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은 마치 (마태복음13:44-)
천국에 관해서 궁금하신 분이 있습니까? 아니면 천국은 되었고 그냥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고 복받으면 그걸로 족합니까? 사실 요즘 사람들은 워낙 이 세상이 살기가 좋아서인지 천국에 별 관심이 없지만 주님 당시의 사람들은 천국에 대해서 정말 관심이 많았습니다. 더구나 우리 주님이 오신 것이 이 땅에 천국이 임하는 것과 일치하니까 천국이 뭔지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이란 것이 결국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더 정확하게는 이제부터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복된 소리가 되는 겁니다. 폭정과 학정에 시달리며 불의와 부패 때문에 힘들던 대다수 선량한 사람들이 더 이상 공포로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로 다스려짐을 받는 다는 사실은 정녕 복된 소식입니다.
사실 여기에 나오는 천국도 하늘나라에 있는 천국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 이뤄지는 천국이 아닐까요? 아닙니까? 그래요, 일단 이제부터 우리 본문을 한번 살펴보십시다.
그런데 주님은 천국에 대해서 명확하게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게 아니라 항상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천국에 관한 세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 비유는 4복음서 중에서 마태복음에만 나옵니다. 마태는 왜 이 비유에 집착했을까요?
1.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
먼저 주님은 천국을 비유하면서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답니다. 그런데 주님의 비유를 잘 보면 뭐가 좀 앞뒤가 안 맞습니다. 우리의 개념상 천국은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보화와 같아서는 안 되고 보화가 감춰진 밭과 같아야 됩니다. 그런데 천국을 밭이 아니라 보화에 비유합니다.
마치 밭에 감춰진 보화처럼 그렇게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팔레스틴에서도 조선과 마찬가지로 난리가 많았고 이때 밭에 보화를 감추는 일이 많았답니다. 가지고 도망가다가 잡히면 오히려 더 위험합니다. 보물을 가진 것이 죄라고 이걸 지킬 능력이 없는데 가지고 있다가 죽을 수 있기 때문에 그걸 밭에 숨기고 도망가는 겁니다. 난리가 끝나면 다시 돌아 오려고.
그리고 감추고 도망간 사람이 다시 찾으러 올 수 없어서 보화가 밭에 감춰진 채로 세월이 흘러서 종종 전혀 새로운 사람들이 뜻밖의 보물을 발견하는 이야기가 많이 퍼져 있었답니다.
여기서 보화라고 표현했다는 것은 먼저 천국이 매우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두 번째로 이 보화가 그냥 노출되어 있지 않고 밭에 깊숙이 파묻혀져 숨겨져 있다는 것은 천국이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천국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그 정확한 실체가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천국은 땅속 깊숙이 숨겨져 있는 것처럼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자기의 소유를 모두 다 팔아서 그 밭을 사는 것은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서도 차지할 만큼 천국이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밭을 산 사람은 그 밭에 파묻혀 있는 보화가 자기의 모든 재산보다 더 가치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밭을 산겁니다.
자,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의문에 빠질 수 있습니다. 천국이 좋기는 하지만 설마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할 만큼 좋을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가치가 있다 없다는 다른 이들은 모르고 그 보화를 발견한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 보화가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희생한 것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다. 실제로 이 사람이 가지고 싶은 것은 그 밭이 아니라 그 밭에 감추인 보화입니다. 만일 그 밭에 감추인 보화가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 밭의 주인은 돈을 받고 밭을 팔지 않을 겁니다. 당연하지요. 그러면 그 보화는 그 밭주인의 것이 될 겁니다. 그래서 그 보화를 소유하려는 이는 그 밭이 자기의 소유가 될 때까지 그 밭에 보화가 묻혀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게 할 것입니다.
천국은 그런 것일까요? 남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남들의 눈에는 그저 그런 밭에 불과하지만 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신비하고 은밀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 하면서도 그냥 지나칠 수 있습니다. 저 세상의 것을 저 천국의 가치를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를 따르고 세상에서 복받기를 원하며 모든 것이 세상에 한정된 사람에게 천국은 영원히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을 것입니다.
깊고 은밀한 중에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고 놀라운 신비를 체험하게 해 줍니다. 일단 그 신비를 체험하게 되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하나님에게 집중하게 만들고 세상보다 하늘의 가치를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되고 세상의 욕심을 내려놓게 만들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그 신비한 경험을 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은 직접적으로 소유하려고 한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다른 이들이 그 가치를 모를 때 내가 그걸 차지하기가 쉽습니다. 경쟁이 치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단 천국이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모든 이들이 알게 된다면 그 다음에는 천국에 들어가려고 난리가 날 겁니다.
다행하게도 우리는 천국이 엄청나게 좋은 것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천국을 위해서 다른 것들을 충분히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천국은 어느 때에 사람들이 가치를 확인할 수 있을까요? 그거야 세상 최후의 날 심판이 일어나고 사람이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고 난 다음에야 그 가치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냥 깨닫는게 아니라 뼈저리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2.천국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다
두 번째로 주님이 하신 천국에 관한 비유는 또 이상합니다. 그러니까 장사하는 사람과 같답니다. 첫 번째는 밭에 숨겨진 보화라고 하더니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람이라고 합니다. 물론 진주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왜 천국은 장소가 아닐까요? 장사하는 사람이 사는 집 그가 가진 기업 그가 소유한 땅이 아니라 그 자신이라는 겁니다.
천국은 점점 더 애매모호하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적인 천국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 장사하는 사람은 진주 도매상입니다. 그는 질 좋은 진주를 구하기 위해 여러곳을 다니며 진주를 구매합니다. 그런데 그는 어느날 아주 좋은 진주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진주를 사기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재산을 다 팝니다.
그러니까 다른 작은 진주들을 팔았다는 말입니다. 그 진주 한 개를 사기위해서 덜 좋은 진주들을 몽땅 팔았습니다. 그러니까 천국이란게 결국은 우리가 가진 모든 소유보다 더 가치 있다는 말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가 가진 모든 소유를 다 팔아야 겨우 살 수 있는 가치로운 것이란 말도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천국을 무턱대고 좋아할 수 없는 대목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것도 가지고 저것도 가지려고 하는데 주님은 천국을 소유하려면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천국이 실제로 그렇게 가치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요? 아무리 진주 상인에게 진주가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해도 그 진주 한알을 사기위해, 그거 한알 소유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포기하라는 것은 좀....
비유가 첫 번째 비유하고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른게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 주체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첫 번째의 대상은 보화라고 하는 물질이었다면 두 번째 비유의 대상은 직접적으로 사람입니다. 진주를 가지려고 자기의 소유를 파는 사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주님의 이 비유는 결코 잘못된 비유가 아니라는 점이지요. 천국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네 마음에 있느니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입니다. 그래요, 결국 천국을 만드는 것은 사람입니다. 물건도 아니고 제도도 아니고 사람입니다.
우리의 마음먹기에 따라서 얼마 던지 이 땅에서 천국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늘가치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그리고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팔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진 그런 사람들이 바로 천국을 이루는 것입니다.
3.천국은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다
그런데 세 번째는 천국을 그물에 비유합니다. 물론 그물이라는 물건 자체가 비유의 대상이 아닙니다. 끝까지 그물을 끌었다가 그 안에 든 것을 뭍으로 가지고 와서 가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눈다는데 비유의 주안점이 있습니다. 두 번째 비유의 대상은 사람이지요? 그런데 세 번째 비유의 대상은 그물이라기보다는 그물이 상징하는 마지막 때를 말합니다.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것이 결코 살아가는 과정 중에 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 때에야 비로소 나누어진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가라지 비유에 보면 주님의 이 비유에 대한 진실된 뜻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아무리 악한 사람들과 이웃하고 있더라도 이들이 즉각 즉각 심판받고 폐가망신하고 감옥에 가고 재산이 흩어지고 건강이 나빠지고 명예가 떨어지고 하는 일이 잘 안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보통 이런 악당들은 누릴 것 다 누리고 나중에야 벌을 받습니다. 그 사이에 너무 행복했으니까 더 큰 벌을 받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즉각적으로 벌을 받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물론 악한이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심판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휩쓸려 고통받을 수도 있는 착한 이들을 보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멸망을 늦출 수 있는 것도 의인들이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우리 주님이 이 땅의 의인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악한들의 삶도 일정한 때가 차기까지 놔두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물에는 물고기만 담기지 않습니다. 물고기도 있지만 바다의 온갖 물건들이 다 들어갑니다. 왜냐면 이 그물이 바로 저인망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인망이라고 했는데 이스라엘에서는 배 두척이 각각 그물의 양쪽 끝을 잡고 물고기를 끌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끌어서 뭍으로 가지고 가서 내용물을 선별합니다. 잡을만한 물고기는 준비된 그릇에 담고 나머지는 물고기부터 바다 해초에서 쓰레기 온갖 잡동사니까지 모두 다 다른 곳에 버려 버립니다.
‘못된 것은 버리느니라’ 하고 합니다. 여기서 ‘못된 것’은 악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황당하게도 여기 못된 것은 바로 쓸모없는 것을 말합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여기서 주님은 ‘쓸모 없는 것’을 버린답니다. 예전에 ‘이 무익한 종아’라고 꾸짖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무엇에 쓸모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의에 쓸모가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쓸모가 있어야 됩니다.
이 세가지 비유가 모두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마무리 말씀이 이어집니다.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라고 합니다. 그래놓고 잘 보세요.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성도 여러분
악인이 많겠습니까? 아니면 의인이 많겠습니까? 제 생각도 여러분의 생각도 의인이 더 적을 겁니다. 악인이 더 많겠지요. 의인이라고 감히 이름을 붙이는 것을 현대인은 도저히 감당치 못합니다. 그래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는 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게 되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을 골라내야 할 겁니다. 그런데도 우리 주님은 이 세상을 기본적으로 의인의 세상으로 인식하는 듯 합니다.
잘생각해 보세요. 가라지 비유에서 마찬가지로 역시 곡식가운데서 가라지를 미리 뽑지 못하게 하시고는 혹시라도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을 상하게 될까 두렵다고 하십니다. 당연하게도 밭에 가라지보다 곡식이 더 많을 겁니다. 그럼 이 세상에 악인보다 의인이 더 많을까요? 현실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인이 악인보다 많은 것처럼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우리보고 의인을 더 많이 만들라고 하시는 겁니다. 의인을 어떻게 우리가 더 만듭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고 하셨으니까 믿는 자를 더 많이 만들라는 겁니다. 그 믿는 자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그의 명령대로 살게 된다면 그게 바로 이 땅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악인은 살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마지막 때에 이 세상에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 것이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악인의 회개를 기다리지 않고 의인이 아닌 자는 솎아 버리고 의인들만 남아서 새로운 세상에서 살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죄 때문에 잠깐 이 세상을 공중권세 잡은 자에게 맡겨 두셨습니다. 그러나 그 권세 하에서 사람들의 고통이 너무 심하므로 이를 불쌍히 여기신 주께서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종식시키기 위해 친히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죄를 도말하고 하나님과 우리사이를 가로막았던 죄의 벽을 허무셨습니다.
그게 처음에는 아는 사람이 너무 적습니다. 마치 밭에 숨기운 보화와 같습니다. 아는 사람이 나 말고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몰래 재산을 처분해서 그 밭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의 가치는 그와 같이 아는 사람이 드물고 소중히 여기는 이도 드물지만 결국 때가 차면 하나님의 준비한 처소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바깥 어두운 데로 풀무 불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더 이어집니다.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주님의 비유에서 쫓겨난 자는 항상 울며 이를 갑니다. 그러니까 그 정도로 천국과 바깥이, 천국과 지옥이 천양지차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쫓겨난 것이 너무 분해서 이를 갈 정도로 하나님의 나라가 좋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전체적인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자, 이상하게 주님은 천국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자꾸 비유로만 말씀하십니다. 그게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실제로 천국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도 우리가 제대로 알아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끔가다 보면 제가 사용하는 용어가 있습니다. 신인동형동성론적 표현이라고. 이거 신학적인 용어입니다. 왜냐면 신이 사용하는 표현과 우리가 사용하는 표현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표현법이 아니면 제대로 의사전달이 안될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는 사실 아무리 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저는 여기에서 몇가지 천국에 관한 특징을 말씀 드릴려고 합니다.
첫째로 천국은 그 가치를 아는 자가 적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천국은 우리의 모든 다른 것을 희생하고서라도 소유하고 싶을 만큼 좋고 가치가 있다. 모든 가진 것을 다 처분해서 그 진주를 사는 겁니다.
세 번째로 천국은 사모하는 사람이 중요하다. 그 마음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통치를 좋아하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자에게 천국이 온다. 너무 너무 갖고 싶어서 다른 진주와 재물을 처분하고서라도 그 진주를 소유 하려고 하는 사람을 보십시오.
네 번째로 천국에 가는 것은 마지막 때에 비로소 정해진다. 쌍끌이 그물로 다 끌어서 뭍으로 올라와서 비로소 좋은 것과 못된 것을 갈라 낸다는 사실을 보면 천국은 마지막 때에 가서야 결판이 납니다. 또한 천국은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있는 이곳이 천국으로 별한 것이다. 왜냐면 갈라서 추려내 버리는 것으로 자주 소개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제 생각일 수도 있는데 밭에 가라지를 뽑아 버리는 것이나 좋은 물고기는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린다는 표현이 우리가 의인이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 곳이 천국으로 변하고 오히려 악인이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난다는 것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아직까지는 주님의 비유로 깨달은 부분이 이 정도에 그칩니다. 아마 세월이 흘러 저의 영성이 더 깊어지고, 공부가 깊어진다면 또 더 많은 깨달음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렇게 하라고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깨닫기 위해서는 더 열심히 보고 더 열심히 느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세상 마지막 때에 울며 이를 갈지 않도록 오늘을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선한 뜻대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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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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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을 얼마나 더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는가를 종종 생각해 보곤 합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에 다다르게 됩니다. 오늘 나는 얼마나 열심히 시간을 보내며 힘내어 살았는가, 100점 만점에 혹여 낙제점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면 참 사는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도 합니다. 저는 게으르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터라 때마다 제대로 한 번씩 되돌아 보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아, 이 공허한 인생에서 전도 한 명을 못하는 구나를 생각하게 되네요. 올바른 기독교인이 맞았는가를 늘 반성합니다.
가끔은 매우 안타까운 생각도 듭니다. 교회에 가짜 교인이 생기고, 이단 종교가 생기고, 그러면서 좋은 사람들 마저 이들에게 물들어 버리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면서도,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가짜의 유혹에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 중에 의인이 많은 세상이라는 표현은 아직도 참 신기합니다. 그런데 가끔 그 말이 사실일 꺼라 믿습니다. 할 말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촛불 하나에 의지해서 100만명씩이나 모이고, 별 일 없이 무사한 것을 보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선의의 힘은 악의 보다는 훨씬 더 강하다는 생각입니다.
선하고, 공정하고, 정직한 세상, 그런 천국 같은 나라를 꿈꾸는 이들이 있기에, 오늘 우리는 이와 같은 말씀 속에서도 힘을 냅니다. 우리가 사는 곳을 환하게 비출 수 있는 빛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힘껏 응원합니다. / 2016. 1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