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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가 신포도를 먹었으므로(에스겔18:1-9)/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10. 22. 04:18

 

아비가 신포도를 먹었으므로 (에스겔18:1-9)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 와서 듣고 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교회에서 듣고 싶은 말은
복준다? 괜찮다? 염려하지 마라? 하나님은 사랑이다? 용서받는다?
이 중에서 한가지가 우리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괜찮지 않다. 잘못하면 벌을 받는다. 민족의 장래를 걱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다. 그는 보응하시는 분이다.

 

따지고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사랑하시고 보호하신다는 말들보다 죄를 짓고 불의를 행하는 자를 심판하신다는 내용을 더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보다 공의의 하나님을 더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턴가 그런 이야기를 싫어하게 되었고 그래서 당연히 설교도 하지 않게 되었고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무섭고 엄격하며 처벌하고 보응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람들, 목사들은 앞다투어 우리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만들기 바빴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도 되시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모든 이들을 사랑하시는 그런 무골호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인 이유는 그가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셨고 또 회개할 기회를 많이 주신다는 것 때문이지 우리의 죄에 대해서 전혀 관여치 않으시고 모든 것을 불문에 붙여서 복 만을 내려주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 가운데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분도 있는데 부모의 죄 때문에 자식이 징계를 받는 일은 우리 하나님이 결코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의 죄 때문에 보응을 받는 것이지 남의 죄 때문에 대신해서 징계를 받지는 않습니다. 그럴 것이 우리 자체가 순결한 무고한 사람이 아니고 우리도 얼마든지 죄를 저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혹시나 싶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병이 오고 재산이 깎이고 무슨 일이 안되는 것을 가지고 모두 하나님의 징계로 생각하고 회개를 촉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이 세상의 모든 가난한 이는 다 죄인이고 부자는 다 의인이어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기로 세상은 결코 그렇지 않지 않나요?

 

오늘 본문 2절에 보니까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아들의 이가 시다’는 말은 당시 남왕국 유다에서 아주 유행하던 속담이랍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면 아버지의 이빨이 시리다고 해야지 어떻게 아들의 이빨이 시리겠습니까? 말이 안되는 거지요. 그런데도 남 유다의 백성들은 포로생활 중에도 버젓이 이런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있으면서도 그것이 자기들의 죄 때문이 아니라 조상들의 죄 때문에 자기들이 고통받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예레미야나 에스겔같은 선지자들이 자꾸 회개를 촉구하니까 백성들이 하는 말이 내 죄 때문에 우리가 지금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조상의 죄 때문에 우리가 고통받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회개할게 없다. 나는 죄가 없이 억울하게 우리 조상들의 죄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공평하지 못하게 대우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운명을 맞이 하게 만든 죽은 조상이 살아 돌아와서 회개할 리가 없으므로 우리는 결코 이런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숙명론에 빠져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우리를 살펴봅시다. 우리나라도 당시의 남 유다 못지 않게 어렵습니다. 이웃의 열강들이 우리를 집어 삼키려고 눈이 벌겋게 설칩니다. 적어도 그들은 우리가 잘되는 꼴을 못봅니다. 그래서 분단을 고착화하고 계속해서 남북에 빨대를 꽃아서 착취하려고 합니다. 수탈. 게다가 경제도 사회 자체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누구의 죄 때문일까요?

 

옛날에 저는 우리민족이 정말 평화를 사랑하고 절대로 남을 침략해 본 적이 없고 순수한 민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우리가 큰 비극을 안고 고통받는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일본을 보세요. 예수도 안믿고 잔인한 짓이란 잔인한 짓은 다하고 저렇게 악랄한데 왜 저들은 저렇게 잘 되느냐? 하다하다 일본 대신에 침략받은 우리나라가 반으로 갈라지고 ...원래 소련이 일본의 반을 달라고 했는데 당시 주일사령관인 멕아더가 자기가 다스리는 권세가 작아진다고 그랬는지 대신 조선을 나누자고 해서 그냥 미군 대령 두명이 우리나라를 나누는데 자기네 방에 있는 지도가 너무 작아서 시도 경계선도 없고 보니까 38도선 40도선 이런 식으로 되어 있더랍니다. 그래서 38도선에 자를 대고 나라를 나눈겁니다.

 

그래서 건넌방과 안방이 서로 나뉘고 아주 웃기게 변해 버렸지요. 그리고 바다 넘어 옹진반도가 우리 쪽으로 넘어오고 지금의 설악산은 북쪽으로 되어 있고 ...어쩌면 이런 식의 경계선을 나눈게 북쪽에게 전쟁을 하도록 유혹한건지도 모릅니다. 산과 강으로 경계가 나뉘어 졌다면 아무래도 이를 넘기가 어려우니까.

 

그래서 저는 우리 하나님의 불공평함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저 악한 것들은 저렇게 흥하고 우리는 이렇게 망하고 이게 뭐냐?

 

하하, 성도 여러분. 제가 충격 받은게 또 있습니다. 실제로 범죄율이나 무고율 그리고 국민을 위하는 위정자들 부정부패지수 같은 것을 보면 일본이 우리보다 훨씬 깨끗하고 안전한 나라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이걸 보고는 너무 분하고 기가 찹디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럴까?

 

그런데 그런 사실을 모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한과 고통을 주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며 하나님의 공의에 의문을 품었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순수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는 코스프레? 여러분 이게 말이 안되는건 아시지요?

 

세계에서 제일 많은 대형교회를 보유한 나라가, 선교를 제일 많이 한다고 하는 나라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결코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남들 안하는 새벽기도에 금요기도회에 수요 기도회까지 무슨 다른 나라의 성직자들보다 우리나라 평신도가 더 열심히 믿는다고 자부하는데 이게 뭡니까?

 

저는 자라면서 참으로 이해가 안 되었는데 지금 어른이 되고 제가 성직자가 되고 보니까 우리민족이 세상 다른 민족에 비해서 특별히 악하고 음란하고 우상을 많이 섬기고 부정부패가 심하고 거짓과 사기가 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무고율도, 음식물에 장난치는 비율도 고소 비율도 높고 각종 암발병율도 높고... 그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여하튼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어려운게 이해가 되고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구나 하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정도라도 사는 것이 우리가 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얻도록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때요?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지 않으십니까?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죄로 인하여 징계를 받고 있는데도 ‘아비가 신포도를 먹었으므로 아이의 이가 시다’ 같은 그런 말을 하고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으니 도대체 어떻게 된거냐고 묻고 계십니다.

유다백성들은 출애굽기20:5에 나온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 우리가 이렇게 멸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게 우리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조상들 죄때문이구나!’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황당한 사고방식을 보시고는 ‘너희 조상들의 죄 때문에 너희가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바로 너희들의 죄 때문에 너희가 고통받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이 만일 의롭다면 의인은 결코 악인의 죄 때문에 죽지 않을 것이고 자기 자신의 의 때문에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의인이 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어쩌면 하나님 앞에 의롭다 칭함을 받기는 거의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나요?

 

여기서 의롭다는 말은 거룩하다는 말하고는 좀 다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의롭다는 말은 ‘하나님과 그리고 인간과의 관계에서 원만하고 바람직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정도면 된다’는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실천하기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5절에 보면 “사람이 만일 의로워서 정의와 공의를 따라 행하여”
그러니까 여기서부터는 의로운 사람의 생활태도에 대해서 나열합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했는데 이때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의로운 행위는 어떤 것인지가 나와 있어야 그대로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여기서부터 의로운 행위에 대해서 나옵니다.

 

1.정의와 공의를 따라 행하여
첫 번째 실천사항이 너무 추상적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정의와 공의’는 이전 성경에서는 ‘법과 의리’라고 표현했고 다르게 표현하면 ‘공평과 의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러니까 의인이 정의와 공의를 따라 행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산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 하라 하지마라는 여기 성경에 다 나와 있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공도,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그 말에 원칙이 있습니다. 그렇게 살면 될 일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하나님의 공의를 가지고 이 세상에서 바르게 생활하는 것입니다. 눈앞의 자그마한 이익에 따라 하나님을 떠나거나 멀리하거나 하지 않고 언제나 한결같이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의를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의와 공의라는 말은 이 다음에 이어지는 일들의 원칙입니다. 구체적인 것을 적시하기가 곤란해서 적어 놓지 않은 것은 모두 이 원칙에 따라서 스스로 판단하면 됩니다.

 

2.산위에서 제물을 먹지 아니하며
사실 본문에는 ‘제물’이란 말이 없습니다. 아마 우리 성경에서 번역하면서 혹시 사람들이 오해할까 봐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제물이란 말을 넣은 듯 합니다. 그러면 원문대로 번역하면 ‘산위에서 먹지 말며’
아니 산위에서 음식을 먹는 것도 하면 안됩니까? 소풍을 가거나 등산을 가서 산에서 도시락을 먹으면 정말 맛있습니다. 그런데 이 무슨 말입니까?

 

높은 산에는 신에게 제사지내는 산당이 많이 있었고 여기서 먹는 다는 말은 그 우상에게 제사지내고  제사 음식을 먹는 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먹는다는게 중요한게 아니고 우상에게 제사지낸다는 말이 중요한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사음식을 먹느냐 아니냐하고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여기서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은 사실 제사의식의 일환으로 제사의식 안에 들어가는 행동 즉 우상숭배행위를 말하는 겁니다.

 

산위에서 제물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산위에 있는 우상의 산당에서 우상에게 제사드리고  제물을 나누어 먹지 않는다는 말이므로 결국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잘 생각해보니 우리나라 풍속과 매우 연관이 큽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무당들이 주로 산에 가서 굿을 하고 그 굿 음식을 나누어 먹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지’라는 속담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거 너무 비슷해서 소름이 돋지 않습니까?

 

마치 이스라엘사람하고 우리가 형제 같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주상, 둥근 나무로 된 우상을 새긴 것을 마을 어귀에 세워 두는 것도 그렇고 산당에서 제사지내고 제물을 나누어 먹는 것도 그렇고 히브리어와 한글도 체계가 너무 비슷하고...
산당에서 제물을 먹지 않는 것이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다는 말하고 같은 이유는 여기 뒤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에게 눈을 들지 아니하며” 어떤 대상에게 눈을 드는 행위는 그 대상에게 도움을 청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에게 복을 달라거나 재앙을 물리쳐 달라고 비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그런 행위를 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우상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나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본문에는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에게 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변 나라와 민족들의 우상을 받아 들여 이게 마치 자기의 고유한 신처럼 생각했고 그 신들을 숭배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제사가 그렇습니다. 남송의 주희가 자기 집안에서 하던 예식을 우리나라 사대주의자들이 수입해서 이게 ‘가짜 양반사건’과 맞물려서 광범위하게 퍼진 겁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에게 물어 보고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우상들에게 물어보고 간구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들은 비록 수긍하지 않지만 이렇게까지 타락했습니다.

자, 그런데 순서가 조금 이상합니다. 무슨 순서겠습니까? 여하튼 잘 보시면 놀라운 진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무슨 진리입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는 의인은 우상을 섬기지 않고....이렇게 시작해야 하는 데 지금 둘 사이의 선후가 바뀌었습니다. 먼저 우상을 섬기지 않는게 아니라 먼저 정의와 공의를 따라 행하는 것이 의인의 삶이랍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정의와 공의를 따라 행하는 것이 더 중하답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양지 캠퍼스에 큰 돌비가 있었는데 여기에 몇가지 교훈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신학교는 신학대학원을 말합니다.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여기에 제가 다 기억하지는 못하는데 그 중에서 ‘(목사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일번과 이번의 순서가 제대로 된 것 같습니다.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제대로 된 삶을 살지 않고 자기의 행복과 치부를 위해서 남을 힘들게 하고 고통을 준다면 그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가지고 사는 삶이 아닙니다.
아무리 그가 목사라고 해도 그는 결코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감히 단언하건데 년봉 1억이 넘거나 가까이 받는 목사가 있다면 그것의 절반으로 이웃을 도우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고 하고 교회에 적을 두고 십일조 생활을 하고 해도 그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가지고 살지 않는다면 그건 결코 의로운 삶이 아닙니다. 요즘 세상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목사에 대해서 아주 좋지 못한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편견을 가지게 된 데에는 우리들이 한 행위가 영향을 끼친 것입니다. 예전처럼 우리 기독교도들이 정의롭게 행동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내세우며 물질에 초연하고 검소하게 살며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일에 앞장서면 사람들은 다시금 우리 기독교를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라는 교훈은 의미심장합니다. 여기 본문에서도 우상숭배금지가 정의와 공의에 따른 삶에 이른 두 번째로 나와 있다는 것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먼저 인간이 되라. 명심해야 합니다. 목사도 성도도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3.음행하지 않으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 아니하며” 세 번째로 의로운 삶은 음행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특별히 본문의 표현대로 음행은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는 것을 말합니다. 뭐 간통이랄 수도 있고 더 나쁘게는 강간이랄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는 행위는 하나님이 주신 결혼제도를 파괴하는 것이고 이웃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며 인격을 살인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한 여인의 인격을 죽이는 것 뿐만 아니라 그 남편과 자식과 부모와 처갓집 식구와 친척들의 인격을 같이 죽이는 엄청나게 악질적인 범죄입니다.

 

더구나 간통과 강간은 사회를 뿌리부터 흔드는 아주 악질적인 범죄이며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사회나 국가의 근본은 가정입니다. 이 가정을 흔들게 되면 사람들은 마음이 공허해지며 삶의 회의를 느끼고 자녀를 올바로 교육할 수 없으며 아내를 빼앗긴 자들에게 공의에 대한 회의, 사회에 대한 증오, 자신에 대한 염증, 자식에 대한 학대같은 것을 하게 만들어 건전한 사회를 만들 수 없게 합니다.

 

제가 재삼 얘기하는 것이지만 우리나라가 간통죄를 폐지한 것은 위정자들이 자기들의 간통을 정죄받지 않으려는 심리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일개 검사가 축첩을 하고 그것도 남의 돈으로 내연의 여자를 먹여 살리는 아주 황당한 일을 한 것을 보니 이 사람들이 자기의 허물을 감추려고 간통죄를 폐지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참 국민으로서 배신감이 들었습니다.

 

4. 성결을 유지하며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며” 솔직히 요즘은 이런 식의 일이 흔한지 모르겠습니다만 구약시대에 월경 중에 여인과 관계를 갖는 것을 부정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성결을 유지할 수 없어서 정결례를 또 행해야만 했습니다. 요즘은 부정하다고 여기는 일은 없지만.

 

그래서 저는 이 구절을 ‘아내를 존중하자’ 또는 ‘절제를 하자’는 말로 바꾸려고 합니다. 왜냐면 이런 성관계는 사실 은밀한 중에 이루어지는데 은밀한 중에서도 율법에서 금한 법도를 제대로 지킬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하나님은 보고 계신다는 생각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혹시나 싶어서 말씀드리는데 지금은 이런 율법은 없습니다. 그때 구약시대를 말하는 겁니다. 이와 같이 의인은 다른 이들이 보지 않아도 하나님의 법을 묵묵히 성실하게 지키는 삶을 삽니다.

 

5.가난한 형제를 사랑하라
7절과 8절에 열거한 항목을 한마디로 하면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그것도 가난한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부유한 형제를 사랑하지 가난한 형제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명령은 항상 파격적이고 우리에게는 전혀 익숙하지 않습니다.

 

먼저 “사람을 학대 하지 말고 빚진 자의 저당물을 돌려주며 강탈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며 변리를 위하여 꾸어주지 아니하며”

 

왜 이런 식의 삶을 요구하시느냐면 이스라엘 백성도 애굽에서 나그네였고 종이었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들로부터 학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려울 때 하나님이 도우셨으므로 저들이 어려울 때 역시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하는 속담이 바로 ‘남잡이가 제잡이’라는 말과 같이 내가 어려운자를 학대하면 상황이 변하여 내가 저들의 학대를 받을 수 있고 그때에 내가 한 행위 때문에 저들의 자비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난한 자의 물건을 저당잡지 말라고 하셨는데 여기에 주로 들어가는 품목이 바로 맷돌과 겉옷입니다. 맷돌은 가난한 자의 생업을 겉옷은 생존을 의미합니다. 사막의 밤은 매우 춥습니다. 낮에는 찌는 듯한 더위가 오지만 밤은 매우 춥습니다. 겉옷은 그래서 가난한 자들의 이불입니다. 그들에게 온돌이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불이 없다면 밤새도록 떨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의 맷돌이나 겉옷을 저당 잡았더라도 저녁이 되기 전에 돌려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강제로 재물을 빼앗아서는 안됩니다. 게다가 나아가 주린 자에게 음식물을 주고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고 이자 없이 돈을 빌려 주라는 것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에는 동족에게 돈을 꾸어주고 이자를 받는 행위가 금지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방인에게는 돈을 빌려 주고 이자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변리를 위하여 꾸어주지 아니하며’에서 ‘변리’는 고리대를 말합니다. 매우 높은 사채로 빌려 주지 말란 말이고 ‘이자를 받지 아니하며’에서 ‘이자’는 증식을 말합니다 . 그래서 이자를 받는 다는 말과 덧붙여 이해한다면 가난한자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더구나 고리나 폭리를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렇게 폭리를 취하여 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가난한 자의 재물을 빼앗아 부자가 된다면 우리 하나님은 결코 그에게 복주시거나 자비를 베푸시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런 돈을 헌금으로 바치는 이가 있다면 그 헌금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상달될 수 있을까요?

 

경주 최부자집의 가훈중의 하나가 바로 ‘흉년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흉년을 면하려고 가난한 이들이 헐값에 땅을 내놓은 것을 헐값에 사면 재산증식에는 그만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그들의 재산이 10대를 전하게 된 것입니다.

 

교우들 간에 돈을 빌려 줄때는 이자를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돈을 빌려간 이는 너무 오래 지체되지 않게 그 돈을 갚으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이자도 듬뿍 쳐서 형편대로 갚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게 바로 인간됨입니다. 빌려준 이는 이자를 생각지 않고 빌려주고 빌린 이는 그게 감사해서라도 더 잘 갚고 이자도 주고 그걸 이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감사의 마음으로 사례하는 것으로 생각해도 됩니다. 서로 감사를 아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기본입니다.

 

어떤 분은 교우에게 돈을 빌려 주면서 받지 못할 생각을 하고 빌려주는 분도 제가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두 손 들어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빌린 이는 그런 것을 악용해서는 안됩니다. 만일 상대방의 선의를 자기의 부를 이루는데 악용한다면 우리 아버지께서 그의 꾀를 박살내고 폐가망신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임으로 돈을 무이자로 빌렸다면 형제의 예로 빨리 갚아서 그의 선의에 보답해야 합니다.

 

우리네 속담에 ‘앉아서 돈을 빌려주고 서서 돌려받는다’고 이렇게 배은망덕한 행동을 해서는 안됩니다. 자꾸 그런 식으로 하니까 ‘돈 빌려주면 돈도 잃고 친구도 잃는다’는 말이 나돌지 않습니까?

 

6.올바른 재판
“스스로 손을 금하여 죄를 짓지 아니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실하게 판단하며” 이 말은 재판할 때 바르게 하라는 말입니다. “스스로 손을 금하여 죄를 짓지 아니하며”라는 말은 쉽게 말하면 ‘그의 손을 불의로부터 거두어 들이며’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불의한 행동이나 부정한 짓에서 손을 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진실한 판단을 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재판장이 또는 백성의 권력자가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거나 가난한 자에게 억울하게 재판하는 것을 매우 매우 싫어 하시고 그러한 권력을 폐지하십니다.

 

실제로 나라를 만드시고 위정자를 세우신 이유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리하여 하나님의 공의로 백성들을 다스리고 그들의 선성을 북돋우고 악성을 근절시키기 위함입니다. 권선징악. 그런데 그러한 기본을 지키지 않는 권력과 그러한 정부를 하나님이 유지시킬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공평한 재판은 이스라엘의 멸망원인 중에서 가장 큰 죄에 해당됩니다. 맨 앞에 나옵니다. ‘정의와 공의를 따라 행하며’ 바로 그 행위를 해야 하는 사람은 일반 백성도 그래야 하지만 위정자나 재판장은 더 확실하게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로 재판해야 하는 것입니다.

 

7.내 율례를 따르며
여기서 하나님은 처음의 말을 다시 한번 풀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의와 공의를 따라 행하며’ 란 말과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진실하게 행할진대’란 말은 같은 뜻입니다. 이게 왜 처음과 나중에 같이 나옵니까? 의인의 삶에서 사실상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모든 이들이 재판하는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재판에 관한 규정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조항은 아닙니다. 남에게 이자를 받고 변리를 받는 것도 역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조항이 아닙니다. 이 조항은 돈이 많은 부자나 사채업자에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사람을 학대하고 저당물을 돌려 주고 하는 그런 조항은 역시 전당포업자나 부유한 자에게 또는 권세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물품을 저당 잡히고 남에게 돈을 융통해 주거나 또는 사람을 학대할 만한 권세 자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대상이 일부 사람에 그칩니다.

 

따지고 보면 사람의 삶에서 여러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일일이 특별한 조항들을 열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먼저 일반적인 원칙을 선포하는 것이고 다른말로 일반적인 원칙을 다시 한번 열거함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여기에서 열거한 모든 조항들은 사실상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따라 행하며 다 지켜야 하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조항들을 실천하는 자는 의인이므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조항들을 잘 살펴보면 원칙을 설명한 처음과 나중을 제외하면 구체적인 실천사항들은 네가지로 대별됩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고
음행을 저지르지 말며
가난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공정한 재판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항은 그 옛날 남 유다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조항들입니다. 이러한 행위를 하는 자를 의인이라 하시고 반드시 살리라(살 것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을 거꾸로 뒤집으면 그렇게 살지 않아 악인으로 낙인찍혀서 반드시 죽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음행을 저지르며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사기쳐서 빼앗고
불의한 재판을 하면 죽게 됩니다.

 

우리는 어때요? 이렇게 살고 있습니까? 제가 볼 때 우리나라는 이 네가지를 다 저지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나라의 사람들을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실 것 같습니다.
우리를 살펴보면 무신론자와 이교도들이 전 국민의 70%가 넘습니다. 그래서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음행을 저지르지요? 간통이 너무 성해서 간통죄가 없어 졌습니다. 간통을 저지르다가 남편에게 들킨 여인이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이 조항이 ‘성의 자기 결정권’을 억압한답시고 헌법재판소에 위헌소송을 내었고 그게 발단이 되어서 결국 간통죄가 폐지되었지요. 기가 차지 않습니까?

 

이혼의 원인 중에서 가장 높은 비율이 돈과 불륜이지요. 그래서 음행천국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사기는 전셰계적으로 수위를 다툽니다. 심지어 피싱과 파밍이라는 신종 사기수법도 널리 퍼져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귀국한지 몇 일 되지 않았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에서 저에게 국제우편이 왔는데 주소가 불명확해서 반송되었으니 주소를 보내달라는 겁니다. 그리고 전화기로 번호를 눌러서 보내 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 다행스럽게도 제가 전화를 걸고 있는 중에 번호를 눌러서 보내는 방법을 몰라서 일단은 끊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한국에서 이런 종류의 사기가 판을 치는 것을 몰랐지만 휴대폰 조작 미숙으로 본의 아니게 피싱 사기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동생들에게 물어보니 이런 식의 사기가 매우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답니다.

 

뿐만 아니라 서초동의 교회에서 한 자매에게 걸려온 사기 전화로 수백만원의 피해를 본 경우도 제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나야’ 라는 전화에 ‘무슨 오빠?’ 이렇게 하는 사기전화가 한때 유행했는데 기억나십니까? 중고물품 매매에서 돈만 받고 물건은 보내지 않거나 전혀 다른 물건을 보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소액사기는 아예 잡히지도 않는다고 생각하고 보통 사람들도 예사로 사기를 칩니다. 고의 부도를 내고 재산을 늘리는 이가 있는가 하면 남의 기술을 훔치고 상대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워 감옥에 보내거나 자살하게 만드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집히거나 무고죄의 비율이 세계최고랍니다. 걸핏하면 소송이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은 너무 광범위하게 퍼져서 아예 고전이 된지 오랩니다.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금하고 있는 모든 죄를 우리가 다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 바벨론에 멸망해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서도 자기의 죄가 아니라 조상의 죄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고난받는다고 회개를 거부하고 있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가 이렇게 이렇게 행했다면 내가 너희를 반드시 살릴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에 비추어 제대로 살고 있나요? 그의 규례를 제대로 지키고 있습니까? 공의와 정의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칩니까?

 

조그마한 권리라도 가지면 그것을 가지고 갑질을 하고 뇌물을 먹으려 하고 사람을 착취하고 사채의 고리대가 너무 심해 사람을 지옥으로 몰아 넣어서 섬으로 팔고 장기를 적출하고 인신매매가 벌어지고 강간에 폭행에 말도 못하는 불법과 포악이 저질러 지고 있음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전관예우’라고 돈있는 자들이 힘있는 전관예우를 받는 변호사를 사서 재판을 굽게 하고 이상한 논리로 자기들은 사면을 받고 오히려 상대방을 무고합니다. 신문을 보면 권세자들의 부정과 비리가 끊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법을 집행하는 자들은 더 썩었습니다. 그를 비난하고 견제해야 할 언론과 사상계 그리고 종교계에서조차도 빛과 의로움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의인의 억울한 피가 흐르고 악인은 기름진 것으로 배를 채우니 우리가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놓인 것을 가지고 감히 하나님 아버지의 공의를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되찾은 나라입니까? 그런 나라가 우리의 죄악 때문에, 우리의 불의 때문에 사라지려 합니다. 제발 정신차리기를 바랍니다. 더 늦기 전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하나님의 진리가 정의가 살아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가, 먼저 교회가 하나님의 공의 앞에 바로서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국민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기를 원하시지만 먼저 믿는 성도인 우리가 의로워져야 합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먼저 의로워진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공동체를 보호하시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이렇게 멋진 공동체를 내가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내가 결단코 이 공동체를 살려서 보존해야겠다’고 하실 때까지 우리가 힘을 냅시다. 하나님이 ‘이런 멋진 공동체가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너무 아깝다’고 하실 때까지, ‘이런 멋진 공동체를 더 발전시켜서 세상이 모두 이 한국을 보고 배워야된다’고 하실 때까지.

 

우리는 지금 백척간두의 상황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외에 어떤 나라도 어떤 사람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민족 전체가 하나님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공의와 정의로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서 각자 각자가 하나님의 정하신 공의로운 법에 따라 행동합시다.

 

제가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우리나라가 이렇게 형편없어 졌다고 정치가나 법조인들이나 재벌들을 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에는 우리 책임이 매우 많습니다.

호구? 호갱? 그것 역시 우리 책임입니다. 이익을 추구하는 장사치에게 양심과 정도를 기대한다는게 벌써 이상합니다. 비싸게 팔수록 더 잘팔리는 세상에서 일부러 이익을 줄이려는 이는 결코 장사를 못합니다. 그래서 소비자는 현명한 소비를 해야 겠지요?

 

부자들만을 위하고, 있는 자들만을 위한 정치를 펴서 너무 힘들어요? 그것도 우리 잘못입니다. 정책은 안보고 항상 지연이나 학연이나 혈연만을 보고 찍으니까 그런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냄비처럼 달아 올랐다가 냄비처럼 식어 버리니까 아무리 형편없는 짓거리를 해도 쉽게 잊어 버리니까 그런 대접을 받을 수밖에 더 있습니까? 아무리 신문과 방송으로 조종하려해도 조종되지 않는 자주 시민이 되면 됩니다.

 

국민들의 수준을 뛰어넘어서 지도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초연한 사람들 외에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사회지도층’이란 말도 안 씁니다. 물질과 명예와 인기에 연연하면 국민수준에 딱 맞는 사람들만 나올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지도하려면 세상이 주는 각종 이권을 거부해야 합니다. 물론 평신도는 좀 그래도 됩니다. 그러나 성직자들은 결코 세상이 주는 이권에 아부하고 눈 돌려서는 안됩니다.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심한 것 맞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우리는 지금 비상한 시국을 사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이 나라 안에서 아웅다웅하고 안달복달하니까 보이는게 없을 수 있지만 큰 그림을 그려보세요. 우리는, 지금 이 나라는 명백하게 멸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진행을 멈추려고 하면 교회가 필요합니다. 양심적인 성직자가 필요합니다. 시대와 민족을 인도할 학자와 사상가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성도가 필요합니다. 캄캄한 이 세상에서 한줄기 빛을 비추는 우리교회가 됩시다.

그러한 목사가 되겠습니다. 그러한 성도가 되어 주십시오. 그러한 교회가 되어 질 지어다. 기도합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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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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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사람은 변명쟁이! 순수하고 착한 어린 아이들도 몰래 케이크나 과자 같은 것을 꺼내먹다가 들키면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려고 한다고 해요. "아! 내 동생이 있었으면, 동생 때문이라고 할 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딱 그런 이들이지요. 우리 조상들 때문에 나는 이 꼴이야, 벗어날 수도 없어, 내 잘못은 하나도 없는걸! 오늘 우리 사회도 헬조선이 되었다지만, 은연 중에 남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먼저 우리부터 생각을 바꾸어서 이 세계를 바꿔나가기 위해서 노력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작은 일부터 성실하고, 똑바르게 해나가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십일조의 1/3은 이웃에게를 열심히 지켜나가고 있는데, 이렇게 살아보니깐 참 재밌습니다. 신전의식이라는 말도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라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오늘 일어난 힘든 일들도 조금은 극복할 힘이 생기지 않을까요. 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 라면서 힘을 내보는 겁니다. 시련 앞에서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면 될 일입니다. 그렇게 기도로 무장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기대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기! 성도가 되어갔으면 좋겠습니다. / 2016. 10.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