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음란을 버리고 (데살로니가전서4:1-)
추석을 잘 보내셨습니까? 식구들이 멀리서부터 오고 음식을 하고 용돈도 주고 또 받기도 하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친척들도 만나고 정담도 나누고 바쁘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며 때로는 몸이 분주하고 그래서 힘들기도 하고 이제 추석연휴의 마지막 날입니다. 내일부터는 또 세상으로 흩어져서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해외여행을 다녀오신 분도 계시겠지요? 이분들은 국내에 남아서 추석에 친척들끼리 모이고 전통적인 추석명절을 쐬는 분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만일 모든 사람들에게 추석이 어떤 특별한 의미가 아니라 단지 쉬는 날이 된다면 나라나 기업이 사람들에게 더 이상 추석연휴나 추석 상여금을 제공할 리가 없습니다. 한때 우리나라 기업주들이 정부당국자들과 만나서 한국 근로자들이 휴일이 너무 많다고 불평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족이 모이지 않고 혼자서 지내는 추석으로 추석풍속이 바뀐다면 더 이상 추석연휴도 없어질 겁니다.
지금 추석연휴가 있는 것은 고향에 가고 오고 하는데 하루씩이 걸리니까 삼일을 지정해 준겁니다. 그런데 고향에 갈 필요가 없어지면 더 이상 추석연휴가 삼일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처음에는 이틀로 그리고 하루로 결국은 쉬는 날에서 제외될 겁니다.
얼마전까지 지켜졌고 그렇지만 공휴일은 아니었던 한식, 단오, 동지, 정월대보름 같은 날들이 지금은 거의 모양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고단한 일상을 떠나서 고향에서 부모님을 만나지도 친척들을 만나지도 어릴 때의 친구들을 만나지도 쉼을 얻지도 못하고 ‘옛날에는...’ 이라고 옛날 타령만 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있을 때 잘해야 하는 겁니다.
우리가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 뵙는 것은 사실은 부모님에 대한 가장 큰 효도입니다. 뭐니뭐니해도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게 가장 큰 효도라고 그게 안되면 일년에 적어도 네 번은 부모님을 찾아 뵈어야 합니다. 너무 적습니까? 그래서 ‘적어도’입니다. 최대한이 아니고. 설, 추석, 부모님의 생신 때. 이 정도는 지킬 수 있겠지요?
추석이나 설에 부모님은 그래도 그때만은 자녀들이 올 줄로 기대합니다. 그러다가 자녀들이 일이 생겨서 이런저런 사정으로 못 온다는 연락을 하면 정말 슬퍼합니다. 그리고 웬만하면 당일치기 말고 하룻밤은 본가에서 잡시다. 물론 처가에서도 하루 잡시다. 너무 힘들어요? 우리끼리의 시간이 없어요? 예, 맞습니다. 그러나 그게 추석이 없어지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명절이 싫어서 시댁에 가지 않으려고 일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들에게도 추석이 있기에 근무수당이 나오쟎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추석이 없어지는 것보다 있는게 훨씬 좋습니다. 제 처남이 베트남에서 일하는데 그곳도 옛날에는 추석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에게는 설만 남았습니다. 당연히 추석에는 쉬지 않습니다. 다만 유치원에서 민속옷을 입는 기념식이 있더라고요.
자녀들이 있음에도 특별한 사유가 없이 못 온다는 연락을 받는다면 힘이 쭉빠지는 거지요. 추석연휴에 자살한 노부부 기사가 있던데 아마 그런 면도 영향을 좀 주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추석에 서로 칼부림한 기사도 많습니다. 제가 잘 알고요 그러나 제도를 우리에게 맞게 적용하는 것은 인간입니다. 그래서 지금처럼 추석을 너무 자기위주로만 생각하면 나중에는 아예 추석연휴가 없어 질 겁니다.
분명한 것은 이기적인 사람들이 모인 사회는 곧 인세의 지옥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남도 배려해야 하고 그래서 있을 때 잘해야 합니다. 지금은 추석에 고향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서 연휴가 남아 있는 거지 홀로 여행이나 가는 사람들이 다수가 되면 아마 연휴가 없어 질 겁니다.
자,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야 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목회 서신입니다. 옛날 성경에는 처음 “종말로 형제들아”라고 되어 있어서 말세 얘긴줄 알았는데 이번에 바꾸었습니다. 제대로 “그러므로 형제들아”라고. 잘한 겁니다.
원래 이 말에서 ‘종말’이란 뜻은 없었습니다. 그냥 편지에 적다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적는 것을 ‘종말로’ 라고 번역해서 사람들을 오도한 겁니다.
바울은 앞부분에서는 디모데의 보고를 받고 데살로니가 교회가 참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칭찬합니다. 그래놓고는 ‘그런데 내가 마지막으로 말할게 있다’ 이런 식으로 적은 겁니다. 아마 데살로니가 교회가 조금 더 잘해야 할 점이 못내 마음에 남았던 모양입니다. 아쉬움 같은 것입니다. 책망이라기보다 조금 더 잘하면 좋겠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오랜 교회가 아니고 이제 막 신앙이 들어간 자들이기 때문에 가르쳐야 할게 있었던 모양입니다.
참고로 데살로니가는 그리스 제2의 도시이고 무역항입니다. 원래 데살로니가는 알렉산더가 자기 아내의 이름을 따서 만든 도시이지만 바울이 편지를 쓸 당시에는 로마의 속령이 되어있었고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아 속주의 수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 로마문화권에 있습니다. 이 도시는 대부분의 로마도시들이 그렇듯이 매우 음탕하고 방탕한 곳이었습니다.
1절에 보면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는 말은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방법에 대해서 우리가 이전부터 이야기를 했고 그래서 너희가 지금 그렇게 행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결코 새롭게 뭔가를 얘기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방법을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아니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실천이 안될 뿐이지. 그래서 다시 강조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권면이나 설득이 아닙니다. 제안도 아닙니다. ‘이렇게 한번 해 보는게 어때’가 아닙니다.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그래요, 지금부터 하는 말은 주 예수의 명령이고 그것을 너희도 다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이땅의 우리 역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을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의 죄악된 본성이 계속해서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고 우리가 거룩하게 사는 것을 방해합니다.
자, 그러면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거룩한 삶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여기서 ‘뜻’은 ‘소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가 거룩해 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출세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위해 큰 공을 세우고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위해 큰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소원이 아니라 우리가 거룩해 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지는 소원이랍니다. 우리 이번에 하나님의 소원을 확실하게 이루어 드립시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제가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 드렸으므로 우리의 소원도 이루어 달라고 요청합시다. 어때요? 서로 소원 한개씩 들어주기.
거룩함을 뜻하는 말은 ‘성화’입니다. 보다 더 정확하게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께 봉헌된 결과로 이루어진 성결, 그러니까 하나님께 바친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별하듯이 하나님에게 바쳐진 우리 성도들은 거룩한 몸으로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사실 거룩하지 않습니다. 성별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삶속에서 거룩한 삶을 계속적으로 삶으로써 거룩해 지는 성화된 삶을 위해서 날마다 힘쓰고 애쓰며 나아가야 합니다. 성도는 거룩한 무리이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거룩해 져야 하기 때문에 성도입니다.
이제 구체적인 실천사항이 나옵니다. 어떻게 하면 거룩하다고 하는 삶을 살 수 있는지 나오는데 첫 번째가 “음란을 버리고”
여기서 ‘버리고’는 ‘스스로 삼가고’란 뜻입니다. 그리고 이 음란은 우리가 이제까지 말해온 우상숭배를 말하는게 아니고 육체의 정욕에서 나오는 음란입니다.
사람들이 무지막지 좋아하고 잘 끊지 못하는 것. 죄에 대해서 인이 박힌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약이나 술 담배가 주로 그렇쟎아요. 마찬가지로 죄악도 인이 박힙니다. 우리 몸이 죄성이 주는 쾌락을 기억합니다. 이걸 하지 못하면 금단현상이 일어 납니다.
이걸 스스로 삼가라는 말입니다. 이게 우리가 거룩한 생활을 하기 위한 첫 번째 행해야 할 실천사항입니다. 그리고 ‘음란’을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면 ‘모든 형태의 성적 방종’을 말합니다. 이 음란이란 단어가 바로 영어 ‘포르노’의 어원이 됩니다.
그런데 이게 하나님의 소원하는 바 우리의 거룩한 삶에서 첫 번째가 된다니 너무 이상합니다. 아무래도 하나님에게 거룩은 우상을 섬기지 않고 자기를 섬기는 것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음란을 버리라니 이상합니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풍조와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 그리스 로마 사회는 성적범죄에 대해서 크게 문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요즘하고 비슷합니다. 공중목욕탕에 창녀가 있었다니 말 다한 겁니다. 요즘도 우리나라에서 음란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의염치는 다 헛소리가 되었습니다. 오죽하면 간통죄까지 폐지하고 합법적으로 간통을 보호하겠습니까? 뿐만아니라 성추행은 엄청나게 광범위하게 벌어 집니다. 이거 나라전체가 좀 이상합니다. 바로 이런 사회풍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삶을 위한 첫 번째 목표가 바로 음란을 삼가라는 것이 된 것입니다.
감히 단언하건데 오늘 이 땅의 우리 성도들, 거룩한 무리들에게 있어 가장 첫 번째가 바로 간통금지입니다. 배우자가 있는 분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간통을 해서는 안됩니다. 참고로 이혼도 간통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간음의 연고 외에 이혼하면 안되고 이혼한 여인과 재혼하는 것 역시 간음이 됩니다. 물론 서로 신앙이 다르면 이혼할 수 있고 목숨이 위험할 때는 당연히 이혼하는 것이지요.
당시 그리스 로마사회에서 성욕을 절제하는 것은 오히려 부자연스런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우리나라의 연예인들이 한동안 성적 문제로 매우 시끄러웠습니다만 이것이 특별히 그들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네 일상입니다.
당시 로마는 이 성적음란 때문에 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간음문제가 심각했지만 위정자도 국민들도 아무도 그걸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죽했으면 로마가 망할 때 집집마다 성병환자가 없는 집이 없었고 성적타락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까지 말했겠습니까?
우리나라에도 요즘 에이즈가 십대 이십대를 배경으로 급속하게 증가한답니다. 이건 사회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은데 동성애가 급격하게 퍼지기 때문에 에이즈가 급격히 증가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에이즈와 동성애는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에이즈 환자를 보호하려고 그러는지 동성애를 옹호하려고 그러는지 언론에서는 이를 부인하는 경우가 많은데 각종 조사에서 이는 뚜렷하게 드러난 일입니다.
가끔가다 아주 적은 비중으로 이런 결과가 언론에 나오기도 하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결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사회의 약자를 보호해야 된다고 해서 동성애자도 소수자라고 이들을 보호하려는 시도는 우리의 삶과 사회를 근본부터 무너뜨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인간은 불쌍히 여기되 그들의 죄악된 행위는 힘써 근절시켜야 합니다.
기독교를 표방하는 어떤 이들은 이러한 일을 하는데 이건 절대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결코 해서는 안되는 하나님의 가증히 여기시는 일입니다.
이러니 저러니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그냥 안하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똑똑하고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전지전능의 하나님보다 너 낫다고 생각지 않는다면 그의 명령을 따르면 됩니다. 그분의 명령은 우리를 괴롭게 하거나 우리를 힘들게 하려고 함이 아니요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하려고 하심입니다.
또 당시 그리스의 미의 여신 비너스, 아프로디테의 신전에서는 공식적으로 신전 창기들이 있었고 비너스를 제사하는 신도들은 이들 창기들과 성관계를 가졌습니다. 다산의 의미가 있었답니다. 신에게 독실할수록 더 많은 관계를 가지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교회안에 들어온 사람들 역시 세상의 때를 완전히 벗지 못하고 음행을 일삼았기 때문에 음란을 제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살 수 있는 첫 번째 사항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무신론 사회였다면 첫 번째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되었겠지요.
구체적으로 봅시다.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그런데 원문에는 ‘아내’란 말이 없습니다. 아내가 아니라 ‘그릇’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만 베드로전서3:7에 보면 ‘아내는 더 연약한 그릇이다’라고 하기 때문에 그릇을 아내로 번역한 것입니다.
여기 원문의 뜻을 정확히 살펴보면 그릇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고 또 ‘영혼을 담는 몸’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은 아내가 아니라 ‘자기 몸’이라고 번역한 곳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몸을 취할 줄을 알고” 다른 죄는 다 몸밖에 짓는 죄이지만 음행은 자기 몸에 짓는 죄이기 때문에 이 말도 그럴듯합니다.
그러니까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 몸의 통제권을 정욕에 내어주지 말고 스스로 가지라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정욕을 이기고 자기 몸의 통제권을 가지고 거룩한 삶을 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번역해도 좋습니다.
‘거룩함’은 ‘도덕적인 성결’을 말하고 ‘존귀함’은 ‘객관적으로 고귀한 가치가 있는 것에 부여하는 영예와 존경’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전인 우리의 몸을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영예롭게 사용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결코 사탄이 우리의 몸을 지배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성도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계속해서 나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이방인들의 삶은 색욕으로 대표될 수 있는데 우리말로는 ‘색욕’이라고 한 단어로 쓰였지만 실제 원문에서는 두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즉 ‘성적 정욕’ 즉 인간의 본성으로는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성적 욕망과 또 다른 한 단어는 ‘ 인간본성에서 나오는 적극적인 악한 욕망’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색욕은 두단어로 실제로는 인간 내면에서 들끓는 그래서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성욕과 그 욕망이 외적으로 나타나는 저열한 욕망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성경에서 색욕이란 한 단어로 표시된 것이 실제로는 어마어마한 지옥불처럼 들끓는 정욕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인간 이성으로는 제어가 불가능하고 성령의 역사로만 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삶에서 이러한 색욕적인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기 때문에 전혀 문제시하고 있지 않지만 실제로 우리 성도들에게 이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자기 몸을 지배하지 못하고 주의 성령이 내 몸에 거하지 않고 사탄이 주는 정욕에 휘둘리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색욕자체가 성도가 아닌 세상 사람이라는 표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이방인은 이것을 죄로 여기지도 않으며 오히려 죄를 짓지 못하게 하면 분노가 폭발하여 남을 공격하고 해를 끼치게 됩니다.
왜냐면 이들 이방인들, 하나님이 없는 이들에게는 가치의 구분이 자기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에 있지 절대 선이이 악이니 하는 절대적인 구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쾌락과 즐거움을 주는 색욕을 못하게 한다면 그 자체로 악이 되고 그래서 아무 죄책감이 없이 공격하고 파괴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이것은 건전한 성욕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이 색욕은 남에게 필연적으로 해악을 끼치는 것이며 이것은 간통과 강간 수간 그리고 남색과 성추행과 온갖 변태 성욕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건전한 성욕을 사랑하는 남녀에게 주셨고 이것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적합한 것이며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과정에서 주어지는 보상이 바로 성적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제도적으로 보호하시는 것이 바로 결혼이라는 제도이며 가정이란 울타리를 쳐서 결혼한 부부를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6절에 나오네요.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해하다’란 말이 원문상으로는 ‘남의 것을 속여 빼앗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분수를 넘어서 해하다’란 바로 결혼관계를 넘어서 이루어지는 간통 즉 성관계를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중에서도 남의 아내를 넘보는 행위를 ‘해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형제를 해한다고 하지요? 그래서 결국 교회안에서 믿는 사람들끼리 간통을 저지르는 행위를 하나님이 엄금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믿지 않는 이들과의 간통도 당연히 금지 된 것입니다. 다만 형제에게 행하는 이런 악은 더 큰 해를 끼치고 더 교회를 피폐하게 만들게 되기에 더 엄금한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이러한 간통이 행해지는 것은 아마 사회의 음란한 풍속에 젖어든 신자들이 세속의 풍조를 따라서 행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들어온 이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의 성결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세속화를 주님이 그렇게나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세상풍조에 젖어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겨져야 합니다. 그래서 눈처럼 희어져야 합니다. 우리 역시 교회의 세속화를 경계해야 합니다.
교회라는 말을 우리 성경은 ‘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잘 아실 것입니다. ‘에클레시아’란 뜻은 ‘하나님이 세상 밖으로 불러 내었다’는 뜻입니다. 아마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아직 믿음의 연조가 깊지 못하여 세상풍조를 따라 이러한 성적 방종에 둔감했나 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음행이 상당히 심했나 봅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그러한 행위를 금하는 주 예수의 명령을 다시금 상기 시킬 필요가 있어서 여기에 언급한 것입니다.
왜 해서는 안됩니까? 악한 행동이니까. 맞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색욕을 좇지 말라 하셨으므로. 맞습니다.
그리고 여기 본문에서 나온 것처럼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신원하다’란 말은 ‘공의에 입각하여 원수를 갚아주다’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내를 빼앗긴 자, 남편을 빼앗긴 자를 위하여 복수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색욕을 좇아 남의 아내와 남편을 빼앗는 행위는 하나님의 복수를 불러 일으키는 불의한 일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간이 크다 해도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 일으켜서 그분으로부터 복수를 당하는 일을 저지르지는 않겠지요? 간통은 하나님의 교회가 성결되지 못하게 하는 첫 번째 악행이며 그 죄악에 대해서는 우리 하나님이 친히 보수하십니다.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끔찍한 일입니다.
세상법정은 아주 황당하게도 간통자를 보호하는 일들을 많이 행합니다. 뭐 구체적인 사례는 생략합니다. 예를 드는 것마저도 화가 납니다. 그러나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세상의 법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 그 사람의 억울함을 들으시고 친히 보수하신다는 것, 하나님의 징계에서 피할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과 복수를 피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은 이전에도 했었고 그동안 엄히 경계했으므로 몰랐다는 말은 안통합니다.
자, 하나님은 우리를 부정케 하려고 부른게 아니라 거룩케 하려고 부르셨습니다. 세상 밖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내실 때는 세상과는 구별되이 거룩하게 살라고 하는 하나님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세상 속에서 구별되이 교회를 구성했음에도 여전히 육체의 구태를 좇아 죄를 저지른다면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소원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적 순결을 저버리는 자는 하나님을 배신하는 행위가 됩니다.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사람들은 오늘날 이땅의 교회가 위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위기라고 진단하는 기준은 신도의 수가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인의 수가 주는게 위기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위기입니다. 우리가 영적 육적 순결을 유지하지 못하고 음행하고 교만하여 자행자지 하는 것이 위기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깨끗해 지고 세상과 구별되이 거룩해 진다면 지금당장이라도 하나님은 이땅의 교회를 부흥시키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 우리를 위기상황으로 내모는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지 못하면 우리는 성도라고 불릴 자경이 없습니다. 우리가 음란을 제하지 못하고 여기에 우리가 휘둘린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음행을 저지르고 간통을 저지른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배신하는 행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수하신다고 하십니다. 그가 애끓는 이들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들을 대신하여 복수하십니다. 그 누가 하나님의 복수의 손길에 떨지 않을 수 있습니까?
여러 가지 우리가 하나님앞에서 거룩한 성도로서의 삶을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단 한가지만 말합니다. 바로 음란을 제하여 버리는 것, 쉽게 말하면 간통을 저지르지 않는 것. 솔직히 말하면 아주 쉽습니다. 너무 쉽습니다. 세상의 법은 간통죄를 폐해서 더 이상 간통이 죄가 아니라고 궤변을 늘어 놓지만 이것은 세상의 법을 뛰어넘는 우리 하나님의 법에 분명한 죄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운데 음란을 제하고 우리가 하나님안에서 거룩해 져야 합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에 가장 필요했던 명령이 오늘 우리에게도 가장 필요한 계율이 되었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음란을 저지르는 것은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요 그렇게 되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버려 더 이상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실 것이요 더 이상 우리를 평안에 거하지 않게 하실 것이요 해를 입은 형제를 대신하여 복수하실 것입니다.
항상 우리 하나님의 지켜보심을 믿고 하나님앞에서 복된 삶을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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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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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한 줄 요약하면,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간통하지 말지니! 입니다. 그러고보면 십계명에도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는만큼 상당히 오래된 이야기이기도 하네요. 생각해보면 참 간단해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경고의 메시지가 있는 것도 우리가 행복하게 잘 살아가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단순하니까요.
헐리우드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에 보면, 강력한 마법일 수록, 경고문이 붙어 있거나,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무기이자 아이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우리가 거룩하게 살았는가? 거기에 자신있게 YES라고 이야기 한다면, 우리의 삶은 주님의 기쁨이 될 터이고, 자연스럽게 복받는 삶이 되지 않을까요. 삶은 단순한게 좋습니다. 죄 짓고 고뇌하고 방황하는 것보다는, 매일 마음을 다정하고 따뜻하게, 남을 깊이 헤아릴 수 있는 거룩한 성도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 2016. 1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