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제사보다 순종(사무엘상15:1-3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9. 14. 05:29

 

제사보다 순종 (사무엘상15:1-31)

 

이제 며칠 있으면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인 추석이 다가옵니다. 온갖 햇곡식과 과일들이 나오고 부모형제와 친척들이 모여서 서로 덕담을 주고 받으며 안부를 묻고 웃고 즐기며 맛있는 것을 먹는 아름다운 절기로 저에겐 기억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추석 때엔 꼭 부모님께서 저에게 새옷을 사주셨지요. 그것이 참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릴 때의 그런 일들이 나중에 나중에 아주 소중하고 새콤한 추억으로 남습니다.

저는 다행히도 아직 부모님께서 다 생존해 계십니다. 그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기도하다가 문득 어머니의 음성이 듣고 싶으면 전화를 합니다. 그러면 홍목사 하고 불러 주시는 그 음성이 너무 듣기 좋습니다. 그래서 별일 없어도 그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를 하는 거지요.

 

아버지는 통화내용이 짧습니다. 그래도 아들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그 마음이 느껴집니다. 경상도 남자들이 서울 사람들처럼 자상하게는 표현을 잘못해도 속 깊은 정이 겉으로 나타난 무뚝뚝함 뒤에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은 인류문명을 존재하게 만든 가장 큰 원동력입니다. 우리는 모두 어릴 때의 추억이 있고 고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힘들어질 때마다 문득 문득 고향이 생각납니다. 어릴 때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예수믿는 이라고 해서 별다를게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라고 해서 추석을 무조건 귀찮아 하지 말고 현 제도의 틀 안에서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유익한 집안 고유의 전통을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자녀들이 먼 훗날 우리를 추억할 수 있도록 멋진 시간들을 많이 만드세요. 추석은 그럴 수 있는 날입니다. 이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요 근래에는 추석이 날짜가 많이 당겨지는 바람에 햇곡식과 햇과일은 아직 조금 멀었습니다. 옷이나 신발이 흔해져서 꼭 추석이라고해서 사주는 일은 잘 없습니다. 게다가 어른이 되고 나니까 추석이 마냥 즐거운 날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추석은 우리들에게 없는 것보다는 있는게 즐거운 날입니다. 적어도 고달픈 직장 생활을 며칠이라도 쉰다는게 어딥니까?

 

여러분들에게 추석은 어떤 날입니까? 제사지내는 친척들과 싸우고 음식만드느라 힘들고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염려되는 그런 날입니까? 취직했느냐 결혼했느냐고 물어서 정말 사람들을 만나기 싫은 그런 날입니까?
잘난 친구들 친척들의 자랑질에 속상하는 그런 날입니까?

 

아니면 아예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국내외 여행지로 떠돌면서 푹 즐기는 날입니까?
아니면 세상과 완전히 단절하고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들고픈 날입니까?

우리 교회 권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즘은 죽은 효자가 많다” 무슨 말인지 궁금하시지요?

 

그러니까 죽은 아들이 효도를 한다는 말은 아니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 효도를 하려는 아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살았을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죽고 난 다음에 뻔질나게 드나든답니다. 죽은 다음에 백날 찾아가봐야 뭐합니까? 살아계실 때 효도를 하세요. 품안에 자식이라고 아이들이 어릴 때 부모님이 필요할 때 그때 시간을 많이 보내세요. 나중에 크면 부모보다 친구를 더 좋아하고 더 크면 이성을 더 좋아하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1.사울의 아말렉 전쟁

오늘 본문은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아말렉에 쳐들어가서 그들을 진멸하는 내용입니다. 아말렉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대단합니다. 아말렉 사람들이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에 행진 대열의 후미를 공격해서 많은 피해를 입혔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생판 남이 아닙니다. 아말렉은 에서의 후손으로 이스라엘과는 형제 민족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이삭의 후손, 선택받은 민족의 후예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형제를 배반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잊지 않으시고 모세에게 책에 기록하고 여호수아에게도 암기하게 해서 이스라엘 대대로 이를 기억하고 아말렉을 원수시하도록 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그들과 대대로 싸워서 아말렉을 진멸할 것을 맹세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원래 호전적인 부족입니다. 아주 잔인합니다. 그리고 약탈을 업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형제가 어려울 때 괴롭혔기 때문에 더 더 단단히 미운털이 박혔습니다.

 

이제까지는 이스라엘 왕국이 서지 않았기 때문에 아말렉에 대한 복수를 미뤘는데 이제 사울이 초대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하나님의 명령으로 그때의 원한을 갚으러 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맹세,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명령으로 아말렉과 전쟁을 했기 때문에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말렉을 쳐서 이기고 나니까 아말렉에 좋은게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그 왕을 사로잡고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아말렉의 왕은 죽이지 않고 포로로 데리고 왔고 가축 중에서 좋은 것들은 살려서 가져 왔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누구는 살려주고 어떤 것은 죽이고 하는게 아닙니다. 모두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왕도 죽이고 가축의 좋은 것도 죽이고 아말렉쪽은 씨몰살을 시키라는 겁니다. 여호수아에게 여리고를 ‘헤렘’으로 바치게 한 것과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아말렉을 ‘헤렘’으로 바치게 한 것입니다. 여리고가 가나안의 첫 결실이었다면 아말렉을 진멸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사울이 바치는 첫 헤렘이 되는 것입니다. 그걸 어긴게 되었습니다. 헤렘을 사람이 가지게 되면 그가 헤렘이 되어서 하나님에게 바친바 됩니다. 헤렘을 어기면 그가 하나님의 벌을 대신 받습니다.

 

사울이 싸우는 모습을 자세히 보면 그의 전쟁하는 방식이 굉장히 뛰어납니다. 골짜기에 복병을 두고 전쟁을 합니다. 이십만의 군대를 가지고도 마구잡이식 몰이가 아니라 매복전을 펼친다는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전쟁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공을 들입니다.

 

사울은 아말렉과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아말렉 사람들 중에 우거하던 겐사람을 떠나가게 합니다. 겐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원수가 아니고 오히려 그들을 선대한 은인들입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바로 미디안의 일파인 겐사람이며 모세의 처남은 이스라엘민족을 위한 길잡이까지 했습니다. 원수는 벌하고 은인에겐 은혜를 갚고 더하여 적의 세력을 줄이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가져옵니다.

 

겐 족속이 아말렉과 함께 있다고 해서 그들도 적대했다면 겐 족속도 당연히 아말렉을 도와 이스라엘과 싸우려 했을 것입니다. 사울은 정말 이스라엘의 왕이 될 만한 재목입니다. 화전 양면으로 성공적인 사람입니다. 이렇게 나무랄데 없어 보이는 사울의 아말렉 전쟁이 끝나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릅니다.

 

2.하나님의 시각은 우리와 다르다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우리들이 보기에 그만한 왕도 없는데 그가 잘한 것은 아주 사소한 듯이 보이는 것에 묻혔습니다. 그 정도를 가지고 하나님이 사울을 왕 삼은 것을 후회한다니 참 제가 다 어리둥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후회하심은 빈말이 아닌 듯이 보입니다.

 

글쎄요, 사울의 업적을 보면 그 정도는 아닙니다. 사울은 왕이 되고 나서 14:47절에 “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른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들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겼고 용감하게 아말렉 사람들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졌더라”

 

이 기록은 또 뭡니까? 하나님이 그렇게나 실망했다고 후회한다고 한 바로 그 원인이된 아말렉과의 전쟁을 성경은 “용감하게 아말렉 사람들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졌더라” 보십시오. ‘용감하게’와 ‘건졌더라’ 다 좋은 말입니다. 왕으로서 전혀 모자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이스라엘 역사상 전무한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하하, 제일 첫 번째 왕이니까 당연히 이전에는 없었던 왕입니다. 물론 다윗이라는 더 위대한 왕이 나오기는 하지만 다윗은 후사를 잘못 세워서 나라를 쪼개지게 한 원인을 제공합니다. 다윗이 솔로몬을 세우는 바람에 솔로몬의 사치와 과중한 부역 그리고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나라가 피폐해지고 결국 북 이스라엘에 반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왕을 보고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할 정도로 폄하할 필요는 없습니다. 따지고보면 솔로몬이나 그 아들 르호보암이 더 형편없는 인물들입니다. 여로보암은 또 어떻습니까? 르호보암 보다 더 떨어집니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사울은 그래도 비교적 훌륭한 왕입니다. 그러고보니 통일 이스라엘에는 겨우 세명의 왕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분단국가가 되었지요.

 

그런데 사울이 이렇게 양 사방으로 대적들과 싸워서 가는 곳마다 승리하자 그의 마음속에 초심이 사라지고 교만한 마음이 자리 잡았습니다. 아말렉 전투에서도 보면 갈멜에다 자기를 위하여 승전비를 세웁니다. 그리고 모두 다 진멸하라고 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좋고 아름다우며 살진 양과 소를 남기고 어린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깁니다. 아니 아주 나쁜 것을 제외하고 거의 다를 남깁니다.

 

게다가 아각을 사로잡아 옵니다. 아각은 아말렉의 왕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왕을 임금님이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애굽의 바로 ,가나안의 아비멜렉 같은 왕의 호칭입니다. 그런데 ‘아각’의 뜻은 광포한 자, 다혈질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왕을 가리키는 말이 이렇게 되었다면 그들이 얼마나 다혈질에 광포하며 호전적인지를 잘 나타내 줍니다. 세상에 살아서 전혀 득될게 없는 잔인한 민족입니다.

 

사울이 왜 아말렉의 왕을 잡아 왔겠습니까? 바로 개선식을 위해서입니다. 내가 이렇게 훌륭한 일을 했다는 허영심을 만족시키기위해 아각을 사로잡고 가축의 좋은 것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전리품을 백성들의 눈에 자랑하여 자기의 위신을 높이려는 겁니다. 아마 사울은 아각뿐만 아니라 고위 귀족과 왕족을 많이 산채로 잡아 왔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말렉에 ‘헤렘’을 명하셨지만 사울은 아말렉을 친 것을 자랑하고 왕의 권위를 높이는데 이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고의로 어긴게됩니다.

 

처음 나이 40에 왕으로 뽑혔을 때 왕이 되지 않으려고 짐보따리 사이에 숨었던 순진하고 겸손한 사울은 이제 없습니다. 뛰어난 장군이고 지도자이며 노회한 정치가 사울만 있습니다. 왕이라는 권력에 취해서 이제 사울은 스스로 왕의 권위를 넘어서 선지자와 제사장의 권위까지 침범하려 합니다.

 

사울의 이 아말렉 전멸 전쟁은 좀 철저하지 못했습니다. 많은 아말렉의 후손들이 살아 남았던 모양입니다. 세월이 흘러 600년후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민족을 몰살시키려는 계획을 세운 사람이 페르샤의 재상 하만인데 그는 ‘아각사람 함므다다의 아들’이랍니다.

 

그러니까 아말렉의 왕족의 후손이 살아 남아 포로지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말살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는게 바로 사울의 철저하지 못한 아말렉 소탕작전 때문인 것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이 왜 그렇게 아말렉을 철저하게 진멸하기를 원하시는가 그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좀 잔인하다 이렇게만 생각하고 덮어 버립니다.
헤렘이라니까 헤렘이지, 다 죽인다면서?

 

그러나 하나님은 먼 미래를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아말렉을 철저하게 진멸하지 않으면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이 큰 환란을 당할 것이기에 미리 그 싹을 제거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얍삽한 자들을 벌하시는 것이고 그가 가족이고 친한 사람이라면 그 벌도 더 가중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이 아말렉의 왕을 살리고 좋은 가축도 살리고 한 것은 하나님의 정의 실현을 사울이 훼방을 놓은 것입니다. 자의적인 불순종으로.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가 더 크게 된 것입니다.

 

600년이 아주 긴 것 같지요? 그러나 요즘의 100년보다 변화의 폭이 훨씬 덜합니다. 고대에는 사람의 삶이 거의 변화가 없고 한 지역에서 대대로 사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충분히 민족적 복수심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자 사울은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은 분명히 제대로 명령을 이해하지 않았는데도 눈도 깜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빌고 거짓을 말합니다.

 

사무엘이 화가 나서 묻습니다. “그려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찌 됨이니이까”

자, 여러분 사울의 변명을 한번 잘 들어 보세요.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나님께 제사지내려고 끌어온 것이랍니다. 그것도 내가 아니라 무리들이 끌어 온 것이랍니다. 게다가 이 사람이 하는 말을 잘 보십시오. 누가 그에게 기름 부어 왕을 삼았는데 지금 그는 하나님을 일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라고 합니다. 내 하나님 우리 하나님이 아니라 당신의 하나님,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당신의 하나님 내 부모님의 하나님 내 조부모님의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내 하나님이 아니므로 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습니다. 내가 이 정도로 당신의 하나님에게 정성을 쏟습니다. 그러면 됐지 뭘 더 바랍니까?

헤렘은 우리도 알다시피 모두 다 죽이고 불에 타지 않는 것은 불 위를 지나게하여 여호와의 곳간에 넣습니다. 이것들 중에서 취하여 가지면 가진 자를 헤렘으로 간주하여 그도 죽이게 됩니다.

 

아간이 그렇게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골골짝의 교훈은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보세요. 여호수아 때는 백성들이 헤렘을 지키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무엘을 제외하고 헤렘을 지키려고 하는 이가 없네요. 민족적으로 신앙수준이 하락한 겁니다.

 

더구나 사울과 백성들은 제사지내려고 좋은 것만을 살려서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실상은 거의 죽이지 않았습니다. 15:9에 보면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 비리비리한 짐승들만 죽였다는 말입니다. 사울과 백성들은 자신들의 정욕을 채우는 것이 여호와의 공의를 세우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소 몇마리 태워주면 무마될 걸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과 사울을 받으시지 않고 버리시기로 합니다. 백성들은 여호와의 것인 전리품을 탐을 내었고 공공연하게 그걸 훔쳤습니다. 사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울이 정녕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려고 가축들의 좋은 것을 끌어왔겠습니까? 그런 핑계는 아무도 안믿습니다. 사무엘도, 하나님도 믿지 않습니다.

 

21절에 재삼 변명하면서 사울은 또 하나님을 “당신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제사지내려고 가져왔답니다. 그것도 백성들이. “나는 죄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하나님을 이만큼 많이 생각합니다.”

사무엘이 화가 나서 혼자 돌아가려하자 다급해진 사울은 사무엘의 옷을 붙잡았고 돌아가려한 사무엘의 옷자락이 찢어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이 사람 사울의 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백성들 앞에서 내 체면을 세워 달라는 겁니다. 그 체면이 바로 사무엘과 함께 가서 여호와께 제사지내는 겁니다.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마 하나님과 선지자의 인정을 받는 것을 뜻하기 때문인 모양입니다. 사울이 바라는 것은 진정한 인정이 아닙니다. 그냥 인정받는 척하려는데 내 체면 좀 세워 달라고 하는 겁니다. 사울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회개한 척만 합니다. 백성들의 눈과 장로들의 눈은 신경 쓰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눈은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 제사를 끝으로 사울과 사무엘은 헤어져서 각자 자기의 곳으로 돌아갔고 사무엘이 죽는날까지 사울을 다시 보지 않았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다시는 사울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말도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 왕으로서 사울은 여러 국경일에 제사를 지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사무엘을 다시 보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그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한답니다. 하나님은 항상 절대로 후회치 않고 변개치도 않는 분인 것처럼 말해져 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후회하시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하나님은 우리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을 지킬 의무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우리도 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긴다면 하나님만 언약을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하나님 역시 언약을 파기하게 됩니다. 이건 하나님의 입장에서 결코 변개한게 아닙니다. 약속을 깬 것은 인간이 먼저 이므로 하나님은 변개치 않는 분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우리가 결코 그를 배신하거나 언약을 어기지 않는다면 하나님 역시 우리를 내버리실 리가 없습니다.

 

22절에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 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그래요, 하나님은 순종을 제사보다 더 낫게 여기시고 목소리를 청종함을 번제보다 더 좋아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존중하는 자를 존중하고 자기를 멸시하는 자를 멸시하십니다. ‘네가 나를 버렸다면 나도 너를 버릴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예배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사는 것은 다른 어떤 헌금과 헌신보다 더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예배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를 그가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예배당에 앉아서 딴생각하고 너무 지겨워서 졸기나 하고 어서 빨리 예배시간이 끝나기만을 바란다면 그건 예배가 아닙니다.

 

기도를 하루에 몇시간씩 한다고 자랑하지만 실천이 없이 기도만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게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혼자만의 심신도야? 글쎄, 수도사도 아니고 도사도 아닌데 기도하고 일어서서 행동해야 합니다. 심지어 아무 생각 없이 중언부언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도 역시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은밀한 중에 내 전심을 다하여 아버지께 아뢰고 그와 소통하는 비밀하고 영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그걸 중인 환시리에 하려고 한다 던지 몇시간을 기도합네 하고 자랑하려고 한다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전도요? 예배당에 앉혀놓는다고 전도가 아닙니다. 그로 하여금 믿게 해야 하지요. 총동원 주일 진짜 많이 했는데 그래서 수백명씩 심지어 수천명씩 새신자가 오면 뭐합니까? 다 놉한 신자입니다. 믿지 않던 이들은 경품으로 연예인을 보는 것으로 유혹하고 믿는 이들은 빌려 오는 거지요. 그래서 다음에 그쪽 교회에서 총동원 주일하면 가주는 것으로. 이런 쓸데없는 일에 수천만원 심지어 억단위의 예산을 사용한다면 이는 죄악입니다. 냄비 주고 설탕 주고 해서 모은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거 안주는 다음 주부터 바로 오지 않을 건데.

 

그리고 근본적으로 믿는 이라고 하는 이름을 생각해 봅시다. 신자라고 하는 이름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성도라고 하는 이름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내가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믿는다면 그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 명령을 준행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사랑하라 하는데 나는 사랑하지 않고 아버지는 흩으라고 하는데 나는 모으고 아버지는 받지 말라고 하는데 나는 받는 것을 좋아하고.

 

요즘 어떤 이의 말이 사람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일년에 생활비를 무려 5억씩 쓴다는 어떤 분은 도대체 돈을 어디다 썼는지를 물어보는 이에게 나누는 삶을 좋아해서 남들에게 베풀었다고 말했는데 그가 베푼 것은 매월 월드비전 3만원 ,적십자 3만원 뭐 만원 ,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 없을 지경입니다. 뭐 그것도 안하는 것보다야 좋지요. 당연합니다. 그러나 월 사천이상 생활비로 쓰는 사람이 그래 그걸가지고 베푸는 삶이라고 하면 너무 웃기고 슬픕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하나님은 가장 기뻐하십니다. 왜나면 자녀가 아버지의 말을 듣고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그의 행동을 본받고  그대로 살아가는 것은 아버지의 기쁨이고 보람이기 때문이지요. ‘내가 저것을 인간만들기 위해서 참 수고했지!’

 

더구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게 되면 사람들이 나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칭송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드높이는 일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아버지의 더없는 기쁨이 됩니다.

제가 우연히 어떤 글을 읽었는데 40대까지는 자신이 돈을 얼마나 잘 버느냐가 자랑이지만 50대 이후에는 자식들이 얼마나 잘되었느냐가 자랑거리랍니다. 하나님 역시 그러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잘 사는지 자기의 명령대로 잘 행하는지가 아버지의 자랑거리가 됩니다.

 

아버지는 전능하신 신이시기 때문에 자기마음대로 우리를 조종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재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 보세요. 앞으로 가는 것밖에 못하는 로봇 장난감이 있다면 처음에는 조금 신기해도 그게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프로그램된 것 밖에 못하는 로봇이 착한 일을 하던 못된 일을 하던 그건 프로그램을 그렇게 한 때문이므로 프로그램한 자가 욕을 먹거나 칭찬을 받는 거지 로봇이 욕을 먹거나 칭찬을 받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인간처럼 자유의지를 가지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착한 일을 해야 비로소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 사울의 행위를 봅시다. 이 사람은 하나님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제물로 사용하기위해 짐승 중에서 좋은 것들은 가지고 왔답니다. 자기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백성들이 자꾸 그렇게 하고 싶어 해서 가지고 왔답니다. 좋습니다.

 

좋은데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사람이 단지 가축의 좋은 것들만 살려서 가지고 온 것이 아닙니다. 사울이 생각할 때 자기의 눈에 좋은 것들은 진멸하기가 아까웠던 것입니다 . 그게 가축만 그런게 아닙니다. 사울은 왕도 사로잡아 가지고 왔는데 이때 왕만 산게 아닌 모양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가짐이 아말렉을 멸절시키는데 열심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이래저래 많은 이들이 살아 났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헤렘에 대한 명령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지는 고려 밖입니다. 그저 백성들의 인기에만 연연하다가 정작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서 버린바 되었습니다. 사울은 왕가를 세우고 아들에게도 왕위를 전하지 못하고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집니다. 사울이 살려준 이들이  나중에 페르샤에서 이스라엘 민족과 마주치게 되고 결국은 이스라엘 민족을 멸절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물론 사무엘이 아각을 죽였기에, 사울이 아말렉을 쳐서 파했기에 원수를 갚으려고 그랬을 수도 있기는 합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나 만일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아말렉을 멸절시켰다면 그 후손이 살아 있을리도 없을 것이고 이스라엘에게 복수한답시고 민족 말살 음모를 꾀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 우리가 너무 잔인하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은 자꾸 아말렉이거나 다른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라고 하시는데 이는 너무 잔인한 행동이 아닐까요? 요즘 제네바 포로 협정도 있는데 이런 식으로 마구 죽이는게 문명인다운 행동입니까?
주의 택하신 백성이 오히려 이방인보다 더 잔인하고 흉포합니까?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아말렉이나 다른 가나안의 토종민족들을 진멸하라고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사람들의 죄악된 문화에 전염되어 이스라엘이 범죄 할까봐서 이들을 아예 접할 수 없게 멸절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실 이방신 특히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의식은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 하고는 비교자체가 불가할 정도로 재미있고 후끈합니다. 이런 이방 제사의 특징이 음탕함과 잔인함입니다. 짐승이 아니라 사람을 바치는 인신공양, 신전 창남, 창기들과의 성관계, 무희들의 음란한 춤 등이 그들의 제의 특징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신전에서 남녀신도들이 서로 눈을 맞추어 성매매도 한답니다. 그러니 엄숙하고 지루하며 냄세 나는, 파리와 모기떼가 들끓는 여호와 제사하고는 비교할게 아닙니다. 그러니 그 촌스런 노예의 후손들이 그런 쾌락적인 제의를 접하면 바로 여호와를 배신할 것이므로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로 다 멸망할 것이므로 그들을 보호하기위해 이방족속들을 멸절시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말이 쉽지 멸절이 어렵습니다. 아각의 후손이 끝까지 살아 남아서 높은 자리에 오르는걸 보면 아말렉은 그 이후에도 살아남아서 큰 세력을 형성했던 모양입니다. 후진국이 선진국을 이기는게 쉽지가 않습니다. 후진국 이스라엘은 선진국 가나안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두고 두고 그들은 이스라엘의 가시가 되어서 나중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조차 거의 전부 바알과 아세라를 비롯한 이방신을 섬기는 자가 되어서 나라가 동강나고 그것도 부족해서 이방에 포로로 잡혀가고 심지어 뿔뿔이 흩어지는 고난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걸 아시는 주님이 아예 그 원인을 제거하려고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잔인하게 보이는 명령을 내린 겁니다.

 

원래 아말렉은 에서의 후손으로 이스라엘하고는 친척입니다. 에서와 이스라엘은 쌍둥입니다. 그런데도 아말렉은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쳐서 대열에서 낙오할 때 그들을 구호하고 보호해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대열에서 낙오한 자들을 치고 빼앗았고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훼방한 자들입니다. 생판 모르는 남이 해를 끼친 것보다 하나님의 눈에 더 괘씸하게 보인 겁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의 후손들은 각각 민족을 이루었지만 둘 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에서와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각각 민족을 이루었지만 둘 다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에서의 후손들은 하나님에 대한 배신자가 되어서 형제를 빼앗고 탈취하는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매우 징치하려는 것은 정의에 합당한 행동입니다.

 

여러분, 죽은 효자보다는 산 효자가 더 낫지 않을까요?
부모님이 아직 살아 계셔서 내가 마음껏 효도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어떤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부모님이 귀찮고 섭섭하고 밉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생각하면 얼마나 그립고 안타까울까요?

 

내가 부모님에게 잘하면 내 자식도 본을 보고 나에게 잘할 겁니다. 부모님에게는 좋은 재물을 드리는 것 보다 말 잘듣고 부모님을 기뻐하고 착하게 사는 것이 더 큰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그래서 제사보다 순종이고 제물보다 순종입니다.

 

추석 명절동안 해외로 많은이들이 나갑니다. 갈려면 부모님도 모시고 가시기 바랍니다. 자기들끼리만 가면 반칙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명절 때가 되면 부모님들은 자식이 언제 오나 이제나 저제나 하며  기다립니다.

 

혹여라도 오지 못한다는 전화를 받으면 삶의 낙이 없어지는 듯이 쓸쓸해 합니다. 이제 늙어서 활동적인 일도 못하고 자식들만 바라며 사시는데 정작 자식들은 부모를 귀찮아 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일까요?
‘남잡이가 제잡이’라고 자기가 부모에게 불효하면 그걸 보고 큰 자식이 나중에 자신에게 불효합니다.

 

부모님이 자식이 사오는 선물을 좋아하는게 아닙니다. 단지 선물을 사 올 수 있을 만큼 걱정없이 여유있게 사는 것이 기꺼울 뿐이지요. 그리고 자식들이 돌아갈 때는 뭐라도 하나 더 주려고 집안을 싹싹 터는 분들입니다.
수구초심이라고 여우도 죽을 때는 굴이 있는 곳으로 머리를 둔답니다. 사람도 역시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그 마음은 더 심해 집니다. 고대 우리 조상들의 무덤에는 아주 신기한 특징이 있었습니다.

 

‘동침앙와신전장’이라고 머리를 동쪽으로 두었고요 또 하나는 새의 날개를 부장품으로 넣어 두었답니다. 그런데 이게 우리나라뿐만이 아닙니다. 만주의 장군총에서도 이집트와 미얀마와 과테말라의 피라미드 안에서도 똑같이 날개가 발견됩니다. 저 세상으로 날아가라고. 우리는 모두 하늘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오래 살면서 옛 기억을 잊고 사탄의 자녀로 살아가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는 초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죄로 단절되었던 하나님 아버지와 화해하고 그분과 함께하는 삶을 삽니다.

 

전국적으로 제사가 지내지고 마치 이게 대단한 일인양 민족의 오랜 풍속인양 하지만 제가 항상 말씀드렸다시피 이 풍습은 결코 오래된게 아닙니다. 제사가 민간에 확 퍼진 때는 20세기 들어와서 부터이고요 양반들 사이에서 퍼진 때도 18세기 이후부터입니다. 기록상으로 제사의식이 기록된 책들은 주로 19세기 후반에나 출간됩니다. 그 전에는 집에서 자필로 만든 책밖에 없었습니다.

 

제사는 양반들의 전유물이고 사당을 가진 자들을 위주로 의식이 만들어 졌습니다. 비단옷을 입고 사당을 가진 자들은 행세하는 양반들밖에 없습니다. 조선말기에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을 때 신분제가 느슨해지고 가짜 양반들이 늘어날 때 제사법을 모르는 가짜들을 위해서 제사법 책들이 나온 겁니다. 그리고 이건 중국의 제도입니다. 정작 중국에서는 제사가 없어졌고 우리만 지금도 맹렬히 제사를 지냅니다.

 

그리고 이 제사 때문에 부부사이에 불화와 이혼이 많아 집니다. 명절증후군이라는 며느리들의 병도 생기고 본가에 시댁에 가지 않으려고 명절 당직을 자처하는 이들이 늘어났다는 글도 있습니다. 삼천리 강토를 귀신의 나라 사탄의 왕국으로 만들어 버리는 전국적인 우상숭배의식은 그만두시기를 바랍니다.

 

기독교도들은 모여서 예배하고 돌아가신 조부모님을 추억하며 살아계신 부모님은 기쁘게 하는 그래서 죽은 효자 말고 산 효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집들이 작아서 한집에 모이기 어려워서 팬션같은 곳을 빌려서 고기 구워 먹고 쉬다가 오는 집도 많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추석은 처가에 설에는 본가에 뭐 이런 식으로 정해서 왔다 갔다 하는 것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하기만 하면 복을 주겠다는 효도를 듬뿍하시기를 바랍니다.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제사니 성묘니 부지런히 찾아 본다고 하지 말고 살아계실 때 부지런히 찾아 뵙고 문안 전화도 자주하고 그렇게 살 일입니다.

 

무조건 본교회만 사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말을 이용해서 부모님과 형제들과 함께 고향 모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도 정말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추석에 처가에 가야돼서 그때 본가에 추석에 못가면 추석 전주에 주말을 이용해서 고향에 가서 찾아 뵙고 함께 예배도 드리고 오세요.

 

시간이 없어요? 그럴 수는 있습니다만 성묘 때문에 고속도로 정체가 심하다고 하는 그 날에 다녀오세요. 아니면 명절 다음 주에 가는 것도 좋습니다. 이제 다 끝났다고 마음을 접고 있을 때 자식이 온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무슨 효도 무슨 효도 해도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게 제일 큰 효도입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며느리는 특히 우대해야 합니다.

 

뭐니 뭐니 해도 하나님과 함께 사는게 가장 크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평소에는 기도하지도 않고 평소에는 예배하지도 않고 평소에는 찾지도 않다가 뭔 일이 생기면 정신없이 엎드리고 기도해봐야 우리 하나님은 안들어 주실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평소에 잘하시기를 바랍니다. 평소에 아버지와 함께 하며 그를 기쁘게 해둬야 나중에 내가 필요할 때 부탁하기가 더 쉽지 않을까요?
뭐 더 필요한 것이 없느냐고 막 주실려고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사울에게 사무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우리가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 우리를 버리실지도 모릅니다. 아버지의 품안에 있을 때는 모르던 어려운 일들이 아버지의 품 밖으로 나가면 엄청나게 많이 생길 겁니다. 그때서야 후회하며 눈물 짖지 말고 있을 때 잘합시다.

 

참고로 제사를 부인한다고 해서 우리 기독교도가 결코 부모를 모르는 불효자들이 아닙니다.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다시피 십계명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람들 사이의 계명으로는 제일 첫 번가는 계명이 효도입니다. 이 효도를 하면 이 땅에서 장수하고 돈도 건강도 명예도 주신다는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아직도 약간은 덥지만 푹푹 찌는 가마솥에 들어간 것 같던 날씨가 정말 기적처럼 시원해 졌습니다. 아직도 매미가 우는 것보니까 늦더위는 있지만 이제 정말 아침저녁으로 서늘해 지고 하늘은 맑고 높아지고 그래서 정말 가을이 왔습니다.

부모님께 효도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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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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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저는 이 말을 참 좋아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살았고, 주님께 선대하였으므로, 주님도 저를 잊지 않으시고 선대해 주세요. 라는 말... 이 말은 실제로도 효과가 무진장 커서, 저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던 것들을 대부분 이루었습니다. 정말로 걱정 없이 자랐습니다. 그래서 너무 철이 없는 게 문제지만요...

 

평소에 부모님께 잘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다가 와서 딱 두 마디를 했는데 매우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말이었습니다. "아프지 마라, 아프지 마라."

 

이번 한 주간은 숨결이 바람 될 때 라는 젊은 의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에세이를 읽었습니다. 0.00..... 몇으로 떨어질만큼 낮은 확률인데, 36살에 폐암진단. 그럼에도 의엿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이 마음을 잔잔하게 울리던 글이었습니다. 우리, 아프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평소 산책도 다니며, 건강도 관리하며, 서로를 고마워하며 아끼며 살아가기, 그런 다정하고 소박하고, 평범한 모습들 사이에 행복도 함께 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아직은 신앙이 부족해, 비록 범사에 감사할 수 없을지라도... 이만큼의 삶을 누릴 수 있음을 특별히 감사할 수 있기를... / 2016. 09.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