되겠다고 생각해서 이들을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 만하면 자리를 잡았다고 본 것입니다. 그 전에는 아마 쫓기는 ‘탈주 노예떼들’ 정도로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장인의 입장에서 모세는 정말 별 볼일 없는 사위입니다.

 

애굽의 왕자였다고 주장하지만 자기 눈으로 본 것은 아니고 애굽의 지명수배를 받고 거지꼴로 도망 온 모습만 보았습니다. 돈버는 재주가 없어서 40년 동안 자기의 양떼를 치면서 자기에게 얹혀 산 애물단지입니다. 오죽했으면 자기 양떼도 아니고 장인의 양떼를 치다가 하나님을 만났겠습니까?

 

게다가 모세는 사실 말도 더듬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장애인입니다. 덩치도 크고 얼굴도 잘생겼고 머리도 좋고 학문도 무예도 뛰어나지만 그걸로 돈벌이는 못하는 도망자입니다. 그러다가 80 다늙은 나이에 어느날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일가족이 애굽으로 갔는데 사위는 계속해서 애굽으로 갔고 자기의 딸과 두 외손자만 돌아 왔습니다.

 

추측컨대 애굽으로 가던 도중에 천사를 만나서 할례문제로 죽을 뻔한 그 사건과 관계가 있는 모양입니다. 여하튼 딸과 손자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고 사위는 애굽으로 독립운동을 한답시고 갔으니 장인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걱정이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들리는 소문으로는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탈출했고 다른 애굽의 노예부족들까지 함께 데리고 나와서 지금 호렙산에 왔다는 겁니다. 그 사이에 애굽의 군대를 격파했고 사위에게 사명을 준 신이 보호해서 애굽에 재앙도 내리고 아말렉도 이기게 하고! 그 신이 생각보다 굉장한 신인 모양입니다. 여하튼 사위는 지금 잘나갑니다. 그런데 그 사위가 지금 백성들을 이끌고 호렙산에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에 이드로는 딸과 외손자들을 데리고 모세에게 온 겁니다.

 

미디안족도 역시 유목민이므로 가축떼를 먹이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다닙니다. 그리고 호렙산 역시 미디안족의 영역에 들어갑니다. 당시 미디안족은 시내반도 일대와 아라비아반도 서북부를 다니면서 가축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손님인지는 모릅니다. 아무래도 이백만이나 되는 숫자가 있으니까 모세를 주인이라 하고 장인을 손님이라 합시다.

 

이백만을 광야에 늘어 놓으면 얼마나 규모가 클까요? 르비딤에서 호렙산 주위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바글바글 했을 것입니다. 여하튼 여기에 장인이 왔습니다.
서로 기뻐하며 재회를 하고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통쾌하고 장엄한 역사를 말합니다. 장인은 사위의 무공담을 들으면서 기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제사드릴 제물을 가져와서 제사를 드리고 남는 것으로 모든 장로들을 초청해서 식사를 합니다. 이교의 제사장이 하나님의 광대한 능력에 순복합니다. 사위도 만나고 딸과 손자들이 사위와 합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너무 행복한 상태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기사는 여기서 시작합니다.

 

이 날은 아마 재판날이었던 모양입니다. 백성들 중에서 재판할 일이 있는 자들이 모두 모세에게 몰려와서 재판을 받습니다. 13절에 ‘재판’이란 말은 단순히 판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는 모든 행위까지 포함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판결만이 아니라 판결의 집행과 문제해결까지 다 한다는 뜻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가 무려 이백만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재판할게 많겠습니까? 그리고 재판의 결과를 이행하고 문제를 해결까지 해야 되니 정말로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렸을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처럼 이 동네에 번호표, 대기표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재판을 받으려고 전부 모세의 곁에 와서 서 있습니다. 재판 대기줄이 어디까지 늘어서 있는 광경을 상상해 보세요. 그러니까 차례를 기다린다고 줄을 서있다고 보아도 됩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이 재판받는 광경도 보고 그래서 사람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의 곁에 섰답니다.

 

원문의 뜻을 정확하게 반영하면 ‘계속해서 백성들이 모세에게 재판을 받기위해 하루 종일 나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백성들도 모세도 죽을 지경입니다. 아무것도 못하고 하루 종일 재판에 매달려 있습니다. 더구나 그 동네는 사막지역입니다. 광야, 약간의 풀과 나무 모래와 자갈 그리고 바위들. 모세야 당연히 나무그늘에서 재판했겠지만 백성들은 뙤약볕에 서 있었을 것입니다.

 

장인 이드로가 이 광경을 보았습니다. ‘우리 사위가 정말 겁나게 출세했구나!’ 이렇게 여기지 않고 그는 한눈에 이 제도의 문제점을 파악했습니다. 그도 미디안의 족장입니다. 한평생을 지도자로 보낸 사람입니다. 물론 미디안 족이 이스라엘 족만큼 큰 민족은 아닙니다. 게다가 그가 미디안 전체의 왕도 아닙니다. 그래도 지도자로서의 연륜이 있습니다.

 

14절에 “네가 이 백성에게 행하는 이 일이 어찌됨이냐 어찌하여 네가 홀로 앉아 있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네 곁에 서 있느냐”
아마 이드로는 모세에게 이 비능률적인 일에 대해서 뭔가 교훈을 주려고 한 모양입니다. 모세는 말합니다. 15절에 “백성이 하나님께 물으려고 내게로 옴이라” 계속해서 “내가...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알게 하나이다”

 

이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세는 자기의 재판이 백성들,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알게 하는 일로 여긴 것 같습니다. 율례는 십계명같이 성문으로 정해진 법을 말하고 법도는 하나님의 율례에 비추어 합당한 도리를 말합니다. 성문법과 관습법, 인간의 도리 이렇게 보아도 되고 하나님의 법과 그 법에 대한 실제적인 적용이렇게 생각해도 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때는 아직 십계명이 나오기 전입니다. 모세는 이제 호렙산에 올라가서 십계명을 받게 될 겁니다. 그래서 지금은 뭐든 하나 하나 하나님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제대로 명확하게 정해진 규정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게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섯불리 판단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더 힘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유권해석을 내놓을 사람은 모세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하나님과 만나서 대화하는 것도 모세니까 다른사람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번잡하고 힘들지만 내 한몸 희생해서 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공의와 법도를 세우자는 거룩하고 숭고한 사명으로 생각하고 재판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이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도를 잘 모르니까 원칙을 설명하고 그게 실생활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시범도 보이고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닐까요?

 

80대의 모세가 노인이라고 어른이라고 젊잖게 앉아서 재판을 합니다. 자기 딴에는 나말고 누가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파할 수 있으랴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40년을 처가살이 하던 모세가 지금 일국의 대통령이 되어 장인 앞에 앉아 출세한 모습으로 있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대통령보단 왕입니다. 세습은 할 수 없는 왕. 성과 속의 권리를 한손에 잡고 있는 종신 대통령? 이드로 역시 사위가 잘하고 있는지를 보려고 왔겠지요?

 

그런데 모세가 하는 일이 영 미덥지 못합니다. 40년 만에 정권을 잡은 모세가 영 정치 감각이 떨어집니다. 아무래도 초보자니까 부족한게 한두개가 아닙니다. 노인의 눈에 모세는 아직 풋내기입니다. 이백만에 한명밖에 없는 재판관은 정말 비능률의 극치입니다. 옛날에 통치의 대부분은 재판입니다. 사사들도 하루 종일 종려나무 아래 앉아서 재판했다고 합니다.

 

이드로는 솔직하게 바로 이야기합니다. “네가 하는 것이 옳지 못하도다”
“너와 또 너와 함께 한 이 백성이 필경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네게 너무 중함이라 네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
너 혼자서 하면 너도 힘들고 백성들도 힘들고 결국 힘 다 빠지고 기다리던 백성들 사이에서 불평이 일어나고 나중에는 통치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겁니다.
‘옳지 못하다’는 말은 도덕적으로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능률면에서 좋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우리가 세속화는 극력 경계해야 하지만 막무가내식의 종교적인 열심도 경계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보시기에 악해서가 아니라 더 많은 능률을 올리고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다른 방법이 있는데 나는 이게 좋으니까 이대로 한다고 고집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 이런식으로 한번 나누어 봅시다. 절대로 하지 말라고 성경에 나와 있는 일, 반드시 하라고 나와 있는 일, 이런 것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게 시행하면 됩니다.

 

두 번째는 성경의 명령은 아닌데 성경본문에 그 상황에 대한 언급이 있는 일, 다른 기사에 상태가 언급된 일, 이런 일은 유추해서 적용합니다. 당연히 명문화된 명령보다 덜 중요하겠지요. 그러면 문제는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일입니다. 성경에 아무런 명령이나 언급이 없습니다. 그때는 성경의 원리에 비추어 판단해야 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될 것이다’ 또는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시행하는 겁니다.

 

가령 이런 걸 봅시다. 교회당 안에서 식당 또는 서점 영업을 하는 것이 가하냐의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실제로 많은 교회에서 이렇게 하고 있기는 한데 이게 과연 하나님의 뜻에 합한 일일까요? 성경본문에는 교회에서 식당을 개설하고 서점을 열고 하는 일에 관한 아무런 지침이 없습니다.

 

다만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채찍을 휘둘러 짐승들을 내어 쫓으시고 환전상의 상을 뒤엎은 기록이 나옵니다. 내 아버지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인데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다고 하는 기록을 보고 우리는 ‘아, 교회에서 영업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구나’ 이렇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 같은 기사를 보고도 교회 안에서 장사하는데 전혀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다. 이들은 나름대로 뭔 생각이 있겠지요. 여하튼 이런 일이 우리 성도의 삶을 규율하는데 어려움을 줍니다.

 

이런게 또 있습니다. 가령 저는 목사의 자격요건을 규정한 성경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라는 글을 보고는 여목사를 부정합니다. 분명히 남편이라는 말이 있으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글을 보고도 여목사에 대해서 전혀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만 명확하게 여목사는 안 된다는 규정이 없다고 해서 여목사를 긍정하는 것은 아닌데도 저들은 ‘규정이 없쟎아’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게 어려운 일이지요. 그러니까 이런것들은 하나님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일일이 재판으로 규범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더 다른사람에게 맡기기가 곤란합니다. 이 사람들이 잘 모르니까.
그래서 이런 식으로 혼자서 모든 일들을 다 떠안고 재판을 하면 결국 모세의 기력이 점점 쇠하여져서 크게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제가 이번에 좌광천 순례길을 걸으면서 느낀 점이 있는데 아무리 목적이 선하고 그래도 너무 사람의 육체를 힘들게 하는 일, 이것 때문에 장기적으로 쇠해서 죽을지도 모르고 적어도 큰 병이 걸릴 수도 있는 정도의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번에 폭염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열몇명이 사망했고 천여명의 환자가 발생했다는데 이 몸뚱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곳에 사용하라고 받은 것이므로 이걸 메뉴얼대로 잘 사용하고 아껴서 오래 오래 효율적으로 사용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너무 무릎 꿇고 기도해서 늙고 난 다음에 관절염 때문에 고생하는 권사님들을 제가 몇분 압니다. 그래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못하게 합니다.

 

금식기도 하다가 돌아가시는 분도 있고,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된 분도 있고 , 목사님인데 40일 금식기도하고 심방 잘 갔다 와서는 그때부터 일어서지를 못한답니다. 수십년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교회 가서 앉아 있다가 전립선암이 걸린 분도 있습니다. 좀 일어서서 운동도 하고 휴식도 가지고 그래야 하는데 일년 열두달 하루 종일 책상에만 앉아 있으니 정말 곤란합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라’고 우리에게 건강한 육체를 주신 하나님은 이 육체를 우리가 사용법대로 잘 사용해서 오래 오래 효율적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이 몸을 잘 쓰기를 바라십니다. 함부로 굴려서는 곤란합니다.

운동도 너무 무리하게 해서는 곤란합니다. 뭐든지 적당하고 정해진 사용법대로 씁시다. 우리의 몸을 쓰면 쓸수록 좋아 지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일정 이상 사용하면 닳아서 교체도 해 주고 기름도 쳐야 하고 열이 나면 식혀도 주어야 하는 기계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빨도 빠지고 눈도 나빠지고 장기도 노쇠해 지고 뇌세포도 죽어가고 피부도 노화하고 쭈글쭈글해지고 간이니 위니 신장이니 방광이니 인대니 사람의 육체는 우리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섬세하면서 또 약합니다.
그래서 안식도 필요하고 그래서 안식일도 생기고 그런 겁니다. 우리나라사람들 OECD나라들 중에서 가장 노동시간이 길다고 하는데 이래서는 안됩니다.

 

물론 시급을 너무 적게 주니까 먹고 살려고 더 오랜 시간 일하게 되는 점도 있고 회사에서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해야 되는 점도 있겠지만 나라도 사업주도 개인도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이거 계속 이야기하면 설교가 안 될 판이니까 넘어 갑시다.

 

이드로는 혼자서 다 해서는 안되고 자기가 방도를 가르쳐 준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래놓고 19절에 “하나님이 그대와 함께 계실지로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축복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의 마음에 임하셔서 그로 하여금 자기의 말을 잘 듣도록 해 달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모세가 이드로의 조언을 불쾌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장인이라지만 적은 마을의 추장이 거대한 나라의 통치자와 같을 수는 없기에 약간 시피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이교의 제사장이 하나님의 능력에 관해서 뭘 안다고 조언하느냐고 비판적으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모세 자기의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통치자의 권위 약화와 권력의 감소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모세에게도 좋고 백성들도 좋고 하지만 백성들이 꼭 모세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재판을 받게 되면 권력누수가 오지 않을까요?
이런 분위기 속에서 모세가 아니라 엉뚱한 사람들이 백성들의 인기를 끌어서 그들의 신망을 얻어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요? 안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이 곧아서 말안듣기로 유명한데 이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닐까요?

 

중앙정부의 위령이 더 이상 지방에 먹히지 않는 일이 생겨서 일을 추진하는데 비능률적이게 되지 않을까요? 혹시 이것 때문에 지파의 통일이 깨어 지거나 이민족통합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요?

이 어리석은 이들이 나 말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기가 어려운데 이들에게 과연 하나님의 뜻을 정하고 그걸 적용하는 일을 맡겨도 될까?

 

등등의 각종 의문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이드로가 아무리 능률적인 선진 시스템을 말해줘도 모세로서는 정치적인 고려를 해야 되기 때문에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유불리를 따져야만 하는 큰 사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셔서 그로 하여금 지혜로운 생각으로 인도해 달라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가 자기의 말을 오해하지 않고 잘 듣게 해달라는 거지요.

고신 신대원에서 뺏지에 달고 다니는 구절이 있습니다. 코람 데오, 하나님 앞에서.

 

19절에 “그대는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있어서” 여기에 나와 있네요. 하나님 앞에 있어서. 우리가 항상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 바로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입니다.

이드로의 말하는 기술이 상당합니다. 모세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아주 완곡하게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방도만 봅시다.

 

첫 번째는 먼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만일 지금처럼 모세가 재판으로 사건 하나 하나 별로 하나님의 뜻을 적용하고 알게 한다면 수십년이 걸려야 비로소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지 말고 학교에서 지식을 가르치듯이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가르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구체적인 사례별로 판단하지 말고 먼저 원칙을 정해주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율례와 법도 안에서 해야 할 일과 가야 할 길을 가르치라는 겁니다. 물론 아직 십계명을 정식으로 수여받지 않았으므로 율례와 법도를 규율해서 정하고 가르치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겁니다. 그러면 그건 모세에게 가져와서 모세가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정하면 되는 겁니다.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가르치는 것은 백성들에 대한 신뢰가 먼저 있어야 되는 일입니다. ‘저것들은 아무리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가르쳐도 도저히 알아 먹지를 못할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에게 가르치면 저들도 충분히 알아 듣고 분간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정하신 대로 살 수 있을거 라는 확신이 먼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통치자가 국민을 우습게 보고 하등한 동물로 생각하고 먹이만 적당히 던져주면 다른건 다 넘어간다고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백성들 중에서 신실하고 지혜로우며 정의감이 충만한 이를 뽑아서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뽑으라는 겁니다. 인사가 만사라고 하지만 그런 적재적소의 인재발탁이 쉬울 리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행정조직에서 볼 수 있는 피라미드형의 관료제가 여기에서 제안되고 있습니다. 이드로는 개인의 능력을 위주로 하는 새로운 관료들을 뽑으라고 하는 겁니다.

무얼 기준으로 삼는지 한번 봅시다. 이드로가 말한 기준은 “능력이 있는 자”입니다. 옛날 성경에는 ‘재덕이 겸전한 자’라고 했습니다. 재주와 덕? 아니면 재물과 덕? 그가 말하는 능력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둘째로 진실하며
셋째로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

 

명문대 학사학위를 가진자로서 행정고시를 통과한 자로 공무원 결격사유에 해당하지 않는자 이런게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진실되고 불의한 재물을 싫어하는 자.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냥 하나님을 무서워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경외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경외함으로 지키고 또 백성들에게 지킬 것을 요구한다는 말입니다. 죄를 지어서 하나님이 두려운게 아니라 하나님의 눈에 혹여 잘못된 삶을 살까 두려운 것입니다.

 

진실하며 란 말은 사람이 진실하여 신뢰할 만하다는 말입니다. ‘저 사람은 믿을 수 있다’ 이런 말입니다. 우리가 잘 사용하는 ‘아멘’이란 말입니다. “정녕 그렇게 될지어다” 아멘,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그게 바로 아멘입니다. 진실이란 말이 바로 아멘이란 말입니다. 절대로 거짓을 저지르지 않고 신실하고 믿을 수 있는 그런 사람

 

세 번째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라는 말은 남에게서 재물을 탈취하는 것을 싫어하는 자, 남에게 뇌물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남으로부터 돈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이가 있을까요? 우리가 댓가성 이야기 많이 합니다.

 

이걸 받았는데 아무런 댓가를 준게 없어서 뇌물이 아니다?  정말 그렇다면 당연히 뇌물이 아니겠지요. 단순한 선물이겠지요. 그러나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정말 그럴까요? 지금 당장은 댓가가 없어도 언젠가는 뇌물이 발목을 잡을 겁니다. 그런거는 따로 스폰이라고 한답니다.

 

미리 친해두면 좋을 사람을 정해서 평소에 뇌물을 줘가면서 친해 두는 거지요. 유사시에 힘을 이용하기위해서 미리 미리 약칠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찾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 세가지를 갖춘 자를 뽑아서 백성의 천부장에서부터 십부장까지를 삼아야 한답니다.

 

자, 그들을 뽑아서 재판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재판할 수 없는 큰 일이라면 상급자에게 가져오고 그들로서도 도저히 안될 때는 모세가 재판하는 것이지요. 또 그렇지 않더라도 아주 큰일이라면 처음부터 모세가 재판하게 하고 비교적 경미한 일이나 소소한 일은 천부장부터 십부장까지가 재판하게 하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모세가 한결 쉽게 정무를 볼 수 있다는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드로는 이 제도의 시행을 위해서 모세의 수용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재가를 들고 있습니다. ‘인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원문상으로는 ‘인가’가 아니라 ‘명령’입니다. 그러니까 인가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신청하면 그것을 승인하는 약간은 수동적인 행동이지만 이드로가 말하는 것은 단순한 인가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셔야 이 제도가 시행될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제도의 최종결정권자는 모세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시살 종종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인간의 장인 누가 바로 최종결정권자라고 생각하고 이 제도가 하나님의 눈에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좋아하는 제도라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면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는 이가 요즘 있을까요?

 

아마 없을 겁니다.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를 채택하면서 이런 경향은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정치꾼들은 정권을 위해서 대중들의 입맛에 영합해서 진정 옳고 바른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대중들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들의 뇌리 속에 다수는 항상 옳다는 생각, 대중은 항상 진리라고 하는 생각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하나님이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신다는 것을 잘 알아서 하나님의 눈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며 부당한 이익을 취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 정치꾼들이 뇌물을 주고 받을 때 돈인줄 모르게 사과박스에다 넣어서 주고 받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이 볼까봐 그렇게 한 것이지요. 그런데 정작 그들은 사람들의 눈은 신경 썼지만 하늘의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말이 항상 비참해 지는 것이지요.

 

24절에 보면 “이에 모세가 자기 장인의 말을 듣고 그 모든 말대로 하여”라고 해서 즉시 그 제도를 시행한 듯이 되어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모세가 이후에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율법체계가 완성되고 난 다음에야 관료들이 뽑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모세는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난 다음에야 이 제도를 시행했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들이 인간의 지혜로, 우리 생각으로 이게 좋을 것 같아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성급하게 무슨 일을 하게 되면 당시에는 몰랐던 부작용들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위해서 하나님에게 먼저 기도로 묻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허가도 하시고 불허도 하시지만 지혜를 주셔서 뭔가 더 좋은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게 바로 신본주의이지요. 우리마음대로 하면 좋을 것 같지만 우리의 지혜가 그렇게 뛰어나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은 한치 앞도 제대로 살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능력있는 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모세가 다 알아서 뽑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무려 이백만이고 그 중에서 공무원이 될 수 있는 성인남자를 전체의 1/4로 잡아도 무려 50만인데 이들에 대해서 모세가 어떻게 다 알 수가 있을까요

 

그래서 그런 이들을 모세가 직접 선택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스스로 그런 자를 추천하게 해서 모세가 이를 추인하는 형식으로 백성의 우두머리를 뽑았답니다. 신명기1장13절에 나옵니다.
이렇게 본다면 모세가 다스리는 이스라엘 사회는  원시 민주주의를 시행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뽑힌 이들은 스스로 재판할 수 있는 일들은 스스로 재판하고 안되는 것은 모세에게 가져왔답니다. 이드로가 처음 제안한대로 된 겁니다.

 

그리고 재판이란 말에서 우리는 단순히 재판만 한 걸로 여기지만 이 말에는 판결뿐만 아니라 다스림이란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재판도 하고 모세의 정책을 보조하기도 하고 전쟁이 나면 군사지휘관도 되고 그렇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모세가 그 장인을 보내니 그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드로의 고향은 사실 이스라엘이 진치고 있는 곳과 매우 가까운 지역입니다. 이스라엘은 이곳에서 무려 11개월 이상을 머물렀고 그 사이에 이드로의 조언이 많이 도움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이드로의 후손들은 겐 족속으로 나중에 이스라엘가운데에 발견됩니다. 그리고 율법을 준수하는 자들이 됩니다.

오늘 설교에서 우리가 배워야할 점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인고로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하기는 곤란합니다.

 

분명히 이 모든 일을 나 혼자 다하기란 불가능해서 다른이에게 뭔가 좀 맡겨야겠는데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나의 권리가 줄어드는 것 같아서 남에게 일을 나누어 주지 않고 나 혼자서 다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남이 나만큼 잘할 수 있다는 생각도 안듭니다. 신입에게 일을 맡기려고 해도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과연 저 사람이 일을 잘해낼 수 있을까?

 

그래서 이것저것 아무것도 놓지 못하고 혼자서 그 모든 짐을 안고 끙끙댑니다. 모세처럼 지도자의 위치에서 일을 분담하는 것 뿐만 아니라 교회나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도저히 안심이 안된다? 그래서 끙끙대면서도 그 일을 놓지 못합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9급공무원의 임면을 직접 챙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나라가 안돌아 갈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뭔가 놓아야 될 것은 놓고 남에게 나누어 위임할 것은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회장만있는게 아니라 부회장도 총무도 회계와 서기도 있는 것입니다. 제직회에서도 각종 부서장이 있습니다. 부장도있고 차장도 있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핀트가 안맞는 것일 수도 있는데 교사에 성가대원에 전도특공대에 권찰에 해외선교까지 모든 일에 다 참여하려고 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기력이 그렇게 넘쳐나지 않습니다. 우선순위를 정해서 한 개만 하세요. 그리고 남들에게도 기회를 주세요.

 

우리는 안식을 이제까지 너무 홀대했습니다. 그러나 안식은 결코 홀대받을 만큼 별 볼일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엿새동안 일하시고 제 칠일에 쉬셨다는 구절은 안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래놓고 우리가 안식하지 않고 쉬임 없이 일만 한다면 그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기독교도들에게 특히 안식이 중요합니다. 주중에는 생계를 위해서 일하고 주말에는 교회를 위해서 일하고 그는 언제 쉬어야 합니까?

 

컴퓨터에서 cpu가 열이 나면 좀 쉬어 주어야 합니다. cpu의 열을 식히려고 쿨러가 달려있기는 하지만 제일 좋은 것은 좀 꺼두는 겁니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열이 식어 있습니다. 그러면 또 열심히 작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열이 나는데도 계속해서 cpu가 돌아간다면 그 cpu가 달려있는 메인보드가 나가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컴퓨터가 고장이나서 작동이 안되고 그러면 컴퓨터를 고치는것보다 새로 사는게 나을 수 있습니다. 메인보드의 가격이 본체의 가격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메인 보드에 cpu도 그래픽카드도 달려있기 때문에 가격이 비쌉니다. 노트북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열이 너무 심하게 나면 식혔다가 사용해야 합니다. 식히려면 쉬어주어야 합니다. 당연한 말이지요.

 

각 부서마다 책임자가 무엇 때문에 있습니까? 일을 맡기려고, 우리는 다 같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동역자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을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내가 이 일을 하면 저 일은 다른이게 맡겨야 합니다.

유능한 일꾼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유능한지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유능한’ 이 무엇인지를 잘 정리해 두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진실 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 하는자.
말은 간단하지만 실천은 지극히 어렵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속마음까지 알아낼 재주가 없습니다. 우리는 드러난 행동만을 보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잘못 판단하는 경우도 많지요.
그래서 누구를 세워야할지를 놓고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기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주의 선하신 뜻대로 우리를 인도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비록 내가 책임자로 있는 동안에 뭔가 업적을 남기고 싶어서 성급하게 무슨 일을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성급하게 굴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일에 오케이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허수아비나 명예 주님이 아닙니다. 그는 실제적으로 우리를 조련하고 조종하며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지혜가 부족할 때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위기를 헤쳐 나가도록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최고라는 말도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기도가 최고입니다. 모든 일의 앞에 반드시 기도할 것입니다. 인간적인 고려와 유불리를 떠나서 하나님의 뜻을 겸손하게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정이 비록 인간의 눈에 안좋아 보인다 해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고 그대로 나가야 합니다.

 

서로 힘을 모아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 재능에 따라 각자 일을 맡아서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공동체, 상대방의 잘남을 질투하지 않고 우리는 다같은 동역자라고 생각하고 서로 모자라는 점을 보완하며 도와서 그리스도의 온전함을 이루려는 공동체, 노인의 연륜과 젊은이의 패기가 조화를 이루어 상승작용을 이루는 공동체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진실되며 불의와 부패를 미워하며 뇌물을 받지 않고 진리를 굽히지 않는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멋진 공동체가 멋진 개인을 만드는지 멋진 삶들이 모여 멋진 공동체를 만드는지 무엇이 앞이고 무엇이 뒤인지 따질 수 없습니다. 이 둘은 항상 함께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우리 사회가 우리 나라가 이런 공동체가 되면 좋겠고 멋진 삶을 사는 좋은 성도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제 기온이 제법 내려갔습니다. 바람이 세게 불때는 서늘함 마저 느끼게 됩니다. 이제 기도해야 할때입니다. 기도하기 정말 좋은 때입니다. 공부하기 좋고 일하기 좋고 운동하기 좋은 때입니다. 멋진 삶 멋진 공동체를 위해서 나아갑시다. 하나님의 가호를 믿고 그의 뜻을 따르며 나아갑시다. 주가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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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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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돌이켜보면 부족했던 것이 항상 기도가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 항상 기도하라! 매일 기도하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먼저 앞서 나가지 않고,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런 참다운 겸손함을 주님께서 사랑하시고 아껴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사람들의 말을 잘 가려 들을 줄 알고, 다수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보다는, 올바른 결정을 잘 내리면서 살아간다면 참 좋겠다 싶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테니까요. 그보다는 하나님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라고 진심으로 물어보면서 살아가는 것이 참 소중한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작은 신앙이라도 잘 간직할 수 있기를... / 2016. 08.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