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한 것에 대하여 (고린도전서12:1-11)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육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영이라고 해서 신격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인격에 대비되는 신격. 어떤 분은 이 하나님을 가리켜 ‘우주의 기운’이라고 하는 이상한 소리를 하기도 합니다. 주로 종교다원주의자들이 하는 소리입니다. 무언가 절대자, 초자아, 슈퍼에고가 있기는 한데 그걸 특정하게 하나님으로 칭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종교를 믿어도 저 종교를 믿어도 궁극적으로 어떤 경지를 넘어서면 통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교를 만든 이들은 주로 여러 가지 종교의 교리를 합칩니다. 진리는 서로 통한다나 뭐라나.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요 인생의 길흉화복을 주장하시며 온 우주의 창조주이십니다. 모호한 어떤 기운이나 초자아라고 하는 이들은 모두 이단이요 사이비요 이교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한번이라도 체험해봤다면 그런 소리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영이시지만 마치 우리 옆에서 속삭이듯이 바로 옆에서 나를 지켜보시고 이끌 듯이 느껴집니다. 내가 확실하게 하나님을 느끼고 있는데 그를 기운이라고 치부한다면 기가 찰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했는데 여기에 ‘신령한 것’에 대한 질문들이 있었고 이것에 대한 답변을 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고린도 전서가 먼저 바울이 쓴 게 아니라 먼저 고린도 교인들의 편지가 바울에게 갔는데 그 답변형식으로 쓰인 걸로 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신령한 것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기에 이것 때문에 아주 시끄러웠습니다.
그렇지요 주의 성도라면 당연하게도 신령한 것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뭔가가 있기는 있는데 그게 우주의 기운인지 슈퍼에고 초자아인지 어떤 신인지 제대로 파악할게 아닙니까?
우리는 지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발붙이고 살고 있습니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고 먹으면 또 속에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추우면 입어야 하고 피곤하면 잘 수 있는 방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주로 산에서 노숙을 잘하는데 그거 진짜로 힘들고 위험한 일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귀국하고 제일 바뀐 것이 바로 멧돼지가 너무 많아졌다고 하는 점입니다. 다음이 뱀, 많아 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사방이 막히고 천장이 덮여 있으며 불이 들어오는 바닥을 가진 집이 필요합니다. 외부의 침입도 막아 주고 사람들의 눈초리로부터 자유롭고 편하게 쉴 수도 있는. 그래서 우리는 육신의 굴레를 벗어 나지 않고는 결코 돈이 없이 자연 그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사회로부터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정말로 힘이 듭니다.
가끔가다 고요하고 푸른 숲속에 앉아서 기도할 때 마치 내가 자연과 하나가 된 듯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가지고 간 도시락을 먹고 그리고 피곤하고 그리고 다시 배가 고파지면 별 수 없이 먹을 것을 위해서 내려와야 합니다. 오죽 먹는 것이 중요하면 방송 중에서 먹방이 제일 인기겠습니까?
자연과 하나가 된 듯이 느껴지다가도 결국 우리는 인간입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에 대해서 우리는 종종 잊고 삽니다.
그러나 영이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은 일반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은 기본적으로 경건한 생활을 한다고 가정할 때 문득 문득 생활의 빈틈을 비집고 나오려는 하나님의 영을 느낍니다. 그래서 세상과 격리되어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구가 생깁니다. 그 신비하고 놀라운 영적인 체험이 그립기도 합니다.
비온 후에 하늘은 너무 푸릅니다. 대기는 맑고 깨끗합니다. 그래서 멀리 잘 보입니다. 그 속에서 살짝 물든 단풍잎들이 햇빛에 빛납니다. 그리고 그걸 느낀 순가 내 마음이 견딜수 없을 만큼 청량해 짐을 느낍니다. 물론 보통은 그냥 바빠서 정신없이 앞만을 바라보고 헉헉댑니다. 사물을 관조한다느니 하는 그런 사치는 부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힘들고 걱정스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가 차기 까지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인간입니다.
우선 본문에서 바울이 언급한 ‘신령한 것’이란 말은 해석에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식으로 ‘성령의 선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표현 방식을 보면 이중부정입니다.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알기를 원한다’ 라고 하면 되겠는데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한다’란 표현 즉 이중으로 부정적 표현을 사용한 것은 거꾸로 반드시 알기를 원한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요, 이건 바울의 고린도 교회에 대한 강력한 바램 일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에게 바라는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바램 일 것입니다. 왜냐면 이 신령한 것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 때문에 교회가 혼란스러워지고 교회가 쇠약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것에 대해 모르는 교회는 세속화되고 세속화된 교회는 세상의 다른 집단들과 마찬가지로 이권을 가지고 투쟁하고 분열하고 시기하고 상처 주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교회에서 영적인 것이 제거되는 순간부터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단순한 사교클럽이 됩니다. 서구의 교회가 관광지가 되었다면 우리나라의 교회는 사교클럽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기 싫다면 신령한 것에 대해서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것도 매우 잘 알아야 됩니다. 바울은 중요한 교훈을 줄 때는 이런 표현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사실 이러한 신령한 것에 대한 바울의 언급은 이 신령한 것에 대한 고린도 교인들의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 성령의 은사들 즉 신령한 것에 대해서 개인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표시로 서로 뻐기고 질투하는 데만 급급했지 이 은사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형제를 사랑하는데 쓰여 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작정하고 신령한 것에 대해서 언급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매우 부유한 교회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린도는 그리스의 대표적인 문화와 경제 중심지입니다. 코린트(고린도)식이라는 문화양식을 우리는 교과서에서 배웠습니다. 손기정 선수가 올림픽에서 상으로 받은 청동투구가 바로 코린트식으로 제작된 겁니다. 그 정도로 돈이 흘러 넘쳐서 문화가 융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교회는 매우 인색했고 매우 음탕했으며 신령한 것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우리는 고린도전후서가 매우 양이 많다는 것을 압니다. 양이 많다는 것은 할 말이 많았기 때문이고 그건 그들에게 책망해야 될 것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보통은 칭찬을 그렇게 오래 그리고 길게 하는 사람은 잘 없습니다. 말로 하면 그럴 수도 있지만 글로 쓸 때는 종목이 나열되기 때문에 뻔한 칭찬은 길어질래야 길어 질 수가 없습니다.
아마 당시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은사와 우상의 신비주의 경험에 대해서 잘 구분하지 못했나 봅니다. 뭔가 그때의 습성이 남아 있어서 교회에서 방언으로 소리치며 신비주의에 취했나 봅니다.
옛날 기록에 의하면 이교도의 신전에서 이교의 제사장들이 술이나 마약같은 것을 먹고는 거기에 취해서 횡설수설하는 일이 많았답니다. 신탁을 받는답시고 자기를 벌꿀 술에 취하게 하거나 또는 악기로 심령을 자극하고 격렬한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고 그러니까 엑스타시를 추구하는 뭐 하여튼 그런 행위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방언을 그런 식으로 생각한 것이랍니다.
그러면 이교의 주술에 취한거와 성령에 취한 것이 차이가 뭐냐면 여기 3절에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그러니까 반대로 생각하면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는 것이 벌써 성령받은 증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고함치고 입신의 상태에 들어가지만 실제로 겉으로는 비슷하게 보여도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느냐 아니냐 라는 겁니다. 당연하게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그는 이미 성령을 받은 겁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거나 치유를 행하거나 예언을 하는 행위가 없이 예수를 구주로 믿는 것 만으로도 이미 성령을 받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한 이유는 명확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자랑하는 고린도 교인들을 잠잠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성령의 여러 은사들 가운데서 가장 가치있게 보이는 것은 뭡니까?
치유? 예언? 방언? 사람마다 치중하는 것이 다르듯이 사람마다 가치있게 여기는 것이 다를 것입니다. 제 입장에서는 치유? 이게 목회에 참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병원도 포기한 이에게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치유의 은사가 임한다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케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방편이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전에 말씀드렸지요?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에 가서 남북정상회담 한 것을 미리 꿈을 꾸고 예언을 했다고....그런데 저는 그게 실제로 이루어 질 줄은 몰랐습니다. 물론 알았다고 하더라도 저에겐 별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무슨 정치꾼도 아니고 정보계통에 종사하는 사람도 아니고 목사니까 저에게 별 상관이 없겠지요. 남북정상회담이 의미가 없다는 게 아니라 그걸 일주일전에 미리 알았다는 게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어차피 몰라도 그만인 것이었지요. 그러나 누군가에게 그 정보는 엄청나게 큰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에 대해서 사람마다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다르지만 이 은사의 소용, 그러니까 이 은사가 어떻게 유용하게 쓰일까를 생각하면 그 은사의 가치가 정해진다고 봅니다. 무엇에 쓰이느냐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데 유용한가 작게는 우리 교회를 세우는데 유용한가 이런걸 가지고 은사의 가치를 나누는 겁니다.물론 사람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므로 다른 분들은 또 다르게 가치를 매길 겁니다.
이제 4절부터 바울은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에 대해서 한가지씩 열거하고 있는데 그렇게 열거하기 전에 전제를 둡니다. 그 모든 은사에 가장 우선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게 안되면 아무리 천하를 떨어 울린다고 해도 그것은 신령한 것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그런 역사를 행한다면 그는 악령에 씌인 것입니다.
원래 율법에 의하면 나무에 달리는 것은 저주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십자가도 결국 나무니까 유대인들은 그래서 예수를 하나님에게 저주를 받은 자라고 불렀습니다. 만일 그 누군가가 예수를 그렇게 부른다면 그는 성령받은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 말은 정확하게 맞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 동정녀에게서 탄생했다는 이야기, 십자가에 달리셨고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했다는 이야기들은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결코 믿기기 어려운 이야기들입니다. 우리가 이미 그걸 믿고 있다는 것을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왜 세상 사람들처럼 그것을 의심하거나 불신하지 않고 그걸 믿고 있지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배운 지식과 우리의 이성으로는 결코 믿을 수 없는 이론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상하게도 그걸 믿고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셨기 때문입니다. 그게 우리 마음에 성령이 임하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성도가 이미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음을 믿습니다. 이미 성령받은 자라는 것을 또한 믿습니다.
자, 이제 우리는 개별적인 은사들에 대해서 살펴 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의 눈에는 달리 보이는 여러 은사들을 일으킨 것은 같은 성령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언이나 입신이나 방언이나 치유나 가르침이나 모든 것이 같은 성령께서 다르게 역사하신 것이지 전혀 다른 성령께서 서로 다르게 역사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은사’라는 말은 우리가 아주 잘 아는 단어입니다. 카리스마. 은사가 바로 카리스마입니다. 카리스마는 ‘선물’이란 뜻을 가지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에 은혜이고 그것을 본문에서는 은사로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능력은 실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에게 우리에게 아무런 값없이 그냥 주신 것이라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여 저는 왜 이것을 주셨습니까?’라고 불평하기가 곤란합니다. 우리가 돈을 주고 샀거나 어떤 공을 이루고 상으로 받았다면 그래도 좀 불평할 수가 있겠지만 이 은사는 우리의 행위와는, 공로의 댓가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냥 은혜로 선물로 받은 것이기에 감사만 있을 뿐이지 불평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 불평한다면 그건 공짜로 더 많이 받지 못했다고 떼를 쓰는 어린아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입니다. 더 자라고 더 성숙해 져야 겠지요?
처음에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신령한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것이 성령의 주시는 은혜요 선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은사라는 말로 바꾼 것입니다. 카리스마,
웃기는게 부하직원들에게 무섭게하는 상사를 보고 그래서 부하직원들이 그 앞에서 쩔쩔매는 것을 보고 카리스마가 있다고 하는데 이건 절대로 틀린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카리스마가 있는게 아니라 그냥 성질이 안좋고 신경질적인 인격수양이 덜된 갑의 횡포를 부리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절대로 카리스마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은사는 여러 가지나’에서 ‘여러 가지’란 말에는 ‘하나를 여러 갈래로 나누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성령께서 은사를 나누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선물이 여러 가지로 분배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실 우리말 성경의 번역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결국 그 모든 은사는 한 성령이 나누어 주신 똑같은 것이 분배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떻게 방언과 예언과 치유와 가르침과 섬김이 같은 것입니까? 절대로 같지 않은데요 그러나 영의 눈으로 보면 그 모든 은사가 사실은 똑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단지 다르게 눈에 보일 뿐이지만 본질은 똑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뜻을 살려서 새롭게 번역한다면 ‘은사는 한 성령으로부터 분배된 것이고’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5절에서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직임이란 말은 섬김 또는 봉사라는 말입니다. 게다가 이 말에서 집사라는 교회의 직임이 나온 겁니다. 섬기는 자.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봉사, 사도나 전도인의 직임을 수행하는 것, 연보를 모두 이 단어로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연보만 해도 섬김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연보가 바로 직임이라는 말입니다.
다양한 교회의 직임 역시 같은 주께서 주신 것이므로 높고 낮음의 구별이 없다는 거지요. 어떤 분은 장로가 집사보다 높다고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사실 성직에서는 그 책무의 다름이 있을 뿐이지 높낮이가 다른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성직을 높낮이로 구별하게 되면 당연하게 교회 안에 세속화의 손길이 미치게 되고 사악한 풍조가 스며들 겁니다. 주가 주신 성직의 높이가 다른 걸로 인식하게 되면 교회 역시 서열이 나뉘고 또 하위서열에서 상위서열로 승진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얼마나 삭막한 조직이 되겠습니까? 더 이상 운명공동체라고 할 수도 없게 될 것입니다. 서로 짓밟아야 되는 그래서 출세해야 되는 조직이 되는데 무슨 공동체입니까?
당연하게도 우리 하나님은 교회를 이렇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직책가운데 귀하고 천하고도 없고 높낮이도 없는 것이며 그 모든 것이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도와서 하나님의 몸을 만들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유익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이제 바울은 또 같다는 말을 합니다.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여기서 ‘역사’는 ‘활동하게 하는 힘’을 말합니다. 영어로는 ‘에너지’를 말합니다. 우리가 아주 잘 쓰는 말의 어원입니다. 역사, 에너지.
우리식으로 하자면 역사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행하시는 사역을 가리킵니다. 역사를 거꾸로 하면 사역이네요. 이 ‘역사’ 역시 같은 하나님에게서 갈라져 나온 것일 따름입니다.
자, 본문을 잘 보시면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사역은 여러 가지나 ...하나님은 같으니
여기서 성령, 주, 하나님으로 나누어 표현했지만 한마디로 하면 모두 하나님.
그러니까 우리가 여러 가지로 번역하는 말은 원래 분배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말하고자하는 것은 같다는 겁니다. 왜냐면 한 하나님으로부터 분배된 것이기 때문이지요.
왜 분배하셨느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알맞게 봉사하도록 하셔서 유기체적으로 교회를 더 잘 섬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더 잘 기여할 수 있도록 하시기위함인 것입니다.
주님의 비유에서 무익한 종이니, 쓸모가 없니 하는 모든 것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어디에 쓰이겠느냐 인데 하나님은 그걸 잘 파악하셔서 똑 같은 것을 다른 것이 아닙니다. 똑 같은 것을 나누어 주시는 거라는 겁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우리의 눈에 다르게 보이는 것들이 실상은 한 하나님으로부터 분배된 똑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본질은 똑 같으니까 서로 높낮이와 우열을 비교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면 각자 필요한 곳이 다르기는 하지만 유기체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바울은 이 비유를 더 잘 설명하려고 12장의 나머지 부분에서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도 이를 사람들이 제대로 받아 들이지 못할 것이 염려되어 13장에서 사랑이 제일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런 은사가 없어요. 하나님이 나는 싫어하시나 봐요”
“그래 그러면 사랑해. 그게 제일 좋은거야”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이 성경은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 직임, 역사가 다 똑같다고 말합니다. 그 어느 것 하나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 중요하고 다 필요합니다. 다만 쓰임새가 다를 뿐입니다.
7절에 보면 그게 다 유익을 나타내려고 하심이라고 합니다.
자, 여기서 하나 중요한 사항이 있습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여기서의 ‘각 사람’은 성령받은 자, 그러니까 우리식으로 소위 은사를 받은자만 가리키는게 아닙니다. 본문의 각 사람이란 말은 고린도 교회의 모든 성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보세요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그러니까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신다는 말이고 결국 교회안의 모든 사람이 다 성령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물론 여기서의 ‘교회안의 모든 사람’은 교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 단지 교회만 출석하고 적만 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주를 믿고 그의 뜻대로 살기를 노력하는 거룩해 지기를 소망하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인은 웃기게도 교회보다 점집을 더 자주 갔다는데 그런 분들까지 성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성령을 받지 못했다면 그는 아예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내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얼마가지 않아서 성령의 은사를 소멸하게 됩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초심을 잃게 되면 성령의 역사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음과 같습니다. 은혜자들 가운데는 ‘기도하는 자가 빌딩 두채를 지으면 성령의 역사가 소멸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귀한 은사를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하면 성령님의 뜻과 어긋나는 것이고 결국 성령의 역사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무엇 때문에 주어집니까? 유익을 위해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집니다. 특히 교회를 세우는 것을 위해서 더 확실하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은사 중에서 방언보다 예언을 더 중하게 여겼고 방언을 공집회에서 하기를 원하면 반드시 통역하는 자가 있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언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전혀 득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들 중에서 성령의 서진론을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예루살렘에서 지중해와 로마로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계속해서 미국과 한국으로 그리고 중국과 인도로 그리고 아랍으로 성령의 역사가 잘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논리적으로 구멍이 많이 있는 말이지만 다르게보면 그럴 듯도 합니다. 왜냐면 그곳에서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열악하지만 특히 주위 환경이 교회를 핍박하고 그래서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아니고서는 교회가 발붙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이와 같이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교회의 필요에 따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각 사람에게 다양한 은사가 주어지는 것도 역시 그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기 위함이지 서로 서로 우열을 겨루고 높낮이를 비교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더 심하게는 그걸로 치부해서 부를 누리도록 주신 것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요즘 한참 나라를 시끄럽게 만든 최모씨를 봅시다. 딸 말고 아버지. 그는 심지어 대한예수교장로회 종합총회라는 곳에서 돈 십만원을 주고 목사 안수까지 받았고 더 심하게 총회장까지 한 사람입니다. 탁명환씨의 생전 저술에 의하면 이 사람주위에 유명한 목사들이 끊이지 않았답니다. 그 권세와 돈을 탐해서 불나방처럼 수많은 목사들이 들끓었답니다.
이 사람이 권세와 부를 가지게 된 것은 그가 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죽을 것을 알았고 그 딸이 대통령이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정확히는 여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답니다. 게다가 무당이 그에게 와서 뭔 조치를 받고서는 영기가 없어져서 무당을 폐업하게 되기도 했답니다. 보통 무당은 신내림굿을 해서 무당을 만드는데 좀 반대입니다. 여하튼 이 사람은 나름대로 능력을 행했고 그걸로 목사에 총회장까지 했습니다. 그 전에는 승려였고 그 전에는 도사?
그러나 그가 행한 것이 성령의 능력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분별도 필요합니다. 방언말함도 필요합니다. 기도하는데 강력한 힘이 되고 특히 귀신을 쫓아내는데 매우 유용합니다. 음 말이 좀 이상합니까? 그러나 공회에서 말하기는 부족합니다. 못알아 들으니까. 그래서 방언을 통역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예언도 필요합니다. 예언은 어지러운 세상을 사는데 오히려 방언보다 더 유익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성경을 가르치고 어떤 이는 지혜와 지식을 말하며 어떤 이는 부엌에서 섬기고 어떤 이는 나가서 섬깁니다. 그런가하면 병고치는 은사도 필요합니다. 이 본문에 소개되지 않은 수많은 은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도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이가 그 모든 것을 다 잘하거나 다 할 줄 알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나름대로 특성이 있고 전문분야가 있습니다. 음, 전공이 다르다고 합시다. 이렇게 된 것은 주께서 이 모든 능력들과 은사들이 서로 협력하여 교회를 굳세게 만들게 하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더 중요한 것이지요. 이 모든 것에 사랑이 빠지면 이제 서로 비교하고 서로 질투하고 서로 시기하게 되며 이러한 것으로 인해 교회가 혼란에 빠지고 분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단위에서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그는 단위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이지만 단에서 내려왔을 때는 그냥 성도입니다. 지금 주일학교 교사는 원래는 목사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평신도가 교사를 합니다. 그렇지만 그 교사의 직분자체는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을 가르치는 일은 아주 고귀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잘 가르칠까 어떻게 하면 이 말씀이 사람들에게 잘 먹히게 될까를 연구하고 기도하고 노력하는 직분을 가르침을 받는 이가 적다고 해서 그 누가 무시할 수 있을까요?
백명 천명을 가르치나 한두명을 가르치나 그 가르치는 은사는 똑 같습니다. 노력도 같이 듭니다. 나름대로 다 쓰임이 있습니다.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쓰지 않는다고 다 칼마다 쓰임새가 있습니다.
성가대원을 봅시다. 성가대는 이미 구약시대 성전에서도 따로 편성되었던 아주 유서 깊은 직분입니다. 그런데 사실 노래를 잘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저처럼 음표를 읽지 못하고 그래서 테너니 베이스니 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성가대원을 하면 괴롭습니다. 그래서 성가대는 더 특별한지도 모릅니다.
봉사부는 식당에서 일합니다. 흔히 군대에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재료는 같은데 군대밥은 왜 이렇게 맛이 없냐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요리에 재주가 있는 이들을 취사반에서 확보하려고 노력합니다. 취사반원을 요리학원에 보내기도 합니다. 그건 솜씨 요리기술이 그만큼 음식의 맛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봉사를 하는 분들의 요리솜씨나 살림을 절약하는 지혜가 매우 필요합니다.
교회의 재정을 관리하는 것도 은사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걸 일목요연하게 정리할지 그리고 규모있는 살림을 살게 할지 어떻게 해야 절약이 되고서도 사업을 원활하게 행하게 할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은사입니다.
상담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말을 잘들어 주고 그에게 공감하며 적절한 조언을 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몇 년 공부하는 걸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타고난 재능도 분명 있습니다. 그래서 은사입니다. 그걸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자기는 천하의 육도삼략을 가슴에 품고 모든 것을 다 아는데 남들 앞에만 서면 말문이 막혀서 고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다 앞에서 섬기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개척을 하니까 병고치는 은사도 중요한데 솔직히 더 절실한 건 전도의 은사입니다. 그런데 제가 가르치는 것이나 병고침의 은사는 있지만 전도의 은사가 약하다고 느낍니다. 제가 꿈을 꾸어서 미래를 잘 맞춥니다. 그런데 솔직히 알 필요가 없는 것도 막 알게 되지만 정말 알고자 하는 것에는 어떤 징조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이렇게 됩니까? 그건 그 은사를 행하는 주체가 내가 아니라 성령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안타깝습니다. 그게 불만이었던 최모씨는 그래서 스스로 교주가 된 모양입니다.
오늘날은 교회에 속하면서도 이런 눈에 띄는 성령의 은사를 행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은근히 부럽습니다. 왜 하나님은 나에게는 그런 은사를 주시지 않을까? 과연 나에게 성령이 임하셨나? 나는 버린 자식인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성경의 말씀이 믿어진다면 내 마음에 성령의 조명이 비추인 것이 확실하고 내가 성령받은 것이 확실하며 내가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인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불평하거나 낙망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뭔가 눈에 띄는 그런 재주가 없는 것 같습니까?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을 하십시오.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샘솟게 해달라고 기도해 보세요. 그리고 의도적으로라도 형제에게 다가가서 한마디라도 따뜻한 말을 더 하고 한번이라도 더 형제에게 웃음을 주세요. 그를 향하여 미소지으세요. 그렇게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나는 사랑의 전도사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링컨이 그랬지요. 사람은 마흔이 넘어가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우리가 계속해서 그렇게 살면 인상도 그렇게 변할 것이고 다른 이도 그것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 같이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성령을 골고루 부어 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면 우리는 각종 능력을 행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는 협력하여 선을 이루고 협력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며 협력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합니다.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면 됩니다. 기도합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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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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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설교 도중에 목사님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무당보다 못한 처지가 된 것을 매우 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참 답답하고, 한편으로는 화도 납니다. 이명박 정권 때도, 교회 장로라는 사람이 각종 의혹을 달고 다니더니, 서울에 경찰버스로 명박산성을 쌓더니, 이어지는 박근혜 정권에서는 최모 목사라는 사교교주의 딸 덕분에 온나라가 엉망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시위를 주장하며, 정직해 지자는 한국인의 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디 사람들이 더 이상 다치지도 않기를, 괴롭지도 않기를 저는 늘 응원하고 있습니다. 유시민 작가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월호 7시간 등등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고 미안하다고 이야기했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진정성 없이 발뺌만 하고, 남탓만 하니까, 촛불이 계속 밝혀지는 것이고, 지지율은 한자리인 것이 아닐까 합니다.
카리스마 하니까 생각나는데 20대 시절 동호회 장으로 활동할 때, 참 좋아하던 회원이자 선배님이 너 같이 운영해 나가는 것도 타고난 능력이라면서, 자신은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로부터 벌써 5년 넘게 지나고 나니깐, 동호회 운영을 끝까지 더 열심히 하고, 사람들 말을 더 진심으로 귀기울여 듣고, 회원들을 사랑했으면 더 좋았을텐데... 같은 진한 아쉬움은 가득합니다. 뭐, 결론은 누구나 잘할 수 있는 분야가 있다는 것입니다. 각자가 가진 능력을 소중히 여겨, 어떠한 순간에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제일 좋겠다는 결론입니다. 오늘도 기운내고, 힘내기를, 그리고 이번 사태가 정의롭게 마무리 되어 부디 다음 대통령은 좋은 분이 되기를... / 2016. 11. 시북.