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대로 제비뽑은 땅 (사사기1:1-)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은 그 가족대로 제비를 뽑아서 가나안땅을 분배합니다. 그리고도 상당한 기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은 제비 뽑아 얻은 땅을 실질적으로 차지하지는 못합니다. 그 땅에는 엄연히 주인이 따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인은 사납고 무서우며 세력이 강대합니다. 주인이 있는 땅을 자기들끼리 제비뽑아서 여기서 여기부터는 네거니 저쪽에서 이쪽까지는 내거니 하고 떠들고 있습니다. 정말 웃기지요?
그러나 이후에 이루어진 일들을 보세요. 그 제비가 결코 웃기지 않습니다. 지금 가나안땅에 살고 있는 종족은 두 종족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그 땅의 주인은 이스라엘사람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블레셋 사람들을 팔레스타인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으면서 자치국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들의 수도는 여리고. 우리가 잘 아는 도시입니다. 가나안 7족속이 살고 있었던 땅은 이제 이렇게 정리되었습니다.
자,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이끌어 온 뒤에 그는 죽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가나안땅의 분배가 시작됩니다. 물론 이전에도 땅을 분배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요단강 동편 즉 가나안땅을 벗어난 곳이었고 이제 본격적으로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땅을 나누어 주기 시작합니다.
말은 분배고 나누어 주는 것이지만 그냥 얻을 수 있는 땅이 아닙니다. 강력한 선주민들과 싸움을 통해서 그들을 몰아내고서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땅을 분배받았다는 말은 그 땅을 차지하기위해 전쟁을 먼저 할 수 있는 권리 같은 겁니다. 전쟁입니다. 정복 전쟁. 그리고 그 정복전쟁의 시작을 유다로부터 시작하도록 했습니다.
그럼 왜 유다지파부터 시작합니까? 이미 하나님이 예전에 예언을 통하여 유다지파에게 장자권을 주섰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자기의 열두 아들들에 대해서 예언하면서 축복한 그때에 유다는 홀이 거할 장소라고 하셨지요. 왕의 홀이 나오니까 아무래도 장자권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그래놓고 요셉에게도 장자권을 줘버립니다. 장자가 셋입니다. 육적으로 르우벤. 영적으로 유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구한 공로를 들어 요셉.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에 큰 불행으로 작용합니다. 왜나면 유다지파뿐만 아니라 요셉지파도 장자권을 얻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장자에게는 두몫을 주는게 관습이었는데 하나님은 요셉지파라고 하지 않고 요셉의 두 아들을 각각 하나의 지파로 삼아서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로 만드심으로 요셉을 장자로 대우하는 것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요셉의 아들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유다의 장자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르우벤은 범죄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장자권을 주장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범죄하지 않았다면 유다와 요셉이 서로 싸울 일도 없었겠지만 장자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자 유다와 요셉이 싸우게 된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솔로몬의 사후에 에브라임 지파가 주도해서 북 이스라엘 왕국을 새로 만듭니다. 실제로 남쪽 유다왕국에는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만 남았기 때문에 유다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낙오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왕가의 후예들이 나라를 잃어버리고 겨우 자기 지파와 이웃한 베냐민 지파만을 데리고 나라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유다에 대한 징계와 자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몰록의 산당과 각종 우상을 음란하게 섬기고 방탕한 솔로몬에 대한 징계와 다윗왕가에 대한 자비로 그래도 쪼개진 나라에서나마 왕노릇 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유다나 베냐민 지파 둘 다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왕가 지파였습니다. 그래서 왕을 배출하지 못한 열지파만 따로 독립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한번 해보고 싶어서.
자, 그러한 역사적인 사실이 나중에 일어나지만 여기서는 이제 신생국가로서의 힘찬 출발이 시작됩니다. 눈에 보이는 왕도 없고 정부도 없지만 이들은 지파별로 하나님의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신정왕국이 된 것입니다. 각 지파별로 자치를 하고 큰 일이 생기면 실로의 장막에 모여 하나님의 신탁을 구하는 그런 체제.
이제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순서대로 유다지파부터 땅을 분배 받습니다. 그러니까 ‘분배를 받았다’는 말은 먼저 ‘싸우러 나가야한다’는 말입니다. 전쟁으로만 그 땅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 분배방식은 바로 제비뽑기입니다.
여기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누가 먼저 올라가야 될지를 묻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유다가 먼저 올라가야 된다고 말씀하신 걸로 나옵니다. 이 말은 열두지파의 족장과 제사장에게 귀에 들리게 말씀으로 그러니까 히브리어로 말씀하신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기도하고 제비를 뽑았는데 유다가 뽑혔다는 말입니다.
그걸 성경이 마치 말한 듯이 적어 두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제비를 뽑는 것에는 어떤 협잡이나 야료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제비뽑기를 순전히 우연이나 운으로 치부하지만 믿는 사람들은 이 제비뽑기를 하나님의 개입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제비로 나타난 것으로 여겼고 이 제비를 뽑아서 유다의 땅이 정해집니다. 요즘에 우리는 투표로 정책을 정합니다. 그때는 제비로 하나님의 뜻을 물어서 정책을 정했습니다.
먼저 제비뽑아 얻는 유다의 강역을 보면 남쪽은 사해남단에서 시작하여 신 광야의 가데스 바네아를 거쳐 애굽 시내를 연결하는 지역이고 동편은 사해이며 북편은 사해북단에서 힌놈 아들의 골짜기를 거쳐 지중해변에 있는 얍느엘을 연결하는 지역이고 서편경계는 지중해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최남단인데 아주 큽니다.
우리가 대충 생각해도 유다의 강역이 아주 이상적인 경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중해와 사해바다를 동서로 남북으로는 애굽시내에서 사해북단과 힌놈의 아들 골짜기까지 바다와 시내와 골짜기를 경계로 삼은 유다지파의 강역은 매우 넓고 또 명확합니다.
자,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가지 의문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할 때 그들에게는 모세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여호수아라는 후계자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일사불란하게 한가지로 가나안 정복전쟁을 치를 수 있었고 그것이 성공리에 끝이 나서 이제 가나안의 주요한 교두보를 점령하고 각지파별로 땅을 분배하는 단계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죽으면서 그는 후계자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각 지파별로 자치에 맡겨버렸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스라엘의 발전이 주변국가에 비해 늦어진 건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의 사사시대는 약 350년간이나 계속되는데 이때 이스라엘은 툭하면 여호와께 범죄하였고 그 결과 그들은 주변의 나라들로부터 돌아가면서 지배를 받았습니다.
사실상 이스라엘은 매우 작은 나라입니다. 그 국토는 메마르고 인구는 적어서 이민족의 침입 앞에 항상 위태로운 나라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이스라엘도 매우 작지만 그 나라 안에 각 민족들이 산거해 있었습니다. 일곱개의 족속들이 있었답니다. 심지어 그 주변에 시돈과 블레셋과 에돔과 암몬과 모압족들도 나라를 건설해서 살고 있습니다. 그 좁은 땅에 나라가 많은 이유는 그래도 가나안 지역이 사막과 사헬지대 가운데서는 제일 비옥한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세계사에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고 나오는 바로 그 지역입니다.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이 가나안을 정탐하고 오면서 둘이서 장대에 메어가지고 거대한 포도송이를 운반하는 모습도 보일 정도입니다. 실로 젖과 꿀이 흐르는 지역이었습니다. 무화과가 잘 익어서 쩍 벌어져 젖이 흐르고 바위틈사이에 석청(꿀)이 흘러내리는 그런 광경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자, 여호수아도 죽고 이제 각 지파는 자기네에게 할당된 땅을 실제로 정복해야 하는데 정말 곤란합니다. 그들은 이미 주인이 있는 땅을 할당받은 겁니다. 말뚝만 박으면 그대로 자기네 집이 되는 경우가 아니라 이미 그 땅에 살고 있는 선주민을 몰아내야 자기네 집의 말뚝을 박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선주민들은 기골이 장대하고 선진문물을 가진 자들입니다.
철기를 가지고 전쟁과 정부의 조직이 완비된 게다가 돌로 된 성까지 쌓고 살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단 한번도 제손으로 성을 쌓아 본적이 없습니다. 종살이 하면서 성을 쌓아 보았을 수도 있지만 그 사람들은 다 죽었고 사막에서 태어난 후손들은 성을 쌓아 볼 기회도 없었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이스라엘같은 노예의 후손들하고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다윗시대까지 이스라엘은 이민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해서 전쟁을 합니다. 그만큼 그들의 싸움실력이 뛰어났고 이스라엘의 실력이 형편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중앙정부도 없이 12지파가 제각각 자기네에게 주어진 땅을 차지해야 하니까 이들은 두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어 봅니다.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사람과 싸우리이까”
여러분, 이 말이 좀 웃기는게 이들은 이제까지는 한꺼번에 올라갔습니다. 한꺼번에 모여서 싸웠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작은 나라나 성에 거대한 군대가 쳐들어가면 적들이 막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지금 한꺼번에 같이 싸우러 갈 생각은 하지 않고 어느 지파가 먼저 싸울지를 물어 보기 위해 제비를 뽑습니다.
출애굽 당시의 기록을 보면 한 지파당 약 6만명 내외의 장정을 보유하고 있었답니다. ‘칼을 뺄 수 있는 자’를 기준으로 한 겁니다. 한 50만 정도가 몰려가면 단번에 이길 텐데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너네가 살 땅을 왜 내가 싸워서 찾아 줘야해’
왜 그럴까요?
이들이 이렇게 가나안 정복전쟁에 소극적인 이유를 우리는 몇가지로 들 수 있습니다. 제일 첫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들의 처지가 그렇게 힘들지 않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들은 아직 가나안 전 지역을 속속들이 정복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거주할 땅과 성읍은 차지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갓과 르우벤과 므낫세 지파의 반은 요단강 저편에서 이미 땅을 차지 했습니다. 그러니 옛날처럼 그렇게 간절하지 않다는 겁니다.
우리네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우리가 절박할 때 , 우리가 죽게 되었을 때 우리는 너무 너무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내 아버지여 이 아들의 간구를 들어 주소서’하고 난리를 칩니다. 그러나 우리가 평안하고 어려움이 없을 때 우리에게 하나님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분이 됩니다. 아니 그때는 오히려 있으면 귀찮지요. 이거해라 저거해라 이거하지 마라 저거 하지마라 하는 식으로 간섭하기 때문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습니다. 처음 여호수아의 인도로 요단을 넘었을 때 그들은 최선을 다해서 싸웠습니다. 여기서 물러서면 요단 저편으로 도망가지 못하고 가나안 부족들에게 다 죽는다는 절박감으로 싸웠습니다. 그리고 아주 적은 실패에도 괴로워하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기도하였습니다. 절박하기도 했고 공동체 의식도 있었고 또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강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모세도 여호수아도 가고 아무도 이들에 대해서 간섭하고 명령할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눈에 좋은 대로 행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더 이상 절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꺼번에 올라가지 않고 한 지파씩 가기로 한 것입니다. 이들은 적은 성공에 안주하고 초심을 버렸습니다.
두 번째는 이들이 비겁해 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이제 배가 덜 고프고 등이 따뜻해 지니까 슬슬 일신의 안락이 더 중요해 졌습니다. 그리고 공동체 의식이 약해졌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올라간 지파가 싸워서 이기면 용기백배해서 한번 도전해 보고 아니면 모른척하고 있으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지도로 가나안인들과 싸울 때는 못 느꼈는데 이제 보니 이들이 보통 강한 군대가 아닙니다. 그러니 정말 함부로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눈치껏 알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들의 앞에 가나안 원주민들이 녹아 내렸지만 이스라엘이 잘나서 가나안 원주민들이 항복하고 패퇴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나안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에 대한 공포심을 넣어 주셨고 또 하나님이 함께 함으로 이들이 용기백배해서 싸울 수 있었고 고비 고비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있었기에 이 졸렬한 무리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땅을 일부나마 점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죽고 아마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가 많이 내려갔나 봅니다. 누구도 먼저 나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비뽑기를 시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 어느 지파가 출전할지가 중요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없어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가니까 되는구나’하는 것을 보여주려면 처음 올라간 지파는 당연히 대승을 해야 합니다. 더구나 자기네의 피해는 거의 없이 상대를 궤멸시키는 압승을 거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압승을 자신 할 수가 없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 당시에 벌써 철병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철병거는 오늘날의 전차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철병거만 보면 두려워서 도망가기 바빴고 결국은 철병거가 다닐 수 없는 산지에서만 주로 살게 된 것입니다.
백성들의 물음에 하나님은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고 하십니다. 유다를 먼저 올라가라고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유다는 당시 가장 수가 많고 강한 지파였습니다. 게다가 믿음의 용사인 갈렙이 족장으로 있는 곳이었습니다. 또 하나님은 일찍이 이스라엘의 홀이 거하는 지파로 삼으셨기에 유다가 제일 먼저 올라가는 게 합당합니다.
우리 같으면 제일 약한 지파나 왕따 지파를 올려 보내고 나머지는 그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가나안 족들이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살펴 볼 것인데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반대로 명하십니다. 가장 강하고 힘센 자가 올라가고, 가장 강한 자가 우선 모범을 보이고, 가장 높은 사람이 솔선수범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법은 항상 그렇습니다. 지도자가 항상 앞장서는 겁니다. 사회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아서 가장 강하고 부하게 되었다면 그가 가장 많은 봉사를 하는 것 그게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은 유다지파를 먼저 올라가게 하시고는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림과 둠밈을 가지고 올라가서 이기겠는지 지겠는지 점을 친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점 친다는게 좀 이상합니까?
제사장의 주머니에 끈달린 우림과 둠밈이 있는데 하나님에게 기도한 다음에 제사장이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돌맹이를 집어내고 그것에 따라서 결과를 말하는 겁니다. 가령 우림이 나오면 올라가는 것이고 둠밈이 나오면 올라가서 안되고 ...
그러니 정확히는 점치는 거 하고 같네요. 물론 이게 그냥 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 진 겁니다. 그러나 직접 말로 듣지 못하니까 여기에 대해 사람들이 의심하고 그래서 못미더워서 올라가기가 두렵고 그런 겁니다. 이건 제사장의 영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제사장의 영성에 대한 믿음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제비의 결과가 나왔음에도 유다가 자기에게 주어진 땅을 완전히 손에 넣은 때는 이 후로도 수백년이 더 흘러야 합니다. 사사시대가 350년이니까 그게 다 지나고 다윗 때에야 비로소 완전히 그 땅을 차지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그 일이 쉬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들이는 사람의 신앙 상태와 정도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솔직히 말하면 그저 입안에 밥을 떠 먹여주는 타입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고 믿고 나가서 싸워 쟁취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내가 이기게 해주께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말만 그렇지 실제로 하나님이 전장에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뭔가 가시적으로 보여주는게 없습니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믿고 나가는 것 뿐입니다.
이게 안 되는 거지요. 우리는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막상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심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는 말씀이 자꾸 의심스러워 지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게 직접 귀에 들리는 말이 아니라 우림과 둠밈을 이용한 복불복같은 행위니까 믿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래요, 성경의 예언대로 유다 지파가 순종했고 믿음의 유명한 용사인 갈렙이 이끌었지만 완벽한 성취는 수백년이나 걸립니다. 갈렙만 순종하면 뭐합니까? 백성이 따라줘야지.
우리네 삶에서도 그와 같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가더라도 쉽사리 승리하고 쉽사리 그 말씀이 성취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승리하는건 사실입니다. 다만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확고하게 붙들고 나가는가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너무 쉬우면 하나님의 역사와 도움을 부인하는 인간성을 볼 때 하나님의 이러한 일은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지 않아도 어차피 우린 이길 수 있었어” 이런 말을 들으면 하나님은 정말 섭섭해 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환경이 어렵게 변한 거지요. 그때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겸손해 지고 하나님의 자비와 도움을 간구할 테니까요.
일단 유다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나가기로 합니다. 아마 제비뽑기에서 유다가 걸린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성경말씀처럼 모두가 엎드려 있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허공중으로 내려와서 귓고막을 울린게 아니라 제비가 뽑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유다가 올라가면 이긴다는 말은 아마 제사장의 우림과 둠밈을 이용하여 내린 신탁일 것입니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행위는 점치는 것 하고 똑 같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일을 점친다고 하기도 그렇고....여하튼 개념만 잡고 있으면 됩니다.
그때 유다는 혼자서 출전하지 않고 자기네와 함께 우거하는 시므온 지파와 함께 나가려고 동맹을 제안합니다. 시므온지파는 유다지파의 가운데에서 함께 거합니다. 그러니 어차피 유다가 적을 패퇴시켜야 자기들도 평안히 거할 수 있기 때문에 유다의 제안에 응한 겁니다. “이번에 우리와 함께 싸워주면 다음엔 우리가 너희를 위해서 함께 싸워준다” 그런 식의 동맹을 제안했는데 시므온 지파가 다행히 유다 지파와 함께 싸우기로 합니다.
사실상 이 정복전쟁에서 유다지파가 상당한 성공을 거두지만 다른 지파들은 많은 부분에서 실패를 경험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각 지파들과 가나안 원주민들이 이웃하여 살게 되는 일이 벌어지고 결국 이스라엘은 이 가나안 원주민들의 문화에 동화되어서 영적으로 종교적으로 타락하게 되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 이방민족의 종이 되어 고난을 당하고 하는 기록이 사사기를 이어 계속 나옵니다.
원래 문화는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을 동경하고 동화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나안이 선진국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의 문화에 동화된 것입니다. 음탕하고 화려하고 짜릿한 그래서 이스라엘 촌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 질 정도로.
우리네를 돌아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죄악된 문화를 몰아 내지 못하면 인간이 원래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쉽사리 죄악에 동화되고 타락하여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됩니다. 잘 생각해 보면 죄는 그냥 쉽게 지을 수 있는데 착한 일을 하려고 하면 억지로 ‘한번 잘해보자’ 이런 마음을 가지고서야 비로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는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원주민들의 음란한 제사를 보고는 호기심에 또는 욕망에 이끌려서 저들의 제사를 받아들이고 결국 우상을 섬기고 여호와를 떠나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아마 유다는 제일 먼저 시므온과 연합하여 침공했기 때문에 성공했고 다른 지파들은 단독으로 싸웠기 때문에 실패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유다지파가 완벽한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본문을 잘 살펴보면 “그들을 쫓아 내지 못하였으며”같은 말들이 아주 많이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지파는 가장 잘 싸운 축에 들어갑니다. 다른 지파들은 더 형편이 없었거든요.
3절에 보면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싸우자’란 말의 뜻은 ‘식사하다’ ‘먹다’란 뜻입니다. 그리고 이‘싸움’이라는 단어는 옛날 정탐꾼들이 가나안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여호수아와 갈렙이 나머지 열 정탐꾼과는 다르게 ‘이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말했는데 ‘밥’이란 단어하고 모음만 다르지 자음이 같습니다. 참고로 성경본문은 자음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에 의하면 ‘싸우자’하는 말이 ‘식사하자’는 말이 되는 겁니다. ‘가나안 사람을 잡아먹자?’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이렇게 말한 자는 갈렙입니다. 당시 유다지파의 족장이었지요. 그런데 우리가 잘 살펴보면 정복전쟁을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저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생각한 자는 갈렙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유다지파와 시므온 지파는 올라가서 이 싸움에서 승리합니다. 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붙이신지라”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과연 그들은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쳐서 이깁니다. 무려 일만명의 군대를 죽인 사실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듯이 유다지파와 시므온 지파가 쉽게 상대를 이긴게 아닙니다. 우리말 성경으로는 잘 알 수 없지만 원어 성경에는 그 분위기를 잘 알 수 있습니다.
6절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서 그와 싸워”
여기서 ‘그와 싸워’란 말은 ‘그를 대항해서 싸웠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원문의 의미는 대등한 상대와 서로 최선을 다해서 싸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를 대항했다는 말에서 이스라엘의 유다지파와 시므온지파가 아도니 베섹을 찾아 다니다가 그에게서 공격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날카로운 공격을 당해서 두 지파 연합군이 대등하게 싸웠고 결국 승리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겠다고 하셨고 네 손에 붙이겠다고 하셨지만 실제로 전쟁은 그렇게 쉽게 가지 않았고 상당한 혈투를 요구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싸워야만 겨우 승리할 정도였습니다. 사실상 믿음은 그런 것입니다. 내 눈에 만만하게 보이고 쉽게 보이면 누구라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눈에 어렵게 보이고 만만하지 않게 보여서 벅차게 보이고 어려워 보여도 하나님이 이기게 하겠다고 하신 말씀을 믿고 나가는 것이 믿음인 것이지요. 인간적으로는 불가능이라고 생각되지만 하나님이 가능하다고 하셨기에 하는 것 이게 바로 믿음이고 이것을 가능케 했을 때 우리는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진 것이라고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도니 베섹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상당히 강한 왕이었던 것 같습니다. “옛적에 칠십 왕이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찍히고 내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더니”라는 말에서 그의 강성함과 잔인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스스로 고백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의 잔인함을 기억하고 그의 소치대로 그대로 갚으셨습니다.
그리고 원문의 뉘앙스는 이런 행위를 한번만 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함으로써 그는 상대를 잔인하고 굴욕적으로 다룸으로 기쁨을 느끼는 잔인한 변태적 기질의 소유자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게 하신 이유를 그대로 보여주네요. 그 잔인한 자가 그대로 남아 있다면 틀림없이 이스라엘의 뒤통수를 칠 것이고 이스라엘에 그대로 행할 것이므로 그대로 놔두었다가는 뒷감당이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도니 베섹은 패했고 도망가다가 유다지파에게 잡혀서 엄지손가락과 발가락을 잘리고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그의 고백대로 하나님이 그의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셨고 그는 죽었습니다. 이 경우에 유다지파는 하나님의 공의를 가나안땅에 세우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그때 침략 받고 잡혀 죽은 이들의 억울한 호소를 주께서 기억하시고 그대로 갚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죄악된 성정대로 마음대로 행하다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그들을 힘들게하고 그래서 그들의 눈물어린 호소가 하늘 보좌에 상달되고 그래서 하나님이 보응하시고 하는 것들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이 잠잠하신 것 같아도 하나님은 결코 놓치지 않고 그 모든 죄악대로 보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안할 때 이웃을 살피고 어려울 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며 나에게 의식이 족할 때 나누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7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아도니 베섹 그 잔인한 자도 자기의 엄지손가락과 엄지 발가락이 잘리고 죽게 되자 하늘을 우러러 그렇게 고백하고 죽었습니다. 그 스스로 느낀 거지요. 그리고 그들의 억울함과 그들이 느꼈을 굴욕감을 자기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미리 미리 깨닫고 돌이켰다면 좋았을 것을.
우리나라의 대통령 임기는 5년입니다. 그리고 한번 밖에 하지 못합니다. 지금 한참 뭐 4년 중임제니 대통령의 권한을 분산하는 이원정부제니 하고 개헌논의를 하는 정치꾼들이 있지만 저는 이 제도가 우리에게 참 알맞은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제한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을 5년 동안 가지지만 이 5년이 지나고 다음 정권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책잡히지 않게 잘 하면 됩니다. 그래서 제왕적 권한을 스스로 제한하면서 합리적이고 자기의 사익보다, 자기 패거리의 이익보다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면 됩니다. 부정도 부패도 천년만년 저지를 수 있을 것 같지만 불과 5년 후에 다른 이가 대통령이 되면 그가 공격할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도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 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은 그렇습니다. 우리가 행한 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갚으십니다. 우리가 힘써 이웃을 돕고 형제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했다면 우리 하나님의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상급은 분명히 반드시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계속하기 바랍니다. 그 상급이 빨리 오지 않으면 더 기뻐하십시오. 그 상급이 우리가 생각한 것 보다 더 크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반대의 경우에 하나님의 보응이 빨리 임하지 않는다고 안심하거나 죄를 계속 저질러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그 죄를 잊으신게 아니라, 그 죄를 묵인하신게 아니라 우리가 회개하도록 기회를 주고 계신 것뿐입니다.
유다지파는 자기에게 주어진 땅을 대부분 차지합니다. 그러나 속속들이 차지하지는 못했습니다. 뭐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보기로 하고 그 중에서 한가지만 살펴보면 가나안 인들에게 철병거가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19절에 보면 “그가 산지 거민들은 쫓아 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쫓아 내지 못하였으며”
골짜기의 거민이라고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평지의 거민이라는 말입니다. 골짜기는 평지를 말합니다. 게다가 골짜기 즉 ‘와디’를 통해서 철병거가 다닐 수 있는 도로가 잘 발달했기에 유다지파라도 쉽게 이들을 쳐부숴서 내쫓지는 못했다는 말입니다. 지파 경계선상의 예루살렘 성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고 쳐부수었지만 영구적으로 점령하지는 못햇습니다. 그래서 여부스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산성에서 계속 살았습니다.
이것은 가나안의 군사력이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옛날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이 보고하면서 뭐라고 합니까? ‘그들은 기골이 장대해서 우리가 보기에도 우리는 메뚜기떼 같더라’고 하지 않습니까? 거인들에 철병거까지 있고 청동기가 아니라 철제 무기를 가진, 전쟁에 이골이 난 자들을 하나님의 명령하나로 하나님의 말씀하나로 믿고 나가서 싸워 이기는게 쉬운게 아닙니다.
성경에는 간단하게 나와 있지만 그들은 아마 최선을 다해서 혈투를 벌였을 것입니다. 철갑 중장보병도 아니고 청동제 무기와 나무 막대기를 든 자들이, 돌멩이나 던지는 자들이 철병거 군대와 싸웠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당시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을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그 당시는 영토국가가 아니라 지역 거점을 차지하는 개념이었습니다. 즉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모두 우리땅이 아니라 그 넓은 지역 중에서 이 성과 주변 촌락은 우리꺼고 저 성은 아직 차지를 못했고 저 산위에는 차지했지만 저 골짜기는 우리가 아니고 저들이 살고... 이런 식입니다.
그래서 유다의 승리와 갈렙의 순종이 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서로 단결하지 않고 각자 지파별로 자기네의 이익만을 위하게 된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치심이나 사사들의활약이 없었다면 아마 나라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지파별로 뿔뿔이 나뉘어 사막을 떠도는 유목부족으로 살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지파들의 정복 전쟁을 보면 가나안 원주민을 완전히 쫓아 내지 못하고 함께 살던가 그들을 종으로 삼아 노역을 시키거나 심지어 저들에게 밀려 불모지에서 겨우 목숨을 연명하는 지파도 나옵니다. 심하게는 터전을 옮기는 자들도 나옵니다.
눈에 보이는 철병거와 기치창검의 번뜩임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보다 더 컸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들의 귀에 올라가라 내가 너희를 이기게 하겠다고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이 실제로 똑똑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어쩌면 그들도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기치창검보다 철병거보다 더 신뢰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나님은 말로 하시지 않았고 겨우 제비뽑기나 우림과 둠밈으로 점을 치는 형태로 응답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완벽하게 신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귀에 똑똑히 들리면 다행인데 그렇지 않고 어떤 다른 성경 말씀으로 징조나 예언의 형태로 나타나면 정말 보이는 것 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신뢰하기가 어렵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올라가라 내가 저들을 너희의 손에 붙이리라’고 하셨지만 눈에 보이는 현실은 결코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말한 갈렙은 현실보다 하나님을 더 믿고 의지한 참 신앙의 용사였지만 우리는 간사하게도 하나님과 현실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연약한 인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덜한 것이라고 자위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이 적은 것이 곧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세상이 쌓아 올린 거대한 부와 문명과 물질을 보고 주눅 들고 힘들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사실은 내 아버지의 것이고 그것을 언제든지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도 또 부수어 버릴 수도 있음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우리는 분명히 천지만물을 지으신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심을 알고 또 믿노라고 합니다. 그러나 문득 문득 우리는 보이는 것에 좌절하고 절망하며 의심하고 그래서 의기소침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물주의 아들일진대 결코 두려워하거나 의기소침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신비가 한번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의 머리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가 바로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믿고 나가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가서 승리하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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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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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현실을 이겨나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놀라움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현실이 힘겨울수록 계속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의 단순함"이 필요한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몸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단지 약을 먹고, 휴식을 취하면서 회복되는 것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요. 동물들은 생존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다치게 되면 그 부위가 어느 정도 나을 때까지 가만히 서서 계속 핥기도 하면서, 고통을 달랜다고 합니다. 성급하지 않다는 거지요.
이상하리만큼 사람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가고, 그래서 교만해지기도 쉽고, 하나님이 어디에 있는지, 또 하나님이 무엇인지, 내가 다 알고 있다고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위험한 것입니다. 내가 살아보니까 하나님보다 더 좋은게 훨씬 많아 보인단 말이에요. 그러면 어느새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때로는, 과거의 중독적인 습관을 끊지 못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 부족한 존재임을, 하나님 없이는 완전할 수 없는 존재임을 받아들이며, 하나님께 충성하면서, 마치 주님의 군사 처럼 살아가는 것이 참 좋지 않을까요? 하나님 제가 그동안 잘못했습니다 라고 돌아오는 회개가 그래서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복음성가 중에 나 주님의 기쁨 되길 원하네 라는 제목의 성가가 있습니다. 어떻게 살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교만 대신에 순종을, 그렇게 하루 하루 시간을 알차게 보내며, 주님이 주신 이 삶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함께 화이팅! / 2016. 09.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