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진실도 인애도 지식도 없고(호세아4: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9. 25. 02:44

 

진실도 인애도 지식도 없고 (호세아4:1-)

 

제가 원래 준비하려던 말씀은 호세아서4장이 아니라 우리가 잘 아는 호세아2장이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서4장 말씀을 읽다가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그게 뭐냐면 10절에 나와 있는 말씀 “음행하여도 수효가 늘지 못하니”
이 말씀을 보고 정말 제가 깜짝 놀라서 이 말씀을 본문으로 설교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오는 이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가 정말 어렵습니다. 아니 어렵기는 옛날부터 그랬지만 점점 규모와 질서가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사회가 정교하게 맞물려서 돌아가는게 아니라 나사가 빠졌는지 톱니바퀴가 제대로 맞지 않아서인지 헛발질도 많이 하고 제대로 돌아가는 부분이 매우 적습니다. 더구나 우리나라사람처럼 돈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경제가 지금 몇 년째 뒷걸음질이고 당분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회사와 부자들의 곳간에는 돈을 쌓을 곳이 없어서 해외 조세피난처의 유령회사에 빼돌려 둔 돈이 세계3위, 경제 규모나 인구로 봐서는 세계 1위. 그리고도 이 땅의 노동자 절반이 월 200을 못받는답니다. 그래서 쓸 돈이 없다고 합니다. 당연히 장사가 안되고 당연히 공장은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없고 점증하는 보호무역주의 추세 때문에 수출도 안되고 돈이 없어서 내수도 안되고 신생아가 안 태어나니까 경제에 활력이 없어지고 ...

 

게다가 더 문제인 것은 정치를 담당한 자들과 일반 국민들은 지금 따로 논다는 것입니다. 국민들은 정치꾼들에게 혐오감을 갖고 있습니다. 냉소를 지나서 저주하고 혐오하며 무시합니다. 사실은 이게 더 큰 일이지요. 민관이 서로 협력하고 군이 신뢰를 얻고 있다면 당연히 어려움은 있을지언정 절망은 없습니다. 경제라는게 별겁니까 결국은 사람들의 마음이지요. 나아질거라는 믿음이 경제도 현재의 삶도 긍정적으로 만들고 이런 긍정적인 마음이 결국 실물경제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그래서 선순환을 이루는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온통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말들뿐입니다. 그래서 더 오그라듭니다. 우리네 마음이 강팍해 지고 인색해 지고 공격적으로 변하고 남을 탓하고 주위에 화를 내고 일을 망치고 그래서 나라도 망치고 결국은 서로 죽음의 경주를 펼치는 겁니다. 누가 죽나 한번 해보자!

 

여러분, 이건 절대로 안됩니다. 멸망으로 가는 폭주열차를 당장 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민족의 앞에는 멸망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이 민족의 멸망을 멈출 지도자와 현명한 국민들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북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죄악을 저지른 북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남 유다에 대해서도 북 이스라엘의 죄악을 답습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남북을 통틀어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라 ”
먼저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가 들어야 된다고 하시는데 이 말은 사회지도층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역시 들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제까지 이스라엘백성들의 죄를 주로 지도자에게 물으셨고 백성들은 도매금으로 같이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백성들 개개인보다는 위정자들의 책임이 크니까 그렇게 위정자들, 지도층에게 경고를 하셨지만 이제 이스라엘은 몇몇 사람들이 문제가 아니라 온 나라 전체가 죄에 푹 빠져 온 국민이 하나님의 경고 대상으로 변했기에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 전체를 대상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그러나 논쟁이란 말은 원문 상으로는 ‘고소’나 ‘소송’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 백성을 죄있다고 기소하신답니다. 기소, 그러니까 고소한다는 말입니다. 백성들도 지도층들과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이 나라 백성전부가 다 죄가 있다고 고소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슨 죄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소합니까?

 

“이 땅에는 진심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진심도 인애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답니다. 원문 상으로 ‘없다’는 말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무’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심도 인애도 지식도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진심이 어느 정도 있고 인애도 조금 있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조금은 있는 상태가 아니라 전혀 없는 상태, 완전한 무의 상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신의 법정에 이들을 기소한다는 말입니다.

 

진심은 무엇일까요? 하나는 신실함을 또 하나는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백성 전부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위선과 가식으로만 대했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이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민족의 우상을 좇아 허랑방탕하며 음란하며 잔인해 졌다는 말입니다.

 

인애는 헤세드를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말하며 하나님의 날개아래 우리를 품어 주신다고 할 때 ‘헤세드’란 말을 사용합니다. 은혜와 은총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아무 때에라도 보호와 인도하심을 주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헤세드는 언약에 기초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깨버린다면 하나님도 역시 그 언약을 깨실 것이고 그러므로 헤세드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동료 인간들에 대한 은총과 자비를 가지고 있지 않고 하나님을 성심히 섬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헤세드를 입지 못할 것입니다. 일단 우리는 헤세드가 전혀 없답니다.

 

세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없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안다고 해서 단순히 피상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만큼 하나님을 잘 아는 민족이 어디있겠습니까?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렇게 피상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본질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보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긴밀한 영적 관계, 그분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당연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너무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었고 우상을 섬겼고 음란한 풍습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가지 죄목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를 자신의 법정에 죄있다고 기소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호세아서의 서두를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재판장되신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논거하시면서 판결을 내리기전에 죄인들은 들으라고 준엄하게 외치시는 모습을 상상하게 됩니다. 그 앞에 일어선 죄인들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준엄한 판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가지가 없다고 꾸짖으신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섯가지의 죄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이 다섯가지의 죄악은 모두 십계명의 3,9,6,8,7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이 저주는 ‘신의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불행한 일이 닥치도록 맹세하며 저주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못하도록 하셨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남을 저주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사용했습니다.

 

속임은 거짓말이나 사기 그리고 법의 판단을 굽게 하는 일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뇌물이나 빽을 이용하여 돈없고 힘없는 이들에게 재판을 엉터리로 행하였고 죄를 뒤집어 씌울 뿐만 아니라 억울한 이들의 호소를 외면했으며 부하고 권세있는 자들의 악한 행위를 합법이라 칭하여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요즘 이러한 행태로 사람들로부터 외면받고 불신받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또한 사업상의 거래에서 저울의 눈금을 속이고 물건의 무게를 속이며 사기를 치고 이 사기행위를 권력이 눈감는 일을 벌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기가 성하고 거짓과 불법이 난무해서 사기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가증히 여기시는 범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살인은 그냥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적대감을 가지고 사람을 아주 산산조각내는 그런 잔인한 행위를 말합니다. 이러한 죄악은 북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남 유다의 백성들에게도 만연했으므로 당시의 이사야나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들이 탄식하며 이러한 죄악을 지적한 것을 보면 남이나 북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는 일을 즐겨한 듯이 보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에서도 토막살인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장기밀매도 일어납니다. 심지어 조선족들이나 중국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인육을 파는 일도 저지르니 이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일입니다. 요즘은 사람들의 살인방식이 아주 독해졌습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이것은 말기적 증상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우리 하나님의 아이콘이며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도둑질은 남의 소유를 불법적으로 훔치는 행위이며 간음은 유부남이나 유부녀가 외간 여자나 남자와 간통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땅에 얼마나 간통이 만연합니까? 저들 법을 집행한다는 이들이 간통을 저지르고 법을 만든다는 이들이 간통을 저지르고 그래서 혹시라도 자기들이 간통을 저지르지 못하게 될까봐서 아예 간통죄 자체를 폐지해 버릴 정도로 이 땅의 영적 상태는 최악입니다.

 

아마 당시의 북 이스라엘도 이와 같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간통을 저지르는 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멸망당하기 전의 말기적 증상이라고 보면 됩니다.

 

2절의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는 말은 그냥 앞의 다섯가지 죄가 급격하게 증가하여 터져나왔다는 말입니다. 요즘 우리나라를 보면 이와 같은 범죄들이 급격하게 증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진노를 어찌 피할려고 이런 짓을 저지르는지 정말 안타깝고 두려운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이 땅이 슬퍼하며 거기 사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우리 인간이 범죄하면 땅과 바다가 저주를 받고 그 땅에 거하는 사람들부터 해서 짐승들과 바다의 물고기가 씨가 마른답니다. 이는 기근이 일어나서 생명들이 점점 죽어간다는 말입니다. 기근은 하나님을 배신한 백성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징벌 중에 하나입니다.

 

요즘 우리나라도 가뭄이 계속해서 늘어납니다. 강은 썩어가고 바다의 물고기는 씨가 마릅니다. 땅도 역시 강팍하여져서 점점 더 많은 농약을 치지 않으면 농사가 안됩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는 농약범벅의 농산물을 먹고 건강에 치명적인 물을 마시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우리나라의 암발병이 급격하게 늘었답니다.

 

뿐입니까 지진도 자주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 우리는 지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부모가 되었을 때 우리는 지진으로부터 자녀들을 보호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우리가 예전에 많이 먹었던 명태, 요즘은 수입합니다. 뿐만 아니라 후꾸시마 원전에서 나온 방사능에 오염된 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 수산물을 먹지 못할 지경에 처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아주 위험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먹거리가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은 우리의 생존자체에 대한 위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겸비하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앞에 죄를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교만하여 자고합니다.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이 얼마나 무서운 줄 모르고 죄악과 환락에 취해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점점 멸망으로 다가갑니다. 이제는 이러한 죄악들이 너무 성하여 마치 우리가 전부 끝장이 나야 정신을 차릴 것 같이 어지럽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소서!

 

그런데요 그런 곤란한 상황에 놓인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은 “그러나 어떤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며 책망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이지요?
여기서 다투다는 말은 우리가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말다툼하고 서로 소송을 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백성들끼리 서로 싸우고 고소하고 해도 이스라엘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또 하나는 백성들 너희들도 죄가 있지만 더 큰 근본적인 잘못은 제사장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가르쳐서 잘 인도할 책임이 더 큰 것인데 그들이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제사장에게 더 큰 책임을 묻는 다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을 하나님의 법정에 기소한다는 것입니다.

 

“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처럼 되었음이니라”는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이 말은 제가 생각할 때는 우리말로 번역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문의 뜻을 참조해서 새로 해석한다면 ‘그리고 너에 대해서이다 그렇다 나는 너 제사장을 고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제사장을 세우신 까닭은 백성들의 제사를 대신 지내주고 의식을 해결하기위한 직업으로 주신게 아니고 대우받고 폼 잡으라고 주신게 아니라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살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하고 가르치고 그들의 본이 되고 사회가 어려울 때 어지러울 때 중심을 잡고 나아가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만일 제사장들이 더 바르게 살았다면, 그들이 자기들의 책임을 더 잘 감당했다면 오늘날 백성들이 이렇게까지 타락하고 방종해지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지도자란 그런 것입니다. 그냥 대우받고 권세를 휘두르라고 세운게 아닙니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백성들에게 바르게 살도록 지도하고 또 백성들에게 본을 보이고 사회의 중심이 공의롭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중심을 잡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 역시 죄를 저지르는 왕실에 붙어서 온갖 아부를 일삼고 나라가 우상에게로 가는 일에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나에게 돈이 들어오고 권세가 있고 내가 이렇게 안락한데 그런 밥그릇을 스스로 걷어찰 일이 없다고 주장하며 왕과 함께 죄악을 저지르는데 앞장섭니다. 그러니 백성들이 본을 보고 따라하는 것입니다.

 

왕이나 지도층이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 법과 영을 세우고 법집행을 가혹하게 하고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들이 스스로 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백성들에게만 지키라고 해봐야 누가 듣겠습니까? 다만 법령에 위배되어 기소되는 자들은 내가 재수가 없다고 생각하지 잘못되었다고는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법은 자기에게만 가혹한 아주 불공평한 것이라고 오히려 사회와 나라를 더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백성들을 바르게 살게 하려면 먼저 자기가 법을  지켜야 합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이 없어져야,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해져야 비로소 백성들의 도리가 바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제사장들과 다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바로 서지 않고 어떻게 나라가 바로 설 수 있겠습니까? 백성들이 볼 때 제사장들은 종교적으로 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종교라는게 사람의 영혼과 정신을 담당하는 것이고 정신이 바로 서면 자연적으로 육체도 바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사상이 바로 서면 자연적으로 사회가 바르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제사장이 바로 살지 못하면 백성들이 그 제사장이 하는 말을 권위있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재물로 조종되는 자에게는 재물로, 권세로 조종되는 자에게는 권세로, 여자로 조종되는 자에게는 여자로 그들을 조종하려 들 것입니다. ‘너희는 이것만 가지고 그냥 입을 다물어라’

 

오늘 이 땅이 바로 가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돈을 너무 사랑하지요? 그렇다면 목사들은 돈을 사랑하지 않을까요? 대도시의 제법 규모가 있는 교회 담임목사들에게 주는 돈은 너무 많습니다. 전문용어로 오만거 때만거 다줍니다. 이렇게 하니까 이 사람들이 돈의 노예가 되어서 돈을 잃을까 싶어서 사람들의 죄악에 대해서 지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돈이 되는 일이면 슬그머니 눈을 감고 자기들도 덩달아 세상풍조에 몸을 싣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의 눈치를 보게 되고 결국은 세상에 아무런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금으로 상처에 뿌리면 어때요? 무지하게 아픕니다. 적어도 화끈거립니다. 그러나 그게 사실은 상처의 균을 죽이는 과정이지요. 사람을 살리는 것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소금을 뿌렸는데도 아무런 통증이 없거나 별다른 증상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소금이 잘못되었거나 우리가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지도자들을 먼저 혼내시는게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물론 백성들이라고해서 면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죄를 저질렀으므로 그들도 역시 기소가 되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들의 죄가 더 크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제가 목사들을 유독 정죄하고 비판하지만 그건 제가 목사라서 입니다. 만일 제가 목사가아니라면 목사가 아니라 위정자들이나 법조계를 비난했겠지요.

 

5절에 보면 “너는 낮에 넘어 지겠고 너와 함께 있는 선지자는 밤에 넘어지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너는 제사장을 말합니다. 제사장과 선지자가 모두 넘어 진다는 말은 이제 이스라엘의 종교계가 완전히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내가 네 어머니를 멸하리라”는 말은 이스라엘을 멸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나라를 조국이라고도 하고 모국이라고도 하는데 바로 그 뜻입니다.

 

누구보다도 나라에서 혜택을 많이 입은 제사장과 선지자가 하나님의 길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기에 백성들이 우상의 길로, 음란과 방탕과 폭력과 거짓의 길로 간 것은 제사장의 책임이므로 제사장을 기소하는 것인데 결국은 그들에게 혜택을 주는 나라자체를 멸망케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목사가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아서 교회를 망하게 하겠다는게 아니라 나라를 망하게 하겠다는 겁니다.

 

제가 요즘 우리나라에서 회자되는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이런거. 누구보다 나라에서 혜택을 많이 받았고 나라가 있음으로 혜택을 많이 받을 사람들이 또 그들의 자식들이 군대에 안갑니다. 이 사람들은 대부분이 군면제입니다. 너무 웃기지 않습니까?

 

솔직히 백성들이야 등따시고 배부르면 나라야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는 자들입니다. 물론 나라가 있어야 백성들의 삶이 안정될 것은 자명하지만 그것 또한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입니다. 결국은 지도층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서민들이야 여기서도 서민이고 또 다른나라의 국민이 되어도 역시 서민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지도층은 다르지요. 여기서 지도층이라도 저기서는 지도층이 아닐 확률이 더 높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게 이 나라는 백성들이 나라를 걱정하고 지도층은 나라를 수탈할 생각만 하고 있는지 정말 황당하고도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6절 말씀은 정말 섬뜻합니다. “내 백성이 자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라가 망하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원뜻은 ‘내가 멸하리라’입니다. 내 백성이 자식이 없어 망하는게 아니라 ‘내가 이 백성들을 자식이 없게 하여 멸하리라’ 이 말은 반드시 이루어질 일임을 확증하기 위한 ‘예언적 완료’랍니다. 내가 반드시 자식을 없게하여 망하게 할 것이다. 기대해도 좋다.

 

우리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의 마음에는 나라에 대한 원망과 부자와 권세자들에 대한 미움과 증오가 가득합니다. 남자는 여자 여자는 남자에 대한 증오가, 이유없는 증오가 철철 넘칩니다. 여자들은 남자들을 한남충이라고 합니다. 벌레, 남자들은 여자들을 김치녀, 된장녀라고 합니다. 그래도 남자들은 여자를 사람취급은 합니다.

 

이게 정상적인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실 예로부터 쪼개고 나누는 것을 좋아 했습니다. 남과 북으로 동과 서로 젊은이와 늙은이로 이제는 남과 여로 이거 뭡니까? 우리 하나님은 이런 분열과 다툼을 미워하십니다. 증오하십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더 이상 노예는 놓을 수 없어서 나 혼자 즐기고 내가 죽으면서 이 나라도 망하면 좋겠다’는 원독에 찬 소리로 가득합니다. 지금 우리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지요?
지금부터 백여년전 구한말 우리나라의 인구는 약 1400만에서 1900만 정도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조선시대 니까 인구조사가 정확하지 못합니다. 삼일독립선언문에 보면 ‘이천만 민중의 성충을 합하여’라고 되어 있는데 그냥 반올림하고 멋있게 보이려고 이천만이라고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 선언문이 역사 기록도 아니고 1922만 4523명의 성충을 합하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쟎아요.

 

지금은 남북한 합쳐서 한 7500만에서 8000만 정도? 많이도 늘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 한반도에 삼천만명만 있어도 된다느니 천만 정도만 살면 좋겠다느니 말합니다. 그렇게되면 사람값도 올라가고 집값도 안정되고 일자리도 널널 하고 경쟁도 덜하고 살만 할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맞는 말 같지만 절대로 그렇게 되도록 다른 나라들이 놔두지 않습니다. 힘없는 자가 맛있는 것을 가지면 그걸 뺏들려 하지 놔두고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식이 없어지면, 그렇게  되면 바로 망하는 겁니다. 자식이 없어서 망한다는 개념은 참 희한한 개념이지만 없지는 않습니다. 역사에 보면 역사의 미스터리라고 인종자체가 없어져서 나라가 사라진 비운의 민족들이 몇있는데 이제 우리가 그 주인공이 되려 합니다. 아니라도 점차적으로는 경제의 활력도 없어지고 외침을 막을 수도 없고 ...

 

우리가 범죄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멸망시키는데 자식이 없게 해서 멸망시킨답니다. 너무 너무 무섭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분명 북 이스라엘에 대해서 심판의 예언을 하신거지만 오늘날 우리나라와 너무 똑 같아서 정말 소름끼칩니다.

 

그 이유가 바로 다음에 나옵니다. 6절에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지식입니다. 자식이 아닙니다. 저도 처음에는 지식을 자식으로 잘못봐서 얼마나 놀랐는지! 마치 하나님이 지금의 우리를 두고 하신 말씀같구나 했는데 그게 아니고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냥 아는게 아니라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서 아는 지식, 그러니까 하나님과 더 이상 교류하고 사귀고 친하게 지내지 않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그를 버렸다는 말입니다. 제사장이 그렇게 한다면 그는 당연히 제사장이 될 수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당연히 백성들은 제사장의 훈도를 받지 못하고 자행자지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은 파멸입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나를 잊어버렸으므로 나도 너희의 자녀를 잊어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아무리 고통받고 힘들어 해도 나는 모르겠다?
얼마나 끔찍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요? 하나님이 모른다고 하시면 절대로 절대로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그와 교제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추상같은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어때요? 너무 놀랍도록 오늘의 우리를 적시한 말씀 같지 않습니까? 여기서 그들은 백성들의 속죄제물을 먹는 제사장을 말합니다. 백성들도 멸망하겠지만 그에 앞서서 제사장이 먼저 멸망 받을 것이랍니다.

 

저들을 번성하게 해놓으니 그 재물을 가지고 엉뚱한 짓을 하고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을 좇고 세상에 아부하는 저들을 멸하리라는 하나님의 준엄한 논고가 계속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말을 제사장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들이 멸망 받고 이어서 백성들도 멸망의 징계를 받게 됩니다.

 

요즘 언론상에 유명한 목사들의 범죄가 줄줄이 나오고 있지요? 모모 유명인사들의 죄악이 드러나고 있지요? 그것도 외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같은 교회 신자들에 의해서 고발당하고 고소당하고 ... 이미 하나님의 징계가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더 두렵습니다. 목사들에 대한 심판이 끝나면 백성들에게 그 심판이 닥칠 것입니다. 그러며 그 결국은 나라의 멸망인데 우리는 반드시 그것을 막아야 합니다.

 

이런 불행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불행한 사태를 막으려면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제대로 서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적시하신 다섯가지의 죄악을 우리 가운데서 제해야 합니다.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

당연하게도 목사가 앞장서야 합니다. 목사들은 너무 많은 재물을 가져서는 곤란합니다. 일용할 양식만 있으면 족하지 않나요?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 한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굶기시거나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동산재벌 교회는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안에 재물을 쌓아두어서도 곤란합니다. 재물을 흩어서 이웃에게 나누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그 젊은이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오늘 우리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들이 개인적으로 세금을 내는 것도 좋지만 교회에 재산세와 소득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도들의 헌금을 모아서 더 더 크고 멋있게 예배당을 지으면 지금 보시다시피 관광지로 전락합니다. 서구의 대리석과 스테인드 글라스에 금은으로 장식한 거대한 예배당들이 지금 관광지가 되어 있는지 오랩니다.

 

그곳에 주일예배는 이미 끊어지고 관광객들만 들어와서 무심히 과거의 영화를 살핍니다. 왜냐면 그곳에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물신주의가 판을 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는 교회가 계속해서 발전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이제까지 재산세와 소득세를 부과할 때 종교시설외의 건물에만 세금을 매겼다면 이제부터는 그 종교시설에도 세금을 매겨야 합니다. 그래야 더 크고 화려한 예배당을 짓느라고 교회 본연의 일을 못하는 우를 범하지 못하게 될테니까요. 더 화려한 목사사택을 마련하지  않을테니까요. 그리고 예배당을 자꾸 지었다가 부수고 또 짓고 하는 일이 없어질 테니까요.

 

소득세는 그러니까 교인들의 헌금에 세금을 매기는게 아니라 일년간 들어온 헌금을 사용하고 연말에 남으면 그 돈에 세금을 부과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가집니다. 그러니까 헌금이 들어올 때마다 세금을 부과하는게 아니라 일년 후에 장부조사를 해서 구제비나 대외적인 성금, 필요경비를 제외하고 남은 돈, 쌓아 둔 돈에 세금을 부과하면 교회들은 기를 쓰고 일년 안에 들어온 돈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 쓸려고 하지 않을까요?

 

제가 너무 급진적입니까? 그러나 이렇게 하면 앞으로 이 땅의 교회가 장기적으로 국민의 신뢰를 얻고 하나님의 뜻에 합한 교회가 되어서 더 발전할 걸로 봅니다. 어떻습니까? 당장엔 어렵겠지만 장기적인 연구과제로 삼을 수는 있을 겁니다.

 

이건 제 말이 아니라 유명한 주석서에 나와 있는 말입니다. “육체노동을 하지 않고 제사와 율법 교육 등 종교적 직무에만 관여하면서 백성들의 십일조를 받아 먹고 살며 , 상당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제사장직은 당시 백성들에게 소위 최고의 ‘인기직종’이었을 것이다‘

 

어떻습니까? 북이스라엘의 제사장하고 이 땅의 목사들하고 같지 않나요? 그 번영이 결국은 우리를 멸망으로 이끌게 되므로 하나님은 그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이라도 청빈한 주님의 제자로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이번 지진을 겪고 난 다음에 생각하는게 있습니다. 인간이 쌓아올린 부와 문명이 우리 하나님의 숨 한번으로 날아갈 수 있구나! 한번 땅이 흔들리니까 모든게 파괴되고 박살이 나고. 그때는 몸만 살려고 정신없이 뛰쳐나가지 아무리 좋은 것으로 치장해도 아무리 높은 곳에 살아도 소용이 없구나하는 것을 느낍니다. 오히려 높은 곳에 살면 더 위험하지요. 그래서 저도 낮게 살려고합니다.
지금 제 집이 4층인데 더 낮으면 어떨지...

 

하하, 성도 여러분 제가 오늘 이렇게 격렬하게 너무 무거운 말들을 쏟아 내었지만 제 말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멸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멸망하지 않도록 깨어서 경성하고 기도하도록 죄악의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 안에서 바르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고 죄악에서 돌이키고 우리들 사이에 만연한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 이 다섯가지 죄악을 일소하면 되는 겁니다.

 

누구부터 먼저? 그래요, 우리 목사부터 먼저, 지도층부터 먼저, 그리고 우리 성도들부터 먼저. 성도는 이 세상의 지도층입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하나님은 우리들의 기도를 더 먼저 들어 주시고 우리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시고 우리들에게 더 많은 책임도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아야 세상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못하게 되고 세상이 우리를 본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 사이에서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 이 다섯가지 죄악을 일소하면 되는 겁니다.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우리사이에 회복시키면 됩니다. 그러므로 더 늦기 전에 하나님의 일을 이룹시다. 일소하고 또 회복합시다. 기도합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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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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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늦기 전에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회복되는 자세로 살아가기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우리가 지도자나 지도하는 위치에 있을수록 더욱 행동을 겸허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제 지난 날의 좌우명은 겸허하게, 당당하게, 그리고 즐겁게 였습니다. 카카오톡 프로필에 딱 칸 수가 맞아서 오래도록 써먹었지요. 삶을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저는 참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저는 재물에 깨끗합니다. 명예를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나의 식구를 사랑하며 살고 있습니다" 라고 늠름하고 어엿하게 살아가는 태도를 떠올릴 수 있겠지요.

 

힘든 일, 그렇습니다. 본디가 고독하고 괴로울 때 있는 힘든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괜히 좁은 길이라는 비유가 있는 게 아니지요. 그럼에도 누군가는 그렇게 자신의 짐을 든든히 지고, 마치 바위라도 들어올리려는 기세로 하루 하루 성실히 맞이하면서, 하루를 빛내며 힘내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목사님이 도중에 경성하다 라는 언어를 쓰셔서 잘 모르는 단어라 찾아봤습니다. 기억하고 싶습니다.

 

경성하다 - 미혹(迷惑)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도록 타일러 깨우치다. "백성을 다그쳐서 일으킬 수 있기를," 내게 주어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더 친절히 전할 수 있기를, 다만 그렇게 정중하고 아름다운 성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2016. 09.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