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로 알리라 (마태7:15-)
제가 요즘 많이 궁금한게 있습니다. 과연 신식 신자들이 천국이나 구원에 대해서 간절히 소망하는가하는 점입니다. 오랫동안 믿어 오신 연세많으신 성도들은 전통적인 믿음을 가지는 관계로 천국을 소망하고 구원에 관심을 가지는 걸로 제가 믿습니다. 그러나 요즘 신식 교인들이 과연 천국으로 만족하는 지는 저도 궁금합니다.
저들에게는 사후의 천국보다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가 더 중요하게 여겨질 것 같은데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또 그런 선입견과는 다르게 내세를 소망하며 천국과 구원에 만족하며 이 세상에서의 고난과 역경을 묵묵히 참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나가는 젊은이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왜 천국과 구원이 이렇게 싸구려로 취급받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교리 때문입니다. 예수만 믿으면 노력없이 누구나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간다고 하는 생각 때문에 이 구원이 싸구려가 된 것입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네 사이에 잘못된 관념이 자리 잡았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참 많이 오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더 이상 구원에 대해서 궁금해 하거나 불안해 하지 않고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그래서 구원의 감격도 기쁨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내가 구원받지 못할까봐서 내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 쓰며 하나님의 눈앞에서 겸비한 모습을 보이던 옛 성도들의 신앙을 더 이상 찾아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사실 믿는다는 말은 매우 어려운 말입니다. 어느 정도가 믿는다는 범위 안에 들어가는 지가 모호한데도 우리는 아주 간단하게 믿는다는 범위를 정해 버립니다. 교회의 교인이 되는 걸로 믿는다는 범주에 우리를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모든게 다 공짜가 됩니다. 천국에 가는걸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연하게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는게 고맙지 않습니다. 믿기만 하면 가는걸 가지고 생색은...
그런데 복음서에 나와 있는 우리 주님의 말씀을 잘 보시면 천국에 가는 거, 구원을 얻는 것을 아주 대단한 혜택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 구원을 그렇게 큰 혜택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마 아니지 싶습니다. 구원은 마치 공기 같습니다. 우리의 목숨을 연명하는데 가장 중요하면서도 아무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특별한 경우에만 귀하게 여깁니다.
만일 이걸 돈으로 사게 되면 그때는 아마 난리가 날겁니다. 이거 일분만 숨을 못쉬어도 몸이 어마어마하게 힘들어 합니다. 산소 공급이 끊어지면 뇌에 충격이 오고 그러면 부작용이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그 정도로 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게 공짜라서 이게 흔해서 귀하게 여기지 않는 공기. 구원이 그짝입니다. 이게 우리네 삶에서 어마 무지하게 귀중한 것임에도 이게 공짜라서 믿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주는 입장권이라서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 구원, 천국 입장권.
그런데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구원이라는게 결코 값싼게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물론 요즘 교인들이 구원을 받기가 어려워졌다고 해서 특별히 더 불안해하거나 더 잘 믿으려고 노력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는 것은 당연한 우리의 책무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제일 첫 번째 구절이 뭡니까?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주께서 이렇게 제일 첫머리에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구원에 대해서 우습게 생각하게 된 것이 바로 거짓선지자들 때문이기에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고 한 것입니다.
이들은 거짓 선지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들은게 없는데 어떻게 전달한단 말입니까?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두려워합니다. 물론 사람들이 무서워서가 아닙니다. 사람들을 이용해서 뭔가 부와 명예를 얻고 권세를 누리기위해서 사람들의 기색을 살펴서 그들의 마음에 맞는 말만을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모든게 다 ‘괜찮아’입니다.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고 무엇을 해도 다 용서받고 그런 식으로 나갑니다. 이 사람이 싫어하는 설교도 저 사람이 싫어하는 설교도 그 사람이 싫어하는 설교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복받는다는 이야기만 줄창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설교에 세뇌된 이들이 저절로 행위에 신경을 쓰지 않고 교회 안에 있는 걸로 설교를 듣는 걸로 구원은 무조건 받는 걸로 여기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천국에 가면 눈만 귀만 입만 천국에 들어 온게 많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천국의 한 창고에 눈만 쌓여 있고 또 어떤 방은 입만 쌓여 있고 어디는 귀만 쌓여 있고, 좋은 것을 보고 좋은 말씀을 듣고 좋은 말씀을 전하고 정작 행위는 전혀 아니었기에 몸은 지옥으로 눈과 귀와 입은 천국으로. 아마 교인들과 목사들을 비꼬려고 만든 이야기겠지만 그럴듯합니다.
전혀 행함이 없는 교인들이 점점 더 많아 집니다. 이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돈입니다. 이 땅에서의 성공, 부와 권세와 쾌락과 명예까지. 그런 이들에게 저 땅에서의 성공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거짓선지자들의 말에 익숙하게 된 교인들은 점점 ‘믿는다’는 말이 행위를 수반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행위가 구원의 선결조건은 당연히 아닙니다. 우리들이야 모두 부족한 죄인이기 때문에 당연한 겁니다. 모두 하나님의 눈에 모자라고 그렇지만 우리가 믿는다면 믿고 난 다음에는 그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달라져야 합니다. 올바로 살아야 합니다. 그게 바로 믿는 자의 삶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올바르게 사는 것인지는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십계명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새계명까지 그의 말씀들과 행동들이 다 나와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을 따르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우리는 일부러 그런 삶에 눈감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 스스로를 믿었기 때문에 이미 구원은 받았다고 하는 최면으로 세뇌시킵니다. 그런데 성도의 삶이 수반되지 않는 명목상 믿는 걸로는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들이 문제인 것이지요.
우리가 흔히 잘쓰는 말 성도는 결코 쉽게 부를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거룩한 무리, 우리가 스스로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떠한 사람도 성도라고 부르기에는 다 모자랍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성도라고 부르는 이유는 거룩한 무리가 되라고 부르는 겁니다. 거룩해서가 아니라.
다음으로는 신자입니다. 믿는 자, 이 말은 제법 많이 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라야 합니다. 그는 스스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지 않으면서 믿는자, 신자라고 말하기가 부끄럽지 않나요? 하나님의 추상같은 말씀이 찔리지 않나요?
그 다음이 교인입니다. 교회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교인입니다. 이 말에 적합한 사람들은 이미 우리나라에 많이 있습니다. 이땅에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교인이라는 말은 교회의 멤버라는 뜻이지 결코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원래는 교인이면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교인다운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감격에 나타나야 하는 감사와 그 감사에 수반되는 겸비한 태도와 실천적인 삶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놓고 교인이라고 하면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예수쟁이입니다. 세상이 약간은 경멸적이며 비하해서 부르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을 제일 좋아합니다. 예수에 미친사람, 그래서 예수쟁이. 성도라고 불리지 않아도 좋습니다. 나는 예수쟁이입니다. 성도의 자격은 없지만 이 땅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예수쟁이를 처치 곤란의 상대로 생각합니다. 이들은 세상과 적당히 어우리는 것이나 그들에 맞춰주는 것을 못합니다. 술도 안마셔 담배도 안피워 왜 교회에 입교하면서 하나님앞에 서약했으므로 새사람 되는 표시로 금주금연을 실천하기로 했으므로
뇌물도 안받아 여자와 즐기는 술집에도 안가. 왜? 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전이므로. 불의에 대해서 적당히 눈감지도 않아. 왜? 부정과 불의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므로. 나는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고 다른 종교도 긍정하고 그렇게 그렇게 둥글게 둥글게 사는 법을 몰라. 왜냐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는 세상에 홀로 하나님이시며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골통들이 바로 예수쟁이입니다. 저는 이 말이 너무 마음에 듭니다. 여러분은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예수쟁이 하겠습니다. 제 생각에 신자와 예수쟁이가 비슷할거 같고 성도에는 좀 미치지 못할거 같습니다. 단순히 교인정도에 그쳐서는 곤란합니다.
주님은 이들 거짓선지자들을 보고 양의 옷을 입었지만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하십니다. 양의 탈을 쓴 이리가 왜 양의 탈을 썼을까요?
늑대가 양을 무서워해서 살아남으려고 양의 탈을 쓴 게 아닙니다. 양을 잡아먹으려고 양의 탈을 쓴 겁니다.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들을 가까이 하면 필경 화를 입게 되어 있습니다.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릅니다. 더구나 거짓 선지자가 아니라 선지자들이라고 되어 있지요? 그건 그만큼 거짓선지자들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더 조심해야 합니다. 평소에는 몰라도 말세에는 더 많아 진다고 하지요 그러므로 더 조심해야 합니다.
이리는 중동에서 양들에게 가장 큰 피해를 주는 짐승으로 목자들의 가장 큰 사명이 바로 이리로부터 양들을 지키는 것일 정도로 해로운 짐승입니다. 이리가 가장 큰 해를 주는 이유는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양의 탈을 뒤집어쓰고 양떼틈에 섞여서 우리 안으로 들어가면 목자가 자리를 비웠을 때 본색을 드러내고 양들을 잡아 먹을텐데 그때는 아무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양떼들은 이리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제일 경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그 열매로 판단하라는 말입니다. 그의 행위로 판단하라는 말입니다. 포도가 열려 있으면 포도나무일 것이고 무화과가 열려있으면 무화과나무일 것입니다. 결코 가시나무에서 포도가 열릴 수가 없습니다. 엉겅퀴에서 무화과가 열릴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열매로 그 나무를 아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열매로 그들을 알려고하니 문제가 있습니다.
이게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겁니다. 거짓선지자는 그 정도로 자신을 잘 위장하고 결정적인 한방을 노립니다. 그래서 열매로 거짓 선지자들을 판단하려는 방법은 가장 확실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왜냐면 보통의 나무에서 열매를 맺으려면 나무가 어느 정도 자라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열매가 아무 때나 열리는 것이 아니라 열매가 맺는 계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나무의 열매를 보고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를 파악하기위해서 제법 긴 시간이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그 사이에 양을 탈을 쓰고 양떼들 사이에 숨어 있던 이리들이 본색을 드러내고 양들을 해할까하는 점입니다. 제가 정말 웃기는 일들을 많이 봅니다. 우리한국교회가 정말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목사청빙에 관련한 추문들, 돈 문제 여자 문제, 그리고 파산하는 교회문제, 무리하게 빚을 내서 지은 대형교회건물이 경매로 넘어가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모두 나몰라라 하는 바람에 교회가 흩어지고...모두 성장주의 외형주의 물질주의 기복주의 가치관이 성령 제일주의를 넘어선 패단입니다.
목사들만 문제가 아니라 교인들도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전체적으로 위기상황입니다. 교인들은 점점 주는데 그 안에서 서로 많이 차지하려는 기득권싸움이 치열합니다. 교회라고 하는 배는 점점 빠른 속도로 침몰하는 중이지만 누구도 이 교회의 침몰에 신경쓰지 않습니다. 누가 이 배를 구할 수 있나요?
성령님만이 이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속 중심을 보시는 아버지께서 양의 옷을 입은 노략질하는 이리를 걸러 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교인들은 성령님에게 집중하지 않고 보이는 것, 물질적인 것에만 집중합니다. 성령이 잊혀진 교회가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겠습니까? 성령의 역사가 없는 교회만큼 우스운 교회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 신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고 성경 제일주의로 살았던 초대 교회로 돌아가야 합니다. 형식보다 내면을 중시하고 서로 사랑하며 함께 공동체를 일구었던 그런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가 우리와 함께 하시면 이 땅의 교회가 새로워 질 수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새롭게 하셔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맺은 좋은 열매를 보고 ‘아 정말 저 나무는 좋은 나무였구나!’하고 세상이 감탄할 것입니다. ‘아 하나님의 성도란 게 저런 것이구나!’ 하고 세상을 놀래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감동받고 하나님의 사랑과 그 역사 앞에 무릎 꿇고 그래서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고 그런 놀라운 역사가 성령충만함을 입고 그리스도의 군사로 살아가는 우리들로 말미암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서 확고한 우위를 점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학벌이나 돈이나 권력이 아닙니다. 그런건 결코 세상에 필적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우위를 점해야 할 것이 있다면 도덕적 윤리적 우위, 그리고 영성입니다. 그리고 도덕적 우위를 점하는 데에도 성령의 보호와 인도하심이 필요한 법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는 교회는 자동적으로 도덕적 윤리적 우위를 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는 교회는 무뉘만 교회지 그건 진정한 의미의 교회가 아닙니다.
영적인 교회가 물질로 승부할려면 그게 말이 안됩니다. 우리의 장점으로 상대의 단점을 상대해야 이길 확률이 높지 우리의 단점으로 상대의 장점과 상대한다면 질 확률이 말도 못할만큼 높아 질 것입니다. 세상이 자랑하는게 물질인데 그 물질로 세상을 이기겠다고요? 말이 안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서 거대한 예배당을 짓는다고 해도 세상은 그것보다 열배 백배 더 크고 멋진 건물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외형으로 승부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열매로 승부해야 합니다.
이 나무에서 이런 열매를 맺었다는 것으로 세상에 승부해야 합니다. 굵고 큰 나무, 잎이 무성하고 싱상하게 보이는 나무가 아무런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주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열매를 맺더라도 독과를 맺는다면 그 나무는 좋은 나무가 아니라 나쁜 나무 위험한 나무가 됩니다. 열매를 맺어도 아무런 맛도 없고 유익도 없는 열매를 맷는다면 쓸모없는 나무가 됩니다. 나무의 좋고 나쁨은 그 나무 자체가 아니라 그 나무가 맺는 열매로 아는 것입니다.
참, 나무자체로 좋고 나쁨을 매길 수가 있기는 합니다. 나무의 외형이 중요할때가 있습니다. 뭐겠습니까?
나무를 잘라서 목재로 사용할 때는 외형으로 승부합니다. 크고 굵은 나무가 아무래도 좋겠지요. 단 죽고 나서.
성령이 없는 교회, 하나님의 뜻이 통하지 않는 교회,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지 않는 교회, 그래서 무뉘만 교회의 무늬만 교인들이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인보다는 신자 신자보다는 성도.
원래는 자격도 없는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보혈공로를 힘입어 구원을 얻었다면 그 은혜에 감격하여 날마다 감사함은 물론이고 보혈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와 나 사이에 막혔던 담이 무너졌으므로 이제는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의 품안에 거하며 그에게 나의 모든 것을 아뢰고 그가 나를 살피신다는 것을 항상 유념하고 그렇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함께 하면 그러면 자동적으로 우리의 영성이 높아지고 영안이 뜨이게 되어 있습니다. 끊임없이 성령의 영향을 받고 성령의 공급하시는 힘을 받는다면 그러면 세상이 능히 감당치 못하는 예수쟁이가 생기는 겁니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유혹해서 조종할 수 없는 사람. 영안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며 영성을 가지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
그런 멋진 성도들이 되어지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 멋진 예수쟁이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기도합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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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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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예수쟁이가 되어서 어떤 것으로도 움직이지 않는 튼튼하고 멋진 사람이 된다면 제일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다른 것 바라보지 않고, 예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면서 즐겁고 감사하게 살 수 있다면 그런 인생은 특별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또한 해보게 되지요.
저는 많은 것을 잃었고, 많은 것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괴로운 시간들이었고, 힘든 시간들도 있었습니다. 꿈에도 세상 것들이 하도 좋아서 자주 나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 나는 멀었구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주님을 포기할 수 없어 예수님이 좋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기독교의 선한 가치들을 따르고 싶습니다. 돈과 명예, 권력까지 - 세상과는 전혀 다른 길을 추구하는 이웃 사랑을 다만 실천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그래요, 그런 성도들이 될 때까지 우리가 함께 모두 노력하기를! / 2016. 09.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