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고향에서 배척을 받다(마가복음6: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11. 17. 03:14

 

고향에서 배척을 받다 (마가복음6:1-)

 

우리는 대한예수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교주는 예수님입니다. 하나님교라고 하지 않고 예수교라고 한 걸 보면 예수님이 우리 인류에게 미친 영향력이 심대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떠올리 때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 들었고 이적이 일어났고 그래서 예수님은 오히려 사람들을 피해서 다닐 정도였다는게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의 사역 중에서 항상 승리하고 성공하기만 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예수님도 사역 중에 실패를 경험하신 일이 참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님의 흑역사는 예수님이 자기 고향에서 배척을 받은 겁니다. 그것도 무려 두 번씩이나 배척받으셨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예수께서 2차 갈릴리 사역기간 중입니다. 이때 주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고향을 방문하셨는데 여기에서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지 무려 2년이나 지난 시점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고향방문은 누가복음4장에 나오는 사건과는 별개입니다. 그때는 사역초기였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사역을 처음 시작할 때라 아직 예수님에 대해서 사람들이 잘 모를 수 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다른 곳에서는 매우 유명해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좇았고 그의 기적과 명성이 갈릴리를 넘어 유대와 광야가지 널러 퍼지고 있던 때입니다. 본문의 고향방문 때는 이미 제자단이 완성되었고 나사렛으로도 이들과 함께 가셨습니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도 고향에서는 여전히 배척을 받은 것입니다.

 

2년 전 고향방문에서 예수님은 하마터면 사람들에게 살해당할 뻔했습니다. 마을 뒤의 낭떠러지에서 사람들이 예수를 밀어뜨리려고 했는데 겨우 사람들 사이를 헤쳐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고향은 배척의 장소이며 살인과 야만의 장소입니다. ‘그래도 고향인데 ’하는 개념으로 접근하면 골치 아픈 곳입니다. 우리의 오랜 낭만적인 생각인 ‘정겨운 고향’이니 ‘고향의 품’같은 것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가기가 싫어야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마저 예수를 인정하지 않고 그를 미쳤다고 비난하며 사역에 훼방을 놓습니다. 설교시간에 가서 ‘저 사람은 미친 사람이고 우리의 형제인데 헛소리니 절대로 믿지 마시오’라고 했다고 합시다. 주님에게 고향은 어떤 이미진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2년이 지난 후에 다시 고향을 방문하셨습니다.

 

고향에 특별히 정이 있어서는 아닙니다. 다만 나사렛도 갈릴리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갈릴리 사역기간입니다. 비록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주님은 자기의 사역지에서 나사렛을 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주로 회당에서 안식일에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날 회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회당장의 허락을 얻어 말씀을 가르친 것입니다. 여기서도 변함없이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듣고 놀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 됨이뇨”

 

유대의 회당은 회당장의 허락만 있으면 누구라도 그곳에서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공간이었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아니어도 누구라고 말씀을 가르치겠다고 신청하면 기본적인 학식만 있다면 가르치는 것이 가능한 곳입니다. 물론 정기적으로 그 회당에서 강좌를 개설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냥 이번주에 내가 특별히 뭔가를 가르치겠다고 하고 그 말씀을 신청하면 양피지 율법서를 가져다 주고 그럼 그걸 읽고 해석이나 관련된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가지 우리들이 회당을 교회당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회당에는 행정업무를 위하여 평신도인 회당장이 세명 정도 있었지 목사나 제사장같은 성직자가 상주하는 곳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베드로도 바울도 이런 제도를 이용해서 복음을 전하는데 이 회당을 즐겨 사용하였습니다.

 

본문에서 ‘가르치시니’ 라는 말은 가르치기를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가르치기를 시작하자 그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이 놀라서 다 웅성거리며 이 굉장한 지혜에 놀랐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사렛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단순한 목수가 너무 유식해서 놀란 겁니다. 목수가 떠들어봐야 별게 있겠냐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가르침이 시작되자 사람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엄청나게 지혜롭고 또 권위가 있어서 놀랐다는 건데 글쎄요 사람들의 반응은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심지어 주님은 회당에서 손을 이용해서 많은 이적과 기사도 행했습니다. 가르침에 권위를 더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 됨이뇨”라고 떠든 겁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목수가, 자기들이 잘 아는 별 볼일 없는 집안의 아들이, 형제가 그렇게 지혜롭고 큰 권능을 행한다는 사실에 반감을 가집니다. 왜냐면 그가 제사장의 집안도 왕가나 귀족의 가문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이나 그리스 로마의 유명한 대학을 나오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오히려 그에게 경도되지 않았습니다. 그들 뇌리 속에 있는 예수님 집안에 대한 무시가 그들의 마음을 닫게 만든 겁니다. 그들의 목수에 대한 편견이 심령을 강퍅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지만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라는 말만 합니다.

 

실제로 지혜라는 말은 ‘소피아’입니다. 권능이라는 말은 ‘뒤나미스’입니다. 그런데 이 두말 안에는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의 힘’이란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예수가 행하는 가르침과 권능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자기들이 잘 아는 ,하찮게 생각하던 목수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척하는 것입니다. 알면서도 모른척하면서 그냥 기이하다는 소리만 하는 겁니다. 인간이 이렇게 사악합니다.

 

인간들은 끊임없이 상대방을 폄하하기 바쁩니다. 어떻게 하면 그를 자기 끌어내리고 자기를 존대하게 여길까를 생각하며 상대의 다름마저 이용합니다. 그러니까 저 사람과 내가 다른점을 가지고 비교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단지 다를 뿐인데도 그걸 생각지 않고 그걸 나쁘다, 열등하다는 쪽으로 생각합니다. 이걸 자존자대라고 합니까?

 

이들이 예수를 배척한 이유가 여기에 나와 있습니다. “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쳑한지라”

 

유대인들은 예수를 일러 ‘요셉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아마 당시에 요셉은 이미 사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의 관습상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의 권위를 떨어뜨리려는 의도적 표현입니다. 당시의 관습상 ‘아무개는 아무 어머니의 아들이다’라고 하는 표현은 특별히 상대를 모욕하려고 할 때 만 쓰는 아주 좋지 못한 말입니다.

 

제가 유대인들을 보니까 우리나라 사람하고 너무 비슷합니다. 무슨 형제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는 행태가 똑같지요? 우리도 항상 그런 식입니다.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잘되면 시기하고 질투하고 끄집어 내리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게 안되면 험담을 하고 외면합니다. 아는 사람이 잘되면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대합니다. 질투심 시기심 때문이지요. 기가 찰만큼 악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근성이 우리나 유대인이나 너무 비슷합니다.

 

‘우리가운데서 저런 위대한 선지자가 나다니 정말 굉장하다’ ‘마리아가 아버지도 없이 자식을 키우느라 정말 수고 많았다’ ‘어떻게 저렇게 잘 자랄 수가 있을까?’ ‘우리도 할 수 있다 이 나사렛에서도 위인이 날 수 있어’ 이럴 수는 없는 겁니까?

 

원래부터 부자고 원래부터 귀족이고 원래부터 권세있는 자만 남들 위에 군림하고 존귀해 질 수 있는 자격을 가졌다고 생각합니까? 그게 아니라 저 자리에 있는게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내 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샘이 나는 것 아닙니까? 질투가 나서 일부러 깎아내리는게 아닙니까?

 

예수께서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원래 당시 유대인들이 자주 사용되던 격언입니다. 선지자는 미리 말하는 자, 앞서 말하는 자라는 뜻이 있지요.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역사를 미리 말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런 거룩한 자가 되기에 자기들이 너무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격언을 잘 풀이하면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보다 친숙한 사람들에게 존경받기가 더 어렵다는 말이 됩니다. 너무 잘 알아서 너무 친해서 존경을 하고 싶지가 않습니까? ‘지까짓게 선지자면 나는 선지자 할애비다’ 이렇게 됩니까?

 

원래 유대에서는 손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특별히 무시하거나 비하하지 않고 오히려 기술자를 존중했다고 합니다. 요즘말로 하면 육체노동, 땀흘려 노동하는 것의 신성함을 믿은 겁니다. 그러나 그리스 로마의 사고방식이 들어오면서 손으로 펜대나 놀리고 머리를 쓰는 직업을 존중하고 대신에 육체적인 노동을 비천하게 여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원래 목수는 유대에서 중류층의 직업이었다는 논문도 있습니다. 소수의 지주와 다수의 소작농, 그리고 소작도 없어서 품삯으로 생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목수는 나름 자영업입니다. 천시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로마의 풍속에 젖은 나사렛 사람들은 목수를 비하하는 겁니다.

 

사실 나사렛 사람들은 목수라는 것으로 트집을 잡았는데 나사렛이란 동네도 사실은 문제가 있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할 때 예수가 나사렛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자 말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라고 말합니다. 그건 나사렛이란 동네가 당시에 로마군의 주둔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로마군대가 주둔하고 있다고 해서 여기에 온갖 부정적인 이미지들을 다 결부시킵니다. 그러니까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졌던 미군의 기지촌이라고 부르면서 가졌던 이미지가 결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선지자도 좀 그럴듯한 동네 출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뭐 우리가 성경적으로 거룩한 도시라고 생각하는 예루살렘, 베들레헴, 벧엘, 브엘세바같은 도시들. 우리로 치면 경상도 안동이나 전라도 전주 또는 나주 이런 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면 ‘아, 전통적인 양반동네에서 태어났구나! 행동거지도 어쩜 저렇게 반듯하고 사람이 기품이 있을까!’이렇게 생각하는 것하고 같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그 동네 사람들을 뭐라고 해도 그 동네 사람들 스스로는 자기가 사는 동네를 부끄러워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사는 이런 동네에 거룩한 하나님의 선지자가 난다는게 말도 안된다’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비하한다면 이는 참으로 불쌍한 일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존귀히 여기지 않고 스스로를 비하하고 기가 죽어 있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자기도 자기를 우습게 여기는데 다른 사람이라고 존귀히 여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짓이 나서 상대를 우습게 여기고 비웃을 겁니다. 마치 그게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의견인양 나발을 불겁니다. 그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나사렛 사람들은 목수라는 것을 트집 잡고 또 스스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는 항간의 평가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자기 고장 출신인 예수를 부인하는 겁니다.

 

나사렛에서 난 자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가 되면 안됩니까? 목수의 아들이 메시야가 되면 안됩니까? 그들이 귀로 듣는 그 놀라운 지혜, 눈으로 보는 그 놀라운 권능과 기적을 그들은 단지 자기네의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부인합니다. 하물며 가족들까지 주님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다른 이들은 일러 무얼 하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사람의 편견은 얼마나 무서운지요? 사람의 고정관념은 도저히 깨트릴 수가 없습니다. 우스개 소리로 심지어 예수님도 그걸 깨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말 다한 겁니다.

 

‘저나 내나 똑같은데 누가 누구 죄를 책망하고 거룩한 척을 하고 있어? 재수 없어, 에이 기분 나빠’ 그런 마음을 깨트리지 못하고 주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답니다.

 

사람들이 불신하니까 주님은 여기서 권능을 크게 나타내시지 않았습니다. 단지 몇몇에게만 안수하여 병을 고치고 말았답니다. 그래요, 우리 영적인 사람들은 영적인 것이 아주 크게 좌우합니다. 사람들의 믿음 없음이 결과적으로 이적이 일어나기 힘든 원인이 됩니다. 반대로 생각한다면 주님의 능력을 크게 맛보고 싶으면 굳게 믿어야 합니다. 적어도 눈으로 본 것은 믿어야 합니다.

 

진실에 눈감고 아집과 편견으로 버티는 자들에게 돌아갈 기적은 없습니다. 6절에 이상히 여기셨더라 는 말은 자기를 믿지 않아서 놀라고 당황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안타까워했다는 말입니다. 왜냐면 그 불신의 결과를 주께서는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고 말씀을 맺습니다. 원래 우리가 합리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문장은 ‘이에 예수께서 전도여행을 중단하시고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쉬셨다’ 또는 ‘기도하셨다’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앞에서 고향에서 배척을 받은 것에 힘이 빠져서 그렇게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게 이치에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면서 가르쳤답니다. 그러니까 ‘전했다’가 아니라 ‘가르쳤다’입니다. 고향사람들의 배척에도 전혀 실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전도여행을 한 겁니다. 회당순례 전도여행?

 

원문을 자세히 살피면 ‘모든 촌’에 다 다니신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는 ‘그 마을들’에 다니신 겁니다. 그리고 전한게 아니라 가르쳤다입니다. 아마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계속 하신 것 같습니다. 다른 고장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잘 먹혔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주님의 그 가르침에 감동하고 설복되고 믿음을 확고히 하고 그래서 치유받고 새롭게 되고 영광을 돌리게 되었는데 나사렛 사람들만 주님을 배척한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정말 다른 마을사람들에 비해서 이상한 종자거나 아니라면 목수의 아들이기 때문에, 너무 친숙하기 때문에 오히려 주를 배척한 겁니다.

 

그래서 복음이 멋있는 겁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베들레헴에서 나신 분이시지만 우여곡절 끝에 나사렛에 정착하게 되었고 이게 주님의 발목을 잡습니다. 다윗의 후손에 베들레헴 태생이라면 이야기가 달라 졌을 겁니다. 제사장이나 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달라 졌을 겁니다.

 

그러나 그래서 더 멋있습니다. 낮은 곳으로 오신 주님이기때문에 그래서 모든 이들에게 희망의 구주가 되시는 겁니다. 높은 곳에서 나셔서 높은 곳으로만 다니셨다면 그는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지만 낮은 곳에 나셔서 낮은 이들과 교제하고 함께 울고 웃으셨기에 그는 모든 인류의 구세주가 된 것입니다.

 

혹시라도 우리 마음에 편견과 아집이 있다면 버리세요. 혹여 그것을 버리지 못하여 진정한 진리를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아직 고정관념에 사로 잡혀 있다면 우리의 마음을 열고 한번 사고를 유연하게 만들어 보세요. 하나님의 진리에 있어서는 고집불통으로 지키고 따라야 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것에 목숨을 건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오신 주님을 배척하고 핍박함으로 정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자기네들의 인식으로 고향사람이 잘나서 남의 고장만 잘되게 해주고 자기들은 오히려 자기혐오와 비하에 빠져서 구세주를 영접하지 못하고 바깥 어두운 곳에서 쓸쓸히 이를 갈며 울게 되지 않았습니까?

 

다른 곳과는 달리 주께서는 믿음 없는 그들에게 큰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고 아주 작은 기적만 베푸셨습니다. 그것도 몇몇에게만.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네들 손해입니다. ‘나는 죽어도 그를 구주로 인정할 수 없어’하며 토시고 앉아서 배척한다고 해서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만 바깥 어두운 곳으로 소외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가 반대한다고 해서 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반대한다고 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최후의 심판때 하나님의 날에 이쪽이 아니라 저쪽에 서서 후회하고 항변해봐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때 “하나님이시여 구세주를 보내시려면서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보내면 반칙아닙니까? 저도 예루살렘이나 베들레헴에서 나셨다면 , 제사장이나 학자의집안에서 났다면 믿었을 겁니다.” 그렇게 항변하면 먹히겠습니까?

 

큰일을 하려고 하면 때로 마음을 열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대적하고 싸우고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함께하고 화해하고 더불어 가는 것도 필요합니다. 사탄의 세력과 싸우고 불의와 대적해야지 이거는 작은 기호의 문제, 습관의 문제로 싸우고 대적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가끔 보면 진리에 있어, 중요한 것에 있어 원칙을 잘 바꿉니다. 그게 사실 돈이 되기 때문이지요. 솔직히 법을 어기면 확실히 돈이 됩니다. 그런데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닌 것, 곁가지에 불과한 것에는 집착하며 목숨을 걸 듯이 버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걸 우리는 아집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지혜가 그의 권위가 그가 손으로 행하는 그 권능이 놀라운 것이라면 진심으로 감복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됩니다. 그런데 그게 안되는 것은 내가 쟤보다 못한게 뭐고 이렇게 되어서 그런 겁니다.

 

저는 충분히 그 마음을 이해합니다. 저도 못난 사람이기 때문에 이해가 바로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너무 슬퍼하고 분해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충실히 나아간다면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 질겁니다. 그러므로 남을 투기하거나 질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한 하나님에게서 난 형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근본적인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 저 사람이 잘되는 것에 내가 그렇게 질시하며 분해 할까요? 그것은 저 사람의 성공이, 저 사람이 잘되는 것이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과 내가 운명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중요합니다. 교회는 운명공동체입니다. 저 사람의 성공이 나에게도 기쁘게 작용해야 합니다. 하다 못해 밥이라도 한끼 대접받고 취직자리라도 부탁할 수 있어야 하고 어려울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내가 저 사람의 출세와 성공에 분내거나 성낼 필요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성내고 질시하고 분노하는 겁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어떤 교수님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절대로 여러분은 교회에서 취직자리 알아봐 주지 말고 결혼자리 알아봐 주지 말고 하나님만 전해라” 상당히 그럴듯한 말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우리는 공동체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는 부유하고 너는 가난하고 할 때 전혀 이게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 곳은 절대로 교회가 아닙니다. 한자리에 앉아서 다른 곳을 바라본다면 그건 하나님의 형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에게는 이자를 받지 말고 꾸어주라고 까지 말씀하셨지요. 형제를 종으로 삼았어도 희년이 되면 그를 풀어주라고 하셨지요. 그 형제의 기업을 샀다고 하더라도 희년이 되면 공짜로 도로 돌려주라고 하셨지요. 그게 바로 운명공동체, 교회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혹시라도 이것을 기회로 사기를 칠까봐 두렵기는 한데 원래 하나님의 공동체는 그런 곳입니다. 그러니 형제가 잘되면 나에게 좋은데 내가 질시하며 그를 깎아 내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곳입니다. 서로 서로 위로하며 사랑하고 돕고 섬기는 곳입니다. 그래서 남이 잘되면 내가 잘되는 것 만큼 기뻐야 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저 사람의 잘됨으로 나를 섬길 거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한 운명공동체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물리적인 교회, 물리적인 건물이나 시설들은 결코 사람의 마음을 다 담아 내지 못합니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우리가 같이 앉아서 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맞지만 너하고 나하고는 위치가 틀려’하고 생각한다면 그건 그 사람도 잘못된 것이고 그 교회도 잘못 된 것입니다. 그건 교회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항상 자기와 다른 것을 찾아서 차별하려합니다. 그것은 그가 추구하는 욕심이 충족되지 못할까봐 두려워서 그런겁니다. 어차피 좋은 것은 희귀하기 때문에 그걸 우리만 가지려고 끈임없이 차별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패거리를 이루고 그 속에서 안정감을 누립니다. 그러나 그 패거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지옥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하고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하고 자기의 욕망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욕심도 버리고 성냄도 버리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사는 삶을 나옹화상이 꿈꾸었지만 일반인들이 욕심과 성냄을 버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교회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한대로 공급하실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부족함이나 모자람이 없다는 사실이 사람들의 욕심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그냥 줄을 서도 지금 나누어 주는 빵이 떨어지지 않고 나에게 주어진다는 확신이 있다면 굳이 새치기를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빨리 받으려고 새치기를 한다고요?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결국 시간이 문제지 받게 된다는 확신이 생기면 남들의 구설에 오르고 눈총을 받는 그리고 자기가 배운 가치관과 교육에 위배되는 무질서가 덜하게 될 것은 당연합니다.

 

제가 예전에 군에서 훈련받을 때 배식조였습니다. 식당에서 국을 퍼다가 백킬로 행군에 참여했는데 배식조였다는 이유로 그곳에서도 우유를 나누어 주는 일을 맡았습니다. 원래 배식조는 행군에 참여하지 않아도 됩니다. 밥을 해야 하니까. 그런데 저도 군에 와서 행군을 한번 해보고 싶어서 배식조를 그만두고 행군에 지원한 겁니다. 그래서 야외에서까지 배식을 할 의무가 당연히 없어야 되는데 군대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집단이다 보니까 피곤한 몸을 쉬지도 못하고 우유를 나누어 줍니다.

 

그런데 나누어 주다 보니까 제가 먹을 우유가 없어 졌습니다. 남는게 없어요. 그래서 목이 말라서 멍하니 있으니까 옆에서 배식조 동기 훈련생 한명이 ‘형 그런식으로 하면 자기 먹을게 없어져요 그래서 여기 한 개 빼돌려 둔게 있어요’ 하면서 줍디다. 그래서 먹기는 먹었지요. 그 친구가 빼돌렸기 때문에 제몫의 우유가 없어진 건지 아니면 훈련병들 중에 두 개를 받은 친구가 있어서 모자란 건지 모르겠습니다. 한 몇 개가 모자랍니다. 그런데 일단 그런 경험을 하면 어떻게 될까요? 다음부터는 자기 것부터 먼저 챙기게 됩니다. 남이야 모르겠고.

 

어때요? 그래서 원칙을 지키는게 그렇게나 중요해 지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자기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다같이 잘사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고 나만 살려고 하면 한두번은 몰라도 사람들 사이에 학습효과가 생겨서 자기 혼자서만 잘살고 잘먹게 되기가 어렵게 되고 결국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게 바로 지옥이지요.

 

예수님이 고향에서 배척받은 기사에서 이런 결론이 나오는게 너무 뜬금없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굳건한 공동체 의식이 있어서 저 사람의 잘됨이 내가 잘되는 첩경이라고 생각되어 진다면 결코 그 사람을 질시하거나 깎아 내릴 필요가 없어 지는 겁니다. 감정적으로 싫어지는 것도 결국은 자신에게 어떠한 이익도 돌아 오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다른 갈릴리 지역에서 성공리에 진행되고 있고 예수님이 더 유명해 지면 질수록 갈릴리와 나사렛에 숙명처럼 부여된 이방의 갈릴리니 나사렛에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니 같은 불명예스런 딱지가 떨어지고 더 이상 나사렛 출신이라고 무시 당하는 경우가 없게 된다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예수님이 더 유명해 지도록 더 열렬히 주님을 지지하고 따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불어 함께가 중요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실 이러한 원리를 가장 잘 아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세우려는 공동체가 바로 이런 원리를 실천하려는 목적을 가졌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런 높은 뜻을 알지 못하고 이제까지의 잘못된 관념과 관습에 얽매여서 예수를 배척하고 박대한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을 감정의 동물이라고 합니다. 어떤때는 저 사람이 주는 것 없이 싫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눈에서 편견이라고 하는 안경을 벗어내더라도 이러한 마음이 계속되면 건전한 사회통합이 저해되고 건전한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세워지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때는 사람들의 죄성을 벗겨내는 일이 중요합니다. 어둠에 너무 오랫동안 젖어서 부정적이며 비관적인 그리고 왜곡된 시각이 당연하게 인식되어진 그동안의 통습을 벗겨 내어야 합니다. 네 형제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바로 해답이 있습니다. 뭔가 나와 비슷한 점을 찾고 그걸 접점으로 삼아 교류를 늘리고 그러면서 친해지고 나누고 그리고 한 공동체를 이루고 그렇게 그렇게 나가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이런 숭고한 사랑은 쉽게 실천될 수가 없습니다. 실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될 겁니다. 주님은 전혀 실망치 않고 계속해서 전도여행을 회당순례를 계속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비록 어려워도 실망치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와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모이고 건전하고 멋진 공동체가 형성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를 좇아 한마음으로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


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


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남들이 나를 알아봐 주기를 원한다. 우리는 왠지 그런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도 겉으로는 무명블로그를 추구한다고 줄곧 이야기 하면서도, 속으로는 방문자숫자가 많으면 내심 즐거워 합니다. 이 한 편의 설교는 저에게 위로가 되어줍니다. 살다보면 좋은 날도 오기 마련이니까, 계속 선하게 살도록 노력하렴. 예수님처럼. 그렇게 요약될 수 있겠지요.

 

아니, 예수님처럼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데요. 맞습니다. 그래도, 노력은 할 수 있잖아요. "나는 왜 그렇게 매일이 한심한 걸까," 자기를 해치는, 그 무엇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말들은 이제 그만두고, 열심히 살아가도록 마음을 바꾸고, 말을 바꾸고, 행동까지 바꿔보아요. 자신을 돌아보면서 실망해도, 다시 또 일어서고, 내 마음 속의 소망을 따라 정직하고 열심히 살아간다면 정말로 좋은 날이 올 것이라 확신합니다. 혹여 지금 힘든 시기라 하더라도 꼭 이겨낼 수 있기를 응원하며... / 2016. 1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