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이혼에 관한 새로운 제안(말라기2:10-16)/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9. 7. 02:14

 

이혼에 관한 새로운 제안 (말라기2:10-16)

 

예전에 제가 본 뉴스입니다. 그 기사를 그대로 재구성해서 전해 드립니다.
20년 전에 이혼한 부부의 처지가 이혼당시와 지금, 극적으로 뒤바뀐 기구한 사연 전해주시죠?
네, 20년 전 조강지처를 버린 부자 남편은 지금은 무일푼 신세가 됐고, 반대로 버림 받은 아내는 위자료로 받은 땅을 불려서 지금은 부동산 갑부가 됐습니다.

 

67살 김 모씨는 지난 1985년 바람을 피우고 새 살림을 차린 뒤 아내 64살 박 모씨와 이혼했습니다. 당시 김씨는 사업에 성공해 상당한 자산가였는데요, 아내와 자녀 둘을 버리고 대신 충남 당진과 서울 개봉동에 갖고 있던 땅을 위자료조로 아내에게 넘겨줬습니다.

그 뒤로 이 두 사람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남편은 거듭된 사업 실패로 재산을 탕진했고, 새 아내와 새로 얻은 자녀들에게도 결국 버림을 받았습니다.

 

반대로 아내는 위자료로 받은 땅을 가지고 착실히 재산을 불려 지금은 수백억대의 부자가 됐습니다. 결국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남편 김씨는 "이혼할 때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땅을 넘겨 줬다"고 주장하며, 전 아내 박씨를 상대로 땅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냈습니다.

 

분명 억지 주장이었지만 재판부는 그래도 한때 부부였던 이들에게 조정을 권고했습니다. 재판부는 "괘씸한 전 남편을 용서하기 힘들겠지만 어쨌든 한때 부부의 연을 맺었고 아이들의 아버지인 만큼 도움을 준다면 그 복은 자식들이 받게 될 것이라"며 박씨를 설득했습니다.

 

결국 박씨는 재판부의 조정안을 받아들여 김씨에게 4천만원을 4번에 걸쳐 나눠서 주기로 합의했습니다. 이렇게 4번에 나눠서 주는 것은 김 씨가 받은 돈을 한꺼번에 탕진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여러분
오늘 저는 이혼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가 참 어렵다고 이야기 합니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교회가 다방보다도 많다고 하는 시점인데도 왜 이렇게 이 나라에 부정과 불의, 그리고 환난과 억울한 일이 많이 생기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표시합니다

 

그것뿐입니까?
이들은 왜 나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느냐고 불평합니다.
그리고는 심한 경우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저 세상으로 다시 나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 잘못도 행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까요?

사실 우리 기독교도들은 예수님의 수많은 명령을 지켜야 됩니다. 그냥 예수만 믿으면 무조건 죄를 사함받고 복을 받으며 부자가 되고 성공하고 출세하고 병고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즉 예수의 제자들은 수많은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남녀간의 관계에 있어 이혼하지 않을 의무도 지고 있습니다
뭐 어떤 분은 경우에 따라서는 이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지만
우리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고 갚아 주실지는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린다면 성경에는 간음과 종교가 다른 부부간의 경우 이외에 이혼해도 된다는 구절이 없습니다.
물론 이스라엘백성들이 이혼증서를 주고 이혼한 경우가 있다고는 나와 있지만 그건 그네들 풍속이고 그게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간음한 연고 이외의 이혼을 금하시고 심지어 이런 여인에게 장가드는 것도 간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서신에서는 여기에 서로 종교가 다를 때 이혼하는 것을 허용합니다. 문자 그대로 허용이지 이혼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교도를 개종시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실지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이교도라고 해서 무조건 이혼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허용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갈라서려면 갈라서라. 이외에 이혼은 허용이 되지 않습니다. ‘살다보니 성격차이 때문에 저 남자가 저 여자가 마음에 안들더라’ 이런 식은 곤란합니다.

 

먼저 본문의 바로 앞부분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형제를 배신하는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언약공동체로부터 제하여 버리겠다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조강지처를 버리고 학대하는 일을 행한다는 겁니다. 여기 보십시오.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게 하는도다”

‘이교도와 결혼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러니까 이교도와 이혼한다는 게 아니라 결혼하는 겁니다. 이제는 조강지처를 버리는 악까지 행한다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래서 가련한 여인들의 눈물과 호소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하나님의 제단을 가리 운다고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사이를  가리 우기 때문에 저들의 기도를 하나님이 듣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가련한 여인들의 이런 눈물과 호소를 외면치 않으십니다. 그리고는 무슨 벌을 주시는고 하니“다시는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시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의 벌을 주신답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겠다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배할지라도 이미 그분하고는 상관이 없게 되었단 말입니다

 

왜 입니까? 불쌍하고 가련한 여인들의 호소가 이미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덮어버려서 그 사이를 가리워서 우리의 간구가 아버지께 전달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라기 선지자는 주전 430년경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페르시아에서 포로로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 온지 100년쯤이 흐른 시절의 선지자입니다. 어떻게 보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기도 합니다.

 

처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에서 풀려나 고향땅에 와서는 우리가 포로생활을 한 것은 하나님의 법과 율례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정말 모든 면에서 새로워 지고 바른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지만 100년이나 흐르게 되자
그만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오게 되어서 죄악을 저지르고 궤사를 행하는 상태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이전에 그들이 망하기 전의 상태보다 더 나쁘게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성전에 제물을 드리고 예배를 드리는데도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지지 않느냐고 불평하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회의를 드러냈습니다. 그러면서 백성들의 악은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악 중에서도 특별히 믿지 않는 이방여인과 결혼하는 것과 이혼하는 것, 이 두가지의 범죄가 두드러지게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제가 말씀드립니다. 믿지 않는 이방여인과 결혼하는 것을 하나님은 싫어하시지만 결혼하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이 매우 기꺼워하십니다. 만일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해서 하나님앞으로 인도한다면 그 사람은 결혼함으로 배우자를 하나님에게로 인도한 아주 큰 일을 한 겁니다.

 

다만 한가지 걱정되는 것은 배우자의 신앙에 대해서 끝까지 책임감을 가지고 잘 인도해야 할 텐데 보통 사람들은 시간이 변하고 급하지 않게 되면 생각이 바뀌기도 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되고 그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기야 사람이 그 정도 했으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하실 것을 믿고 우리는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지요.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이에 본문의 저자 말라기 선지자는 너희가 그따위로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서도‘ 어찌하여 하나님이 내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는고, 어찌하여 나의 제사는 받으시지 않는고 라고 하나님을 원망하느냐’라며 질책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저는 이 두가지 죄악가운데서도 이혼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려고 합니다

우선 13절에 보시면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다시는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시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하나님에게 왜 제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저의 헌물을 돌아보지 아니 하십니까 라고 항의합니다

 

14절 중반부에 하나님은 그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찍이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렇습니다
네가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워서 한 약속을 저버렸기 때문에
내가 더 이상 너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니라.

 

우리가 결혼식을 할 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결혼식을 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이거나 사정이 여의치 못한 경우에 적은 사람 앞에서 하거나 아니면 간단하게 두사람만의 혼인신고만으로 결혼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형식이야 어떻든 그 모든 결혼의식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증인이 되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보이지도 않고 결혼식에 간섭지 아니하시는 것 같지만
그는 우리의 모든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시며 우리의 맹세 ‘영원히 서로 사랑하며 버리지 않겠다’는 바로 그 맹세의 증인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혼한다면 하나님이 증인으로 서신 그 소중한 언약을 어기는 것이며 이것은 증인되신 하나님을 멸시하며 무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며 증인은 그 약속이 지켜질 것을 보증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방적으로 그 약속을 파기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입니다

그래놓고 하나님에게 복을 달라고 빌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그는 지금 복이 문제가 아니라 크나큰 벌, 약속을 어긴데 대한 벌과 하나님을 멸시한 신성모독의 죄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할 처지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이혼은 결혼의 상대방을 억울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이들의 하나님이시지만 특별히 가난한자, 억압받는자. 억울한자.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이 세상의 구석구석에서 힘있고 부유한 자들이 자기의 힘과 부를 억압받는자, 억울한자,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를 돕는데 사용하는가 지켜보시고 그들이 주어진 힘과 부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행하는데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빼앗아서 다른 이들에게 ,자기의 뜻을 제대로 수행하는 자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청지기의 비유에서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억울하게 하는 고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드리는
제물을 받지도 않겠다고 하십니다.
신자가 남을 억울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과 자기 사이의 교통이 단절되도록 만드는 큰 죄악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남을 억울하게 한다면 우리와 하나님과의 사이만 막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사이의 관계마저 막는 것입니다.
“예수믿는 사람이 뭐 저래.........그런 예수 너나 믿으라”

 

그래서 우리 믿는 이들은 모든 일에 있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특별히 요즘은 교인들이 잘못하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흠을 찾아내려고 하기 때문에 특별히 더 조심해야 합니다. 제가 항상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사실 성도들은 좀 억울하게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이건 뭐 매사에 조심해야 되고 약간의 손해를 보는거는 당연하게 여겨야하고 항상 남을 도와야 하고 배려해야 하고 ....아, 신경질 나’

 

제가 이런 병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강박증’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마시고, 병 걸릴 정도까지는 생각하면 안되고 다시 한번 자신의 생활을 돌아보자는 말입니다.

 

지금 당장은 좀 손해보는 것 같고 남을 짓밟고 배려하지 않고 나만을 위해 사는 사람보다 못한 것 같아도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다 아시고 반드시 삼십배 육십배 백배로 갚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상급을 기다려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마 5:23,24).
여기서 ‘원망들을만한 일’은 적의나 원한같은 큰 일뿐만 아니라 단순한 의견대립까지도 포함한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답답한 일입니다. ‘의견대립도 안돼?’ ‘그럼 우리는 무조건 네네만 해야 돼?’

 

물론 그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의견을 반대해서 대립하는 경우에도 정도라는게 있습니다. 인격적인 모독이나 조롱이 들어가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반대도 너무 극렬하게 하거나 나머지 사람들과 편을 먹고 반대하면 상대방은 왕따를 당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드럽게 상대방의 마음이 상하지 않게 반대하라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예할 때 혼자서 아니오하는 광고도 있지요. 반대할 때도 남을 배려하면서 그 사람의 인격을 짓밟고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고 그리고 받아 들이는 쪽에서도 여유를 가지고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헌물을 돌아보시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어려서 취한 아내(본처)를 버린 까닭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본처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서약하고 취한 아내니, 그를 버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맺은 언약을 배반하는 죄악입니다. 창 31:49,50; 마 19:6; 잠 2:17 참조.

 

어려서 취한 아내를 버리는 것은 남을 억울하게 하는 것 중에서도 가장 크게 억울하게 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 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해서 안되는 죄 중에서도 가장 큰 죄입니다.

그(아내)에게 “궤사를 행함”은, 여기서는 이혼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운 약속을 어긴단 말입니까?

 

이는 증인으로 서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을 뜻하는데 과연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할 만큼 능력이 있는 존재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분노의 채찍도 견딜 수 있을 만큼 강합니까? 아니요 아니요, 우리는 너무나 약해서 하나님의 입김한번에도 패가망신하는 연약하고 불안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후~ 불어버리면 우리가 쌓아놓은 종이돈이 날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버스를 타고 가다가 만원권 지폐 수천장이 하늘을 날아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오토바이에 돈다발을 실었는데 이 사람이 누런 봉투에 돈을 싣고 오토바이에 그걸 묶고 가다가 종이가 찢어져서 돈이 날아갔는데 삽시간에 도로가 아비규환이 되었습니다. 달리던 차들도 서고 사람들이 내려서 정신없이 서로 밀쳐가며 돈을 줏는데 저도 뛰어내려서 돈을 줍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학교 식당에서 짜장면 한그릇에 200원 냉면 한그릇에 250원 하던 시절에 만원 몇장만 주우면 몇달 밥값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 어’ 하는 사이에 돈을 다줏었더라고요. 제가 돈이 싫어서 안 내려간건 아닙니다. 그냥 어쩌다 보니 못 내려간거지요.

 

어떤 아주머니는 번개처럼 움직여서 지폐를 한웅큼을 줏었는데 줏다보니까 돈을 잃어버린 주인발치까지 왔는데 이걸 모르고 주워서 고개를 드니까 주인이 보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주운 돈을 주인에게 돌려주는데 무슨 원수를 보는 듯 하더라니까요. 마치 강도에게 자기 돈을 강탈당하는 사람처럼. 지금도 그 눈빛이 선합니다.

 

당연히 멀리 있던 사람들은 그 돈을 주워서 도망을 갔고 그날 그 사람은 이삼천만원을 잃어버렸답니다. 돈이 일단 바람에 한번 날아가니까 정말 되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아등바등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키셔야지 그렇지 않고 내가 아무리 인색하게 굴어도 이게 지켜지지가 않습니다. 옛 어른들이 하는 말씀, 돈에 눈이 있다고 너무 따라가면 도망갑니다. 안 그런척 하고 있어야 돈이 들어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성립시킬 영을 얼마든지 창조하시려면 창조하실 수 있었으나, 그는 처음에 일남 일녀를 지어 서로 합하여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창 2:24; 마 19:4-6).곧, 그가 일남 일녀를 지으신 목적은, 그들이 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본문에 "하나"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둘이 합하여 하나 된다는 의미에서 하나이라는 뜻입니다. 부부가 서로 갈리지 않고 하나됨에 있어서 가장 이상적일수록,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합치하는 것입니다.

 

일남 일녀가 한 몸을 이루는데 있어서 형식뿐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 화합하여 일치함이 참될수록, 거기서 나는 자손이 경건하다는 의미를 우리 본문이 가르칩니다. 경건하다는 말이 단순히 엄숙함만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엄숙하기만 한 자녀가 그렇게 매력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의 경건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부모를 섬기는데 그리고 학문이나 사물에 접근하는데 엄숙하다는 말입니다. 곧 뛰어나고 효성스럽고 하나님을 잘 믿는 아이가 된다는 말입니다.

 

부부가 서로 화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그러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가 자라면서 더 경건하고 더 뛰어나게 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자녀를 위해서 과외다 학원이다 보낸다고 동분서주 할 필요 없이 서로 사랑하며 아끼는
좋은 가정을 만들어서 자녀를 키우는 것이 그러한 모든 노력보다도 더 크고 확실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 라는 말씀의 의미는, 남을 학대하는 죄악을 심하게 범하기 때문에 그 악이 마치 그의 옷을 가리우고 있는 것처럼 그의 전 인격을 그것으로 대표한다는 의미입니다. 이혼하는 자는 그렇게 큰 학대를 그 아내에게 행하는 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치장하려고 좋은 옷을 입습니다. 요즘은 이 좋은 옷이라는 개념이 조금 달라져서 비싼 옷, 고급 브랜드의 옷이라는 뜻으로 많이 변질된 것 같은데..........

여하튼 사람들은 앞 다투어 좋은 옷을 입고 자기를 뽐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난하고 약하고 억울한 자를 학대한다면 그것이 옷을 가리운답니다

 

예쁘게 보일려고 잘 차려입은 옷을 학대가 가리워서 나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추악하고 더러운 존재로 나타내 보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행실로 옷입지 못하고 악한 행실로 우리를 나타내게 된다면 어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며 우리의 제물을 헌납하시며 우리의 헌물을 받으시겠습니까?

 

이제 저는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이혼하는데는 합당하거나 아니면 합당하지는 않더라도 상당한 이유가 존재합니다.
배우자의 부정도 있고, 시댁과 친정이라는 두 가정간의 문제도 있고, 고부간의 갈등, 장모와 사위와의 갈등, 또 자녀문제, 경제적인 문제 등등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뚜렷한 이유가 없을 때는 흔히들 성격차이라고 이혼사유를 이야기 합니다.
성적인 격차 뭐 신문에는 성격차이라고 해서 마치 서로 성격이 안맞아서 이혼하는 것처럼 적어놓았지만 사실은 성적인 차이 ,아마도 성적 무능력이겠죠 이게 성격차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좋습니다
어쨌든 이혼은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이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결혼의 증인이셨던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신성모독의 범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래놓고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나에게 축복치 않으신다고 불평한다면 얼마나 웃긴 일입니까?

건전한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섭리일 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건전한 발전의 초석입니다
그리고 민족부흥의 근본입니다
마찬가지로 건전한 기독교 가정은 교회발전의 밑거름이요 교회교육의 근본입니다
이것은 결코 흔들려서는 안되는 기둥입니다

 

그리고 참고로 제가 말씀드립니다. 혹시라도 이혼하신 분이 있다면 혼자 사는 것을 권합니다. 어떤 분은 자꾸 재혼해야 한다는데 자녀들이 너무 불쌍합니다.혹여라도 저들이 비뚤어 지고 눈물 지을 수 있습니다. 이혼하는 순간에 그렇게 되겠지만 더 큰 어려움과 슬픔을 주어서 더 비뚤어 질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러다가 새로운 인연이 생긴다면 어쩔 수 없는 거지만 돌싱이라고 환상을 가지고 자유롭게 새로운 배우자에 대한 기대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면 안됩니다. 결혼정보업체에 신청하고 맞선 시장을 전전하면 안됩니다. 더 나은 배우자에 대한 환상으로 몸부림치면 안됩니다. 그게 바로 주께서 말씀하신 간음입니다. 마치 굴레를 벗은양 해서는 안됩니다.

 

아프리카 서부에서 선교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 선교사의 교회에 정말 착하고 열심히 봉사하는 교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 선교사가 일부일처제에 대해서 설교를 하고 난 다음부터 이 여신도가 안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물어 물어서 그 신도의 집에 찾아 갔습니다. 가보니 이 사람의 집은 일부다처제입니다.

 

이 여신도는 몇 명의 아내중에서 막내 부인입니다. 이 선교사는 도덕적, 종교적 우월감을 가지고 그 남편에게 일부다처제는 안좋은 것이라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습니다. 자기는 많이 배웠으니까 이 무식한 흑인하나쯤은 상대도 안될거라고 생각했는지.

 

그런데 그 흑인 남편의 대답은 굉장히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 소리 하지마라. 그래도 우리가 너희 보다 낫다. 너희도 결혼하고 이혼하고 그리고 또 결혼하고 이혼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몇 명이나 아내가 있는 것이 아니냐? 그래도 우리는 이혼으로 상대에게 고통을 안겨 주지는 않는다”

 

이 선교사가 할 말이 없어서 논쟁에서 지고 왔습니다. 우리가 일부일처제를 주장하며 뭔가 더 고상한 것처럼 굴었는데 알고 보니 우리는 간음자들입니다. 그것도 나라전체가 합법의 탈을 쓴 간음을 저지른 것입니다.

 

음행과 종교문제가 아니고 다른 문제로 이혼을 했다면 그것 자체가 불법이므로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음행이고 또 다른 새로운 배우자가 될 사람을 음행으로 이끄는 겁니다. 참 제가 이 문제에 대해서 참고사항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건 성경은 아니지만 아마 주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악하지 않아서 이런 일이 없었을 뿐이므로 아마 언급하지 않으셨으리라 봅니다.

 

저도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교회에 여신도가 밤에 기도를 하러 왔습니다. 마침 목사님이 기도한다고 있다가 그분을 만났습니다. “집사님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예, 목사님 기도할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저는 강대상에서 기도할테니까 집사님은 기도하세요” 이렇게하고 기도하고 있는데 한 남자가 찾아와서 그 집사님을 찾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 남자에게 물었습니다.  “누구시죠?” “아무개의 남편입니다”

 

“그래요, 잠시 기다리세요” 하고 들어와서 여 집사님을 설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부부가 서로 화합하는 것이다. 남편이 찾으러 왔는데 기도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 그 여 집사님은 계속해서 가기 싫다고 하더랍니다. 억지로 억지로 권해서 집으로 보냈는데 다음날 그 여 집사님은 차디찬 시체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너무 극적입니까? 그래서 폭력이 심해서 목숨이 위험이 생긴다면 이혼해야 겠지요? 아마 우리 하나님도 허락하실 겁니다. 성경에 그 내용이 없는 이유는 당시에는 그 정도로 악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자체를 안하는 것이지요. 확실히 요즘이 말세가 맞기는 맞나 봅니다.

 

만일 재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었다면 절대로 다시는 이혼하지 마십시오. 어떤 경우에도 이혼하지 않고 서로 맞추어서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걸 재혼에 따른 패널티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이 설교를 듣고 재혼부부들은 새삼스럽게 우리 갈라서야하나 같은 생각은 안하시겠지만 절대로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고 더 화목하게 더 경건하게 더 열심히 사시기를 바랍니다. 상대 배우자의 자녀가 있다면 그들도 똑같이 사랑하십시오.

 

가끔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슬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 배우자와의 사이에서 난 자녀를 버리고 새롭게 결혼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이혼했다고 부부가 서로 다투었다고 자녀를 버리고 또 몹쓸 짓을 하는 이야기. 이건 절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그 자녀들의 분노와 원망이 새로운 가정의 행복을 막을 겁니다. 하나님은 약한자 가난한자 억울한 자를 더 편애하십니다. 당연히 그들의 간구를 더 들어 주십니다.

 

물론 배우자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녀까지 책임지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들을 마음속으로부터 사랑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결혼을 하려고 했다면 그건 자기에게 주어진 책무이자 십자가입니다. 그걸 감수할 수 없다면 재혼하지 마십시오. 재혼하는 분들은 자기가 마치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이 가정을 섬기려고 파송받은양 섬기며 사십시오. 그렇게 건전한 가정을 이루면 되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 앞에 회개입니다.

 

이혼은 분명한 죄입니다. 그러나 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우리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지 않고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 말고도 정말 많은 죄를 저지릅니다. 그렇다고 이혼만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극악한 죄는 아닙니다. 그리고 회개가 반드시 원상회복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상회복이 더 큰 죄를 짓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미 생긴 새가족은 어쩔겁니까? 이미 저질렀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걸 바로잡겠다고 새로운 죄를 저질러서는 안됩니다.

 

이미 죄는 저질렀고 새롭게 잘 사는 것이, 경건한 가정을, 경건한 자녀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속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의 자녀를 행복하게 하시고자 간섭하시는 것이지 그들을 불행하게 하고 가정을 깨고 그래서 더 큰 불행을 가져오려고 간섭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제가 이혼 설교를 하면 꼭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나라의 송홍이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중국 한나라에 광무제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아주 잘 싸우고 무서운 임금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도 고민거리가 하나 있었는데 자기 동생인 공주가 이혼을 하고 궁으로 돌아와 있는 것입니다. 동생을 보니까 아직 젊은데 혼자가 되어 있는 것을 보니 너무 안되어서 동생에게 물었습니다. 너 재혼할 생각이 있느냐?

 

당연히 공주는 재혼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황제가 다시 뭇습니다. 누구를 소개시켜 줄까? 조정의 신하들 중에서 네 마음에 드는 사람을 이야기해라고 합니다. 이에 공주는 ‘송홍’이라는 사람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습니다. 황제가 골치가 아픕니다. 송홍은 이미 결혼한 유부남입니다. 뭐 잘생기고 듬직하고 그래서 사람은 좋지만 유부남에게 공주를 시집보내기가 그렇습니다. 공주를 첩으로 할 수는 없으니 본부인을 내보내든지 첩으로 강등시켜야 합니다.

 

어느날 황제는 공주를 용상의 뒤에 숨기고 송홍을 불러 묻습니다.
새장가를 갈 의향이 있느냐?
그러자 송홍은 자기는 이미 결혼한 사람이라서 결혼할 수 없다고 합니다. 황제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경이 미천할 때 결혼한 여인은 지금 경의 벼슬이 높아진 이때에 맞지 않다. 귀한 규수로 경의 아내를 삼아야 한다고.
그때 송홍이 한 말이 있습니다.


貧賤之交 不可忘
糟糠之妻 不下堂
우리가 ‘조강지처’라고 하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그렇게까지 완강하게 거부하니까 결국 황제도 포기하고 송홍을 물러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일러 진정한 남아라고 칭송할 수 밖에 없었답니다. 공주는 슬프지만 포기하게 되었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가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하나님 앞에서 약속한 그 맹세를 기억하며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원 설교에 뒷부분을 조금 보태었습니다. 성경에 나와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의 원리를 참조했습니다. 악한 시대에 새롭게 대응하는 내용이 너무 없어서 제가 임의로 집어넣었습니다. 어떤 분은 개탄을 하실 수도 있고 어떤 분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연약한 인간인고로 일어난 일임을 명심하고 원칙적으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한 결혼서약은 결코 깨져서는 안됩니다.

 

예외조항 몇가지가 있습니다. 그것도 반드시 그럴 경우에 이혼하라는 말이 아니라 이혼을 허용하는 정도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품안에서 서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살기를 원합니다. 예전에 우리는 한번 결혼한 부부가 백년을 해로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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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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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요즘에는 드라마나 TV에 워낙 자주 볼 수 있는 대사가 있습니다. 아휴 말도 마, 요즘 이혼은 누구나 하는거야, 돌싱은 흠도 아니라니깐! 그렇게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아름답게 포장하는 방법을 습득한 것 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은 그렇게 함부로 이혼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보수적인 설교를 듣게 됩니다. 저는 묻습니다. 정말로 기독교인의 이혼비율은 낮은 걸까요? 목사님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 그래서 가능하다면, 기독교인을 만나는게 더 좋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결국 사람은 환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운명 같은 사람을 또 만나게 될지도 몰라! 그런데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본다면 훨씬 더 사람은 못 된 것 같았습니다. 저는 예전에 이혼한 사람을 실제로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그 사유가 새로운 여인을 만나서 함께 있어야 자신의 인생이 살 맛이 난다고 표현하더라고요. 한 마디로 원래 아내를 버리는 죄책감 보다는, 새로운 사람과의 즐거움을 더 우선하는 행위에서 매우 몹쓸 불쾌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 눈에 눈물 흘리게 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즐거움도 도를 지나쳐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습니다.

 

이 글을 올리는 시점에 저는 아직 미혼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서, 이혼 없이 백년 해로 하면서, 함께 즐겁게 살아가는 것, 그런 소박한 마음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서로를 버리지 않는 다는 것, 그 짧은 말이 너무도 가치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길이 고된 만큼, 빛이 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서로를 잘 참아 주는 것, 그런 배려심이 날마다 더해갈 수 있기를... / 2016. 09.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