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이세벨의 딸이 일으킨 참변(열왕기하 11: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11. 4. 02:00

 

이세벨의 딸이 일으킨 참변 (열왕기하 11:1-)

 

우리가 성경을 보는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에는 예수님의 언행을 기록한 복음서, 사도들의 목회서신, 그리고 율법이나 선지서 그리고 예언서나 시가서 뿐만 아니라 역사서도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알려고 성경을 보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서에는 우리가 살펴보면 우리를 지혜롭게 할 많은 교훈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 역사가 흥하는 역사입니까? 그대로 하면 되고 망하는 역사입니까? 반면교사로 삼으면 됩니다. 반대로 하면 되는 거지요.

 

이스라엘이 비록 적은 나라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서도 역시나 사람들이 울고 웃으며 모략을 베풀고 권모술수가 난무하고 부자와 빈자의 대립이 있고 위정자들의 잘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있습니다. 더구나 통일왕국 후에 남북으로 분열된 것도 우리와 비슷합니다. 따지고 보면 시대도 다르고 인종도 다르지만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같지 않을까요?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정말 아주 기이합니다. 기적이라고 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섭리가 도대체 있는지를 보여주는 그런 본문입니다.

유다의 요아스라는 왕은 우리가 설교시간에 한두번 쯤은 들어 본 것 같은 사람입니다.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서를 발견하고 그걸 계기로 철저한 종교개혁을 일으킨 왕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왕이 되는 데는 엄청난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왕이 되는 데에는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은 없지만 요아스가 왕이 될 수 있는 원인을 제공한 사람도 있습니다. 아달랴. 여호야다와 아달랴는 요아스가 왕이 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들입니다.

먼저 1절에 유다의 왕 아하시야가 죽자 아하시야의 어머니인 아달랴가 왕의 자손을 모두 멸절했답니다. 왕의 자손이라면 자기의 아들이거나 손자일 텐데 이 사람들을 모두 죽인게 이해가 안됩니다. 배다른 아들? 배다른 손자? 도대체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잔인하고 비정할까요?

 

그런데 출신을 알고 나면 바로 이해가 됩니다. 아달랴는 아하시야 왕의 어머니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더 유명한 신분이 있습니다. 바로 이세벨의 딸이라는 겁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사이에서 태어나 유다의 왕가로 시집온 이스라엘의 공주입니다.

 

북쪽의 이스라엘에서는 예후가 왕이 되면서 아합의 아들 70명을 죽이고 아하시야의 형제 42명도 죽입니다. 남쪽에서는 아합의 딸이 유다의 왕족들을 멸절시킵니다. 남북의 왕자들이 씨몰살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이세벨이 일으킨 재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돈의 공주였던 이세벨은 이스라엘로 시집을 오면서 바알과 아세라 신관850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바알과 아세라 신앙을 퍼지게 했고 엘리야와의 대결에서 바알신관들이 패해서 죽게 되자 엘리야를 죽이려고 발악을 하다가 결국 예후에 의해서 비참한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의 딸은 이스라엘에서 유다로 시집을 와서 또한 우상을 퍼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오염시킵니다. 죄를 짓게 하고 여호와의 분노를 사게 만듭니다. 그래서 결국 남쪽 유다왕가에 피바람을 불러 일으키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에 그친게 아닙니다. 그 스스로 왕이 되려고 왕의 자손들을 멸절시키기에 이릅니다. 이 두 모녀는 남북을 통 털어 이스라엘에 다시없는 재앙덩어리입니다.

 

본문은 아달랴가 자기의 아들 아하시야가 북부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자기가 왕이 되기 위해 나머지 왕자들을 모두 죽였다고 합니다. 보통의 어머니들은 아들이 죽었다면 슬퍼하고 애통해 하며 다른 걸 할 힘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손자들을 죽입니다. 굉장한 여인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딸답습니다.

 

우리도 잘 알다시피 왕가에서는 정략결혼을 자주 합니다. 자기들 말로는 결혼동맹입니다. 피로 이어지는 동맹관계를 구축해서 자기들의 세력을 키우고 어려울 때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 동맹은 때로 이렇게 보복의 연결고리가 되어서 치명적인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누구와 결혼하느냐가 그래서 중요합니다.

 

남 왕국 유다는 북 왕국 이스라엘에 비해서 정변이나 반란이 적고 한 왕들이 비교적 오랫동안 통치를 했습니다. 그리고 북쪽의 아합왕과 같은 악당들은 비교적 적었습니다. 물론 유다에도 악당들이 몇 있기는 했지만 아합 정도로 악한 왕은 없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다윗 때문에 남겨둔 핏줄이라서 그런지 아주 하나님을 멀리 떠난 그런 왕들은 비교적 적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덜 샀고 그래서 이스라엘보다 상대적으로 더 평안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이 그 모든 상황을 바꿔 버렸습니다. 사실 북쪽 이스라엘은 여러번 왕가가 바뀌었습니다. 여로보암과 바아사와 오므리같은 왕가입니다. 아합의 다음대인 왕 예후도 있고 계속해서 왕가가 바뀝니다. 반면에 남쪽 유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윗왕가였고 포로기 후에도 여전히 다윗왕가가 백성들을 이끌었습니다.

 

그 다윗왕가에 최대의 위기가 찾아 옵니다. 아달랴가 다윗왕가의 왕자들을 모두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려 한 겁니다. 마치 당나라의 무측천 같습니다. 이씨의 아내이면서 이씨의 나라를 망하게하고 스스로 무씨의 나라를 만들려고 아들도 죽이고 한 측천무후.

 

아달랴는 이세벨을 닮아서 성질이 포악하고 제멋대로 였답니다. 우리말로는 대가 세다고 해야 합니까 아니면 거세다고 해야 합니까?그런데 이 여자의 이름 아달랴가 무슨 뜻인지를 알게 되면 정말 황당해집니다. 아달랴의 뜻은 ‘여호와는 존귀하다’입니다.  이런 멋지고 신앙적인 이름을 가진 이 여자는 남편 여호람과  아들 아하시야를 좌지우지 해서 유다에 바알 신앙을 뿌리 내리게 만들었고 마침내 예후의 손에 아하시야와 아하시야의 형제 42명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아하시야의 아들들을 죽인 겁니다.

 

그녀가 손자들을 죽인 이유는 자기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아달랴는 남편도 손에 쥐고 흔들었고 아들도 손에 쥐고 흔들었습니다. 그렇게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아들이 전사했다는 소식은 그에게 자칫하면 자기의 권력을 다른이에게 빼앗길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심어 주었습니다. 다른 이가 왕이 되면 자기는 찬밥이 됩니다. 그 왕에게도 어머니가 있고 외척이 있고 새로운 권력자가 들어섭니다. 그래서 손자들을 죽여 버린 겁니다.

 

그리고 자기의 아버지 아합의 왕국이 예후에게 멸망한 것을 보고는 이제 자신이 왕이 되어서 북쪽에서 멸망한 아합 왕국을 남쪽에다 세우려고 시도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바알왕국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악의 뿌리는 끈질기게 이어집니다.

 

시돈에서 시작된 악의 피는 이스라엘을 오염시키고 유다를 오염시키고도 계속해서 퍼져 나갑니다. 때로 인간적인 책략인 결혼동맹은 본래의 의도대로 집안과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나라와 집안을 멸망으로 이끌고 가는 통로로 이용됩니다.

 

아마 여호람이나 그의 아버지는 북 이스라엘의 공주를 맞이함으로 자기 집안이 이렇게 멸절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지만 이세벨은 들어가는 모든 곳에 재앙을 불러 일으킵니다. 우리 성도가 들어가는 모든 곳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듯이 이세벨의 딸이 들어가는 모든 곳에는 재앙이 발생합니다.

 

한때 성도들에게 ‘축복의 통로’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우리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복을 받는 거지요. 그런데 악인은 축복의 통로는 커녕 재앙의 통로가 됩니다. 예수믿는 성도는 결코 재앙의 통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당연하게도 재앙의 통로가 되는 사람이 성도일 리가 없습니다. 이름과 실질이 맞지 않기는 참으로 어렵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성도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우리 역시, 성도라는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름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이는 그 이름을 지어준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의 염원을 배신한 겁니다. 저도 신기한게 왜 이 사람의 이름이 아달랴가 되었는지를 모르겠네요. 아합이 잠깐 정신이 이상해 진건지.

 

혹시 남 유다의 왕인 여호람이 아달랴의 이름을 듣고 그가 하나님을 신실히 섬기는 여인이라고 생각하고 혼인한건 아닐까요? 당시에 사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자의 외모를 확인할 방법이 없지요. 초상화는 어차피 사람이 제멋대로 그리는 거니까. 어쨋거나 이세벨이나 이세벨의 딸 아달랴는 시집으로 우상을 퍼뜨리는 역할을 잘 감당했고 그 때문에 시집을 멸망케 하는 원흉이 되었습니다. 재앙의 통로가 된 것이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생각하는 것처럼 사랑의 하나님만은 아닙니다. 사실상 복수하시는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자기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배반한 자들에게는 철저하게 보복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악한 행위에 따른 공평한 벌을 내리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벌은 인간이 견디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결혼을 통해 우상을 수입하고 그 손에 놀아나서 하나님을 버린 왕들을 향해서 무서운 진노의 채찍을 휘두르셨습니다. 본문을 약간 벗어나기는 하는데 앞부분을 보면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가지지 못해서 자리를 보전하고 누워있자 이세벨이 모략으로 나봇을 죽이고 그 포도원을 빼앗아 남편에게 주는 기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이세벨이 더 악하고 강단도 있는 모양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의 백성들을 사탄의 손에 판 남북의 왕들을 향해 무섭게 진노하셨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하셨나 봅니다. 그 와중에도 한 아이를 살리셔서 그로 하여금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바로 요아스, 당시 한 살배기인 이 어린아이는 자기의 고모의 손에 의해서 구출을 받았습니다. 고모 여호세바는 아달랴가 왕자들을 죽일 때 요아스와 요아스의 유모를 자기의 침실에 몰래 숨겨서 살렸고 이후에는 성전에서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요아스를 돌보았습니다.

 

요아스의 고모인 여호세바가 요아스를 구했는데 갑자기 아무런 설명 없이 요아스가 성전에서 자라는 광경이 나옵니다. 그것은 공주 여호세바가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아스도 이때 함께 간 모양입니다. 아마 ‘여호세바’는 아달랴의 친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옛날 왕가에는 여러명의 처가 있기 때문에 왕후니 왕비니 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당장 아합만해도 아들이 칠십이라고 하니 한두 여인의 태에서 난 자식들은 아니겠지요?

 

요아스의 생존은 매우 극적이지만 그는 다윗왕가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음으로 왕위 경쟁없이 자동적으로 왕이 될 수 있는 자격도 얻은 행운아입니다. 42명의 왕자들이 죽지 않고 살아 났다면, 아달랴가 요아스의 형제들을 죽이지 않았다면 왕위 계승전의 향방을 쉽사리 예측하기가 어려울 만큼 치열했을 겁니다. 웃긴게 그렇게나 자그마한 나라도 왕이라는 자리에 앉기 위해 형제들 사이에서 피가 흐른다는 사실. 인간의 권력욕은 정말 말릴 수가 없습니다.

 

아하시야의 형제들은 아라비아 사람들이 죽였고 아하시야의 조카들은 예후가 죽였고 아하시야의 아들들은 아달랴가 죽였지요. 졸지에 다윗왕가에서 왕위에 오를 자격을 갖춘 남자가 없어져 버린 겁니다. 요아스를 제외하고.

 

그러나 이렇게 다윗왕가에 내린 진노는 사실상 그들이 결혼동맹을 맺으면서 바알 신앙을 수입할 때부터 예견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기의 명령을 거역하고 우상을 음란하게 섬기며 백성들에게 학정을 펴는 왕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오래 참아서 기회를 주셨을 뿐인데 이걸 가지고 인간들은 ‘하나님이 없다’느니 하며 자기 자신을 속이고 스스로 위안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들을 처벌하지 않고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둥의 이야기로 자기를 속입니다. 다 자기를 위로하기 위한 거짓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기의 생명책에 우리에 관한 모든 것들을 다 기록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항상 그걸 깨닫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이웃에게 베풀고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최후의 심판 때 하나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한다면 결코 우리가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말 한마디라도 제멋대로 할 수 없습니다. 명심해야 합니다.

 

예후가 아합 왕가의 자손들을 죽인 것도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킨 아합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고 아하시야의 형제와 아들들을 죽인 것도 역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때문입니다. 바알을 받아 들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배반하게 만든 장본인으로 벌을 받는 겁니다.

 

역사에서 보면 인간의 추악한 욕망들이 서로 겨루어서 어떤 역사적인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 배후에는 세상에 공의를 실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자정작용을 해서 깨끗해지지 못하면 하나님이 강제로 개입하셔서 바로 잡는 거지요.

 

북쪽에서는 예후가, 남쪽에서는 아달랴가 각각 왕족들을 씨몰살을 시켰지만 그들은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의 징계의 도구로 쓰임 받은 겁니다. 비록 그들이 악할 수도 있고 선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악당이고 선인이고 가리지 않고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욕심을 이용해서도 자기의 선한 목적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물론 악당일 경우에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고 난 다음에는 스스로의 죄로 인하여 또 징계를 받을 겁니다.

 

본문에 ‘진멸하다’는 단어가 보이지요? 이 단어는 주로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을 섬기며 악한 행동을 할 때 하나님의 징계가 내려올 때 주로 쓰여지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간접적으로 이 집안에 씨몰살의 위기가 닥친 이유가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음란하게 섬기며 학정으로 백성들을 오도한 죄를 당하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에는 지금까지 여로보암 왕가, 바아사 왕가, 오므리 왕가들이 있었지만 남유다에는 다윗왕가 하나밖에 없습니다. 왕가가 자주 바뀐다는 말은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다윗왕가에 두신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다윗왕가의 씨가 모두 몰살을 당하는 와중에서도 요아스가 살아남게 된 것입니다.

 

요아스가 성전에서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었는지 본문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냥 그렇게 넘어갑시다. 요아스가 성전에서 숨어 지내는 동안에도 아달랴는 나라의 왕이 되어서 다스리고 있습니다. 6년의 세월이 지나고 요아스가 7살이 되었습니다.

 

아달랴의 손을 피하여 성전에서 자란 요아스가 일곱 살이 되자 대제사장 여호야다는 쿠테타를 계획합니다. 정당한 왕자인 요아스에게 왕위를 주기 위해서 그는 백부장들을 소환합니다.

 

4절에 보면 여호야다는 쿠테타를 일으키기위해 ‘가리 사람’의 백부장들과 호위병의 백부장들을 성전으로 불러 언약을 맺고 맹세를 시킨 다음에 요아스를 그들에게 소개합니다. 가리 사람은 다윗시절에 나온 ‘그렛 사람’을 말합니다. 이들은 이방인으로 대대로 왕에게 충성한 용병들입니다. 이 부족이 용맹으로 유명했던 모양입니다. 다윗의 대부터 시작된 그들은 아직까지 여전히 유다왕실을 수호하는 용병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가리사람을 부르고 그리고 왕의 호위병 백부장들을 불렀답니다. 역대기에는 이들 백부장의 이름이 나와 있고 이들의 숫자가 모두 다섯입니다. 그래서 여호야다는 쿠테타에 모두 500명의 군대를 동원한 겁니다. 왕실 호위대가 동원되었습니다. 그는 지난 6년동안 그냥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요아스를 왕위에 올리기위해 세력을 키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아달랴는 죽고 요아스는 왕이 됩니다. 다시금 다윗왕가가 집권을 하게 됩니다.

 

자, 오늘 우리가 살펴본 것은 단순히 왕실비사가 아닙니다. 누가 왕이 되고 누가 죽고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여기서 한 여자의 역할이 얼마나 큰가에 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한 집안도 한 국가도 여자의 영향력하에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남자들이 열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해야 될게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집안에 믿지 않는 며느리가 들어가면 그 남편이 예수를 믿지 않을 확률이 거의 80%를 넘어 갑니다. 그러나 반대로 믿지 않는 집안에 믿는 며느리가 들어가면 그 집안이 믿게 될 확률이 또 80%가 넘어 갑니다. 이게 바로 여자의 영향력이 남자의 영향력보다 크다는 증거입니다.

 

당연하게 사람마다 다른게 확실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그런 정도의 확률이 있다는 겁니다. 죄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환경도 다르지만 마음가짐도 다릅니다. 하나님의 안에서 자라서 양심을 지키고 죄를 저지르는데 거부감이나 본능적인 거리낌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기치고 뺏고 하는게 오히려 불편하고 두렵습니다. 죄를 짓고는 도저히 두발 뻗고 잘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조금 손해를 봐도 그냥 남에게 피해를 안주는 걸 더 좋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나만을 위해 삽니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중하기에 나를 불리하게 만들고 불편하게 하는 모든 것이 나에게는 악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보면 선은ㅡ 착한 일은 주변에 널리 퍼지는게 매우 힘듭니다. 이게 한번 주변에 널리 퍼지려고 하면 경천동지할 사건이 벌어지거나 의도적인 노력들이 동반되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악은, 죄는 솔직히 별다른 노력 없이도 매우 자연스럽게 잘 퍼집니다. 악과 더불어 조금만 있으면 우리는 그 분위기에 젖어 내가 오히려 죄와 악의 원흉이 됩니다.

 

동네에서 노는 아이들을 요즘은 잘 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랄 때를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애들은 놀면서 욕을 자연스럽게 문장에 섞어 씁니다. 앞뒤로 접두어니 접미사로 욕을 습관적으로 집어 넣습니다. 그런데 이게 친구들 사이에는 전혀 이상스럽지 않습니다. 심지어 집에서 전혀 욕을 쓰지 않던 아이들도 욕을 하는 아이들과 두시간만 놀다 오면 바로 욕을 씁니다. 그만큼 악은 사람들과 친합니다.

 

그래서 여자와 죄가 함께 합쳐지면 그 퍼지는 속도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리 어머니들은 정말 많은 고생을 감내하면서 오로지 가정을 지켜왔습니다. 남편이 비록 못나도 불평하면서도 이혼이란 건 생각도 못하고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고 그래서 자녀들을 출가시키고 그들을 사회의 구성원으로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이 나라가 이 정도라도 되어 있는 것은 사실 어머니들의 힘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가정에 여자가 들어오는 것에 매우 큰 의미를 두었고 여자의 힘으로 가정이 살기도 하고 망하기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볼까요? 교회역시 여 성도들의 헌신으로 이만큼 성장한 겁니다. 여성도들의 헌신이 없이는 교회가 성장할 수 없습니다. 이것저것 재고 따지는 남자들보다 맹목적으로 헌신하는 여 성도들의 신앙 때문에 교회는 오늘날 세계에 우뚝 서서 선교사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아마 선교사 파송 숫자가 세계 일위일 겁니다. 얼마 전까지는 미국이 일위였지만 이제는 역전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전에 제가 대학생 때 독일 선교사들이 철수하면서 선교지를 우리나라 선교사들에게 부탁하고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제 세월이 흘러서 우리나라가 세계 선교를 좌우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게 사실은 여성도들의 헌신 때문입니다. 아마 집집마다 교회마다 비슷한 사정일 겁니다.

 

이세벨은 시돈에서 바알을 수입해서 이스라엘을 우상숭배의 나라로 만들었고 남편 아합을 가장 악한 왕으로 만들었다가 하나님의 진노의 손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 했습니다. 그리고 딸을 유다에 시집보내서 유다에 바알신앙을 퍼지게 했습니다.

 

그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는 역시 이스라엘에서 바알을 가지고 유다로 시집가서 남편과 아들을 그 결혼동맹 때문에 죽게 만들었고 유다에 바알숭배를 전파했고 결과적으로 동족상잔의 끔찍한 비극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남쪽의 왕인 아하시야가 북쪽 예후의 쿠테타로 죽은 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왕과 동맹관계로 같이 아람과의 싸움에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에서 이스라엘 왕 요람이 부상을 입었고 이 부상을 위문하기위해 아하시야가 이스르엘로 내려갔다가 마침 예후가 그곳으로 이스라엘 왕을 죽이러 왔는데 이때 함께 죽은 겁니다.

 

이스라엘 왕 요람이 먼저 죽고 이를 보고 아하시야가 도망하여 므깃도까지 갔지만 그곳에서 죽습니다. 그래서 아하시야는 겨우 일년간을 왕으로 있다가 죽게 됩니다. 악한 처남을 만나서 정말 안타깝게도 그 좋은 왕자리에 일년밖에 있지 못했습니다. 아하시야의 형제들은 우연히 예후가 사마리아로 가던 도중에 털깎는 자의 집에서 만나서 모두 죽게 됩니다. 처남매부 사이인 이들은 함께 죽었습니다. 더불어 아하시야의 형제들도 죽게 되었고 더하여 아하시야의 아들들도 죽게 되었습니다. 악을 가까이 하면 이렇게 화를 입습니다.

 

‘여호와는 존귀하다’는 이름의 여인은 하나님의 존귀함을 스스로 부인하다가 다른이의 칼날에 죽음으로 하나님의 존귀함을 자기의 죽음으로 증명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가 그렇게나 파괴하려한 하나님의 성전에서 목숨을 건진 이 여인은 성전을 나서서 도망가다가 죽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남북에서 아합의 씨앗들은 멸절되었고 원흉은 제거되었습니다.

 

북쪽이나 남쪽이나 왕들의 자식들은 매우 매우 많습니다. 아합의 70명의 자식들 과 아하시야의 42명의 형제들을 죽였다는 기사를 보면 그들의 숫자에 질릴 지경입니다. 겉으로 보면 이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번성한 것 같고 더 잘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심판의 때까지 이들을 버려두셨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정해진 때에 이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옛날 우리 믿음의 어머니들은 밥을 지으려 쌀을 씻기 전에 십일조를 위해서 성미쌀을 따로 떠 두었다가 자그마한 포대에 모아놓은 쌀을 교회에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을 목회자들이 받아서 양식을 삼았습니다. 지금은 대부분의 교회에서 이런 풍경이 없어졌겠지만 아마 오랜 세월 후에 가장 아름다웠던 신앙의 모습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 될 것입니다.

 

자기의 왕권을 위해서 자식에 손자들까지 몰살을 시키는 여인이 있는가하면 자식을 위해 자기 목숨도 내어놓은 어머니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 덕분에 아직 이 사회가 유지되고 있는 겁니다.

 

우리나라에 결혼한 사람의 1/3이 이혼을 한답니다. 이 통계가 어떻게 나왔냐 하면 한해 결혼하는 숫자와 이혼하는 숫자를 단순히 비교한 겁니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결혼한 사람의 1/3이 이혼한건 아닙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이혼이 무슨 말인지 생각조차 안하고 있는 이들이 더 많을 겁니다. 주로 기독교인들이 더 그러합니다.

 

요즘 웬만한 가정은 항상 생활비가 쪼들립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돈은 있는게 한정입니다. 쓸데가 어찌나 많은지. 그런데도 그 빡빡한 살림에서 십의 일을 떼어서 하나님께 바치는 분들 보면 정말 놀랍습니다. 자기의 필요를 절약해서 가난한 형제를 도우는 걸 보면 정말 감동적입니다. 아마도 여성도님들의 힘이지 싶습니다.

 

한 여자가 들어 두 나라를 말아 먹는 일도 있지만 한 여자가 들어서 나라와 가정을 살리는 일도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당연히 나라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는 그런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때문에 나라가 살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교회의 뒤에 여자가 있었다는 말도 들리기를 원합니다. 먼 훗날 이 땅의 역사책에 아니 전 세계의 역사책에 한국 어머니들의 헌신과 신앙이 사도행전의 여인들처럼 복음서의 여인들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소식으로 퍼져 나가기를 원합니다.
기도합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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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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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제 할머니는 제 2영도교회에서 권사 생활을 오래 하셨고, 은퇴 후에는 성경 쓰기에 재미를 붙여서 세 번이나 성경필사를 해서 상까지 타오시곤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틈틈이 찾아뵐 때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해서 여러 차례 신앙고백을 해주시곤 했습니다. 그런 강한 영향을 받아온 제가, 기독교인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자, 섭리, 또는 더 이상 굳이 벗어날 수 없는 안전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비밀 하나.

 

그러면 할머니는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는가? 바로 말을 지독히 안 듣던 큰아들이 있었는데, 이 집에 들어온 며느리가 그 시절에 보기 드문 예수쟁이 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며느리 한 사람 덕분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쟁이가 되었습니다. 한 여인의 신앙, 늘 감사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열심히 사는 기독교인 덕분에 많은 사람의 삶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진실인 것 같습니다. 저도 그래서 할머니 - 어머니 - 저 로 이어져 벌써 3대째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요즘 사이비 종교니 무당과 혼합종교니, 각종 게이트니 나라가 안팎으로 시끄럽고, 괜히 멀쩡한 기독교까지 덩달아 욕먹기도 하는데 속이 많이 상합니다. 제가 아는 기독교는 이웃사랑, 사회개혁, 실천의 종교였기 때문입니다. 자기들끼리 모여서 돈이나 횡령하고, 부유하게 살아가는 것이 무슨 종교란 말입니까, 가난한 사람들 고혈을 빨아먹으면 그것은 종교라는 이름의 독약일 것입니다.

 

이 땅의 기독교가 여전히 반짝이며 빛나며, 새로워질 수 있기를, 아름다운 신앙인 한 사람으로, 그 공간이 더 밝아지고, 믿음직해질 수 있기를 다만 소망해 봅니다. / 2016. 1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