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선지자와 국왕(열왕기하1장)/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8. 31. 03:18

 

선지자와 국왕 (열왕기하1장)

 

오늘 우리는 선지자와 국왕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볼겁니다. 오늘날에도 종교인, 특히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치하도록 통치자들을 감독하고 독려하며 책망할 책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게의 경우 오늘날의 목사들에게 더 큰 책무는 돈 앞에서의 자유입니다. 옛날 민주화시대처럼 목사들이 민주화운동의 전면에 나서는 일은 이제 없습니다. 그보다 돈에 대해서 자유로운게 더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옛날 목사들이 왕에게 해야만 했던 정치적인 비판이나 계도 같은 경우에는 그 역할을 지금은 신문이나 방송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종 사회단체들이 나름대로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목사는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 정치에 간섭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칼빈주의는 처음부터 정교분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칼빈은 오히려 정교일치를 주장했습니다. 정교분리는 우리 목사들의 자발적인 절제에 기인한 것이지 이것이 성경적이거나 교리적으로 맞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하나님의 진리에 어긋나는 일이 벌어진다면 당연하게 목사는 정치에 개입해야 합니다. 그것은 목사로서가 아니라 국민으로서의 의무이자 권리이기도 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 나라와 민족의 인도자라는 소명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가 이 세상에서 제대로 반영되는가를 감시하며 또 공의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을 때는 이행을 촉구하고 격려할 책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들에게 정작 더 중요한 것은 세속의 정치권력이 아니라 돈입니다. 오늘날 돈은 권력이자 신앙입니다. 모든 이들은 돈 앞에서 굴복하며 돈 때문에 울고 웃습니다. 우리가 먹고 살려고 해도 돈, 쾌락을 즐기려 해도 돈, 안목의 정욕을 충족시키려 해도 돈. 심지어 우리나라를 일러 재벌공화국이라고 부릅니다. 재벌의 힘이 그만큼 세진 것이고 우리가 스스로 돈의 힘을 너무 과신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바알세붑’은 신약성경에는 ‘바알세불’로 나옵니다. 우리가 사탄을 바알세불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결국 바알세붑은 사탄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뜻은 ‘파리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파리가 병을 옮긴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파리의 신은 역설적으로 병을 고치기도 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파리의 신을 섬기며 그에게 자기의 병세를 물어보려는 아하시야의 행동은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황이 얼마나 암울한 것인가를 바로 보여줍니다. 왜냐면 아하시야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것’으로 이름 붙여진 사내는 정작 자기 자신을 ‘바알세붑의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는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을 보호하고 이스라엘 땅에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해야 할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그런데 그는 정작 여호와가 아니라 바알세붑을 섬깁니다.

 

분명 그 신은 자기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에그론, 블레셋의 5도시가운데 하나인 블레셋의 신이자 파리 신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 신을 섬기며 스스로 그에게 물어보려 합니다.

따지고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도 여러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애굽에서 워낙 여러 가지의 신들을 섬기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또 그 땅의 선주민들과 이웃들이 여러 형상의 우상들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당시에 금송아지, 아피스를 섬긴 데서부터 시작해서 그들은 지금 바알과 아세라에 이어서 바알세붑까지 이신 저신 가리지 않고 마구 섬깁니다. 제가 신이라고 말씀드렸지만 실제로 그것들이 신이 아니라 인간이 신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말 못하는 금은동철석목의 인형일 따름입니다. 조각품이지요.

 

우리는 출애굽시에 애굽 하수에서부터 나온 개구리와 파리, 이 등의 재앙을 기억합니다. 이것은 사실 애굽에서는 신으로 숭배를 받는 것들의 형상입니다. 그러니까 파리의 신은 애굽에서도 섬겼던 신입니다. 동시에 출애굽시에 바로에게 임한 하나님의 징계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그때 파리가 나와서 바로를 징계했기에 자기네 민족을 수호하는 신으로 여길 수도 있겠습니다.

 

이방민족들 사이에서 하나님이 무시당하는 것은 뭐 충분히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위하여 빼신 나라와 민족 안에서 무시당하는 것은 한마디로 배신입니다. 그래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배신, 하나님과 세운 언약에 대한 배신. 이 언약에의 배신은 징계를 가져오고, 사랑에의 배신은 질투를 유발합니다. 그 끝은 가혹합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잘 보면 하나님은 죄인을 징계하실 때 그가 회개할 시간을 충분히 주신 다음에 비로소 실행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회개하고 변한다면 하나님은 자기의 말씀 역시 변화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은 변개치 않는 분이라고 말들을 하지만 변개라는 것도 결국은 인간의 언어지 하나님의 언어로는 정확하게 어떻게 표현되는지 모릅니다. ‘신인동형동성론적 표현’이란 말을 많이 쓰는데 그냥 하나님이 우리가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우리의 언어로 표현했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시고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시는 분이지 될 수 있으면 심판의 불구덩이로 쓸어 넣으려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지금 사랑의 하나님으로 여기게 된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영벌에 처해질 우리가 그래도 구원을 위한 기회를 제공받고 심판의 때가 자꾸 늦추어지는 것입니다. 한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서 구원의 문, 좁은 문의 문호를 최대한 개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늘어납니다.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 시간이 늘어납니다.

 

사실 엘리야는 약대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메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막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신약시대에 요한이 생각나시지요?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안락하고 편안한 삶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엘리야 한명만 있었던게 아닙니다. 사마리아의 왕궁에는 소위‘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수백명이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이 우상숭배를 좋아했지만 그래도 이스라엘의 국교는 여전히 여호와교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스스로 그를 일러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왕궁에 수백명의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입니다.

 

아하시야는 왕궁의 다락에서 떨어졌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다락이 아니라 우리나라로 치면 옥상 또는 가장 좋은 방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탑처럼 높이 솟아서 사방이 뚫려있고 바람도 잘 통하고 가축 냄새도 나지 않는.
다락의 난간역할을 하는 격자무늬 창살이 부서져서 떨어졌답니다.

 

그런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면 제법 충격이 많이 갔을 것입니다. 다락에서 떨어진 아하시야는 시름시름 앓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병을 치료한다고 생각되어진 신인 바알세붑에게 자기가 낫겠는지 물어보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하시야가 결코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니까 병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계속해서 침상신세를 지다가 죽는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은 항상 그런 실수를 잘 저지릅니다. 영안을 뜨지 못한 그들은 눈에 보이는 화려함과 권력과 힘에 경도되지만 영안을 뜬 이들의 눈에 그들의 화려함과 부와 권력과 힘은 코웃음도 나오지 않을 만큼 미약한 것입니다.
마치 햇볕에 사라질 아침 이슬 같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영안이 어둡기에 만유의 하나님이 가진 권세를 보지 못합니다. 마치 기도 후에 게하시가 하늘의 불말과 불병거를 본 것처럼 기도해서 신통해져야만 볼 수 있는 영안이 뜨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보지 못한 자는 결국 자기가 죽으면서도 죽는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수만의 군대를 가진 왕과 몇몇 지지자들만 있는 선지자와의 대결은 누가봐도 왕의 승리이겠지만 선지자의 뒤에는 그를 보내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왕과 선지자의 대결은 결국 왕과 하나님의 대결입니다. 아니 대결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왕이 반항하는 것입니다.

 

왕에게 선지자가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왕이 반항하는 것입니다. 강약의 차이가 명확합니다. 마치 태양빛과 반딧불 같습니다. 다만 그 스스로 알지 못할 뿐 인간 왕의 패배는 명약관화합니다.

 

이스라엘에 왕가가 여러개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역사는 비교적 짧지만 남 유다가 다윗왕가 하나밖에 없었던 것에 비해 북 이스라엘은 잡탕입니다. 워낙 반란이 많이 일어나서 왕가가 자주 바뀌었는데 그 중에서는 그래도 오므리 왕가가 제일 오래 왕질을 했습니다.  바로 그 오므리 왕가 제8대왕이자 마지막에서 두 번째 오므리인 아하시야 왕의 멸망을 예언한 엘리야와 왕 사이의 결투! 흥미진진하지 않습니까?

 

결론이야 뻔하지요. 당연히 선지자의 승리겠지요.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니까 당연합니까? 여하튼 아하시야 왕과 엘리야 선지자의 대결에서 승리자는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승리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대변했기 때문입니다.

 

왕은 하나님을 대변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했고 선지자가 하나님을 대변했기 때문에 이는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인간 왕이 아무리 강대하다고 해도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는 별거 아니지요. 그러나 모든 대결에서 무조건 선지자가 이긴다고 볼 수 없습니다. 선지자가 이기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대변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인간의 욕심을 가지고 살았다면 그는 왕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하, 선지자가 인간의 욕심대로 살았다면 왕과 대결할 이유도 없겠네요.

 

사실 하나님은 몇 번이나 오므리 집안에도 회개할 기회를 주었지만 그들은 끝끝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아하시야의 아버지인 아합은 한때 겸비한 태도를 보인적도 있지만 위기의 순간이 지나자 다시 원위치한 인물입니다. 아하시야의 어머니 이세벨은 악녀로 유명한 여인입니다. 페니키아의 공주이자 이교 제사장의 딸인 이세벨은 남편도 아들도 악하게 만들었고 결국 집안을 멸망으로 이끌고 백성도 도탄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본문을 좀 크게 한번 살펴봅시다. 왕과 선지자의 대결을 기술한 본문의 첫절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한 기사가 나옵니다. 뭐 역사적 사실이니까 본문에 당연히 기록이 되었겠지만 엘리야와 아하시야의 대결 양상을 기록하려는  성경이 모압의 배반을 언급함으로 시작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큰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압이 뜬금없이 독립하고 배반한게 아니라 이스라엘이, 아하시야가 여호와를 배반한 결과 모압으로부터 배반을 당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항상 성경은 이런 말을 합니다. ‘읽는 자는 깨달을 진저’ 또는 ‘귀있는 자는 들을 진저’ 이런 식의 말. 우리가 많이 보아 왔습니다.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들어도 알지 못하면 얼마나 답답합니까? 영안이 어둡고 귀가 닫힌 자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어떻게 전달될까요?

 

아하시야가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했다고 난리를 치지만 실제로 배반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뻔뻔한 배반이 먼저였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모압으로 부터 배반을 당하는 것이라는 거지요. 자기들이 먼저 하나님에게 반역을 했으므로 모압에게 반역을 당하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오므리와 아합시대에 이스라엘은 상당한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아합은 시돈의 공주인 이세벨과 결혼하고 자기의 딸은 유다왕의 아내로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시돈과 이스라엘과 유다가 삼국 결혼동맹을 맺은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결혼동맹같은 인간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뭄과 전쟁으로 국력이 쇠하게 됩니다.

 

유명한 3년반의 가뭄과 아람과의 세차례 전쟁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국력은 쇠해졌고 마침내 이스라엘에 속해있던 모압이 독립을 꾀한 겁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성경본문은 와우 계속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게 뭐냐면 ‘와우’가 ‘그리고’ 라는 뜻입니다. 모압이 배신을 했는데 배신하자마자 이스라엘의 왕이 난간에서 떨어져 아무런 대처를 할 수 없었던 것 처럼 말합니다. 왕이 다쳐서 자리보전하고 누웠다면 당연히 아무런 대처가 없을 수도 있지만 꼭 그런건 아닙니다. 국가의 대사는 이인자의 손을 통해서도 계속해서 이어지도록 할 수 있습니다. 왕자도 있고 왕제도 있고 총리도 있고...그런데 성경이 그렇게 기술한 겁니다.

 

하나님이 아하시야와 이스라엘의 멸망을 계획하고 그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모압이 독립하고 아하시야가 다락에서 떨어지고 결국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고 .... 성경을 읽는 사람이 그렇게 느끼도록 기술한 것입니다.

 

아하시야는 다락의 격자무늬창살이 부서져 추락한 걸로 되어 있습니다. 보통은 다락난간이 부실해서 난간에 의지했다가 난간이 부서져서 추락한 걸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격자무늬의 나무 창살이 부서져서 추락했답니다. 당시에는 당연히 유리가 없었고 나무로 얼기설기 짜둔 창살이 있는데 이게 부서져서 추락한다는게 좀 이상합니다. 왕궁에서 제일 좋은 방의 창살이 부실하다니 좀 일어나기가 어려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자, 그런데 성경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단어가 또 있습니다. 다락! 따지고 보면 열왕기서에 다락이 몇 번이나 나옵니다.
엘리야는 다락에서 사르밧 여인의 아들을 살렸고
엘리사는 다락에서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렸고

 

어때요? 열왕기서에 나오는 다락은 생명과 삶의 장소였지 사망의 장소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이에게 다락은 생명의 장소이지만 하나님을 배반한 자에게 이 다락은 죽음의 장소입니다.

 

‘묻는다’는 말을 히브리어로 ‘따라쉬’ 라고 하는데 이 말은 하나님에게 특별한 답변을 얻거나 계시를 구하는 행위를 일컫는 특별한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언약 백성에게 주어진 특권이자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왕에게 특별한 일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에게 물어 볼 수 있고 또 다른 누구도 아니고 하나님에게 물어야 할 의무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하시야는 하나님이 아니라 남의 민족, 남의 나라, 이스라엘의 원수 블레셋의 바알세붑에게 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명기11장에서 가나안의 신에게 묻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이름은 ‘파리의 주’이지만 결국 바알세붑이 바알세불로 변하고 지금은 사탄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도 결국 우상들의 최종목적지는 사탄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권위에 반항하기 위해 각종 우상들의 모습으로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가는 것을 방해하고 그들을 미혹합니다. 그는 질투의 하나님이시므로 이런 패륜을 그대로 둘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왕의 사자들이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는 길을 하나님의 사자인 엘리야가 막아서서 말하는 겁니다.

 

물론 자기 마음대로 막은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겁니다. 성경본문은 여기서 왕의 사자들과 하나님의 사자인 엘리야를 대조합니다. 악과 선의 대조요 우상과 신의 대조요 육의 권위와 영육의 모든 권위를 가진 분의 대조입니다. 열왕기하는 전체적으로 이런 이방신과 여호와의 대조가 계속됩니다.

 

3절에 ‘이르되’라는 말은 주로 법률적인 선고를 말할 때 사용합니다
디셉사람 엘리야...본문을 잘 보시면 아합에게 심판을 경고할 때는 항상 이렇게 칭했습니다. 이는 당시 왕실에 있던 어용선지자와 구분하기 위해 성경저자가 사용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어용 선지자, 가짜 선지자가 아니라 참 하나님의 선지자다 이런 표시로 엘리야 앞에 꼭 디셉 사람이란 말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아하시야’는 ‘여호와의 것’이란 뜻이기 때문에 열왕기서의 저자는 이를 기피하여 그를 아하시야라고 부르지 않고 사마리아의 왕이나 단순히 왕으로 표현합니다. 그렇지 않고 아하시야에게 저주를 발하면 어떻게 됩니까? ‘여호와의 것’을 여호와가 벌하는 것으로 보여지기에 뭔가 말이 안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름대신에 사마리아의 왕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고의적으로 부인한다면 하나님 역시 종국에는 우리를 부인할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렵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그에게 물어보는 것은 우리 성도들만이 가진 특권이자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이 가지는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점쟁이에게 묻고 절의 승들에게 묻고 하다못해 트럼프, 미국 대통령후보가 아니라 카드인 트럼프에 묻는다면 얼마나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행동입니까? 하나님이 모욕감을 느끼시고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참 자녀라면 교훈을 내리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하시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말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물으러 가느냐?’
그러므로 아하시야가 다락에서 떨어져서 죽은 것은 하나님을 버린 것에 대한 징계의 결과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아하시야가 다락에서 떨어진 것도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의 회개 기회를 기다려 주지 않고 아합의 집을 멸절시키기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이때도 만일 아하시야가 하나님에게 돌아와서 회개하고 겸비했다면 어쩌면 하나님은 아합의 때와 마찬가지로 백성들 때문에라도 한번 더 참으셨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는 자녀들이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데 우리가 아버지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 문젭니다.

 

3절에 범죄를 적시하고 이제 징계를 선포하는데 이는 바로 징계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그 범죄를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촉구하기 위함입니다. 네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그래서 회개하라고 징계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어때요? 하나님은 그렇게나 우리에게 오래 참으시고 기회를 재삼 재사 자꾸 주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기회가 영원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지고 보면 여호와는 항상 징계를 선포하고 우리의, 죄인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즉 죽이고 멸망시키고 부수기위해서가 아니라 기회를 주기위해 징계를 선포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까의‘ 다락’과 마찬가지로 ‘침상’이란 단어를 봅시다.

 

여기서 침상은 반대의 의미입니다. 엘리야의 침상과 엘리사의 침상은 사람을 살리는 장소입니다. 침상에 누웠던 아이들이 다 살아 났습니다. 그러나 아하시야의 침상은 죽음의 장소입니다. 네가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리라.

우리가 큰 그림을 한번 그려봅시다. 지금 왕궁에서는 침상에 누워있는 아하시야가 있습니다.

 

여기 산꼭대기에는 엘리야가 앉아 있습니다. 아하시야는 침상에 누워 오늘내일하고 있지만 엘리야는 산꼭대기에 앉아 천하를 호령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그에게 불가능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는이에게 세상의 부귀는 없지만 대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무엇이든 필요할 때는 간구할 수 있고 무엇이든 모를 때는 아뢸 수 있는 그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엘리야는 지금 담대한 것입니다.

 

아무리 대리석 왕궁과 상아 침상 비단 보료가 있으면 뭐합니까? 아하시야는 그 화려한 침상에서 내려올 수가 없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참상이 화려하기는 해야 겠습니다. 그 침상이 자기의 전부니까.

4절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엘리야의 순종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을 강조하기위해 오히려 성경은 담담하게 기술한 것입니다. 이에 가니라. 어쩌고 저쩌고가 없습니다. 변명도 핑계도 없고 그냥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해서 가는 겁니다.

 

엘리야는 사마리아의 궁에 없었음에도 아하시야가 다락에서 떨어졌음과 이방신에게 물으러 가는 것을 알았습니다. 인간인 그가 알 재주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알게하신 거지요. 그러므로 아하시야의 사자들은 엘리야의 권위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왕의 사자가 아니라 여호와의 사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아하시야에게 전하는 사자가된 것입니다. 올 때는 분명 왕의 사자였고 바알세붑에게 가는 사자였지만 이제 그들은 충실한 하나님의 사자가 된 것입니다.

 

8절 털이 많은 사람...빠알 세아르, 좀 순화해서 읽으면 ‘바알 세아르’ 즉 ‘털의 주인’으로 ‘파리의 주인 바알세붑’과 대조되는 단어입니다. 파리도 현미경으로 보면 정말 털이 많쟎아요. 그러니까 바알세붑과 하나님을 대조하는 것에서 나아가 이제 바알세붑을 하나님의 사자인 ‘털의 주인’ 엘리야와 대조하는 겁니다. 이방신에게 자기의 운명을 건 아하시야에게 ‘눈이 있으면 보아라, 네가 신으로 믿고 있는 바알세붑은 인간 ‘바알 세아르’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알세붑이 신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우상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엘리야를 털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엘리야가 털이 많았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는 아마 털옷을 입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약대 털옷을 입었는데 그는 엘리야의 상징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니까 아마 엘리야도 몸에 털이 많아서 털의 주인이 아니라 짐승가죽 털옷을 입었기에 털의 주인으로 불려진게 아닌가 합니다. 그러니까 돈이 없어서 털옷을 입은 겁니다. 이스라엘의 낮은 지금 우리의 한여름보다 더 덥습니다. 그러니까 털옷은 엄청 더울 겁니다. 지금 성경은 엘리야가 비단으로 몸을 감싼 어용선지자들과 확연히 다른 의복을 입었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다른 말로 부귀와 영화를 포기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더 정직하게 반응하게 되고 그러면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나님에게만 의지하게 되므로 참 선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참 선지자가 능력이 많은 것은 참 신이신 하나님에게 참으로 붙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거짓으로 하나님에게 붙어 있는 것처럼 하지 않기 때문에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감히 이야기한다면 평신도야 잘살아도 되지만 목사가 잘산다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목사가 꼭 가난해야 된다는 말은 아니지만 목사에게 청빈은 자랑이지 결코 부끄러움이나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먹고 살만큼은 주시니까.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신 주님의 기도문을 상기해 보세요.

 

뭐먹고 살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목사가 부귀영화를 찾게 되면 필연적으로 사람의 눈치를 보아야 되고 그렇게 되면 당연하게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드는 말을 하고 그들의 눈에 좋은 일을 하게 되고 그렇게 그렇게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9절 “(그)산꼭대기에 앉았다”.......‘그 산’으로 이미 우리가 잘알고 있는 산이란 말입니다.  당시 아하시야의 사자를 만난 그 산을 가르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왕에게 저주를 퍼붓고는 결코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당당한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엘리야를 잡으러 온 이스라엘군대의 오십부장은 엘리야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의 사람이여’ 해놓고는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

 

두 번째 오십부장 역시 ‘하나님의 사람이여’ 해놓고는
‘왕의 말씀이 즉시 내려오라’ ‘즉시’가 하나 더 붙었습니다.

‘내려오라’는 뭔가가 연상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아하시야에게 (침상에서)내려오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십부장은 이 ‘내려오다’란 말을 강한 어조로 엘리야에게 사용합니다. 강한 어조로 한 말은 명령이라는 말입니다. ‘내려와 주십시오’가 아니라 ‘빨리 내려와’

그러므로 그는 결코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존중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사람이여!’하면서 조롱한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사람이라지만 사실 너에게 명령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왕이다. 그리고 너는 그 명령을 들어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도망가지도 않고 그 오십명의 군인들이 올 때까지 그가 왕의 사자들을 만났던 바로 그 산의 꼭대기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엘리야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군대가 자신을 잡으러 오기 전에 도망갔을 것입니다. 그가 도망가지 않았던 이유는 도망가지 않아도, 군대가 잡으러 와도 잡혀 가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며 이런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일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오십부장은 영안이 없어서 뭐가 뭔지 제대로 분간을 하지 못하고 왕의 권력만 믿고 설칩니다. 겨우 오십명의 군대장인 그가 쥐꼬리만한 권력과 무력을 믿고 건방지게 하나님 앞에서 설치는 겁니다. 그는 결국 하늘에서 내려온 불에 살라져서 죽습니다.

 

그에게는 육적인 눈만 있어서 화려한 비단옷에 금관을 쓰고 왕궁에 있는 아하시야만 두려웠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귄위는 전혀 고려밖입니다. 크게 우둔한 것이지요. 그는 실수한 겁니다. 그것도 치명적인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를 죽였고 그가 이끄는 오십인도 죽였습니다. 다음 오십인대와 오십부장은 한술 더 뜹니다. 그래서 역시 죽은 것입니다. 교훈을 보고도 깨닫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눈이 있는 자는 깨달을진저’

 

엘리야는 이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불이 내려오게 하시고 태우소서” 그는 하나님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명령이 아니라 요청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도 결국 오십부장의 명령과 엘리야의 요청을 대조시키려고 한 겁니다.

 

불이 ‘내려오다’는 ‘야라드’입니다, 침상에서 ‘내려오다’ 산꼭대기에서 ‘내려오다’와 같은 말이지요. 오십부장이 엘리야에게 꼭대기에서 ‘내려오라’고 명령하자 하나님은 하늘에서 불을 ‘내리셔서’ 오십부장과 그 부하들을 살라 버리셨습니다. 엘리야는 지금 하나님과 그의 종을 무시한 자에게 하나님의 공의를 내려줄 것을 간청하고 있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엘리야를 잡으러 온 첫 번째 오십인대가 죽고 사마리아의 왕은 다시 오십인대를 또 보냅니다. 아마 오십인대만 보낸 이유는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서 오십인대를 살랐다는 것을 안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로 파견된 오십부장을 보세요. 인간이 이렇게 어리석습니다. 이미 첫 번 오십인들이 죽었음에도 두 번째로 파견된 오십부장은 엘리야에게 즉시 내려오라고 명령합니다. 즉 첫 번째사람 보다 더 퉁명스럽고 불손하게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역시 지금 한번 해보자는 겁니까? 신에게 도전하는 인간의 초라함과 어리석음을 나타냅니다.

 

자기가 그렇게나 자신이 있으면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엘리야를 잡아 오면 간단한 일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너무 높은 곳에 올라가 앉았는지 어쨌는지 올라가지는 못하고 밑에서 빨리 내려오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는데 영안이 어두운 자의 어리석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전형입니다.

 

엘리야가 비록 초라하고 무력하게 보인다 해도 그를 위해 하나님께서 싸우고 계신다는 사실을 일개 오십부장이 알 리가 없지요. 자기 딴에는 오십부장이 대단한 벼슬같지만 하나님의 눈에 얼마나 웃기겠습니까?
왕도 꾸짖는 선지자에게 일개 오십부장이 명령하고 있으니 결말이 뻔합니다.
이번에도 역시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오십인대를 살라버렸습니다.

 

우리들 중에 혹 이럴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엘리야도 너무 한 것 아니야? 병사가 명령에 따랐을 뿐인데 그렇게나 잔인하게 태워 죽이다니!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군인이라서 어쩔 수 없이 수동적으로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니라 앞서의 두 군대가 불에 살라져 죽은 것은 그들이 아하시야의 악행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엘리야를 조롱하였지요.

 

‘우리가 감히 하나님의 사자에게 손을 대다니 왕이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와 같은 말이 아니라 ‘왕이여 저에게 명령만 해 주시면 참 선지자를 사칭하는 엘리야를 당장 잡아서 대령하겠습니다’하면서 잡으러 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된 겁니다. 명령에만 따랐으니 오십인대에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명령을 이행하는 데에도 그 명령이행의 태도가 다릅니다. 아하시야는 여전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들을 살랐다는 것도 믿지 않고 세 번째로 오십인대를 보냅니다.

이 세 번째 오십인장은 바짝 얼었습니다. 가면 틀림없이 타죽을 것을 알고 그에게 꿇어 엎드려 간청합니다.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명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그는 앞서의 두 오십인대가 건방을 떨다가 하나님의 불에 타죽은 것을 잘 알기에 이를 인정하고 엘리야에게 꿇어 엎드려 제발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오십인대를 살려주려면 어째야 합니까? 따라가야 하지요. 만일 엘리야를 데리고 가지 못하면 왕은 계속해서 엘리야에게 돌려 보낼 것이고 결국은 아무리 겸손해도 하늘의 불이 또 사를 것이기에 오십인장은 나죽었소 하며 엎드려 빌고 있습니다.

 

그 겸비함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보고 여호와의 사자가 말합니다. “저를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내려가라”

15절 “저를 두려워말고”........여기서 ‘저’는 오십부장이 아니라 아하시야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미 납닥 엎드린 자를 두려워할 일이 뭐있습니까?

 

이 말은 눈에 보이는 권세만 두려워하지 말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왕이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천지의 주를 두려워하란 말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의 주가 아니라 천지의 주를 의지하란 말입니다. 이게 선지자 엘리야를 그렇게나 담대하게 만든 배경입니다.

 

아하시야가 비록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하기는 했지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답게 심판의 때에 변명의 여지가 없게 몇 번이고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 저는 몰랐는데요” “하나님 저는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이런 말이 안 나오게 몇 번이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한때 엘리야같은 주의 종이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살면서 제가 엘리야처럼 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야처럼 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만이 그를 하나님의 사자로 만드는 권위의 원천인 능력이 되었지요.

 

돈 걱정도 없고 건강에 대한 걱정도 없고, 앞으로 어떡해야 할까에 대한 걱정도 없고 무조건적인 하나님에대한 신뢰를 가지고 생활해야 하는데 저 역시 인간인고로 그게 안됩니다. 이 걱정 저 걱정도 많고 때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안되는 지도 모릅니다.

 

짐승가죽으로 옷을 입고 떡과 물만 먹어도 만족하는 그에게 돈도 필요없고 걸핏하면 산꼭대기에서 노숙하는 그에게 집도 필요없지요. 그런 그에게 세상의 어떤 것으로 위협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세상에 너무 깊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엘리야처럼 될 수가 없습니다. 눈치를 봐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굴해 졌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왕의 눈치를 살피게 된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도 이와 같이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인간의 권위에 위축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그의 말씀만을 제대로 전할 수 있습니까?

 

엘리야와 아하시야가 만났지만 별 말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엘리야가 아하시야에게 한 말은 아하시야의 사자가 전한 말과 똑 같습니다. 엘리야는 왕궁에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왕의 체면도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이 전하라는 말씀을 그대로 전합니다. “네가 그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아하시야는 정말 고집쟁이입니다. 아니면 정말 어리석은 자입니다. 엘리야가 왜 왕이 죽을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 설명합니까?

 

그냥 죽으면 너무 억울하니까 죽을 때 죽더라도 이유나 알고 죽으라고 그렇게 말했을까요?
아닙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자기가 죽는 이유를 듣고 회개하도록 말한 겁니다. 그런데 아하시야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아버지하고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하면 엘리야의 말을 듣자마자 죽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세상권력과 하나님간의 싸움이고 당연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권위는 깨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하시야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자는 그의 아들이 아닙니다. 여호람이 뒤를 이어 왕이 되었는데 여호람은 그의 아들이 아니라 형제입니다. 그러니까 아합과 이세벨의 아들입니다. 성경은 여호람을 때로는 ‘요람’이라고 하는데 이는 유다왕 ‘여호람’과 구별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여호람은 나중에 결국 에훗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오므리 왕가는 멸문을 하게 됩니다. 이세벨도 죽어서 추한 꼴을 보입니다. 아합의 대에 하나님이 내리신 전주가 그 아들대에 그대로 이루어 집니다.

 

그때는 엘리야도 이미 하늘로 승천한 후입니다. 그러나 그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 졌지요. 마치 나말 나옹화상의 말처럼 바람처럼 구름처럼 살다가 간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매우 미약한 존재입니다. 돈도 없고 권세도 없지만 세상의 존경마저도 없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너무 세상과 세상이 주는 돈과 권세를 두려워하지 말고

 

혹시 뭐라도 좀 얻어 걸릴까싶어서 이곳저곳에 아부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굽히고 하나님의 말씀을 굽히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며 담대히 말씀대로 전파하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목사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가 다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뭔 성도가 말만하면 돈 돈 돈 지겹지도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그의 뜻대로 살기위해서 털옷과 노숙도 두려워하지 않으면 세상도 세상의 왕도 성도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굽히고 세상에 아부해서 세상의 물질과 권세를 탐하게 되면 사람도 추해지고 오히려 세상의 비웃음을 사고 조롱거리가 됨과 동시에 그렇게나 원하던 돈도 권세도 명예도 다 날아가 버릴 것입니다.

 

교회가, 성도가 너무 세상 깊숙이 들어와 있는 오늘날 하나님제일주의는 더 필요합니다. 엘리야같은 능력이 부럽습니까? 그처럼 한번 그렇게 살아 보세요. 똑 같이는 아니라도 물질제일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제일주의로 한번 살아 보세요. 엘리야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를 위해 역사하실 것입니다.
전능의 하나님, 불가능이 없으시며 천지의 주인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세상에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


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


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기회가 있음에도, 정작 기회인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때때로 사람은 참 어리석구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 점은 우리도 마찬가지라서, 오늘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귀히 여기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게다가 우리네 인생은 길어야 100년이고, 병이라도 들면, 또 언제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살아 있을 때, 건강할 때, 주님과 동행하는 삶, 주님께 물어보는 삶, 무엇보다 마음을 주님께로 향하는 순전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초점을 어디에 맞추느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목사님 댁에는 성능이 썩 괜찮은 쌍안경이 있는데, 그걸로 세상을 보면 놀랄만큼 세계가 달라 보이더라고요. 영화 문라이즈 킹덤에서도 거의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으로 세상을 보는게 난 좋아. 우리가 선한 편에서, 즐겁게 살아가는게 난 좋아! 라고 당당하고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마치 리틀 엘리야 처럼, 아름다운 인생일 수 있기를 저는 열심히 응원하고 싶습니다. / 2016. 08.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