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가나안 여자의 믿음(마태복음15:21-28)/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11. 17. 03:59

 

가나안 여자의 믿음 (마태복음15:21-28)

 

믿음이란 사실 추상적인 그리고 관념적인 용어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말에는 절박함 그리고 ‘그 외에는 의지할 곳이 없음’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사안이 중대하면 할수록 사면초가에 빠지면 빠질수록 믿음은 더 커집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믿음은 가장 커지고 숭고해 집니다. 그래서 믿음은 역설적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의 가나안 여인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에게 매달리는 외에는 어떤 의지처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당연하게도 그 누가 있어 귀신을 쫓아 낼 수 있을까요.

 

오늘 주님은 갈릴리를 잠시 떠나 시돈과 두로 지역 지금의 레바논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주님은 평소에는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라고 하셨을 정도로 이방에 가는 것은 경계하셨습니다. 물론 이방인을 경계하고 그들을 배척하는 의미는 아닙니다. 여기서는 그 의미를 분석할 필요는 없고 일단 주님의 행보를 따라가 보십시다.

 

마태복음의 이 본문과 병행기사인 마가복음에서는 이 여인은 두로 지방에서 만난 수로보니게 여인으로 나옵니다. 주님이 주 무대인 갈릴리를 떠나서 이방으로 들어 가신 것은 아마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좀 쉬고 싶기도 했을 것입니다. 워낙 사사건건 따라다니면서 시비를 거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한 가나안 여자가 나와서 소리를 지릅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들렸나이다”

 

갈릴리의 유대랍비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을 피해서 이방으로 들어 왔는데 주님을 주라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는 이방 여자가 있습니다. 이는 정말로 놀라운 것입니다. 본토의 성경선생들과 하나님의 법을 가장 잘 지킨다고 하는 이들이 주님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상황에서 전혀 다른 곳, 이방의 수로보니게 여인이 주님을 향하여 주라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 원문에는 ‘보라’라는 놀람의 감탄문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보라 한 가나안 여자가’

 

마가복음에서 이 여인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헬라인 그리스인이 아니라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페니키아의 수로보니게 출신의 여자란 말입니다. 아람어를 사용하고 이스라엘 땅에 사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전혀 상관없는 이방인입니다. 본토의 배척을 받고 이방으로 떠나온 주님은 이방여인의 신앙고백에 맞닥뜨립니다. 그래서 의외요 놀라운 것입니다.

 

22절에 보면 ‘그 지경에서 나와서’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아주 멀리서부터 딸의 병을 고치기위해 이 여인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요 일부러 주님을 만나러 온 것입니다. 결코 길가다가 우연히 만난게 아닙니다. 왜냐면 이 여인에겐 주님밖에 의지할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그런 것입니다. 주님밖에 내가 의지할 이가 없다. 주님만이 내 딸을 고칠 수 있다. 바로 그게 믿음입니다.

 

주 다윗이 자손이여라는 호칭은 예수를 자신의 주인으로 그리고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한 표현입니다. 놀랍지 않나요? 예수님은 자신의 백성들로부터 백성의 지도자들로부터는 배척을 받았지만 이방여인으로부터 주 다윗의 자손으로 메시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이방에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주를 인정한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면 이 여인은 매우 다급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주를 배척한 유대의 지도자들은 다급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픈 가족도 없고 생활고도 겪지 않고 스스로도 건강해서 전혀 급하지 않았고 주님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를 배척한 것이지만 이 여자에게는 귀신들린 딸이 있었고 그래서 주님이 간절히 필요했기 때문에 주를 찾아서 멀리서 왔고 주를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런 것입니다. 다급하고 간절할 때 마구 마구 생겨 납니다.

 

이 여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한 이유가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소서’는 ‘엘레에손’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지요? 변화산에서 내려온 주님에게 아들의 간질병을 고쳐달라고 무릎꿇었던 아버지의 말입니다. 이제 귀신들린 아이의 어머니가 또 똑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엘레에손, 불쌍히 여기소서. 그래요, 위급하고 아프고 힘이 들고 다급한 이 시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현실을 딛고 사는 생활인 가장들이 바로 이 말을 지금 주님에게 하고 있습니다.

 

엘레에손, 불쌍히 여기소서. 그런데 이 여자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합니다. 자기 딸이 아픈데 이 여자는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합니다. 이 말은 이 여자가 자기 딸의 아픔을 자기와 일치시킨 겁니다. 어머니의 마음은 이와 같습니다. 딸을 위해서는 못할게 없습니다. 딸이 아프면 엄마도 함께 아픕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의 아픔을 자기와 동일시 합니다. 그래서 아들이 아프면 아버지도 함께 아픕니다.

 

이 여자의 딸은 그냥 귀신이 들린게 아니라 흉악하게 귀신들렸답니다. 이 ‘흉악’이란 말에는 ‘병든’이란 뜻과 ‘위험한’ 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의 딸은 귀신들려서 육체적으로 병이 들었고 또 나쁜 행실로 인해서 남에게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 사탄의 습성이지요. 그가 영혼을 지배한 이를 병들게 하고 그 행동으로 남도 위험하게 만들고 그렇습니다. 이 딸, 여자아이도 역시 귀신이 들렸고 그 지배하에서 병들었으며 도덕적으로도 좋지 못한 행동을 하며 나아가서는 남에게 위해를 가하고 위험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귀신이 들려서 좋아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내림이랍시고 무당이 되는 굿을 하는 여인들을 보면 기가 찹니다. 신병이 낫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은 싹 다 거짓말입니다. 일시적으로 미혹된 상황이 시간이 지나고 흥분이 가라앉게 되면 전혀 효과도 없고 오히려 심신이 더 괴로워지고 재산도 날리고 몸도 만신창이가 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귀신의 지배를 받는 것만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무당이 그래서 무서운 거지요.

 

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에게 무당이 말합니다. 당신은 장차 여왕이 될 것이므로 가족과 친척들과 왕래를 금하고 몸을 조심하라. 그랬는데 그 여인은 과연 무당의 말대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정말 그 무당의 영성이 굉장한 것일까요?

 

천만에요. 그 여자는 대통령이 된거지 여왕이 된게 아닙니다. 그런데도 여왕이 된걸로 여기게 해서 결국은 더 큰 고난에 더 많은 사람들이 고난에 처하게 만드는 것, 이게 바로 사탄이가 하는 일입니다. 물론 조찬모임에 초대받고 조찬기도회에서 만나서도 귀신이 들렸다는 것을, 사탄에게 사로잡힌 것을 몰랐던 대형교회 목사들은 모두 회개해야 합니다. 초청 조찬기도회에 간 사람을 대형교회 목사라고 합시다. 작은 교회 목사를 그런곳에 초대할 리가 없으니까 아마 맞을 겁니다.

 

무당보다 못한 영성을 가지고 영안이 없이 거짓 선지자 노릇한 사람들은 정말 회개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거짓 명성을 버리고 무릎 꿇고 앉아 회개하고 무당보다 나은 영성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정도도 안되는 영성을 가지고 교인들을 영적으로 지도한다고 헛소리를 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하나님의 가증히 여기시는 바입니다.

자, 그런데 반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가 외치는 말을 듣고도 한말도 대답지 않았답니다. 오죽 무안했으면 제자들이 오히려 주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귀신들인 딸아이의 엄마인 이 수로보니게 여인은 계속해서 주님 뒤를 따라오면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주님이 외면하면 할수록 더 열심으로 외칩니다.

제자들이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하지요? 제자들이 매우 무정합니까? 이 사람들 몹쓸 사람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말은 자꾸 소리 지르고 시끄럽게 하니까 그냥 돌려 보낼 수가 없지요, 고쳐서 보내버리란 말입니다. 그러면 소리도 지르지 않고 조용할 것 아닙니까.

 

참 제자들의 믿음이 굉장하지요. 선생님을 향한 신뢰가 대단합니다. 그깐 병쯤은 주님이 하시고자 하면 아무런 문제도 없이 바로 고쳐주실 수 있다. 이게 그들의 주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시끄럽다고 그 여자를 조용하게 하려고 그냥 고쳐줘 버리라고 종용하는 겁니다. 굉장하지요? 요즘 무당보다 못한 목사라는 말이 유행인 것 같은데 저는 그런 목사가 안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종용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여기서 집은 배타적 공동체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나는 이스라엘 공동체라는 잃어버린 양을 구원하기 위해 왔다는 말입니다. 왜냐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공동체에서 벗어난 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이 말은 여자를 시험해 보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이제까지 모른 척만 하던 주님이 제자들의 불평에 한마디를 하게 되자 뭔가 틈을 노린 여자가 주님에게 와서 절합니다. 이곳 사람들은 걸핏하면 절하는 것 같은데 모두 아픈 자녀를 둔 부모들입니다. 회당장 야이로, 귀신들려 간질에 걸린 아이를 둔 아버지,  귀신들린 딸을 둔 여인. 이들은 모두 다 위급합니다. 절박합니다. 오로지 주님 외에는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마지막 희망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나와서 절하는 겁니다.

 

본문의 뉘앙스는 한번만 절한게 아니라 계속해서 절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인 의미의 절이 아니라 신적인 경배를 계속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신으로 여기고 그 앞에 자비를 호소한 것입니다. 이게 바로 아픈 자녀를 둔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내 딸을 고칠 수 있고 이제 내가 주님을 만났으니 결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이런 여인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계속해서 이 여인은 말합니다. “저를 도우소서”
여기에는 ‘위험에 빠진 사람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달려가다’란 뜻이 들어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황급히 달려가서 도와주다’란 뜻도 있습니다.

 

그래요, 우리 성도들은 주님을 향하여 ‘주여 나를 도와 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주여 내가 위험에 빠졌으니 빨리 오셔서 건져 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한이 많습니다. 아버지에게만 아뢸 수 있는 구구절절한 한들이 쌓여 있습니다. 그처럼 이 여인도 ‘저를 도우소서’라고 절하며 울부짖고 있습니다.

 

여인의 계속되는 읍소에도 주님은 정말로 무정하고 잔인하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정말 주님이 너무 잔인한 것 같습니다. 진짜 심합니다. 여자를 개로 비유한 겁니다. 그냥 고쳐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이렇게 꼭 그 불쌍한 여인을 모욕해야 속이 시원합니까?

 

그런데 여기의 개는 그냥 우리가 좋아하는 개나 강아지, 애완견이나 반려견 같은 개가 아니라 아주 더럽고 사나운 들개를 말합니다. 이건 개 중에서도 급수가 떨어지는 개입니다. 최대의 모욕을 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속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나라에 거할 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려고 한 것입니다.

 

왜냐면 개에게 떡을 던져 주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의 떡과 개, 그 떡을 먹는건 원래 자녀인데 그 자녀가 먹는 떡을 들개에게 던진다는 표현자체가 하늘나라의 양식을 그들도 먹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집에서 기르는 개가 아니라 야생의 들개를 비유로 든 것입니다. 비록 자녀와 개가 대조되기는 하지만 이것에는 이방인들을 위한 자리가 천국에 예비되어 있을 수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개로 비유되는 모욕을 당한 입장에서 얼마나 기가 차고 화가 날까요? 그래도 이여인은 그 말에 모욕감을 느낀게 아니라 더 대담하게 받아 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자기를 개로 비유한 주님에게 그래도 그 개는 제 주인의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말합니다. 당신의 영적 양식을 개들도 먹을 수 있다. 그 개는 당신을 주인으로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여자는 이스라엘사람에게 무시받을 그런 천한 신분이 아닙니다. 개라고 모욕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에게 스스로 개를 자처한 것은, 스스로 당신이란 주인의 개라고 자처한 것은 딸을 살리고자 하는 모정 때문입니다. 내 딸만 나을 수 있다면 나는 개가 아니라 더한 것도 될 수 있다는 엄마의 모정이 그 모욕을 이겨내고 주님을 감동시킨 겁니다.

 

이에 감복한 주님은 더 이상 여인을 시험하지 않고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라고 하시고 곧 그의 딸이 나았답니다.

보세요, 믿음은 이와 같습니다. 우리에게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차릴 수가 없습니다. 낮아 지고 낮아져서 겸비한 자세로 그의 자비와 긍휼을 바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믿음이 시작되는 것이고 여기서부터 우리 주님에 대한 감동작전이 시작되는 겁니다.

 

주님의 말대로 즉시로 딸의 병이 나았습니다. 자, 여기서 거꾸로 한번 볼까요?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 지려고 하면 ‘우리의 믿음이 크도다’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만이 소원을 이룰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존심이 상하고 모욕을 받아도 그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도록 만든건 절박함 때문입니다. 절박하지 않으면 그런 모욕을 견디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까 거꾸로 하면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내야만이 결국 우리 주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고 인정을 받아야 우리의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다시 그곳을 떠나서 갈릴리로 돌아갑니다. 아마 이방땅을 데가볼리로 해서 한바퀴를 돌아서 갈릴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사실 이방으로 가시는 길이 참 드문데 정말 이 여인이 주님을 만나 것은 큰 복입니다. 물론 이 여인의 간절함이 주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게 만든 것도 있지만 갈릴리에서 북쪽으로 가지 않고 만일 주님이 남쪽 유다로 가시거나 데가볼리로 건너가셨다면 어쩔뻔 했습니까?

 

보통은 주님은 갈릴리 바다를 중심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두로와 시돈지역보다는 갈릴리 동부의 데가볼리 지역을 더 자주 방문하십니다. 그런데 저는 이 여인의 간절함이 주님을 만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여인의 주님에 대한 믿음과 간구가 이 여인의 소원을 이루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정말로 힘든 나날들을 보냅니다. 이 세상은 여러 가지로 참으로 매정하고 팍팍합니다. 쉽게 볼 수 없습니다. 만만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을 믿는다는 것은 큰 위험을 동반합니다. 환경의 변화가 너무 무쌍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불완전하고 유동적이며 그래서 불안하고 염려스럽습니다. 언제든 상황이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계획대로 뭔가를 이루어 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한가지 해결법이 있습니다.

 

유동적이며 불확실한 세상에서 확실한 분, 변하지 않는 분, 주님을 믿으면 됩니다. 그분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해결됩니다.

 

우리가 불쌍히 여겨달라고 주님에게 요구하려면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고 모욕을 이겨내고 자존심의 방해도 이겨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오직 주님의 믿음으로 무장할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소원을 이루게 할 겁니다. 믿음은 가장 위급할수록, 믿을이가 없을 때 더 힘을 발휘합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그래서 네 소원을 이룰 것이다. 마침내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항복하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크도다하고 복 주신 겁니다. 이와 같은 멋진 믿음의 보상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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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모욕을 견뎌야만 했던 여자의 믿음이 정말로 대단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험하심이 조금 너무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정성"이라는 것이 진짜 일 때, 기적 같은 일은 현실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럴 때면, 저는 유행가 "말하는대로" 같은 노래가 떠오르곤 합니다. 우리의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되는데, 결국 자신이 말하는대로, 써놓은대로 가치관이 형성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의사 선생님은 하루에 다섯 가지라도 감사한 일들을 기록하고, 한 달만 연습해도 긍정의 가치관이 자리잡을 수 있다고 책으로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비법은 힘든 날을 보낼 때에 큰 위로가 됩니다. 맛있는 식사가 있어서, 커피를 음미할 수 있어서, 영화를 볼 수 있어서, 글을 남길 수 있어서,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어서, 오늘 하루는 사실은 특별한 하루였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설교를 생각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것이, "간절함 그리고 믿음" 이라고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돌아봅니다. 감사 기도 대신에, 배부른 돼지나 짐승처럼 현실에 안주해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제일 먼저 뼈아프게 진실로 반성합니다. 권력에 빌붙어서 쾌락을 즐겨왔던 인간들이 줄줄이 잡혀들어 가는 것을 보면서, 정의가 무엇인지도 생각합니다. 손바닥으로 결코 하늘을 가릴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삶이 투명빛깔 시원하고 청명한 모습을 닮아가기를. / 2016. 1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