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도 (마태복음10:5-15)
우리 믿는 성도들은 모두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이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들을 살펴서 그대로 행하는 것이 가장 모범적인 제자도가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우리 주님의 제자도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지금 우리들이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말씀입니다.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
그러나 오늘 주님의 제자를 자처하는 많은 이들은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좋은 옷을 입고 기름진 음식을 먹으므로 배고픈 자들의 사정을 알지 못합니다. 안다고 해도 피상적으로 압니다. 왜냐고요 그가 배고파 본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또한 좋은 집에 좋은 차로 목에 힘주고 교만하며 군림합니다. 수천 수만의 사람들에게 떠받들려지다보니까 자기가 마치 중세의 귀족이라도 된 양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권세가들에게 아부하고 재력가들에게 웃는 낯으로 대하며 오히려 성도들에게는 권위적입니다. 교묘하게 입으로는 위선을 말하고 행동은 추악하여 그들이 머문자리에서 향기가 나는게 아니라 악취가 진동합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외면 받고 조롱받지만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돈이 되지 않는 것에 신경을 쓸 만큼 저들의 마음이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탐욕에 정신이 팔려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신도들을 어디로 이끄는지도 모릅니다. 결국은 추종자들과 함께 영원한 멸망 속으로 몸을 던지게 됩니다.
이것은 제자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제자의 길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열두제자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니까 정식으로 제자단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와 요한으로부터 시작해서 안드레와 요한의 형제를 더하고 동네의 친구들을 더하고 결국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까지 모두 12명의 제자단이 완성된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에게는 이 12제자 말고도 70명의 제자들도 있었고 또 120명의 제자들 500명의 제자들처럼 많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이 12제자들은 특별히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12사도로 불리 우는 제자들입니다.
이렇게 완성된 제자들을 향하여 주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이 말은 제자도를 설명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보내시며”에는 ‘어떤 임무를 주어 대리로 파견하다’라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대리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 사명을 띠고 파송되었기 때문에 ‘제자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의 길? 제자가 가져야 될 자세?
1.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사실 본문은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에게나 이방인들에게 가기보다 차라리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는 말로 들립니다. 그런데 원문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은 ‘차라리’나 ‘오히려’가 아니라 ‘반드시’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해석한다면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에게 가기 전에 반드시 이스라엘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이 말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북한이나 해외선교를 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남한에 복음을 전하라는 말인 것입니다. 선교를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약간 못마땅한 말일 수도 있는데 이 말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그렇다는 것이고 원뜻은 마태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구세주로, 메시야로 유대인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그런 말을 강조한 것입니다. 왜냐면 마태복음을 읽는 대상이 주로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를 위해서 오신 메시야 예수’를 강조하기위해 이런 구절을 넣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또한 28장에서 온 세상으로의 복음이 확산되는 것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결코 국수주의적인 편견에 사로잡혀 복음의 세계로의 확산을 거부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잃어버린 양’이라고 하는 표현은 결국 이전에는 이 양들이 하나님에게 속했다는 점을 다시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2.천국이 가까이 왔다
그런데 제자들이 할 말은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가 아니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입니다. 이 두 구절은 비슷한 거 같지만 상당히 다른 결과를 가져 옵니다. 마태는 복음전파가 결국 천국의 도래,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면서 예배당에 저들을 모아 들여 조직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전도라고 하면 그 사람을 예배당으로 데리고 오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마태는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을 전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려면 사람들이 깨끗해 져야 합니다.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에 저들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지배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에게 있어 교회당이라는 좁은 공간에 인도하는 것이 전도가 아니라 이 세상을 모두 새롭게 만들어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법을 따르도록 하는 것을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지금처럼 그 사람의 성결여부나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여부와 상관없이 예배당에만 앉혀놓으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전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통 한 종교가 인구의 1/4을 넘어서면 그것은 국교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왜냐면 적어도 한 가정에 한명씩의 교인이 있어서 가족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구교를 합친 기독교가 우리나라의 국교인 셈입니다. 물론 불교나 무신론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만 기독교는 충분히 자신의 교리로 세상에 영향을 넘치도록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이 땅에 부정과 불의가 판을 치며 소자와 약자들이 고통 받고 서민들이 나라에 실망해서 차라리 이 나라가 망하면 좋겠다고 저주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정부는 국민들을 위한 조직이 아니라 마치 부자들 기업주들을 위한 조직같이 변했습니다. 뇌물을 받고 모든 제도나 판결을 그들을 위하여 펼치니 일반사람들에게 이 땅은 지옥으로 변합니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가 전도의 방향을 잘못 잡아서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 땅 사람들의 의식을 개혁해야 합니다. 그리고 위정자들과 정부가 바뀌도록 해야 합니다. 사리사욕을 버리고 공익을 우선하도록. 주어진 권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대신해서 펼칠 수 있도록.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우뚝 서고 하나님의 법이 나라를 다스리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면 이미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서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께서 오심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확산되고 커지고 강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에 죄인들은 있을 수 없지요. 그래서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추방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이 땅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지 못한다면 대신 이 땅 어딘가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추방된 자들이 모이는 지옥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안되면 사탄의 나라가 될 터인데 사탄의 나라를 우리는 지옥이라고 부릅니다. 최후의 심판 때 결국 영원히 멸망에 처해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지옥에서 사는 성도라는 것은 주의 날이 되기까지 순교와 학대와 핍박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3.병든 자를 고치며
그리고 8절에 보면 단순하게 천국이 가까웠음을 전파할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건 우리가 안하는게 아니라 못하는 거지요. 누구나 이런 권능을 행하고 싶지요.
더구나 당시 병원이 없던 시절에 이런 이적은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죄를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는 정신적인 각성에 이어 병든 육체를 치유해서 새로운 일터에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받아서 살 수 있다는 것은 육체적이며 물질적인 새로워짐입니다. 이게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있는 이 구절은 천국이 이루어지면 행해지는 모습들의 일부분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당신이 오실 메시아냐”고 질문을 했을 때 주께서 바로 이런 일이 행해지고 있음을 이야기하라고 하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천국은 모든 면에 있어서 새로워 지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오늘날 교회가 이런 부분에 있어 많이 약합니다. 그리고 이런 분야에 특화된 병원들이 있어서 옛날처럼 절실하지가 않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치유와 축사는 우리 제자들이 가진 강력한 권능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제자들을 파송할 때 이런 권능을 주셨고 도처에서 이런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병원에서 절대로 고칠 수 없는 많은 질병들이 있습니다. 아마 연구를 계속했다면 고치는 방법이 나왔을 수도 있지만 워낙 희귀질병이라서 돈이 안되기 때문에 연구를 하지 않았고 그래서 손 쓸 수 없는 질병도 많습니다. 또 아무리 치료해도 어찌 할 수 없는 질병도 많습니다.
아직도 사람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는 물론이고 암이나 뇌혈관쪽 질병이나 정신질병은 완치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천국은 이런 질병이 없어지고 귀신들이 쫓겨나고 경제적 어려움이 극복되는 그런 곳입니다.
육체가 건강하지 않아서 일을 못해서 가난에 처해 있는 이들에게 건강한 육체는 경제적 안정도 줄 수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주민들이 육체노동이나 소작으로 연명하던 유대는 특히 더 그러했습니다. 그런데요 주님은 우리가 자신의 제자가 될 때 이미 그러한 질병을 치유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심지어 죽은자도 살리는 권능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러한 권능을 행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께서 명하신대로 살지 않아서입니다.
요즘은 각종 중독이 많이 있습니다. 인터넷 중독, 알콜 중독, 니코틴 중독 등등. 하나님은 이러한 각종 중독에서 치유하는 능력도 허락하셨습니다. 이들이 중독에서 벗어나 새사람이 된다면 그들의 삶이 얼마나 더 풍성해 질까요?
사실 치유와 치병의 경험은 저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능력을 행하는 분을 제가 주위에서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겠지만, 제 생각에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영적인 것보다 물질적인 것, 육적인 것을 더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권능이 없는 것 같습디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우리를 제자로 삼아 이 땅에 파송하실 때 그러한 권능을 행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능력을 주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주의 성령을 힘입는다면 그러한 일들을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4.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그리고 이러한 능력을 행할 때 댓가를 받지 말고 공짜로 해주라고 하십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그래요, 주님이 거저 주신 능력으로 치부할 사람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절대로 이걸 치부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거저 받은’ 이란 말은 ‘아무 댓가도 치르지 않고 선물로 받은’ 이란 말이고 ‘거저 주라’는 말은 ‘어떤 결과도 기대하지 않고 주라’는 말입니다. 당연하게 이 말은 정말 아무런 결과도 기대하지 않고 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돈이나 명예를 얻지 말고 기대하지 말고 주라는 말입니다.
사실상 이런 능력은 치유와 축사를 행하는 제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일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래요, 단지 그것만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주석서에 정말 신기한 구절이 있습니다. 뭐라고 하는고 하니 거저 받지 못한 자는 거저 주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 구원받지 못하면 구원을 전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고 내가 구원받지 못했는데 당연하게 다른이에게 전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그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자기가 받지 못했는데 어떻게 남에게 줄 수 있을까요?
그래서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영적인 비밀한 것들을 알게 되면 나는 확신에 차서 이 세상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고 구원을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모두 거저 받았으므로 사람들에게 거저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단 신학교는 모두 수업료를 무료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기숙사비와 급식비까지 무료로 하면 더 좋겠지요. 큰 교회들이 돈이 넘쳐나는데 이런 곳에 좀 학비를 기부하면 좋겠고 전국의 목사들도 모두 십시일반 조금씩 기부해서 신학교에 들어가는 학생들에게 무료로 수업을 시킬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 그런데 우리 주님의 명령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신 주님은 한술 더 떠서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목회자의 청빈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냥 일용할 양식이 주어짐에 감사해야지 돈을 쌓아놓고 살려고 생각해서도 안되고 호의호식하며 자기가 마치 중세 귀족이라도 된 양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 전대에 구리 밑에 철전 정도는 괜찮나요? 예, 그건 괜찮습니다. 그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될 수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의 주화 중에는 동전 밑에 십원짜리 알루미늄에 구리칠 해놓은게 남네요. 하하. 대신 우리는 우리 하나님이 내 분깃이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활비 걱정은 하나님에게 맡겨두고 우리는 하나님만 좇으면 됩니다. 주가 절대로 굶기거나 헐벗게 하시지 않습니다.
5.여행을 위하여 걱정하지 마라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먼저 주님은 돈을 모으지 말라고 하시고 서는 이제 더 심한 명령을 합니다. 여행을 위하여 배낭 옷 신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한다는 말일까요?
솔직히 사람이 벗고는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옷을 가지지 말라가 아니라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 입니다. 입은 그대로면 되었다. 그럼 신발은요? 벗고 다녀라. 지팡이가 있어야 짚기도 하고 사나운 짐승들도 쫓을 수 있습니다만. 그건 걱정하지 마라. 내가 맹수들에게 말해 놓으께. 배낭이 있어야 여행에 필요한 이것저것을 넣어서 다닐텐데요. 여행하는데 뭐가 필요하냐? 그냥 입은 그래도 가다가 아무집이나 들어가서 거기서 하루 머물고 음식도 먹고 그리고 또 길을 가라.
사실 본 절에 나오는 배낭이나 옷이나 신 그리고 지팡이는 유대인들이 여행을 떠날 때 반드시 지참했던 물건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 모든 것이 다 필요 없고 빈 몸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지팡이도 들지 말고 신발도 신지 말고 가라고 하시는데 이거 괜찮을까요?
당시 제자들은 말을 타거나 나귀를 타고 가는게 아니라 걸어서 가는 겁니다. 그런데 신발도 가지지 말라고 하시니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바로 다음에 나와 있습니다.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아, 내가 준비하지 않아도 내 아버지께서 주실 것이므로 걱정하지 말란 말이구나!’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하는 일꾼에게 품삯뿐만 아니라 먹을 것 입을 것도 다 주신답니다. 또 재워주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답니다. 그래서 그런게 필요 없다는 거지요.
아니면 ‘그런게 당연히 필요하겠지만 네가 준비할 필요가 없다. 내가 다 너를 위해서 준비해 주께’ 이렇게 말씀하신건지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고 아무 염려하지 말고 너는 내가 시키는 일만 해라, 그러면 그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하께” 우리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뒷부분에 나오는 말이 좀 이상합니다.
11절에 보면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내가 보내는 성이나 마을에 가서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서 거기에 머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요. 어차피 따뜻한 방안에서 자고 음식도 잠자리도 대접받으므로 이불 대용으로 두벌의 옷이 필요 없다는 겁니다. 배낭에 이것저것 잔뜩 넣어서 무겁게 지고 다닐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여행을 갈 때 가장 힘든게 바로 무거운 짐들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는 겁니다. 제가 산에서 기도하고 잠자고 그런걸 자주 하는 편인데 한번 가려고 하면 정말 지고 올라가야 할 게 너무 많습니다. 한여름에는 모기 때문에 힘들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밤에 춥기 때문에 두꺼운 여벌의 옷, 침낭, 그리고 먹을 것과 마실 것, 후래쉬, 수저와 나이프, 그리고 여분의 건전지 양말 등등 가지고 가야 할게 너무 많습니다. 오래있을수록 더 많이 가져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무거운 걸 짊어지고 산꼭대기까지 오르는 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만일 누군가 저 대신에 산꼭대기에 짐을 다 가져다놓았으니까 너는 몸만 가면 된다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지금 주님은 우리에게 여행준비는 내가 다 해놓았고 네가 쓸 것도 다 준비해 두었으므로 너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내말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시니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주님은 아마 내가 누구 집에 말해놓았느니까 너는 가서 문안하기만 하면 네가 여행이 끝날 때까지 그 집에서 묵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 사람이 합당한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 사람이 합당한 사람이라면 제자의 요청에 흔쾌히 집에서 묵을 수 있게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축객을 할 것이기 때문에 전혀 식별이 어렵지 않습니다.
미국 풀러에 김세윤교수라고 있습니다. 이 교수님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마구잡이로 주님이 제자들을 보낸게 아니라 자기의 후원자들이 있는 곳으로 보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 모든 것을 제공받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베다니 마을의 마르다 집이나 예루살렘의 요한의 집 같은 곳이 여러 곳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에게는 비록 제자가 되어 따르지는 못하지만 재택근무 제자들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이들이 각처에서 이 제자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잠잘 곳을 제공했다는 것이지요.
이 말이 맞는지 아닌지는 차치하고 이렇게 주님은 자기의 제자들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제자된 입장에서는 전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나누어 구제하고 우리는 걱정 근심 없이 주님과 더불어 길을 가는 것 이게 바로 제자도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주목하지는 않았지만 반드시 주목하고 명심해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이 말은 아주 인간적인 말입니다. 가령 어떤 집에서 대접을 하기에 그 집에서 묵고 있는데 뒤늦게 더 좋은 집에서 더 권세있는 자가, 더 부유한 자가 자기 집에 묵게 하고 싶다고 초대한다고 합시다. 이때는 결코 집을 옮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번 여행에는 이집에 숙소를 정했으므로 아무리 더 좋은 집에서 나를 초대해도 결코 중간에 집을 바꾸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또 한가지를 당부드립니다. 목사들이 담임이 되어서 어떤 교회에 부임을 했다면 그래서 위임식을 했다면 그 교회서 나가라고 하기 전까지는 결코 임의로 더 좋은 조건의 교회로 옮겨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만일 여기저기로 더 좋은 조건을 찾아서 옮긴다면 그건 목사가 교회를 출세의 발판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교회면 다 같은 교회지 무슨 더 큰 교회, 더 좋은 교회가 있다는 말입니까?
물론 현실적으로야 더 좋은 교회, 더 돈 많이 주는 교회, 더 큰 교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남에게 으스대고 자랑할 수 있는 그런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대우에 따라서 교회를 옮긴다면 그는 주님의 제자가 아니고 소명의식을 가진 자도 아니고 단순한 삯꾼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되면 삯꾼에게 지도받는 교인들이 너무 불쌍합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제대로 된 영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6.평안을 빌라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평안을 빈다는 건 별거 아닙니다. 솰롬이라고 인사하는 겁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남의 집에 방문하면 하는 인사 그걸 제대로 하라는 겁니다. 서로 껴안고 복을 비는 것 이지요. 이건 보통사람들이 하는 인사에 불과하지만 능력의 종들이 하면 전혀 다른 영향을 미칩니다. 실제로 그 집주인에게 평안이 오는 거지요.
솰롬이란 말은 절대적 평안의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평안의 상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임한 상태, 그리고 궁극적인 구원에 이른 상태, 절대적 평안과 복락의 상태까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솰롬은 그들이 평소에 쓰는 단순한 인사말에 불과한 것 같지만 솰롬이란 말에는 육체적 정신적 평안과 또 경제적인 평안함까지 모든 절대적인 평안함의 상태를 기원하는 간구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복을 빈다고 해서 마구잡이로 그 복이 그 집에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그 복이 임할지 아닐지는 그 주인의 대응여부에 달린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집을 제공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한다면 제자들이 빈 복이 그에게 임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그들이 빈 복은 그 집주인이 아니라 복을 빈 제자들에게 도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마다 복을 후하게 빌어도 전혀 손해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만일 그 복을 받을 자격이 안 된다면 그 복은 우리에게 돌아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복음 전도사역에 쓰일 거점을 위해서 복을 비는 겁니다. 그래서 만일 주인이 거점을 빌려 준다면 그들이 빈 평안이 주인에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평안이 임할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 집 주인이 흔쾌히 제자들을 영접지 않는다면 발에 먼지를 떨어 버리랍니다. 그런데 원문이 주는 뉘앙스로는 미련을 가지지 말고 단호하게 먼지를 떨어버리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명령이 내린 것은 ‘값싼 복음’이 되지 않게 하려는 우리 주님의 의지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복음 사역자를 대접할 생각이 없고 축객을 할 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재삼 재사 간청한다면 그 사람들의 눈에 복음이 얼마나 값싸게 보이겠습니까? 절대로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님이 볼 때 복음 사역에 집을 제공할 수 있는 것, 각종 형태로 복음 사역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엄청난 복을 받을 기회를 가지는 것과 같으므로 구질구질하게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제자들이 그 집에 은혜를 베풀어 주는 셈이 되는 겁니다. 물론 거절하는 이는 영안이 어두워 제자들에게 집을 제공하는 것이 얼마나 큰 기회인지 모릅니다. 알 수가 없지요. 영안이 어두워서 육의 눈으로만 볼테니.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금도 은도 동도 없는 제자들은 그 은혜를 자기들이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안의 복을 빈 것인데 바로 그들이 빈 복이 하나님의 손에서 내려오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인간이 갚아 주는 것하고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는 엄청난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이교도 지역을 여행하고 유대로 오게 되면 신발의 먼지를 털어버려서 부정해 지는 것을 방지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아서 제자들이 신발의 먼지를 털어버린다는 것은 한마디로 그 지역을 이방 지역으로 인정한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심한 징계를 받게 된답니다.
하나님의 날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는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처럼 취급되고 그래서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지역이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 역시 이방인과 같이 취급되리라는 경고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식으로 한번 적용해 볼까요? 교회에 적을 올렸다고 해서 모두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교인인가 아닌가로 천국과 지옥을 나누시는 것이 아니라 신자인가 아닌가 성도인가 아닌가로 나누십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방해한다면 그는 교인이 아니라 이방인이고 신자가 아니라 불신자입니다.
복음 사역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자기의 나쁜 행실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되지 못하게 하고 비방거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뭐 저래’ 같은 이야기를 듣고 뒷담화에 손가락질 받는 자가 교인이라면 그 복음이 제대로 먹힐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아, 나도 저런 사람들하고 같은 공동체에 속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에 적을 두었다고 하더라도 불신자로 취급되어 하나님의 심판 때에 영벌에 처해지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 목사가 금과 은을 쌓아 놓고 부를 이루면 사람들이 ‘나도 예수믿고 복받아야지’라고 생각하며 예수믿을까요? 천만에 말씀이지요. 성직자가 부유해질수록 그 종교는 부패해 지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다시 또 하나, 예배당 건물이 화려해지고 거대해 지면 하나님의 복음이 탄력을 받을까요? 천만에요. 예배당 건물이 화려해지고 거대해 질수록 복음은 힘을 잃게 될 것이고 가시밭길이 될 것입니다. 지금 보세요. 수백년동안 지은 거대한 예배당들이 텅텅 비어있는 유럽을 보세요. 미국을 보세요.
물론 예배당이 크고 화려한 만큼 교인들이 늘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그건 수평이동입니다. 세속화된 교인들이나 대형교회의 물질적인 장대함에 감복하지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비난하고 조롱하여 하나님의 복음은 오히려 힘을 잃습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자기들은 물질을 좋아하지만 교회가 성직자가 물질이 넘치는 것은 싫어합니다. 비난합니다. 장사라고 기업이라고 욕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발이나 지팡이도 가지지 말라 하셨습니다. 주께서 예비한 자를 만나서 대접받고 그리고 또 떠나라고 하십니다.
보세요, 우리는 인생을 나그네 길이라고 하면서 죽을 때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쌓아 올리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도는 다릅니다. 재물을 흩어서 나누어 주고 너는 나를 좇으라.
그럴거면 차라리 예수를 확 안 믿어 버립니까?
그래서 기독교가 체험의 종교인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면, 그와 은밀한 가운데서 영교한 경험이 있으면, 그 놀라운 신비를 맛본다면 나는 그를 배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이 그의 생각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그를 어쩌지 못하는 것이지요.
제자도는 그런 것입니다. 물질도 명예도 초개같이 버리고 주님과 더불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더 얻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항상 역설의 도를 말씀하십니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라, 내가 다 준비해 두었다. 단지 너희는 나의 대의에 순종하고 공의롭게 행동해라. 그러면 이룰 것이다.
여러분, 여기에 동의하십니까? 그렇다면 좋습니다. 계속해서 그렇게 나가시기를 원합니다. 무궁무진한,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상급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동의하지 못하시나요? 그렇다면 더 기도하고 하나님아버지께 확신을 달라고 기도하세요. 체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해보세요.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성령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깊고 신비로운 체험이 기다릴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들을 초개같이 버리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속에 잠기게 될 것입니다.
제가 자꾸 신비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신비주의자로 여기면 곤란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신비니까 그런면에선 제가 신비주의자지만 그냥 세상의 일에 울고 웃는 그리고 염려도 하고 계획도 세우고 하는 평범에서 조금 더 주님께 다가선 자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사실 제자도는 우리로 하여금 현실에 절망하지 않고 이기게 합니다. 이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감당하게 합니다. 생각해 보면 정말 신나는 일입니다. 내 입으로 빈 평안이 이루어지고 그 반대로 내가 떨어버린 먼지로 인해 그 사람과 동네와 성읍의 미래가 바뀐다고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하며 세상의 법칙을 초월하는 일을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너무 멋진 일이 아닐까요? 막 가슴설레지 않나요?
그 멋진 제자도를 걷는 일은 매우 쉽습니다. 내 작은 입을 열어 지금 천국이 시작됨을 알리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로운 법에 의해 살 것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명령하신 대로 사는 겁니다. 어때요?
우리 함께 제자의 길을 걸어갑시다. 그래서 제자의 도리를 다합시다. 그렇다면 그 끝에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놀라운 상급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보이는 현실에 절망하지 말고 좌절도 하지 말고 주님을 굳게 믿고 제자도를 힘차게 걸어가서 실천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이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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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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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올해 93세인 할머니가 생각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하나님이 딸을 아껴주셨다며 몇 번씩 체험했던 이야기를 전해주곤 했습니다. 그런 할머니께서는 건강이 불편한 저를 두고서는, 꼭 공무원이나 정규직이 되지 않아도 얼마든지 좋으니까, 주님의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길게 기도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숨쉬기가 다소 불편함에도 열심히 기도하던 그 모습이 잊힐리가 없습니다.
저는 평소 돈 욕심이라고는 정말 없이 자란 탓에, 지금처럼 적은 돈을 조금씩 저축해가면서 소소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것에 있어 매우 만족하고 있는 편입니다. 누군가가 사는게 뭐가 그렇게 재밌냐고 물어본다면, 매달 영화보러 산책가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라고 반문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다보면, 의외로 많은 일을 할 수 있는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블로그도 그렇게 정성을 가꾸는 편인데, 설교를 올려두면 검색어에 금방 잡히는 것을 보고선 혼자 뿌듯해 하기도 합니다. 작은 개척교회의 설교를 누군가가 읽고 감동할 수 있다는 것이 참 놀라웠기 때문입니다.
영화 리뷰 쓸 때, 한 번 써먹었던 문장이지만, 워낙 마음에 들어서 다시 한 번 덧붙이며 오늘 설교 원고 업데이트를 마칩니다. 톨스토이의 말입니다. 나 자신의 삶은 물론 다른 사람의 삶을 삶답게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다. 아름다운 인간, 그렇게 아름다운 성도가 되어가기를... / 2016. 10.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